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227

한 우물을 파다

한 우물을 파다/월정 가대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 하지만어디 그러기가 쉬운가, 말같이   막 지난 어제조차 낯설어 아뜩해지는 세상황우 뿔 세우고 한길로만 가기가   잽싸게 인해人海 바다 헤쳐 나가다난데없이 암초를 만나 죽을 영금 보기도 하고하찮은 것에 어금니 악물더니 끝판에는앞이 번듯한 사람을 수도 없이 봤던지라   경주 토함산 석굴암과 불국사 찾고무등산 규봉암 서석대 오르고정도리 구계등 갯돌 새에 붙박여 다진 심지어둠을 뒤져 파고 판 우물 아닌가   먼발치에서라도 내 피땀 눈여겨본 사람은삼 년 가물 석 달 열흘 장마에도끄떡없을 명줄이라 침 흘리지만선뜻 발 아래로 염려 내려놓지 못하고   시나브로 땅윗물 못 들게 뒷정리 해 가며세세히 지켜봐 점차 손 떼볼까 하다언제 하늘이 변심하여 상전벽해 되..

1. 오늘의 시 2024.11.18

또 다른 별리

또 다른 별리/월정 강대실  네 형 때는 어머니랑 열차로 올라가연병장에 대열로 세워 놓고 돌아섰어도이렇듯 애틋함 몰랐었다난생처음인 별리 아픔 같은 건 모른 척너는 쫓기는 짐승, 혼자 역사로 줄달음쳤지연신 죄어 오는 입소 시각, 초조로운 마음돌린 전화는 착신 중지 안내음 뿐이었다퇴근길 맞댄 가슴 몇이 군 생활을 곱씹으며위로주에 가라앉은 마음도 잠깐터벅터벅 샛골목 야음 밟아 마주한 가족얼굴에 겹겹한 그늘 숲속보다 무거웠다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네 어머니두 아들 애지중지 길러 조국을 품게 했으니이보다 더 장한 일이 있겠냐며 다독였지여하튼, 온갖 풍파에도 일념으로 노 저어이제는 고삐 풀린 약관의 건아, 차차품에서 멀어질진대 마음의 탕개 풀자 했지다들 자리에 들고 홀로 고요로운 뜨락허허로운 천공 잠 못 든..

1. 오늘의 시 2024.11.18

꽃길 이백 리

꽃길 이백 리/월정 강대실    먼 남쪽 가칠한 마파람에 실리어산을 넘고 물 건너 온풋풋한 꽃향내에 홀린 마음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 에워 안은산모롱이 돌고 바람길 더듬어 찾아든쌍계사 꽃길 이백 리  이 산 저 산 온 천지가 왁자지껄바람난 개나리 산수유 목련두견화 이화 앵화 도화배꽃 벚꽃 조팝 민들레...... 꽃이란 꽃은 우르르 쏟아져 나와어우렁더우렁 한마당 꽃 잔치꽃향기에 취해 배질하는 차량 행렬. 초2-7982021. 3. 26.

1. 오늘의 시 2024.11.18

늙은 구두 수선공의 기술// 육탁

늙은 구두 수선공의 기술닳은 구두 뒤축을 갈기 위해구둣방에 갔는데, 늙은 수선공이뒤축 대신 사과나무를 심어놓았다.걸음 걸을 때마다사과꽃 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비음산 옆구리의 산골짜기가 고향이라던 늙은 수선공은4월이 되면 늑골 깊은 곳에서 사과꽃이 핀다고 했다.그러니까 늑골 깊은 곳은, 이제돌아갈 수도 없는 옛집 마당.늙은 수선공은, 이 도시 거리를천진한 웃음이 사과꽃 향기로 퍼지는 마당으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하다.그렇지 않다면, 뒤축 대신 사과나무를구두에 심어놓는 불가해한 기술을 보여줄 리 없다.그런데 내가 거리를 걷는 동안아무도 사과꽃 피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만개한 사과꽃 향기를 느끼지도 못했다,시내를 뒤덮고 있는 벚꽃과 분명 다른 향기였는데도.얼른 집에 돌아와 보여주었지만, 아내도구두에 뒤축 대신..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육탁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숫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출처] 시집 1091. 배한봉 - 『육탁』|작성자 느티나무

우포늪 왁새/육탁 배한봉

우포늪 왁새 _ 배한봉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소리꾼이 있었다. 신명 한 자락에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한 대목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황산 솔밭을 다 적시고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늙은 고수라도 만나면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맸던 소리가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저 왁새들완창 한 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육탁 배한봉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 육탁​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숫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출처] 시집 1091. 배한봉 - 『육탁』|작성자 느티나무

육탁

육탁/ 육탁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