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적성촌(積城村)에서/ 정약용

월정月靜 강대실 2007. 11. 23. 13:42
적성촌(積城村)에서---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
 
시냇가 헌 집 한 채 뚝배기 같고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쳇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 드네.
집 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팔아도 칠팔 푼이 안 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같이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 새는 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
무너앉은 선반대는 새끼줄로 얽었도다.
구리 수저 이정(里正)에게 빼앗긴 지 오래인데
엊그젠 옆집 부자 무쇠솥 앗아 갔네.
닳아 해진 무명 이불 오직 한 채뿐이라서
부부유별 이 집엔 가당치 않네.
어린 것 해진 옷은 어깨 팔뚝 다 나왔고
날 때부터 바지, 버선 걸쳐 보지 못하였네.
큰아이 다섯 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
세 살 난 작은놈도 군적에 올라 있어
두 아들 세공(歲貢)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빨리 죽기 바라는데 옷이 다 무엇이랴.
강아지 세 마리가 새로 태어나
아이들과 한 방에서 잠을 자는데
호랑이는 밤마다 울 밖에서 울어 댄다.
남편은 나무하러 산으로 가고
아내는 이웃에 방아품 팔러 가
대낮에도 사립 닫힌 그 모습 참담하다.
점심밥은 거르고 밤에 와서 밥을 짓고,
여름에는 갖옷 한 벌, 겨울엔 삼베 적삼.
땅이나 녹아야 들냉이 싹날 테고
이웃집 술 익어야 찌끼라도 얻어먹지.
지난 봄에 꾸어 온 환자미가 닷 말인데
금년도 이 꼴이니 무슨 수로 산단 말가.
나졸놈들 오는 것만 겁날 뿐이지
관가 곤장 맞을 일 두려워 않네.
오호라, 이런 집이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멀어 어찌 다 살펴보랴.
한(漢)나라 벼슬인 직지사자(直指使者)는
이천석(二千石) 관리라도 마음대로 처분했네.
폐단과 어지러움 근원이 혼란하니
공수, 황패 다시 온들 바로잡기 어려우리.
정협의 유민도를 넌지시 본받아서
시 한 편에 그려 내어 임금님께 바치리다.
 
세공(歲貢):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공물
환상미(還子米): 왕조 때, 봄에 받은 환곡을 가을에 바치던 쌀.
직지사자(直指使者): 한자의 뜻으로 보아 여기서는 암행어사를 비유하는듯
---1794년 11월이었다. 경기도 지방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정조는 경기도 여러 지방을 순찰할 암행어사들을 선발하여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내렸다.
“어사의 직임은 수령의 잘잘못을 규찰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살피는 것이다. 근래 각 도에 보낸 자들이 그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고 폐단이 위로 보고되지 않으므로 백성들은 강직한 어사가 파견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너희들을 파견하는 것이니 관부와 시장, 촌락을 드나들면서 세세히 조사하여 조정에 돌아올 때에 일일이 조목별로 파악해 아뢰도록 하라.”
정약용도 이렇게 하여 경기도의 적성·마전·연천·삭녕 지방을 맡아서 내려갔다. 그런데 정약용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현실은 말로만 듣던 것 보다 더 비참했다
정약용이 위 시에서 읊었듯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 뒤에는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경기감사 서용보의 비리였다. 남의 땅을 가로채고 조세를 포탈한 혐의였다. 그런데 경기감사는 고위직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위의 시에서 “직지사자는 이천석 관리(지방 태수급)라도 마음대로 처분했네”라고 읊었듯이 망설이지 않았다. 관직의 힘으로 남의 땅을 빼앗고 이권을 챙긴 자들을 관대하게 봐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임금께서도 이런 부정부패를 철저하게 다스리라 하지 않았던가. 정약용은 경기감사 서용보의 부정을 사실대로 캐어내어 보고하였다. 이 사건으로 서용보는 정약용을 가장 악랄하게 음해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천석(二千石) 관리: 지방 태수급의 관리
공수.황패: 漢나라의 유명한 원님들
정협의 유민도: 유랑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궁핍한 백성들의 참상을 임금께 일러 바친 고사

 

 

유민도(流民圖)와 다산의 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 마음이 없이 쓰는 시는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非詩也)라고 했던 다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없이 지은 시는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非詩也)라고 했던 다산, 그래서 ‘음풍영월(吟風詠月)’이나 ‘담기설주(譚棋說酒)’하는, 즉 바람이나 달을 읊고 장기나 바둑을 두며 술이나 마시는 이야기를 시로 읊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던 것이 다산의 시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젊은 시절 다산은 경기도 몇 개 고을을 염찰(廉察)하는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참담한 농민들의 실태를 읊은 눈물겨운 시를 지은 바 있습니다. 「적성촌 마을에서 읊은 노래」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 “멀리 정협(鄭俠)의 유민도(流民圖)를 본받아다가, 새로 시 한 편 지어 임금께 바쳐볼까”(遠摹鄭俠流民圖 聊寫新詩歸紫
)라고 하여, ‘유민도’를 거론했던 적이 있습니다.

유민도란 송(宋)나라 때의 훌륭한 벼슬아치인 정협이 백성들의 고달파하는 참상을 보다 못 견디고, 그들의 떠도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임금께 바치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큰 가뭄까지 겹쳐 비참한 농민들이 유리걸식하던 때에 백성들의 소원이 풀리 듯 가뭄에 단비가 내렸고, 임금도 백성들의 참상을 실감하여 신법을 폐지하여 백성들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뒤 다산은 ‘굶주리는 백성의 노래’라는 ‘기민시(飢民詩)’를 지어 시를 읽은 사람이라면 백성들의 굶주리는 모습에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여는데, 그 시를 읽는 평자(評者)가 “이 시야말로 바로 유민도로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산은 언제나 시를 지으면서 마음속에 ‘유민도’를 상상하며 지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참담한 백성들의 실상을 그림으로 그리듯 핍진하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적 수법을 시를 짓는데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반FTA를 위한 농민들의 투쟁을 TV에서 보며 ‘저게 바로 유민도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다산이 살아계시면 어떤 시를 지었을까도 생각해보고, 요즘 시인들은 왜 유민도 같은 시를 짓지 않는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12. 내가 읽은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계절별 시모음  (0) 2007.12.05
기민시(饑民詩- 茶山 丁若鏞 -  (0) 2007.11.23
哀絶陽,애절양 / 茶山 丁若鏞  (0) 2007.11.23
가을  (0) 2007.10.08
비-1  (0) 2007.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