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4 17

20. 고재종 시/12. 수숫대 높이만큼

수숫대 높이만큼 네가 그리다 말고 간달이 휘영청 밝아서는댓그림자 쓰윽 쓰윽마당을 잘 쓸고 있다백 리까지 확 트여서는귀뚜라미 찌찌찌찌찌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데아무 장애는 없다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씨르래기의 연주도씨르릉 씨르릉 넘친다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20. 고재종 시/10. 푸른 자전거의 때

푸른 자전거의 때말매미 말매미 떼 수천 마리의 전기톱질로온 들판을 고문해대어선콩밭에서 콩순 따는 함평댁의 등지기 위로살 타는 훈짐 피어오르는 오후 숲참때 저기 신작로 하학길을은륜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막내녀석,그 씽씽 그 의기양양문득 허리를 펴다 가늠한 함평댁의 입이함박만하게 함박만하게 벌어질 때 때마침 목덜미를 감아오는 바람자락과 함께푸르고 푸른 풋것들이환호작약, 온갖 손사래를 쳐대는 것이었다

20. 고재종 시/ 9. 동안거(冬安居)

1957년 전남 담양 출생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시집 ,,,, 수필집 ,13, 14, 15회 3년 연속 소월시문학상 추천우수작상2002년 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신동엽 창작기금받음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 동안거(冬安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동ː-안거 (冬安居): (불교) 승려들이 겨울 90일, 곧 음력 10월 16일부터 이듬해 정월 15일까지 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일. ↔하안거. ▷안거. 동ː안거-하다 (자)

20. 고재종 시/ 8. 오솔길의 몽상.2

오솔길의 몽상.2 / 고재종이고 들고 업고 안은 아낙네만 같아서무얼 좀 놓아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그리하여 내가 다시 찾는 오솔길에는억새 속새 푸나무 넌출 무성한데무얼 더 붙잡겠다고 거미는 곳곳에진을 치고 기다리는가, 기다려보아야아무도 없는 혼자일 때마다소쩍새 울음이나 뼈마르도록 듣던 곳,잎새들이 또 한시도 가만있질 못하고모퉁이를 돌아간 쓸쓸함까지 되부르는 곳.무얼 좀 놓아버리면 몽상은 되살아나선가령 수제비 떼어놓은 듯한 구름이며휘파람새 울음 속에 집 한 채 짓고 싶다.몽상은 요렇더라도 머루 다래 돌배는토실토실 여기저기 풍성한데오목눈이들은 어찌 오락가락 야단법석인지.야단법석으로 여럿일 때마다늘 무언가 잃어버린 듯 막막하던 날들,저처럼 햇빛 코팅한 억새들의 반짝임 속에그러나 곧장 해지면 소슬해지는 그 속에..

20. 고재종 시/ 7.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 고재종  하늘의 정정한 것이 수면에 비친다. 네가 거기 흰구름으로 환하다. 산제비가 찰랑, 수면을 깨뜨린다. 너는 내 쓸쓸한 지경으로 돌아 온다. 나는 이제 그렇게 너를 꿈꾸겠다. 초로(草露)를 잊은 산봉우리로 서겠다. 미루나무가 길게 수면에 눕는다. 그건 내 기다림의 길이. 그 길이가 네게 닿을지 모르겠다. 꿩꿩 장닭꿩이 수면을 뒤흔든다. 너는 내 외로운 지경으로 다시 구불거린다. 나는 이제 너를 그렇게 기다리겠다. 길은 외줄기 비잠(飛潛) 밖으로 멀이지듯 요요하겠다. 나는 한가로이 거닌다. 방죽가를 거닌다. 거기 윤기 흐르는 까만 염소에게서 듣는다. 머리에 높은 뿔은 풀만 먹는 외골수의 단단함 임을. 너는 하마 그렇게 드높겠지. 일월(日月) 너머에서도 뿔은 뿔이듯 너를 향하여 ..

20. 고재종 시/ 6. 푸르러서 썩지 않는 슬픔떼

푸르러서 썩지 않는 슬픔떼 / 고재종 남들은 푸른 절개라 뭐라 하지만저 대나무 보는 나는 늘 서럽다한 번의 태생, 그 모진 뿌리에 엉키어한 발짝도 옮길 수 없는 그것으로댓마디마디 부르튼 것을 보아라한 번의 운명, 그 모진 노여움에 살아푸르른 눈 한 번 감지 못하고댓잎새 서걱서걱 제 살이나 베고바람은 한시도 멈출 줄 몰라서저 대나무도 나도 가만 있질 못한다때론 우듬지 떨림 같은 그리움으로수많은 되새떼을 야심천에 띄우고날빛과 별빛 사이의 설렘을금쌀밭 은쌀밭으로 바꿔보기도 했지만모든 게 부질없느니! 그렇다 해서그 소가지 텅텅 비워보기도 했다하지만 꽃 한번 피우는 그날이생의 최후의 날인 이 천형 때문에대밭에선 늘 살가지떼나 사는 것이냐차라리 죽창으로 빛나리라 했다선혈이 낭자한 어느 아침놀 녘번뜩이는 도끼로 제 ..

