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 시인 약력
1945년 전남 순천시 조례동 출생
순천고등학교 졸업(고 14회)
197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성신여대 대학원 문학박사
국립 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교육대학원장,인문과학연구원장 역임
현 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무등포럼 공동대표
목포 현대시 연구소장.우리문학기림회장.계간<시와 사람>편집고문
영국 IBC인명 사전에<세계의 시인>으로 등재 (2002년)
영국 IBC인명 사전에 <세계 100대 교육가>로 선정 (2005년)
시집
<첫차> <영혼의 눈> <비 잠시 그친 뒤>등 11권
저서
평론집 <시와 역사인식>, 연구서<영랑 김윤식 연구>
수필집 <오메 달이 뜨는구나>등 다수
수상
제34회 전라남도 문학상(문학),제1회 월간문학동리상
제2회 순천문학상,광주예술문화 대상등 10회 수상
허형만 작품론
세계를 치유하는 ‘사랑’의 언어
강 경 호
1
시인 허형만은 194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1973년 『월간문학』에 「예맞이」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 등단한 지 30여 년 동안 첫시집 『청명』을 비롯하여 『풀잎이 하나님에게』 『모기장을 걷는다』 『입맞추기』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 『공초(供招)』 『진달래 산천』 『풀무치는 없다』 『비 잠시 그친 뒤』 『영혼의 눈』에 이르기까지 10권의 시집을 펴 내었으니 3년에 1권씩 시집을 출간한 부지런한 시인이다. 또한 그는 일찍이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으로 성장하여 시인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는 명실공히 빛나는 시인이다.
그의 시의 싹수는 일찍이 순천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키우기 시작하였는데, 그때의 스승이 문병란 시인이었다. 문예부장을 맡으면서 <씨크라멘>이라는 문학동인회를 결성하여 프린트판 동인지 발간과 시화전 등으로 대학입시보다는 오히려 시의 길을 찾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후 중앙대학교 국어국문과에 진학하여 그 학교에 출강하는 조병화 시인의 강의와 문병란 시인의 스승인 숭실대의 다형 김현승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시의 밭을 일구어 마침내 ‘시인’이란 덫에 스스로 걸리게 된다.
그동안 열 권의 시집을 통해 그가 보여준 시세계는 크게 두 갈래로 볼 수 있는데, ‘현실인식과 초월적 세계에의 지향’으로 압축시킬 수 있다. 그중 현실인식에 천착한 작품에서는 어쩌면 그의 스승인 문병란 시인을 비롯한 광주·전남지역 시인들의 시세계가 주로 그러했던 것처럼 늘 소외되고 주변으로 밀렸던 호남지역의 정서와 시대상황이 그를 밀실에서 귀를 틀어막고 시를 쓰게 하기보다는 질곡의 현실을 인식하는 이른바 거대담론을 노래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특히 『비 잠시 그친 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말수를 줄이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는 초월적 세계에의 지향과 성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허형만 시인이 시를 일궈오면서 늘 시의 배면에 관심을 둔 것은 ‘사랑’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의 인간됨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가 기억하는 사람들의 애경사라면 밤낮과 물불을 가리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온 그의 따스한 사랑이 그 추진 동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그의 30년 시적 결실을 ‘현실인식과 초월적 세계에의 지향’이라는 주제로 시세계를 묶는 일은 비평적 오류가 내포될 수도 있겠지만, 그 기저에 그의 세계에 대한 한없는 관심으로 ‘사랑’이 내재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시인으로서 간판을 내건 첫시집 『청명』은 30여년 동안 시의 밭을 일구는 데 여러 가지 자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시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을 때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시키는 것이 대부분 시인들의 시작과정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간에 펴낸 시집 제목으로도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하다.
세속적인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준 현실인식의 세계와 초월적인 세계에 천착한 허형만 시인의 시세계의 단초가 되는 첫시집 『청명』을 살펴봄으로써 불화로 가득찬 세계에 대한 그의 따스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보도록 하자.
2.
