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가(戀歌) / 고정희
아픈 머리에 열이 가라앉고
창마다 환하게 불빛 고이는 저녁
겨울 난롯불에 내 혼을 쬐며 고린도전서 13장을 펴면
내 진실의 계단 어디쯤서 너는 오고 있는가
어둠을 쓰러뜨리며 난롯불은 조금씩 내 피를 뎁히고
꿈틀이며 꿈틀이며 타고 있는 글자들
구름이 가는 곳을 묻고 싶은 황혼쯤
엉겅퀴 울타리를 밟고 가는 바람처럼
내 안에 서걱이는 한 무더기 공허
한 무더기 공허로도 비칠 수 없는 얼굴
불심지 휘감아도 살속 캄캄한 어둠 목구멍을 채우네
지구 가득 부신 햇빛 부려놓고
노을을 물들이는 태양이여,
산마루 넘어가는 태양이여,
눈은 눈으로 구름은 구름으로 떠나고 있을 때
나무들 우쭐대는 진종일 바람은 바람으로 만나고 있을 때
내 깊은 눈물샘 어디쯤서 물그르매
물그르매 번쩍이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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