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245

20. 고재종 시// 3. 길에 관한 생각

길에 관한 생각 고재종마음은 쫓기는 자처럼 화급하여도 우리는늘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일까. 새벽에 일어나흰 이슬 쓰고 있는 푸성귀밭에 서면저만큼 버려두었던 희망의 낯짝이 새삼고개 쳐드는 모습에 목울대가 치민다. 애초에그 푸르름, 그 싱싱함으로 들끓었던 시절의하루 하루는 투전판처럼 등등했지, 그 등등함만큼 쿵쿵거리는 발길은 더 뜨거웠으니어느 순간 텅 비어버린 좌중에 놀라,이미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타협해버린연인들처럼, 그렇게, 한번 그르쳐 든 길에서남의 밭마저 망쳐온 것 같은 아픔은 깊다.살다보면 정 들겠지, 아니 엎어지든 채이든가다보면 앞은 열리겠지, 애써 눈을 들어먼산을 가늠해보고 또 마음을 다잡는 동안세월의 머리털은 하얗게 쇠어갔으..

20. 고재종 시// 2. 유서

유서 / 고재종 된서리에 배추 속 차듯이 살면땅 밑의 알토란 무더기 캐듯 할 거라더니, 개평술 몇 잔에 이 집 저 집상갓집 개처럼 어슬렁거리다간 죽었다. '평생을 리자만 갑다 말엇따!'모진 생만큼이나 쓰라린 유서 한 줄 남기고, 서로 외면하는 그의 집에 삭풍만 들락거리며문에 붙은 조합의 차압 딱지를 추문(推問)해 댔다.

20. 고재종 시/ 1. 고재종 시 모음

고재종 시 모음 1957년 전남 담양 출생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시집 ,,,, 수필집 ,13, 14, 15회 3년 연속 소월시문학상 추천우수작상2002년 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신동엽 창작기금받음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 동안거(冬安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동ː-안거 (冬安居): (불교) 승려들이 겨울 90일, 곧 음력 10월 16일부터 이듬해 정월 15일까지 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일. ↔하안거. ▷안거. 동ː안거-하다 (자) 푸른 자전거의 때말매미 말매미 떼 수천 마리의..

19. 서정주 시/ 22. 저무는 황혼

저무는 황혼/ 서정주   새우마냥 허리 오그리고 누엿누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너머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이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너머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내겐 없으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여뀌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보 또랑물 이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매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엇비슷이 비끼어 누워 나도 이제는 잠이나 들까.

19. 서정주 시// 21. 내리는 눈발 속에서

내리는 눈발 속에서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라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포근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그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리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국,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거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기어 드는 소리. ……

19. 서정주 시/ 20. 상리 과원

상리 과원/서정주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나 낙동강 상류와도 같은 융융한 흐름이다.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뜨리는 몸뚱어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숭어리들을 달았다.맵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 새끼들이 조석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만 마리의 꿀벌들이 온종일 북 치고 소고 치고 맞이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

19. 서정주 시/ 19. 추석

추석/ 서정주  대추 물 들이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 떠나올 때 가슴에 그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비수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비수들 다 녹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은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았다가 그 눈썹 꺼내들고 기왓장 넘어 오는고.춘궁(春窮)춘궁(春窮보름을 굶은 아이가산(山) 한 개로 낯을 가리고바위에 앉아서너무 높은 나무의 꽃을밥상을 받은 듯 보고 웃으면,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산(山) 두 개로 낯을 가리고그 소식을구름 끝 바람에서겸상한 양 듣고 웃고,또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산(山) 세 개로 낯을 가리고그 소식의 소식을 알아들었는가인제는 ..

