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24. 황동규 시/9. 시월

월정月靜 강대실 2025. 4. 5. 14:48

시월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뒤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

* 황동규시집[삼남에 내리는 눈]-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