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 267

20. 고재종 시/20. 분통리의 여름

분통리의 여름 / 고재종 닷새만에 헛간에서 발견된 월평할매의 썩은 주검에서 수백 수천의 파리떼가 우수수, 살촉처럼 날아오르는 처참에 울고 빈대 뛰는 온 방안 뒤지고 뒤져 찾아낸 전화번호 속의 일곱 자녀들기름때 묻은 머리로 하나 둘 달려와 뒤늦게 뉘우치며 목놓는 아픔에 울고  급기야 상여를 멜 남정네들 모자라경운기로 울퉁불퉁 북망길 떠난 할매굴삭기로 파놓은 구렁에 묻히고그 험한 종말에 또 울었지만  어디 그뿐이랴 이 사양의 마을 그 어디건 헐린 담장, 텅 빈 마당에 개망초 눈물꽃은 흐드러지고뻐꾹새 피울음은 종일 쏟아지고 이제 불과 예닐곱집 연기나는 곳 퀭한 눈만 남은 또 다른 월평네들의 간단없는 해소기침만 너무 질겨서 사방 산천 진초록도 목숨껏 노엽고

20. 고재종 시/19. 세한도

세한도 / 고재종 날로 기우듬해가는 마을회관 옆,/ 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  한때는 앰프방송 하나로/ 집집의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 옆,/ 그 둥치의 터지고 갈라진 아픔으로/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  그 회관 들창 거덜내는 댑바람 때마다/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거기 술만 취하면 앰프를 켜고/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이장과 함께.//  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긴 궁벽, 그러나/ 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 그 청솔 바라다보는 몇몇들 보아라.//  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 서러움조차 잘 걸러내어/ 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와/ 까막까치 얼어죽는 이 아침에도/ 저 동녘에선 꼭두서니빛 타오른다.//

20. 고재종 시/17. 사랑에 대한 몽상

사랑에 대한 몽상 / 고재종 내가 가보지 않은 뉴질랜드 숲은 밤 내내/ 짝을 부르며 우는 올빼미앵무로 뒤척인다/ 검은 고요가 콜타르처럼 엉겨붙어/ 성냥알만 대어도 확 일 것 같은데 어떤 놈은/ 인근 바닷가에서 죽은 갈매기를 물고와/ 屍姦을 감행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네 마음을 얻으려고 늘 언어를 혹사했으나/ 네 마음을 호출하는 호출부호를 마침내 얻어서/ 네게 가보면 너는 이미 거기 없던 것처럼/ 밤 내내 우는 올빼미앵무, 끝내 짝을 짓지 못한다/ 숲의 땅바닥에 사는 까닭에 곧잘 잡혀 먹혀/ 씨가 마를 정도로 개체 수가 준 탓이라고 하는 건/ 검은 몰약으로 밤을 닦는 숲의 말이 아니다/ 결코 파고 들어갈 수 없는 어둠이라고 하지 않고/ 지상을 울울창창 덮는 나무들과/ 正金片 같은 별들을 보여주는 숲의/..

20. 고재종 시/16. 웅숭 깊어지는 사랑

웅숭 깊어지는 사랑 / 고재종 수수 꽃 다리 꽃이/ 바람에 우수수 거릴 때마다/ 그 청량한 향기가/보이지 않는 사방의/ 별을 생생히 닦아 내느데요//  수수 꽃 다리 꽃을/ 정 혼자에게 보내선/ 파혼을 통고했다는 한 여인은/ 저 꽃을 일러/ 젊은 날의 추억이라 했다지요//  그런 서럽고 서느러운/ 그늘이 드리워져/ 수수 꽃 다리 꽃도 우리네 사랑도/ 아, 연자줏빛으로/ 웅숭깇어지는 건 아닐런지요//

20. 고재종 시/15. 서러운 사랑 이야기

서러운 사랑 이야기 / 고재종 저 밤나무의 밤송이들이 왜 가시옷으로 무장을 하고 왜 종주먹질을 해대는지 아시는지는 나는 기억하는데요 모내기 끝난 지난 유월 모내기 끝낸 여남은 사람들 해설피 정자에 앉아 남은 막걸리 마저 기울이다간앞산 보고 넋을 잃었는데요 그 앞산엔 젖살빛 밤꽃무더리뭉실뭉실, 수만 구름 떼 밀어올리며 물큰물큰, 숫컷내 마냥 풍겨댔는데요 그 꽃 보다 넋을 잃다 다 가고샛터집 과수댁만 뿌리치고 남아 워매, 저 징헌 놈의 꽃 좀 보소 워매, 이 징헌 놈의 냄새 좀 보소 꽃멀미 한 태산 일으켰는데요혹여 그 일 때문에혹여 그 환장할 일 때문에 저 밤나무의 밤송이들 저렇게 가시옷에다종주먹질을 해대는 건 아닐런지요 그렇다면, 정녕 그렇다면저 밤나무의 밤송이를 까주어선그 속의 알알들 쏟게 할 수 있는 ..

20. 고재종 시/14. 첫사랑

첫사랑 /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않았으랴 싸그락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난 분분 난 분분 춤 추었겠지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