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2 17

23. 손택수 시/7. 가시잎은 시들지 않는다

가시잎은 시들지 않는다                                       하늘에 매가 없다 솔개 한 마리,독수리 한 마리 없다 이게 새들을 절망케한다매서운 부리와 발톱에 쫓길 때 그는 차라리  그  죽을 지경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겨울 아침 새들이 눈 쌓인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와서 운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펼쳐진 저 드넓은 하늘을 두고 결사코,여린 가슴을 겨누는 가시 밀림을 찾아든다오늘 빙벽을 찾아나선 사내들이 추락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얼음 속의 가시,살을 쿡쿡 찔러대는 빙벽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팽팽한 밧줄을 타고 아찔한빙벽 사이를 날아다녔을 새들시들지 않기 위해 피어나는 잎이 가시가 된다 연하디 연한 이파리로부터 시퍼렇게 담금질한 무쇠잎이 된다 이파리 투..

23. 손택수 시/6. 흰둥이 생각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의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 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 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달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23. 손택수 시/5. 방어진 해녀

방어진 해녀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멍기 있나, 멍기-)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휘둥그래진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하마터면 정신나간 여잔가 했더니파도소리 그저 심드렁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그 사투리 혼자 자맥질하다 잠잠해진 바다속에서 무엇인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하아, 하아_ 파도를 끌고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나오는 해녀,내 놀란 눈엔 글쎄 물 속에서 방금 나온 그 해녀실팍한 엉덩이며 불룩한 가슴이 갓 따올린멍게로 보이더니아니 멍기로만 보이더니한 잔 술에 미친 척 나도 문득 즉석에서멍기 있나, 멍기_ ..

23. 손택수 시/4. 홍어

홍어 어느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나는 고기가 한점 먹고 싶고김치 한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죄스런 마음에 몇 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어머니 뱃속..

23. 손택수 시/3. 외할머니의 숟가락

외할머니의 숟가락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23. 손택수 시/2. 옻닭

옻닭 1옻나무는 지독하다 나무 그늘만 스쳐도살갗에 소르르 소름이 돋는다해마다 한 번씩 자신을 스쳐간 폭염과 홍수팔을 뚝뚝 부러뜨리던 폭설의 기억을 비벼 꼬아제 속을 치잉칭 결박하는 나무속을 쥐어짜 잎잎이 푸르디푸른 신음을 뱉어낸다허나 독기라면 닭도 지지 않는다한평생을 옥살이로 보내온 그가 아닌가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벼슬과 부리,쇠창살 사이로 모가지만 간신히 빼내어댕강 참수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제 것이 아닌 몸뚱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지독에 이른 동물과 식물이 한 몸이 되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다 2독기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나를 무심코 집어삼킨 세상에우둘투둘한 옻독을 옮기리라뚝배기 국그릇 속에 코를 쥐어박고아버지와 함께 옻닭을 먹는다두 편에 오만 원 어쩌다 받은 원고료로삼십 년 지겟꾼살이 주..

23. 손택수 시/1. 손택수 시 모음 28편

1970년 전남 담양 출생경남대 국문과를 졸업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부산작가상, 현대시동인상 수상 제22회 신동엽창작상 수상시집 2003년 창비2005년 제3회 애지문학상 수상  옻닭 1옻나무는 지독하다 나무 그늘만 스쳐도살갗에 소르르 소름이 돋는다해마다 한 번씩 자신을 스쳐간 폭염과 홍수팔을 뚝뚝 부러뜨리던 폭설의 기억을 비벼 꼬아제 속을 치잉칭 결박하는 나무속을 쥐어짜 잎잎이 푸르디푸른 신음을 뱉어낸다허나 독기라면 닭도 지지 않는다한평생을 옥살이로 보내온 그가 아닌가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벼슬과 부리,쇠창살 사이로 모가지만 간신히 빼내어댕강 참수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제 것이 아닌 몸뚱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지독에 이른 동물과 식물이 한 몸이 되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다 2독기라면..

22. 한용운 시/10. 당신은

당신은한용운당신은 나를 보면 왜 늘 웃기만 하셔요당신의 찡그리는 얼굴을 좀 보고 싶은데나는 당신을 보고 찡그리기는 싫어요당신은 찡그리는 얼굴을보기 싫어하실 줄을 압니다그러나 떨어진 도화가 날아서 당신의입술을 스칠 때에 나는 이마가찡그려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었습니다그래서 금실로 수놓은 수건으로얼굴을 가렸습니다

22. 한용운 시/9. 님의 침묵

님의 침묵한용운님은 갔습니다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난적은 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명서는 차디찬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얼굴에 눈멀었습니다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닌 한 것은 아니지만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떠날..

22. 한용운 시/8. 나의 노래

나의 노래 한용운나의 노래가락의 고저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맞지 않습니다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에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달파하지 않습니다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하면아니되는 까닭입니다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조절하려는 것입니다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람의망상(妄想)으로 토막쳐 놓는 것입니다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자연에 치욕입니다님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흠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점이 됩니다나의 노래는 사랑의 신(神)을 울립니다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쥡짜서보기도 어려운 맑은 물을 만듭니다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는천국(天國)의 음악이 되고 님의 꿈에들어가서는 눈물이 됩니다나의 노래가 산..

22. 한용운 시/7. 나의 꿈

나의 꿈한용운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22. 한용운 시//6. 나의 길

나의 길한용운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뱃길이 있습니다.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발자취를 냅니다.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의(義) 있는 사람은 옮은 일을 위하여칼날을 밟습니다.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미끄럼 탑니다.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괴로운 까닭입니다.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나의..

22. 한용운 시/5. 나룻배와 행인

나룻배와 행인한용운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없습니다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나를 위함이 많습니다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추수(秋收)가 없습니다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그 말을 ..

22. 한용운 시/4. 나는 잊고자

나는 잊고자한용운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행여 잊으까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잊으려면 생각하고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잊든지 생각하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구태여 잊으려면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잠시 죽음뿐이기로님 두고는 못하여요.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22. 한용운 시/3. 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한용운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아니하는 것이 아니라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같이 있다는 말입니다.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애처롭기까지 만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않고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

22. 한용운 시 /2. 길이 막혀

길이 막혀한용운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언만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비칩니다.나의 손은 왜 그리 짧아서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산에는 사다리가 없고물에는 배가 없어요.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나는 보석으로 사다리를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오시려도 길이 막혀서 못 오시는 당신이 괴로워요.☆★☆★☆★☆★☆★☆★☆★☆★☆★☆★☆★☆★

22. 한용운 시/ 1. 한용운 시 모음 29편

한용운시모음 29편☆★☆★☆★☆★☆★☆★☆★☆★☆★☆★☆★☆★《1》길이 막혀한용운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언만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비칩니다.나의 손은 왜 그리 짧아서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산에는 사다리가 없고물에는 배가 없어요.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나는 보석으로 사다리를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오시려도 길이 막혀서 못 오시는 당신이 괴로워요.☆★☆★☆★☆★☆★☆★☆★☆★☆★☆★☆★☆★《2》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한용운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아니하는 것이 아니라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