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7 10

8. 문병란 시/9. 꽃씨

[출처] 문병란 시 모음 // 9월의 시 등 33편|작성자 염생이 꽃씨​문병란​가을날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빛나는 여름의 오후,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버리면갑자기 뜰이 넓어 가는 가을날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기인 기다림의 창변에화려한 어젯 날의 대화를 묻는다.

8. 문병란 시/8. 9월의 시

9월의 시 문병란​9월이 오면해변에선 벌써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무성한 여름을 벗고제자리에 돌아와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 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기도를 마친 여인처럼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먼 항구에선벌써 이별이 시작되고준비되지 않은 마음눈물에 젖는다

8. 문병란 시/8. 희망가

희망가문병란얼음장 밑에서도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매화는 꽃망울을 튼다절망 속에서도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사막의 고통 속에서도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보리는 뿌리를 뻗고마늘은 빙점에서도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절망은 희망의 어머니고통은 행복의 스승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인생 항로파도는 높고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한 고비 지나면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8. 문병란 시/7. 호수

호수문병란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무수한 눈길의 번뜩임 사이에서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8. 문병란 시/6. 직녀에게

직녀에게문병란이별이 너무 길다슬픔이 너무 길다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돗돌을 놓아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이별이 너무 길다슬픔이 너무 길다사방이 막혀 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그대 손짓하는 여인아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오작교가 없어도 노돗돌이 없어도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야 할 우리말라붙은 은하수 눈물은 녹이고가슴과 가..

8. 문병란 시/5. 죽순 밭에서

죽순 밭에서문병란죽순 밭에는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죽순 밭에는낭자히 고이는 달빛이 흐른다.무엇인가 뿜고 싶은 가슴들이무엇인가 뽑아 올리고 싶은 욕망들이쑥쑥 솟아오른다도란도란 속삭인다.왕대 참대 곧은 줄기다투어 뽑아 올리는 대나무 밭나도 한 그루 대나무 되어 서면내 가슴속에서빠드득빠드득 뽑아 오르는 소리뾰쪽뾰쪽 솟아오르는 울음소리사운사운 내리는 달빛 속에달빛을 받아먹고이슬을 받아먹고천근 누르는 바위 밑에서도만근 뒤덮은 어둠 밑에서도쑥쑥 뽑아 오르는 소리마디마디 매듭이 지는 소리이윽고 참대가 되고 왕대가 되고유혈이 낭자하던 대밭임진년(壬辰年) 의병의 손에서원수의 가슴에 꽂히던 죽창이 되고,갑오년(甲午年) 백산(白山)에 솟은 푸른 참 대밭우리들의 가슴을 뚫고사무친 아우성이 솟아오르는 소리안개 속에서 달빛 ..

8. 문병란 시/4. 정당성1

정당성 1문병란나의 행동에 대하여나는 정당성을 찾는다.외국 유학생의 비자 위에서오늘의 지성은 정당을 찾는다.마땅히 먹어야 하고마땅히 배설해야 하고모름지기 남보다 잘 살아야 한다.나는 왜 그녀를 울렸던가.나는 왜 수입이 적은가.그녀의 입술 위에서나의 입술은 무엇을 훔쳤는가,우리들의 사랑은 정당하다.데모대는 돌맹이 속에서민주주의 소생을 믿고경찰은 최루탄 속에서법의 존엄성을 믿는다.모든 것은 정당하다.성토 대화가 열릴 때도봉산에 가서 연인과 즐기고데모가 전개될 때당구장에 가서 휴강을 즐긴다.껌을 씹으면서 패튼을 관람한내 양심의 소재,껌을 씹다어금니로 입술을 깨문 그실수 - 짭짤한 피의 맛을 아는가.전쟁을 즐기는 위대한 영웅과죽음을 두려워하는 졸병 사이에서입 다문 휴머니티어금니 사이에서 으깨려진껌 - 모든것은 ..

8. 문병란 시/3. 인연서설

인연서설문병란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사랑은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이 애틋한 몸짓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오가는 인생 길에 애틋이 피어났던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가시덤풀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다하지 못한 그리움사랑은 하나가 되려나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사랑은 서로..

8. 문병란 시/2. 땅의 연가

땅의 연가(戀歌)문병란나는 땅이다길게 누워 있는 빈 땅이다누가 내 가슴을 갈아엎는가?누가 내 가슴에 말뚝을 박는가?아픔을 참으며오늘도 나는 누워 있다.수많은 손들이 더듬고 파헤치고내 수줍은 새벽의 나체 위에가만히 쓰러지는 사람농부의 때묻은 발바닥이내 부끄런 가슴에 입을 맞춘다.멋대로 사랑해 버린 나의 육체황토빛 욕망의 새벽 우으로수줍은 안개의 잠옷이 내리고연한 잠 속에서나의 씨앗은 새 순이 돋힌다.철철 오줌을 갈기는 소리곳곳에 새끼줄을 치는 소리여기저기 구멍을 뚫고새벽마다 연한 내 가슴에욕망의 말뚝을 박는다.상냥하게 비명을 지르는 새벽녘내 아픔을 밟으며누가 기침을 하는가,5천년의 기나긴 오줌을 받아 먹고걸걸한 백성의 눈물을 받아 먹고슬픈 씨앗을 키워온 가슴누가 내 가슴에다 철조망을 치는가?나를 사랑해다오..

8. 문병란 시/1. 문병란 시 모음 33편

문병란 시 모음 33편☆★☆★☆★☆★☆★☆★☆★☆★☆★☆★☆★☆★《1》9월의 시문병란9월이 오면해변에선 벌써이별이 시작된다나무들은 모두무성한 여름을 벗고제자리에 돌아와호올로 선다누군가 먼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기도를 마친 여인처럼고개를 떨군다울타리에 매달려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먼 항구에선벌써 이별이 시작되고준비되지 않은 마음눈물에 젖는다.☆★☆★☆★☆★☆★☆★☆★☆★☆★☆★☆★☆★《2》가을의 여백에 앉아서문병란가을은 먼저4만 원짜리 횟감 두 접시와우리들의 단란한 술잔 속에 와서비린내도 향그러운 가을바다아침이슬 한 잔씩을 가득 채웠다.길고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모처럼 하늘이 높고 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