2025/04/05 36

26. 김남주시/10. 무심(無心)

* 무심(無心) 아침 햇살이 은사시나무 우듬지에서 파르르 떨고산골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는 내 귀에서 맑다나는 지금 어머니를 따라 산사(山寺)를 찾아가고 있다어머니 그동안 이 고개를 몇번이나 넘으셨어요니가 까막소 간 뒤로 이날 이때까장 그랬으니까나도 모르겄다야 이 고개를 몇차례나 넘었는지옥살이 십년 동안 단 한번도 자식을 보려감옥을 찾은 적은 없었으되정월 초하루나 팔월 보름날 같은 날이면한번도 빠짐없이 절을 찾으셨다는 어머니그런 어머니를 두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실은 나도 모를 일이다자식이 보고 싶을 때감옥 대신 절을 찾으셨던 어머니의 그 속을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어머니 그 절이 나오지요그래 그래 하면서 어머니는 숨이 차는지공양으로 바칠 두어 됫박 쌀차둥이를 머리에서 내려놓고후유 후유 한숨을 거..

26. 김남주시/9.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있는 나라는

*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있는 나라는 윗것들은밑으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위협을 받아 재산의 뿌리 권력의 기둥이 흔들리면민중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이고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그들을 학살했다1894년 갑오농민전쟁때 양반과 부호들이 그랬고1950년 앞뒤에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이 그랬다이런 것쯤은 알고 있다 먹물인 나는시인인 나는 이렇게 노래할 줄도 안다동전과 권력의 이면에는 조국이 없다고그러나 나는 몰랐다 인천엔가 어디에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 있더라는 소리를 듣고그런 것은 미국의 식민지에는 으레 있는 것만으로만 알았지그런 것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은 차마 몰랐다그래서 나는 신경림 시인이 ‘민요기행’에다 담은어느 농부의 노여움을 읽고 그만 화끈 얼굴이 달아올라얼른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남의 나라 군대 끌..

26. 김남주 시/8. 노래

* 노래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꽃이 되자 하네 꽃이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녹두꽃이 되자 하네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새가 되자 하네 새가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파랑새가 되자 하네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불이 되자 하네 불이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들불이 되자 하네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다시 한 번 이 고을은반란이 되자 하네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26. 김남주/7. 이 가을에 나는

*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오라에 묶여 사슬에 손발이 묶여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이번에는전주옥일까 광주옥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일까나를 태운 압송차가낯익은 도시 거리의 인파를 빠져 나와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에서 숫돌에 낫을 갈아 나락을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에서빙 둘러서서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는 아이들의 제방에서 내려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내려서 손발에서 허리에서 이 오라 풀고 이 사슬 풀고 내달리고 싶다 아이와 같이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내달리고 싶다 발목이 시도록 논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슴에 바람 받으며 숨이 차도록 가다가 목이 마르면손으로..

26. 김남주/5. 돌멩이 하나

* 돌멩이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숨이 막히고 가슴 미어지던 날친구와 난 제방을 걸으며돌멩이 하나 되고자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이내 가라앉고 말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불씨 하나 되고자 했다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새날이 오면 금새 사라지고 말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이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

26. 김남주 시/2. 지는 잎새 쌓이거든

* 지는 잎새 쌓이거든 - 김남주     당신은 나의 기다림강 건너 나룻배 지그시 밀어 타고오세요한줄기 소낙비 몰고 오세요당신은 나의 그리움솔밭 사이사이로 지는 잎새 쌓이거든열두 겹 포근히 즈려밟고 오세요오세요 당신은 나의 화로눈 내려 첫눈 녹기 전에 서둘러가슴에 당신 가슴에 불씨 담고 오세요오세요 어서 오세요가로질러 들판 그 흙에 새순 나거든한아름 소식 안고 달려오세요당신은 나의 환희이니까요 *

26. 김남주 시/1. 김남주 시 모음

* 지는 잎새 쌓이거든 - 김남주     당신은 나의 기다림강 건너 나룻배 지그시 밀어 타고오세요한줄기 소낙비 몰고 오세요당신은 나의 그리움솔밭 사이사이로 지는 잎새 쌓이거든열두 겹 포근히 즈려밟고 오세요오세요 당신은 나의 화로눈 내려 첫눈 녹기 전에 서둘러가슴에 당신 가슴에 불씨 담고 오세요오세요 어서 오세요가로질러 들판 그 흙에 새순 나거든한아름 소식 안고 달려오세요당신은 나의 환희이니까요 * * 옛 마을을 지나며찬 서리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홍시 하나 남겨 둘 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여 * * 사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봄을 기다릴 줄 안다기다려 다시 사랑은불모의 땅을 파헤쳐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천년을 두고 오늘봄의 언덕에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사랑은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사과 하나 둘로 ..

25. 고정희 시//10. 묵상

묵상 / 고정희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출근버스에 기대앉아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언제나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언제나 거기끝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저 들판이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나는 웬지 눈물이 납니다

25. 고정희 시/9. 그대 생각

그대 생각 / 고정희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은방울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

25. 고정희 시/8. 쓸쓸한 날의 연가

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내 흉곽에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려지는 날이면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그대 간절하다 새벽 편지를 쓰고허파에 숭숭한 외로움으로는그대 그립다 안부 편지를 쓰고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 편지를 쓰네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비오는 날은 비오는 소리 편에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아침에 부치고저녁에도 부치네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25. 고정희 시/7. 사랑법 첫째

사랑법 첫째 / 고정희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25. 고정희 시/6. 연가(戀歌)

