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22. 한용운 시/5. 나룻배와 행인

월정月靜 강대실 2025. 4. 2. 19:19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者)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