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0 15

한밤에 쓴 편지

한밤에 쓴 편지 姜 大 實 편지를 쓴다 초저녁부터 소곤소곤 시를 읊는 봄비 화답하는 대지의 노래 소리에 마음이 동해 한밤중에 편지를 쓴다 새삼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것 없이 모든 게 내 찰찰이 불찰이었다고 아까운 시간을 먼 산 쳐다보듯 그르친 것 전부 나의 삑삑함 탓이었다고 몇 번을 문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선 일 알량한 내 자존심 때문 이었다고 멀어진 발길 봄이 가기 전에 돌리게 샛문이라도 삐그시 열어 두자고 구름에 가리인 해와 달이 시새워하게 눈 마주치며 웃음 머금고 살자고 안 보면 보고 잡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나날을 살자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주며 고갯길도 평지같이 수월수월 넘자고 누가 먼저다 말고 열 일을 제처 놓고 서로 안부 전화 잊지 말자고 편지를 맺는다 꼭 부..

1. 오늘의 시 2023.09.10

한가위 기다리는 밤

한가위 기다리는 밤/ 월정 강대실                                           내일모레는 팔월 한가위 전야지난 설에도 오마 해 놓고는 안 온서울 간 형 간만에 백마 타고 오는 날 밭고랑 훔친 땀 밴 삼베 적삼앞 도랑에 흔들어 간댓줄에 널고호롱등 밝혀 앞 기둥에 걸어 놓고  앞산 두둥실 솟아오르는 달 기다려달덩이 같은 호박전 붙이며딸랑딸랑 말방울 소리 기다리다 이슥하자 앞질러 오는 불길한 조짐그만, 어머니 눈시울 붉힐까 두려워콩닥거리는 가슴 곁눈질하다  깜박 졸은 유년의 한가위 기다리는 밤.

1. 오늘의 시 2023.09.10

새봄을 기다리며

새봄을 기다리며/ 월정 강대실 골짜기 안침 바위 틈새 틀어박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앙가슴이 바싹 마르고 미어져도 목 놓아 소리 내지르지 못했습니다 회한을 살라낸 자리에 아픔이 도지고 하늘이 하 서러워 붉게 넘어도 찬란한 새봄을 만나야 합니다 무언가 하나 선물처럼 안고 올 남은 촛도막에 마지막 불을 댕겨 지새운 기도를 받치렵니다 환희에 젖어 순한 들꽃 한 송이까지 빵싯이 미소 지을 모습 기리며.

1. 오늘의 시 2023.09.10

춘래불사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월정 강대실 봄은 왔는데 내 안은 봄이 아니어 가시덤불 앙상궂은 마음으로 봄맞이 간다 물아래로 둔덕 밑 양지받이에 새뜻하게 단장하고 옹기종기 앉아 있던 봄아씨들 심곡의 봄은, 그리고 생은 다 이런 것 이라 해답이라도 줄 것처럼 눈길을 건네더니 굴속 같은 일상 허위허위 털고 늘 푸르른 소망에 산다는 듯 빙긋이 웃는다.

1. 오늘의 시 2023.09.10

신용협동조합 고백서

신용협동조합 고백서 - 더는 과거를 말하지 마오 월정 강대실 젖비린내 풀풀 날리던 너 믿음직스레 기르고픈 욕망이 짙푸른 꿈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너의 성장이 내 발전의 주춧돌로 믿고 너를 위해서라면 열일을 박살하고 내 것보다는 우리 것을 앞세워 애면글면 사랑과 정열 젊음을 살랐다 너는 한발 한발 걸음마를 시작하더니 잔병치레도 없이 우후죽순처럼 자랐다 그럴수록 임직원은 자신에게 엄한 회초리 들며 겸허의 갑주 입고 초지일관 했다 돈보다는 사람을 앞세워 차근차근히 자조 자립 협동을 다졌다 신뢰와 이웃을 손잡고 찾아들더라 무지개꿈 안고 연방 모여들더라 자율화와 시장 개방을 원칙과 순리를 좇아 대비했다 살아남았다 튼튼한 체질로 I M F 파고도 거뜬히 넘었다 쌓이는 부실도 버겁지 않게 막아냈다 시장은 어느새 다다익..