첫시집 『청명』에는 사물에 대한 묘사적 이미지를 감성적인 사색으로 그린 시가 주류를 이룬다. 또한 관념과 구체적인 일상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수법으로 그린 작품들도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첫시집은 허형만 시의 원형질 같은 것으로 장차 현실인식에 대한 거대담론과 초월적 세계를 구현하는 시의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첫시집 이후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까지의 허형만 시의 주류가 현실인식에 관심을 갖는 시세계이고, 최근에 펴낸 두 권의 시집인 『비 잠시 그친 뒤』 『영혼의 눈』의 주류가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준 결과에서 알 수 있다.
사랑할 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나와 함께
조용히 창 앞에 서자.
이파리 화사한 웃음소리처럼
푸르른 하늘이 나린다.
넘쳐 흐르는 음정으로
한 계절이 나린다.
슬픈 또 하루가 흐르면
눈 감고 기도하는
갸륵한 마음씨를 간직했기에
이렇게 눈물을 잊을 수 있잖느냐.
가을을 닮아온 내가
내가 닮아온 계절 앞에서
소리없는 노래,
忍苦의 詩,
詩 같은 한 빛깔 믿음을
정성껏 繡놀 때
나와 함께
숨찬 생명의 음악을
환희에 넘치는
그 순간에 들을 것이다.
젊음이 성숙했을 때,
사랑할 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나와 함께
창 앞에 서노라면
나리는 푸른 하늘,
나리는 가을의 인사는 반갑고
쇠진한 고독을 달래기에 기쁘단다.
―「가을 戀歌」 전문
위의 작품은 허형만 시인의 초기 작품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가을’이라는 관념을 ‘성숙’과 ‘결실’이라는 의미로 형상화시킨 이 작품은 젊은날 시인의 감성과 세계에 대한 지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가을을 닮아온 내가/ 내가 닮아온 계절 앞에서/ 소리없는 노래,/ 忍苦의 詩,/ 詩 같은 한 빛깔 믿음을/ 정성껏 繡놀 때/ 나와 함께/ 숨찬 생명의 음악을/ 환희에 넘치는/ 그 순간에 들을 것이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을’은 시인과 동일성을 이루는 시적 화자가 닮아온 존재로 나타난다. 그리고 봄, 여름을 힘들게 인내하며 이룬 결과가 “忍苦의 詩”인데, 그 “詩같은 한 빛깔 믿음”을 가졌을 때 “숨찬 생명의 음악을 들을 것”이라는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 시인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믿음을 지키고 간직할 때 가을처럼 풍성한 결실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믿음에는 ‘사랑’이 전제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위의 작품 「가을 戀歌」는 그의 첫시집 제1부 첫 작품으로 첫시집을 펴낼 때 허형만 시인이 왜 ‘서시’격인 첫 작품으로 「가을 戀歌」를 맨 서두에 배치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이후 그가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지향해 온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많은 것을 시사하는 작품이랄 수 있다. 「가을 戀歌」가 ‘사랑’이라는 시적 화두의 서곡이며 총론격이라면 무수히 많은 ‘사랑의 시’는 구체적인 본론이며 각론이라 할 수 있다.
하루의
祝福이 쏟아지는
窓 너머
樹木의 가지마다
이름모를 새,
새, 나(飛)는데
樹木
가지마다
촉촉이 젖은
알몸으로
몸 내음 피우는데
당신은 지금
가녀린
열개의 손가락으로
머언 먼
이오니아 바다,
무지갯 빛 찬연한
바람을 일며
타이프라이터를 치고 있다.
―「사랑을 위한 詩」 전반부
위의 작품은 허형만 시인의 시의 갈래인 신앙적 색채를 띤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주제로 한 그의 시는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닌다.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다양하게 읽히는 것이 그의 ‘사랑’의 시인 것이다. 예컨대 신앙적으로 읽을 수 있고, 이성간의 사랑으로 볼 수도 있다. 위의 작품에서 “당신”을 절대자인 ‘하느님’ 또는 어떤 신적 존재로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기독교에서 가장 크게 내세우는 ‘사랑’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는 빛과 어둠을 짓고, 우주와 만물을 짓고, 나무와 새를 지은 절대자를 사랑의 표상으로 보고 있다. 또한 절대자가 우주만물을 지은 것은 생명이 있는 것들에 대한 아가페적인 사랑 때문임을 유추하게 한다. 그리고 절대자의 끊임없는 사랑은 하늘이 푸르거나 붉게 물들 때는 물론 “어느 외딴 섬/ 未知의 작은 물새” 한 마리까지 풀어놓으며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다음의 작품도 보다 구체적인 대상을 한정시키지 않고 여러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
나에겐 방문 여는 버릇이 있다.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만 같은
햇살보다 더 밝은 너의 웃음을 맞이하고저.
