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491

고인돌의 노래//서연정

고인돌의 노래 서연정 검 하나 오직 들고 무한 시공을 달려온 청동빛 짙은 그리움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은 나의 호명을 바람소리라 하였다 바위를 쩍, 갈라 호된 마음 꺼내니 흐르는 핏물이 땅에 철철 스민다 그들은 이 흙을 치대 그릇을 구우리라 더러 향로가 되면 삼가 제를 모실 때 파르라니 오르는 연기 속에 스미건만 그들은 복 비는 손을 바라볼 뿐이구나 다시 천 년을 침묵으로 달려갈까 어느 너덜겅에서 만나게 될 이들이여 돌에도 길이 나는 연유 곰곰 물을 일이다

박현덕//눈 내린 날 , 소쇄원에서

= 계간 가을호 눈 내린 날 , 소쇄원에서 박현덕 밤 깊자 단소 분다 오므라졌던 꽃들이 피고 긴 바람과 불빛 따라 독백이 시작된다 고목도 혼 빠져나간 아우성을 듣는 밤. 뒤란의 대숲에선 가계(家系)를 들춰보듯 푸른 붓이 하늘에 해서체로 편지 쓴다. 제월당, 곪은 상처 위로 붕대 칭칭 감았다. 눈 나린다 우물가 쌀 문지르는 소리처럼, 한 사람이 다른 사람 향한 숨결이 느껴지는 밤 여든의 어머니가 찾아와 고봉밥을 퍼준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久遠)..

곽재구//사평역(沙平驛)에서

사평역에서 최종수정 : 2006-04-01 14:37:07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

기다리는 행복// 이해인

기다리는 행복 - 이해인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온 생애를 두고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수수한 옷차림의 기다림 입니다 겨울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言語를 익혀 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 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이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더 이상 먼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내가 길들인 기다림의 日常 속에 머무는 나 때로는 눈물 흘리며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오랜 나날 상처받고도 죽지 않는 기다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소임입니다

님의 침묵//한용운

님의 침묵 한 용 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한 용 운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고독하다는 것은 -//이정하

고독하다는 것은 이정하 날고 싶을 때 날 수 있는 새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피고 싶을 때 필 수 있는 꽃들은 또 얼마나 행복한가. 고독하다는 것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고스란히 비워 당신을 맞이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그래서 당신이 사무치게 그립고, 어서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그런 뜻입니다.

슬픔을 위하여 //정호승

슬픔을 위하여 - 정호승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슬픔을 위하여 정 호 승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사산 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철르 어루만지지 말라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버릴 수 있다면 -류시화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버릴 수 있다면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 이상 없을것이라고. 꽃들은 왜 빨리 피었다 지는가. 흰 구름은 왜 빨리 모였다가 빨리 흩어져 가는가. 미소 지으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