19. 서정주 시/ 18. 고요

/ 서정주  이 고요 속에눈물만 가지고 앉았던 이는이 고요 다 보지 못하였네. 이 고요 속에이슥한 삼경의 시름지니고 누었던 이도이 고요 다 보지는 못하였네. 눈물,이슥한 삼경의 시름,그것들은고요의 그늘에 깔리는한낱 혼곤한 꿈일뿐, 이 꿈에서 아조 깨어난 이가비로소만길 물 깊이의 벼락의향기의꽃새벽의옹달샘  속 금동아줄을타고 올라 오면서임 마중 가는 만세 만세를침묵으로 부르네.

19. 서정주 시/ 17. 쑥국새 打鈴타령

쑥국새 打鈴타령 / 서정주 애초부터天國천국의사랑으로서사랑하여사랑한건아니었었다그냥그냥네속에담기어있는그냥그냥네몸에실리어있는네天國이그리워竊盜절도했던건아는사람누구나다아는일이다아내야아내야내달아난아내쑥국보단天國이더좋은줄도젖먹니가나보단널더닮은줄도어째서모르겠나두루잘안다그러니딸꾹울음하고있다가딸꾹질로바스라져가루가되어날다가또네근방달라붙거든예살던情分정분으로너무털지말고서下八潭上八潭하팔담상팔담서옛날하던그대로또한번그어디만큼묻어있게해다오

19. 서정주 시/ 16. 선덕여왕의 말씀

선덕여왕의 말씀  짐朕의 무덤은 푸른 영嶺위의 욕계 제이천第二天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구름 엉기고, 비 터 잡는 데- 그런 하늘 속.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너무들 인색치 말고있는 사람은 병약자한테 시량柴糧도 더러 노느고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첨성대瞻星臺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 살肉體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살닿는 것 중 그중 빛나는 황금 팔찌를 그 가슴 위에,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 스러지지 않거든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하지만 사랑이거든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서라벌 천년의 지혜가 가꾼국법國法보다도 국법의 불보다도늘 항상 더 타고 있어라. 짐의 무덤은 푸른 영 위의 욕계 제이천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

19. 서정주 시//14. 눈 오시는 날

눈 오시는 날 내 연인은 잠든 지 오래다. 아마 한 천년쯤 전에……. 그는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 그 꿈의 빛만을 나한테 보낸다. 분홍, 분홍, 연분홍, 분홍, 그 봄 꿈의 진달래꽃 빛깔들. 다홍, 다홍, 또 느티나무 빛, 짙은 여름 꿈의 소리나는 빛깔들. 그리고 이제는 눈이 오누나……. 눈이 와서 내리 쌓이고, 우리는 저마다 뿔뿔이 혼자인데 아 내 곁에 누워 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연인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

19. 서정주 시//13. 님은 주무시고

님은 주무시고 님은 주무시고, 나는 그의 베갯모에 하이옇게 수놓여 날으는 한 마리의 학이다. 그의 꿈속의 붉은 보석들은 그의 꿈속의 바다 속으로 하나하나 떨어져 내리어 가라앉고 한 보석이 거기 가라앉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한 이별을 갖는다. 님이 자며 벗어놓은 순금의 반지 그 가느다란 반지는 이미 내 하늘을 둘러 끼우고 그의 꿈을 고이는 그의 베갯모의 금실의 테두리 안으로 돌아오기 위해 나는 또 한 이별을 갖는다.

19. 서정주 시/10. 꽃밭의 독백

꽃밭의 독백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 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19. 서정주 시/9. 풀리는 한강가에서

풀리는 한강가에서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 이파리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 숙여 보라 함인가 황토 언덕 꽃 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래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19. 서정주 시/8. 추천사

추천사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베갯모에 놓이듯한 풀꽃 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19. 서정주 시/7. 국화 옆에서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19. 서정주 시/5. 귀촉도

귀촉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미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19. 서정주 시/4. 부활

부활 내 너를 찾아왔다 순아.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순아, 이것이 몇 만시간 만이냐.그날 꽃상여 산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촉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 린지, 한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순아! 순아! 순아! 너 이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19. 서정주 시/3. 자화상(自畵像)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

19. 서정주 시/2. 화사

화사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꿰어 두를까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베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베암.