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
나에겐 마당을 서성이는 버릇이 있다.
금방이라도 대문을 두드릴 것만 같은
기도보다 더 절실한 너의 정성을 맞이하고저.
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
나에겐 거리를 쏘다니는 버릇이 있다.
금방이라도 날 부르며 달려올 것만 간은
소나기보다 더 싱싱한 너의 사랑을 맞이하고저.
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
나에겐 사춘기보다 더 짙은 우울이 있다.
달무리 지는 밤이면 끓어오르는 가슴을 안고
늑대처럼 서럽게 울부짖고자운 아픔이 있다.
―「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 전문
성경의 ‘돌아온 탕자’를 연상시키는 위의 작품은 내용에서 꼭 그렇게 읽는 것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에서 지칭되는 “네가”는 시적 화자가 지극히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그 대상은 지금 “나”를 떠난 존재로 나에게 너는 부재중이다. 금방이라도 대문 두드리며 돌아올 것 같은 너는 ‘사랑’일 수 있고, 또는 내가 사랑을 주고 싶은 상대일 수 있다. 먼저 “네가” 즉 ‘사랑’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나는 “사춘기보다 더 짙은 우울이 있”고 “달무리 지는 밤이면 끓어오르는 가슴을 안고/ 늑대처럼 서럽게 울부짖고자운 아픔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읽으면 “네가 떠나간 그 순간부터/ 나에겐 방문 여는 버릇이 있고” “마당을 서성이는 버릇이 있”고 “거리를 쏘다니는 버릇이 있”고 “사춘기보다 더 짙은 우울이 있”는 것은 “네가” 사랑으로부터 떠나버려 사랑을 모르고 살아갈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래서 “네가” “금방이라도 대문을 두드”리며 돌아오면 “너의 사랑을 맞이하고”싶은 것이다.
이처럼 허형만 시인의 시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다.
3.
앞에서 살펴본 것은 ‘사랑’을 직접적으로 노래한 시편들이다. 그러나 사랑을 말하지 않고도 현실과 보다 밀착된 삶을 살면서 역사와 현실을 인식할 때는 사랑이 작품 속에 투사된다. 이런 현실인식을 위한 시인의 눈길은 역사와 현실에서 소외되고 짓밟힌 시인 자신의 고향과 소외계급에게 집중된다. 뿐만 아니라 분단된 조국의 상처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특히 현실인식에 대한 그의 시선은 뼈를 깎는 고통으로 오랫동안 역사와 민중들의 삶에 머물게 된다.
전라도 아침 안개는
앙징스럽게 꿈틀거리고 있다.
크나큰 한 마리 짐승
황톳빛 비늘 번득이는 짐승이 되어
탈 쓰고 환장하다가
韓半島의 목아질 물어 뜯다가
끝내는 아드득 이빨을 간다.
빛과 어둠, 그리고
유황보다 뜨겁게 입술이 타는
서럽도록 고요한 아침을
굴욕으로 끙끙 앓는
전라도 안개.
크나큰 한 마리 새
황톳빛 나래 파닥이는 새되어
구성진 육자배길 읊어대다가
韓半島의 발목을 물어 뜯다가
끝내는 칼날보다 예리한 부리를 깎는다.
차라리, 불꽃으로라도 타버리고자운
목마른 流配地에서
서툰 목청으로 사투리를 배우고
때로는, 진도 아리랑
비린 바닷내음에 피를 토하는
전라도 안개.
전라도 아침 안개는
앙징스럽게 꿈틀거리고 있다.
―「전라도 안개」 전문
주지하다시피 ‘전라도’는 근현대사는 물론 역사의 중심무대에 자리하지 못하고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때로 피를 흘리고 때로 수탈과 소외의 대상이었다. 먼저 그런 전라도의 역사성을 떠올린다. “빛과 어둠, 그리고/ 유황보다 뜨겁게 입술이 타는/ 서럽도록 고요한 아침을/ 굴욕으로 끙끙 앓는/ 전라도 안개”라고 전라도가 “굴욕으로 끙끙 앓는” 역사적 공간이었으며 존재였음을 인식한다. 이 굴욕의 역사는 과거진행 뿐만 아니라 현재진행형임도 고발한다.
