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9 24

순천만 갈대/ 손광은

순천만 갈대/ 손광은  가을을 엿듣고 있으면가래는 흔들리지 않는구나푸른빛도 보이지 않고하얀 입술을 문지르고 있구나.달이 떨군 한숨인 듯 하얗게휘청휘청 나부끼고아무르강 흑두루미순천만에 날라와 끼룩끼룩 울고,물면에 몸에 던져 부비듯,스스스 서걱이는 마른 갈대잎 휘날리지만,갈대는 흔들리지 않는구나. 바람에 몸을 맞긴 채 가슴끼리 맞부비고 흔들리지 않는구나.갯바람도 쓸어모아 자지러지게 부딪히는 소리뿐건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장단에 춤을 출뿐.... 갈대는 휘모리로 휘모리로 귀가 열리네.가을에 갈대는 귀가 열리네.갈대는 가을에 휘모리로 귀가 열리네.내가 엿듣고 마는 나를 갈대는 나를 만나네.숨어있는 나를 향해 석양 빛을 길게 뻗고강이 뒤채는 물면 그늘에 빛을 던지네.흰달이 흰물결 뒤로 떨어질 때까지다소곳이 서서 뉘..

보리타작/ / 손광은

보리타작/ 손광은 어릴적 머슴인 내 아버지는 마당 복판에 무더위를 불러들인보리단을 놓아둔다까실까실한 사슬이 매달린 보리,단정히 부수지 않고손가락을 대본다.실한 머슴은 곁에 있는 농주를 마시며푸른 보리를 생각한다.풀잎 같은 풀잎이었다가풀잎 같은 보리였다가풀잎 같은 보리국물을겨울에는 마시며,지금은 풀잎같이의식을 일으켜비밀의 구조를 갖고 누렇게 살아 있는,보리를 술잔에 비쳐보곤 히죽이 웃으며,「여 때리라저 때리라」거만스럽게 삐걱이며도리깨질을 하면서 잠 깊은 누런 이마를 후려친다. 후려쳐....서성이는 어머니는 빗자루를 치켜들고왔다, 갔다,튀어나는 보리알을 쓸면서신비로운 내 시선 사이로 지나간다.큰물소리가 지나간다.곁에 가던 먼지가불타듯 연기되..

21. 허형만 시/ 20.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을 거닐며/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겨울 들판을 거닐며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겨울 들판을 거닐며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21. 허형만 시/ 19. 아버지

아버지 / 허형만​​산 설고 물설고낯도 선 땅에아버지 모셔드리고떠나온 날 밤 얘야,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잠긴 문 열어 젖히니찬바람 온몸을 때려뜬눈으로 날을 샌 후 얘야, 문 열어라!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세상을 향한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세상을 향한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출처] 아버지 / 허형만|작성자 정의와평화

21. 허형만 시/ 19. 살다보면

살다보면 /허형만            무문토기처럼 투박한 안개가 서서히, 느리게, 겹겹으로 에워싼다 통근버스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나아가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차창 가까이 바싹 조여오는 안개의 날렵한 혓바닥 앞에 차 안에 갇힌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살다보면 때로 이렇게 숨결마저 발목잡히는 일이 많다우리도 차라리 안개가 되든가 안개 속에 녹든가 허공중에 물방울로 증발되든가 우주의 반짝이는 눈물로 굳어지든가 그리하여 마침내 알타이 우코크 고원 베르떽 계곡의 지워지지 않는 안개처럼 우리 모두를 구름 위에 서있게 하든가 살다보면 때로 이렇게 시간마저 발목잡히는 일이 많다.

21. 허형만 시/ 17. 소 리

소 리 /허형만허옇게 뼈만 남은서어나무골수에 구멍이 뚫려있다그 구멍에서까막딱따구리가 쪼다 남은소리가 들렸다딱다그르르아득한 생애를 그리워라도 하듯서어나무 으스스 몸 떠는소리도 함께 들렸다이 산 어느 계곡 쯤으로우레가 흐르는가딱다글 딱다글그 작은 구멍들마다연두빛 잎 틔우는 소리로가득 술렁였다서어나무잠시 생생한 모습을드러냈다 금방 사라졌다아니본 듯 떠나라 했다.

21. 허형만 시/ 16. 풀꽃 한 송이

풀꽃 한 송이 /허형만-기도그대 보고자운 풀꽃 한 송이오늘도 바람결에 흔들리면서사랑합니다 그대여 허락하소서그대 확실한 언약 아닐지라도오시리라 목이 긴 풀꽃 한 송이진실한 사랑이란 왜 이리 외로운지오늘따라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들판으로 밀려오는 은밀한 고요그대 기다리는 풀꽃 한 송이오늘도 구름결에 숨어 살면서그립습니다 그대여 찾아드소서

21. 허형만 시/ 15. 살다보면

살다보면 /허형만            무문토기처럼 투박한 안개가 서서히, 느리게, 겹겹으로 에워싼다 통근버스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나아가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차창 가까이 바싹 조여오는 안개의 날렵한 혓바닥 앞에 차 안에 갇힌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살다보면 때로 이렇게 숨결마저 발목잡히는 일이 많다우리도 차라리 안개가 되든가 안개 속에 녹든가 허공중에 물방울로 증발되든가 우주의 반짝이는 눈물로 굳어지든가 그리하여 마침내 알타이 우코크 고원 베르떽 계곡의 지워지지 않는 안개처럼 우리 모두를 구름 위에 서있게 하든가 살다보면 때로 이렇게 시간마저 발목잡히는 일이 많다.