8. 문병란/ 24. 가을행

가을행                             문   병   란가을 아침 문득손수건 한 장으로 길을 나선다아무 준비 없는 길 떠남이이토록 가슴 설레임은 무엇일까.모르는 얼굴들 틈에서 두리번거리며쫓겨가는 사람모양 서글픔을 안고다음 열차를 기다려 개찰구 앞에 서면제법 감도는 인생에의 비장감,누구에게 결별을 고하지 않았어도나의 애틋한 마음 허공에 운다.인간의 고독한 삶이여, 줄줄이 매달린온갖 속연들, 마누라와 자식과제자와 직장의 동료와 여러 친척들,그들의 눈빛은 오히려 선하기만 하거니지금 내가 들고 있는 차표 위에는유언처럼 슬픈 내일의 이정표가 흐른다.다시 오지 못할 길일지라도후회하지 말라 가을 바람은 소슬하고내 피에 섞인 역마성은먼 하늘의 흰구름을 손짓해 부른다.떠남을 재촉하는 철맞은 코스모스야너..

8. 문병란/ 23. 서편에 달이

서편에 달이                           문  병  란서편에 달이 지려 하고 있다.하품하는 키 큰 미루나무가그 달과 눈을 맞추고 있다.지난밤 나는 꿈속에서누군가를 만났는데이 아침 문득서쪽에 사는 사람이 그리워진다.아쉬움이 남는 밤촛불 한 자루 다 태우지 못한 밤호박 잎 위에서 여름밤이 도르르 말린다.이 새벽 무슨슬프지 않은 이별이 있는 걸까.지는 달을 안고호수가 별들을 토해낸다.삼나무가 자꾸만 손을 흔든다.서편에 달이정다운 벗처럼 떠나고 있다.친구, 친구, 날 잊지 마셔요.어디선가 누가 작게 울고 있다.

8. 문병란// 22. 전라도 젓갈

전라도 젓갈 문 병 란썩고 썩어도 썩지 않는 것썩고 썩어도 맛이 생기는 것그것이 전라도 젓갈의 맛이다전라도 갯땅의 깊은 맛이다괴고 괴어서 삭고 곰삭아서맛 중의 맛이 된 맛온갖 비린내 땀내 눈물내갖가지 맛 소금으로 절이고 절이어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맛소금기 짭조롬한 눈물의 맛장광에 햇살은 쏟아져 내리고미닥질 소금밭에 소금발은 서는데짠맛 쓴맛 매운맛 한데 어울려설움도 달디달게 익어가는 맛원한도 철철 넘치게 익어가는 맛어머니 눈물 같은 진한 맛이다할머니 한숨 같은 깊은 맛이다자갈밭에 뙤약볕은 지글지글 타오르고꾸꾸기 뻐꾸기 왼종일 수상히 울어예고눈물은 말라서 소금기 저린 뻘밭이 됐나한숨은 쉬어서 육자배기 뽑아올린 삐비꽃이 됐나썩고 썩어서 남은 ..

8. 문병란// 21. 아버지의 귀로

아버지의 귀로 문병란 서천에 노을이 물들면 흔들리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리어커꾼의 거치른 손길 위에도 부드러운 노을이 물들면 하루의 난간에 목마른 입술이 타고 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한 애인이 된다는 것, 무너져가는 노을 같은 가슴을 안고 그 어느 귀로에 서는 가난한 아버지는 어질기만 하다. 까칠한 주름살에도 부드러운 석양의 입김이 어리우고, 상사를 받들던 여윈 손가락 끝에도 십원짜리 눈깔사탕이 고이 쥐어지는 시간, 가난하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그 아들딸 앞에 돌아오는 초라한 아버지, 그러나 그 아들딸 앞에선 그 어느 대통령보다 위대하다! 아부도 아첨도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왕국 주류와 비주류 여당과 야당도 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