그런데 그는 전라도를 ‘안개’라는 유기체로 형상화시켰는가? 안개는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해가 뜨면 금방 사라지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전라도가 사라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전라도가 오랫동안 안개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 안개가 걷히면 역사 앞에 당당하게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바라는 “전라도의 아침 안개는/ 앙징스럽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위의 작품에서는 ‘황톳빛’ ‘육자배기’ ‘유배지’ ‘사투리’ ‘진도 아리랑’ 등의 향토적 정서를 갖는 언어를 통해 전라도의 이미지를 빚어내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보다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관념에 머물러 있다.
이렇듯 1970년대 구체화되지 못하고 관념에 머문 그의 시는 1980년대 우리나라 리얼리즘 시의 득세와 맞물려 보다 구체성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① 맨 처음 햇살은
태초의 하이얀 입김
음악보다 질 고운 바람으로
가늘게 떨고 있었네.
햇살은, 밝은 지혜의
햇살은
그 싱싱한 바람을 숨쉬며
무성한 이파리마다
사랑의 숲을 이루었네.
이별이 잦은 곳에 사는 우리
미움이 잦은 곳에 사는 우리
아픔이 잦은 곳에 사는 우리
그러한 거 모두 저만치 밀어두고
이제금 햇살은,
밝은 지혜의 햇살은
근심스러운 조국을
가슴에 꼬옥 품어 어루만지며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사랑하는 자
뼛속 깊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네.
―「밝은 지혜의 햇살은」 전문
② 兵村에 날이 밝으면
옥수수가 한시름 더 익는다.
바람은 북녘바람
이마가 시리고
오리木 울타리마다
화약내음 물씬한데
R-406 비행장 위로
솔개 한 마리 회전하는
兵村에 날이 밝으면
동동주가 한시름 더 익는다.
―「兵村」 전문
위의 두 작품은 1970년대 혼란스러운 현실과 분단의 상처를 그린 작품들이다. 물론 그런 상황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여전히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①에서는 우리의 현실을 “이별이 잦은 곳” “미움이 잦은 곳” “아픔이 잦은 곳”으로 인식한다. 그렇지만 숲을 바라보면 바람이 가늘게 불고 햇살이 싱싱한 숲위로 내려쬐어 “사랑의 숲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렇듯이 “당신과 나”는 이별, 미움, 아픔이 잦은 “근심스러운 조국을/ 가슴에 꼬옥 품어 어루만지며”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자”가 “뼛속 깊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음을 노래한다. 이 작품에서 ‘햇살’의 의미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숲 속에 내리쬐는 햇살로 그야말로 ‘자연의 햇살’이며, 한편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자”가 내리쬐는 햇살은 자연의 햇살이 아닌 ‘지혜의 햇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인은 이 작품에서 숲 속에 내리쬐는 햇살이 숲을 무성하게 하듯이 “우리를 사랑하는 자”가 내리쬐는 햇살, 또는 우리 스스로 지혜를 내어 근심스러운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어떤 것인 햇살을 통해 이별과 미움과 아픔을 멀리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겠다.
②에서는 분단의 상처를 병영의 한 모습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바람은 북녘바람/ 이마가 시리고”에서 보듯 이념이 다른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오리木 울타리마다/ 화약내음 물씬한데”에서는 언제든지 남과 북이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어쨌든 병영은 “한시름 더 익는” 우리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R-406비행장 위로/ 솔개 한 마리 회전하는”에서의 “비행기”와 “솔개”는 동의어로 ‘공격’과 ‘감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시어로 이 또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모순된 역사의 현장을 적절하게 형상화시키고 있다.
금호동 山 10번지, 빈민촌 물지게는
제 손으로 뽑아 준 의원님댁 문고리보다
일금 2원整의 흐늑임에 한결 더 무겁다.
처마 끝에 오직 하나 굴비 한 줄이듯
한 줄로 칭칭 엮인 모진 목숨들,
차라리 하늘 우러러 눈물 막는 지아비가
제 업보, 제 어깨에 짊어진 물지게.
