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24. 황동규 시/11. 귀뚜라미

월정月靜 강대실 2025. 4. 5. 14:49

* 귀뚜라미


베란다 벤자민 화분 부근에서 며칠 저녁 울던 귀뚜라미가
어제는 뒤꼍 다용도실에서 울었다.
다소 힘없이.
무엇이 그를 그 곳으로 이사 가게 했을까.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 가는데?
기어서 거실을 통과했을까,
아니면 날아서?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그가 열린 베란다 문턱을 넘어
천천히 걸어 거실을 건넜으리라 상상해 본다.
우선 텔레비전 앞에서 망설였을 것이다.
저녁마다 집 안에 사는 생물과 가구의 얼굴에
한참씩 이상한 빛 던지던 기계.
한번 날아올라 예민한 촉각으로
매끄러운 브라운관 표면을 만져 보려 했을 것이다.
아 눈이 어두워졌다!
손 헛짚고 떨어지듯 착륙하여
깔개 위에서 귀뚜라미잠을 한숨 잤을 것이다.
그리곤 어슬렁어슬렁 걸어 부엌으로 들어가
바닥에 흘린 찻물 마른 자리 핥아 보고
뒤돌아보며 고개 두어 번 끄덕이고
문턱을 넘어
다용도실로 들어섰을 것이다.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공간으로......

......오늘은 그의 소리가 없다. *

* 황동규시집[미시령 큰 바람]-문학과지성사,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