1. 오늘의 시 2023.09.10

시인이냐 저승사자냐

시인이냐 저승사자냐/월정 강대실 옥상에 있는 화분 정리한다 일찍이 올려놓고는 손보지 못한 잠에서 깨어 스위치 올리면 그만 내 잠자리 넘나들다 들켜 잽싸게 줄행랑치던 바퀴들 깜짝 놀라 굼실굼실 기어 나온다 복수심이 도져 일까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시기 일까 기를 쓰고 달아나고 거꾸러져 허공을 허우적이는 것들 고약한 심보 번쩍이며 가차없이 으깨어 죽인다 옥상 여기저기에 낭자한 주검 허나 버림받은 증오는 아주 죽지 안 듯 그들의 혼은 천국이나 연옥 삼계육도나 삼천대천세계 떠도는지 책을 펴들면 행간을 기고 누우면 머릿속 뒤지고 다닌다 과연 나는 미물과도 정이통하는 시인이냐 저승사자냐.

1. 오늘의 시 2023.09.10

어느 여름날5

어느 여름날5 姜 大 實 오랜 동창 하나 만났네 허스레한 산막 찾아왔네 또렷이 한번을 인연하지 못한데다 새벽 버스처럼 들이닥쳐 기억의 단편은 강바닥 밑 무늬돌 같이 희미하지만 순한 별 두엇 찾아온 하늘 보며 주고받는 정화는 넘쳐 푸르른 너나들이 피어나고 풀벌레 합주에 자지러져 밤은 꼭꼭 어둠을 쌓는데 잔은 나가서 들지만 몸은 꼭 들어가 눕히고 살아왔다고 뒷산 소쩍새 노래에 홀로 젖으라며 훌쩍 길을 나서는 친구 휘청이는 등 뒤를 시루봉 능선 위 열 엿샛달이 둥두렷이 따라나선다.

1. 오늘의 시 2023.09.10

또다시 이별

또다시 이별 姜 大 實 애티가 보동보동하던 네 형을 떠나보낼 때에도 이렇듯 애틋함을 몰랐었는데. 네 어머니 간곡한 분부는 총총히 아홉 시 발 열차 역으로 아버지는 출근길로 두 편으로 서로 갈라진 아픔 씹으며 가족 간에 등을 돌려야 했다 입소 시간은 다되어 가는데 마지막 한 끼 점심이 마음에 걸려 단축 번호를 눌러보았지만 듣고 싶던 네 목소리 대신 착신 중지 안내음 뿐이었다 동창생들과 추억의 단편을 더듬으며 허전함을 잊는 것도 잠깐 돌아와 가족과 모아 앉았지만 침묵의 호수는 깊기만 했다 네 어머니 TV에 눈을 얹고 있다 돌연 걱정 되느냐는 물음에 어디 속내를 내보일 수 있겠더냐 아들 둘 낳아 조국을 보듬게 했으니 할 일 다 했노라 참말 했었지 분명 가긴 갔나부다고 성장한다는 것은 가족의 그늘에서 점점 멀어..

1. 오늘의 시 2023.09.10

간이역 인생

간이역 인생 姜 大 實 삶은, 허허한 벌판길에서 손잡고 갈 인연 하나 만나 함께 걸어가다가 사람들 급히 오르내리고 나면 바삐 떠나는 간이역입니다 얼마간을 더 가다 언제쯤 어느 역에 닿을지 알 수 없으나 모든 것 운명으로 사려 물고 수려한 꽃마차에 무지개 싣고 덜컹대는 계절에 애환 싣고 아등바등 먼짓길을 갑니다 되돌릴 수 없는 오르막 길 오르다 종착역에 닿으면 가슴 저린 기적만 토해내고 제 갈 길로 가는 간이역입니다.

1. 오늘의 시 202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