그 어느 벼랑 끝을, 피안의 벼랑 끝을
못다 한 죽음이라도 짊어지고 걸어간들
물지게야, 물지게야, 이만큼은 더 할까,
이마엔 보송보송 굴욕의 비늘이 가시로 돋고,
낮은 포복으로 대롱대롱 매달린 물통 속에서
서러운 한국의 햇살,
이마가 깨지고 피를 쏟으며
아프게 열 두 번씩 자맥질 하나니
금호동 山 10번지, 오르는 길은
일수 딸라돈 이자보다 턱숨이 차고
오늘에사 서녘노을 인왕산도 고개 돌려 돌앉는다.
―「금호동 물지게」 전문
위의 작품을 통해 허형만 시인은 구체적인 현실의 한 풍경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그가 관심을 갖는 현실은 갖지 못한 자의 고통스러운 물지게를 진 어깨이다. 오늘날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은 권력이나 물질을 갖지 못한 자는 늘 변두리 삶을 살며 버거운 삶을 살고 있는 점이다. 하물며 군부독재 시절인 1970년대 금호동 山10번지에 사는 물지게꾼의 삶은 어깨가 휘어지는 무거운 것이었을 것이다.
위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시적 대상인 물지게꾼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갖지 못한 자들의 상징이다. “금호동 山10번지” 또는 빈민촌을 오르는 물지게꾼의 노임은 2원인데 “이마엔 보송보송 굴욕의 비늘이 가시로 돋”는 언덕길을 가족을 위해 “일수 딸라돈 이자보다 턱숨이 차”도 업보처럼 물지게를 지고 오르는 가장의 모습에서 시인은 연민과 굴욕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제 손으로 뽑아준 의원님”은 호의호식하며 잘 살고 있는 모순된 현실에서 시인은 “서러운 한국”의 일면을 보며 가슴아파하고 있다. 가슴 미어지는 고통으로 빈민의 가장을 바라보며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시인의 따스한 사랑임은 당연지사이다. 그것은 시인이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작품에 시인의 마음이 전이되지 않기 때문인데 위의 작품에서는 연민과 사랑이 뜨겁게 흐르는 허형만 시인의 마음이 녹록하게 넘치고 있다.
대략적으로 살펴본 허형만 시인의 첫시집 『청명』에서 이후 그가 토해내는 뜨거운 언어들의 숨결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일상과 자연과 삶의 모습을 그려낸 어떠한 그의 시편에서도 상처와 불화의 치료제로 ‘사랑’을 처방전에 담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첫시집 이후 때로 피고름 짜는 소리, 아이들 똥구멍 핥는 소리를 예고하고 있다.
눈이 멀었어도 영혼의 눈으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소리를 듣기도 하며, 밝음을 이기는 영혼의 눈을 갖기까지 그의 시는 첫시집에서부터 만병통치약인 ‘사랑’을 약제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시인, 『시와 사람』 발행인)
겨울산에서/허형만
바름바름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가냘픈 햇살 앞에
굼벵이처럼 날리는 눈발도
어찌하지 못한다.
절벽처럼 깎아지른 세상
세월에 비겨댄 듯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에 시린 손 문지르면
다사로운 체온이 햇살처럼 퍼져온다
사람論 / 허형만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땐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 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백담사 가는 길
찔레꽃머리
아득히 흐르는 구름
먼산에 우렷하게 걸리고
구룡동천 계곡 아삼삼한
강대소나무 한 그루 미륵불로 서서
어서 오너라 환한 웃으심 보이십니다.
여기서 백담사는 얼마나 남았지요
묻는 내 속마음 다 안다는 듯
애기똥풀 꿀을 빨던 모시나비
모시진솔 펄럭이며
저만치 앞서 날아갑니다.
굼 깊은 산 물소리도
넌출넌출 따라갑니다.