21. 허형만 시/ 14. 동전 한 닢

동전 한 닢/허형만학교에서 돌아오는 길길바닥에 버려진 동전 한 닢조심스럽게 주워 들었습니다.흙 속에 묻혀 삭아들지 않고발바닥에 밟혀누그러들지 않고차바퀴에 깔려 오그라들지 않고길바닥에 버려진동전 한 닢정성껏 닦고 닦아 빛을 냈습니다.따스한 손 바닥에 꼭 쥐고밟히고 깔려 멍이 들었을아픔을 감싸 주었습니다.

21. 허형만 시/ 13. 운석隕石을 어루만지며/

운석隕石을 어루만지며/허형만함께 있다는 것, 길림성吉林省운석박물관에서 8백 만 년 전에 길을잃은 별 하나 어루만지며, 함께 있다는 것이 이토록 짜릿한 걸 잊고살았다. 사랑하는 당신, 지금 나의 손바닥에 신호를 보내고 있는 이우주의 박동소리처럼 나도 당신의 심장 속에 별로 박히고 싶다.

21. 허형만 시/ 12. 이름을 지운다

이름을 지운다 / 허형만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멀면 먼대로가까우면 가까운대로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안경을 끼고도 침침해 지는데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나의 이름을 지우겠지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함께 지우겠지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21. 허형만 시/ 11. 녹을 닦으며

녹을 닦으며-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내 지나온 생애에는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회환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그리 살아온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철없이 울먹었던 뽀요얀 사랑까지바로 내 영혼 깊숙이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손가락이 부르트도록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21. 허형만 시/ 10.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 / 허형만백운면 애련리에세수 삼백 오십 세가 되셨다는느티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계셨다수많은 사리들을 거느리시며내가 보기엔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시지만원래 사람이 매긴 나이란 게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라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넓으신 그늘에 쉬다가어찌나 한기가 드는지 벌떡 일어나두 손 모으고 우듬지가 보일 때까지 우러렀다한사코 햇살 탓만은 아닐 터휘추리와 애채 사이를 포롱포롱 건너다니는멧새의 깜직한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였다그때였다 수많은 사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댔고고요한 파동은 서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백운면 애련리에세수 삼백 오십 세와는 무관한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신 분 한 분 계셨다세상의 발자국도 가는체로 걸러내시며계신 듯 아니 계신 듯

21. 허형만 시/ 9. 금호동 물지게

금호동 물지게/허형만 금호동 山 10번지, 빈민촌 물지게는제 손으로 뽑아 준 의원님댁 문고리보다일금 2원整의 흐늑임에 한결 더 무겁다.처마 끝에 오직 하나 굴비 한 줄이듯한 줄로 칭칭 엮인 모진 목숨들,차라리 하늘 우러러 눈물 막는 지아비가제 업보, 제 어깨에 짊어진 물지게.그 어느 벼랑 끝을, 피안의 벼랑 끝을못다 한 죽음이라도 짊어지고 걸어간들물지게야, 물지게야, 이만큼은 더 할까,이마엔 보송보송 굴욕의 비늘이 가시로 돋고,낮은 포복으로 대롱대롱 매달린 물통 속에서서러운 한국의 햇살,이마가 깨지고 피를 쏟으며아프게 열 두 번씩 자맥질 하나니금호동 山 10번지, 오르는 길은일수 딸라돈 이자보다 턱숨이 차고오늘에사 서녘노을 인왕산도 고개 돌려 돌앉는다.―「금호동 물지게」 전문

21. 허형만 시/ 7. 밝은 지혜의 햇살은

밝은 지혜의 햇살은/허형만 맨 처음 햇살은태초의 하이얀 입김음악보다 질 고운 바람으로가늘게 떨고 있었네.햇살은, 밝은 지혜의햇살은그 싱싱한 바람을 숨쉬며무성한 이파리마다사랑의 숲을 이루었네.이별이 잦은 곳에 사는 우리미움이 잦은 곳에 사는 우리아픔이 잦은 곳에 사는 우리그러한 거 모두 저만치 밀어두고이제금 햇살은,밝은 지혜의 햇살은근심스러운 조국을가슴에 꼬옥 품어 어루만지며당신과 나,우리 모두의 사랑하는 자뼛속 깊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네.―「밝은 지혜의 햇살은」 전문