20. 고재종 시/ 5. 능금밭 앞을 서성이다

능금밭 앞을 서성이다 / 고재종 지난 토요일 직장 동료들과 청도에 다녀왔습니다. 별장처럼 예쁜 집에서 밤, 땅콩, 고구마를 먹고 집 근처 텃밭에서 자란 풋고추와 배추도 먹으며 눈부신 가을햇살까지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 집 옆엔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보고 우리들은 하나 따 먹어도 될까? 괜찮겠지? 안되겠지? 하면서 초대받지 않은 그들의 달콤한 축제에 방자하게 끼워 들었습니다. 정말로, 무슨 장한 기운이 서리서리 둘러쳐 있는 것인지 저마다 둥글게 깊어지고 있는 그 곳에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가지고 간 카메라에 몰래 담아 왔습니다. 詩하늘 드림

20. 고재종 시/ 4. 백련사 백일홍나무를 대함

백련사 백일홍나무를 대함'//고재종스님이 입고 있는 입성은잿물빛도 소연해서 소연해서 사그러지겠더군.스님이 바라보는 백일홍은분홍빛도 화사해서 화사해서 자지러지겠더군.그날사 말고 비는 내리고 내려서구구구 멧비둘기 불러 무위적정(無爲寂靜)을 허물고비 맞고도 환하디환한 백일홍,나는야 차마 차 한 모금 못 넘기겠더군.- 고재종. 전문......................................................................................고창쪽 선운사 가는 길이었든가. 아니면 천안 어디쯤 추사 김정희의 생가 가는 길이었든가 하여튼 십리도 넘게 젊은 백일홍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길을 따라 가 본 적이 있다. 밑둥을 살짝 긁으면 사르르 꽃망울을 떠는 이 배롱나무가 안개비가..

20. 고재종 시/ 3. 길에 관한 생각

길에 관한 생각                                      고재종마음은 쫓기는 자처럼 화급하여도 우리는늘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일까. 새벽에 일어나흰 이슬 쓰고 있는 푸성귀밭에 서면저만큼 버려두었던 희망의 낯짝이 새삼고개 쳐드는 모습에 목울대가 치민다. 애초에그 푸르름, 그 싱싱함으로 들끓었던 시절의하루 하루는 투전판처럼 등등했지, 그 등등함만큼 쿵쿵거리는 발길은 더 뜨거웠으니어느 순간 텅 비어버린 좌중에 놀라,이미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타협해버린연인들처럼, 그렇게, 한번 그르쳐 든 길에서남의 밭마저 망쳐온 것 같은 아픔은 깊다.살다보면 정 들겠지, 아니 엎어지든 채이든가다보면 앞은 열리겠지, 애써 눈을 들어먼산을 가늠해보고 또 마음을 다잡는 동안세월의 머리털은 하얗게 쇠어갔으..

20. 고재종 시/ 2. 유서

유서 / 고재종   된서리에 배추 속 차듯이 살면땅 밑의 알토란 무더기 캐듯 할 거라더니,  개평술 몇 잔에 이 집 저 집상갓집 개처럼 어슬렁거리다간 죽었다.  '평생을 리자만 갑다 말엇따!'모진 생만큼이나 쓰라린 유서 한 줄 남기고,  서로 외면하는 그의 집에 삭풍만 들락거리며문에 붙은 조합의 차압 딱지를 추문(推問)해 댔다.

20. 고재종 시/ 1. 고재종 시 모음

고재종 시 모음 1957년 전남 담양 출생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시집 ,,,, 수필집 ,13, 14, 15회 3년 연속 소월시문학상 추천우수작상2002년 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신동엽 창작기금받음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 동안거(冬安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동ː-안거 (冬安居): (불교) 승려들이 겨울 90일, 곧 음력 10월 16일부터 이듬해 정월 15일까지 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일. ↔하안거. ▷안거. 동ː안거-하다 (자) 푸른 자전거의 때말매미 말매미 떼 수천 마리의..

19. 서정주 시/ 22. 저무는 황혼

저무는 황혼/ 서정주   새우마냥 허리 오그리고 누엿누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너머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이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너머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내겐 없으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여뀌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보 또랑물 이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매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엇비슷이 비끼어 누워 나도 이제는 잠이나 들까.

19. 서정주 시/ 21. 내리는 눈발 속에서

내리는 눈발 속에서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라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포근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그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리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국,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거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기어 드는 소리. ……

19. 서정주 시/ 20. 상리 과원

상리 과원/서정주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나 낙동강 상류와도 같은 융융한 흐름이다.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뜨리는 몸뚱어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숭어리들을 달았다.맵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 새끼들이 조석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만 마리의 꿀벌들이 온종일 북 치고 소고 치고 맞이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

19. 서정주 시/ 19. 추석

추석/ 서정주  대추 물 들이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 떠나올 때 가슴에 그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비수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비수들 다 녹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은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았다가 그 눈썹 꺼내들고 기왓장 넘어 오는고.춘궁(春窮)춘궁(春窮보름을 굶은 아이가산(山) 한 개로 낯을 가리고바위에 앉아서너무 높은 나무의 꽃을밥상을 받은 듯 보고 웃으면,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산(山) 두 개로 낯을 가리고그 소식을구름 끝 바람에서겸상한 양 듣고 웃고,또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산(山) 세 개로 낯을 가리고그 소식의 소식을 알아들었는가인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