연가(戀歌) / 고정희아픈 머리에 열이 가라앉고창마다 환하게 불빛 고이는 저녁겨울 난롯불에 내 혼을 쬐며 고린도전서 13장을 펴면내 진실의 계단 어디쯤서 너는 오고 있는가어둠을 쓰러뜨리며 난롯불은 조금씩 내 피를 뎁히고꿈틀이며 꿈틀이며 타고 있는 글자들구름이 가는 곳을 묻고 싶은 황혼쯤엉겅퀴 울타리를 밟고 가는 바람처럼내 안에 서걱이는 한 무더기 공허한 무더기 공허로도 비칠 수 없는 얼굴불심지 휘감아도 살속 캄캄한 어둠 목구멍을 채우네지구 가득 부신 햇빛 부려놓고노을을 물들이는 태양이여,산마루 넘어가는 태양이여,눈은 눈으로 구름은 구름으로 떠나고 있을 때나무들 우쭐대는 진종일 바람은 바람으로 만나고 있을 때내 깊은 눈물샘 어디쯤서 물그르매물그르매 번쩍이는 너

25. 고정희 시/5.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캄캄한 밤아라도 하늘 아래선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25. 고정희 시/4. 사십대

사십대 /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방황하던 시절이나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25. 고정희 시/3. 관계

관계 /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아흔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갈대밭 둔덕에서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언덕 아래서는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따뜻한 어깨와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미안하다며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다시 돌아오지 않았고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완벽한 겨울이었다

25. 고정희 시/2.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

25. 고정희 시/ 1. 고정희 시 모음

시인 고정희  고정희 전 시인출생-사망1948년 (전라남도 해남) - 1991년 6월 9일가족5남 3녀 중 첫째학력한신대학교 학사데뷔1975년 현대시학 등단수상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경력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관련정보네이버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나는 ..

24. 황동규 시/16.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꽃꽂이도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그냥 설거지일 뿐.얼굴 붉은 사과 두 알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마음보다 더 시원하게,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프라이팬을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없이 ** 황동규시집[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문학과지성사

24. 황동규 시//15. 오미자술

* 오미자술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익기를 기다린다.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예쁘다.막소주 분자(分子)가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전화 걸기 전에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

24. 황동규 시/14. 영포(零浦), 그 다음은?

* 영포(零浦), 그 다음은?  자꾸 졸아든다만리포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다음은 그대 한 발 앞서 간 영포차츰 살림 줄이는 솔밭들을 거치니해송 줄기들이 성겨지고바다가 몸째 드러난다이젠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알 것 같다영포 다음은 마이너스 포(浦)서녘 하늘에 해 문득 진해지고해송들 사이로 바다가 두근거릴 때밀물 드는 개펄에 나가 낯선 게들과 놀며우리 처음 만나기 전 그대를 만나리

24. 황동규 시/13. 연필화(鉛筆畵)

* 연필화(鉛筆畵)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 *

24. 황동규 시/12. 가을 아침

* 가을 아침오래 살던 곳에 떨어져내려낮은 곳에 모여 추억 속에 머리 박고 살던 이파리들이오늘 아침 銀옷들을 입고 저처럼 정신없이 빛나는구나말라가는 신경의 참을 수 없는 바스락거림 잠재우고이따금 말 더듬는 핏줄도 잠재우고시간이 증발한 눈으로 시간 속을 내다보자방금 황국의 성대에서 굴러나오는 목소리저 황금 고리들, 태어나며 곧 사라지는저 삶의 입술들!

24. 황동규 시/11. 귀뚜라미

* 귀뚜라미 베란다 벤자민 화분 부근에서 며칠 저녁 울던 귀뚜라미가어제는 뒤꼍 다용도실에서 울었다.다소 힘없이.무엇이 그를 그 곳으로 이사 가게 했을까.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 가는데?기어서 거실을 통과했을까,아니면 날아서?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그가 열린 베란다 문턱을 넘어천천히 걸어 거실을 건넜으리라 상상해 본다.우선 텔레비전 앞에서 망설였을 것이다.저녁마다 집 안에 사는 생물과 가구의 얼굴에한참씩 이상한 빛 던지던 기계.한번 날아올라 예민한 촉각으로매끄러운 브라운관 표면을 만져 보려 했을 것이다.아 눈이 어두워졌다!손 헛짚고 떨어지듯 착륙하여깔개 위에서 귀뚜라미잠을 한숨 잤을 것이다.그리곤 어슬렁어슬렁 걸어 부엌으로 들어가바닥에 흘린 찻물 마른 자리 핥아 보고뒤돌아보며 고개 두어 번 끄덕이고문턱을 ..

24. 황동규 시/10. 소곡(小曲) 3

* 소곡(小曲) 3  내 마음 안에서나 밖에서나 당신이 날것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나는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선창에 배가 와 닿듯이당신에 가 닿고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넌지시 밀려나고 싶었습니다.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던 것을.창밖에 문득 후득이다 숨죽이는 밤비처럼세상을 소리만으로 적시며 남몰래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것을. *

24. 황동규 시/9. 시월

* 시월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아늬石燈 곁에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달이 지는데밀물 지는 고물에서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석등 곁에밤 물소리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뒤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

24. 황동규 시/8. 기항지 2

* 기항지 2多色의 새벽 하늘두고 갈 것은 없다, 선창에 불빛 흘리는 낯익은 배의 구도밧줄을 푸는 늙은 배꾼의 실루엣출렁이며 끊기는 새벽 하늘뱃고동이 운다선짓국집 밖은 새벽 취기누가 소리 죽여 웃는다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철새의 전부를 남북으로 당기는감각의 긴장 당겨지고바람 받는 마스트의 검은 깃발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누가 소리 죽여 웃는다아직 젊군다색의 새벽 하늘

24. 황동규 시/7. 기항지 1

* 기항지 1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긴 눈 내릴 듯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주머니에 구겨넣고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조용한 마음으로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정박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모두 고개를 들고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