21. 허형만 시/ 6. 전라도 안개

전라도 안개/허형만 전라도 아침 안개는앙징스럽게 꿈틀거리고 있다.크나큰 한 마리 짐승황톳빛 비늘 번득이는 짐승이 되어탈 쓰고 환장하다가韓半島의 목아질 물어 뜯다가끝내는 아드득 이빨을 간다.빛과 어둠, 그리고유황보다 뜨겁게 입술이 타는서럽도록 고요한 아침을굴욕으로 끙끙 앓는전라도 안개.크나큰 한 마리 새황톳빛 나래 파닥이는 새되어구성진 육자배길 읊어대다가韓半島의 발목을 물어 뜯다가끝내는 칼날보다 예리한 부리를 깎는다.차라리, 불꽃으로라도 타버리고자운목마른 流配地에서서툰 목청으로 사투리를 배우고때로는, 진도 아리랑비린 바닷내음에 피를 토하는전라도 안개.전라도 아침 안개는앙징스럽게 꿈틀거리고 있다.―「전라도 안개」 전문

21. 허형만 시/ 5.

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허형만  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나에겐 방문 여는 버릇이 있다.금방이라도 들어올 것만 같은햇살보다 더 밝은 너의 웃음을 맞이하고저.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나에겐 마당을 서성이는 버릇이 있다.금방이라도 대문을 두드릴 것만 같은기도보다 더 절실한 너의 정성을 맞이하고저.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나에겐 거리를 쏘다니는 버릇이 있다.금방이라도 날 부르며 달려올 것만 간은소나기보다 더 싱싱한 너의 사랑을 맞이하고저.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나에겐 사춘기보다 더 짙은 우울이 있다.달무리 지는 밤이면 끓어오르는 가슴을 안고늑대처럼 서럽게 울부짖고자운 아픔이 있다.―「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 전문

21. 허형만 시/ 4. 가을 연가

가을 연가/ 허형만 사랑할 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나와 함께조용히 창 앞에 서자.이파리 화사한 웃음소리처럼푸르른 하늘이 나린다.넘쳐 흐르는 음정으로한 계절이 나린다.슬픈 또 하루가 흐르면눈 감고 기도하는갸륵한 마음씨를 간직했기에이렇게 눈물을 잊을 수 있잖느냐.가을을 닮아온 내가내가 닮아온 계절 앞에서소리없는 노래,忍苦의 詩,詩 같은 한 빛깔 믿음을정성껏 繡놀 때나와 함께숨찬 생명의 음악을환희에 넘치는그 순간에 들을 것이다.젊음이 성숙했을 때,사랑할 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나와 함께창 앞에 서노라면나리는 푸른 하늘,나리는 가을의 인사는 반갑고쇠진한 고독을 달래기에 기쁘단다.―「가을 戀歌」 전문

21. 허형만 시/ 3. 밤비

밤비/ 허형만비 나리는 밤이면어머니는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방문 여는 버릇이 있다.방문을 열면눈먼 외할머니 소식이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육순의 어머니.공양미 삼백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꿈자리가 뒤숭숭하시다?외가댁에 다녀오신 오늘,묘하게도 밤비 내리고방문을 여신 어머니는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젖어차라리 돌아가시제.돌아가시제.

21. 허형만 시/2. 5월이 와도 피어나지 못하는 한라산 철쭉

5월이 와도 피어나지 못하는 한라산 철쭉/ 허형만 이 나라에 태어나난생 처음 한라산 상상봉을 오르면서오월 산천 흐드러진 철쭉여기서만은 꽃망울도 터지지 않았다.으레 봄날이 오면 피려니 했던철쭉 한 송이도 피어내지 못하는한라산 상상봉을 오르면서우리는 얼마나크낙한 희망으로 서있는지우리는 얼마나심원한 핏줄기로 뿌리박고 있는지안개 속 가녀린 햇살에도괴로워했다.그렇구나, 한라산 상상봉까지떠밀리고 떠밀리어오월이 와도 피어나지 못하는이 나라의 서러운 철쭉을 두고누가 아름답다 하느냐봄이라 하느냐.―「철쭉」

21. 허형만 시/ 1. 허형만 시 모음

허형만 시인 약력 1945년 전남 순천시 조례동 출생순천고등학교 졸업(고 14회)1973년 으로 등단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성신여대 대학원 문학박사국립 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교육대학원장,인문과학연구원장 역임현 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무등포럼 공동대표목포 현대시 연구소장.우리문학기림회장.계간편집고문영국 IBC인명 사전에으로 등재 (2002년)영국 IBC인명 사전에 로 선정 (2005년)시집 등 11권저서평론집 , 연구서수필집 등 다수수상제34회 전라남도 문학상(문학),제1회 월간문학동리상제2회 순천문학상,광주예술문화 대상등 10회 수상  허형만 작품론세계를 치유하는 ‘사랑’의 언어강  경  호1시인 허형만은 194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1973년 『월간문학』에 「예맞이」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