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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손택수 시//13. 아버지와 느티나무

아버지와 느티나무 아버지의 스무살은 흑백사진,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무슨 노랜가를 부르고 있는지 기타를 품고, 사진 밖의 어느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젖은 눈으로, 어느 누군가가 언제라도 말없이 기대어올 것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와 함께 있다 나무는 지친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기 위하여 그렇게 기울어 간 것이나 아닌지, 쓰러질 듯 기울어가면서도 기울어가는 둥치를 끌어당기느라 뿌리를 잔뜩 긴장하고 서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 사람들 등의 굴곡에 가장 알맞은 모습으로 기울어 가기 위하여 한평생을 고단하게 쓰러져갔을 나무, 풍성한 머릿결을 바람에 비다듬고 내가 알 수 없는 노래에 수만의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 구겨지고 구겨진 흑백 속에서도 그 노래 빳빳하게 살아 있..

23. 손택수 시/12.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모처럼 만에 입은흰 와이셔츠가슴팍에김치 국물이 묻었다난처하게 그걸 잠시들여다보고 있노라니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김치 국물을 보느라숙인 고개를인사로 알았던 모양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푹 숙이게 하는구나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 쯤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일이다

23. 손택수 시/11. 호랑이 발자국

호랑이 발자국가령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해마다 눈이 내리면 호랑이 발자국과모양새가 똑같은 신발에 장갑을 끼고폭설이 내린 강원도 산간지대 어디를엉금엉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눈 그친 눈길을 얼마쯤 어슬렁거리다가다시 눈이 내리는 곳 그쯤에서 행적을 감춘사람인 것도 같고 사람 아닌 것도 같은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래서남한에서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가 나타났다호들갑을 떨며 사람들이 몰려가고호랑이 발자국 기사가 점점이 찍힌일간지가 가정마다 배달되고금강산에서 왔을까, 아니 백두산일 거야호사가들의 입에 곶감처럼 오르내리면서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속담이 복고풍 유행처럼 번져간다고 치자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증명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