이곳에선 신라인
장보고를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장보고를 찾으려면
장보고를 묻지마라
장보고를 아는 사람은 없고
법화원을 아느냐 물어야
비로소 장보고를 만날 수 있느니
장보고가 세웠다는
赤山 법화원
나도 NO.0012534번째 손님으로
석가여래 옆 그림 속
신라인 장보고를 가까스로 만났느니.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 / 허형만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가 되셨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계셨다
수많은 사리들을 거느리시며
내가 보기엔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시지만
원래 사람이 매긴 나이란 게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넓으신 그늘에 쉬다가
어찌나 한기가 드는지 벌떡 일어나
두 손 모으고 우듬지가 보일 때까지 우러렀다
한사코 햇살 탓만은 아닐 터
휘추리와 애채 사이를 포롱포롱 건너다니는
멧새의 깜직한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였다
그때였다 수많은 사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댔고
고요한 파동은 서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와는 무관한
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신 분 한 분 계셨다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체로 걸러내시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녹을 닦으며-공초14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환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었던 뽀요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대로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 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
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 중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새벽 산책 중에 들었던 소리 중에서
가널가널한 풀벌레 소리만 입력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땅으로 되돌려 보내세요
먼 훗날 어느 새벽 별 하나 돋듯
고객님의 음성사서함이 켜지면
갈매빛 만만한 풀벌레 소리
비로소 가슴 적시는 사랑인 줄 알겠지요
운석隕石을 어루만지며/허형만
함께 있다는 것, 길림성吉林省운석박물관에서 8백 만 년 전에 길을
잃은 별 하나 어루만지며, 함께 있다는 것이 이토록 짜릿한 걸 잊고
살았다. 사랑하는 당신, 지금 나의 손바닥에 신호를 보내고 있는 이
우주의 박동소리처럼 나도 당신의 심장 속에 별로 박히고 싶다.
비가 나리는 밤이면
어머니는
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
방문여는 버릇이 있다
방문을 열면
눈먼 외할머니 소식이
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
육순의 어머니
공양미 삼백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
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다시며
외가댁에 다녀오신 오늘
묘하게도 밤비 내리고
방문을 여신 어머니는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젖어
"차라리 돌아가시제
돌아 가시제"
이름을 지운다 / 허형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대로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 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
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는냐 / 허형만
봄날
하늘하늘 날리는
꽃잎만 보아도 눈물이 난다
꽃잎에 반짝
머금은 햇살에도 눈물나더니
소주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보고 싶다 생각만으로
눈물부터 피잉 도니 어인 일이냐
보이는 것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느냐
몹쓸 눈물이 먼저 뽀르르 앞서느냐
동전 한 닢/허형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길바닥에 버려진 동전 한 닢
조심스럽게 주워 들었습니다.
흙 속에 묻혀 삭아들지 않고
발바닥에 밟혀
누그러들지 않고
차바퀴에 깔려 오그라들지 않고
길바닥에 버려진
동전 한 닢
정성껏 닦고 닦아 빛을 냈습니다.
따스한 손 바닥에 꼭 쥐고
밟히고 깔려 멍이 들었을
아픔을 감싸 주었습니다.
순천만 /허형만
새떼들 솟아오르고
갈대 눕는다
대대포구로 떨어지는 해
뻘 속을 파고드는데
묻지마라
쓸쓸한 저녁의 속내를
만월 일어서고
별 하나 진다
안 개 /허형만
밤새 머물지 못한 영혼들이 있었으리
그래 새벽은 안개를 낳고
떠다니는 영혼, 그 중에서도
상처받은 영혼들을 감싸주고 있으리
개미 한 마리 /허형만
개미
한 마리
또박또박 간다
(기어가는 건지
걸어가는 건지)
영하 수십도의
안데스 설원
한 마리
개미
또박또박 간다
(눈 속에 묻혔다가
다시 헤쳐나왔다가)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설원을
벗어난 개미
한 마리
또박또박 간다
(삶이 아름다운 건지
희망이 목숨인 건지)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아이맥스 영화 「사랑의 날개」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거 리 /허형만
그 사람이 나를 모른다 하니
나 또한 그를 모른다 한다
조금씩 여위어가는 시간의 육신만큼
조금씩 잠도 시들해져가는
이 나이의 마루 끝에 걸터 앉으면
이 빠진 간장종지만한 햇살도
나를 알아 발가락 간지럽히고
삶의 울타리에 내려앉은 쇠찌르레기
쀼-이, 큐, 큐, 쀼이 은근히 나를 돌아보게 하는데
그 사람만은 나를 모른다 하고 돌아서니
나 또한 그를 본 적이 없다 하고 돌아선다
게놈/개놈 /허형만
-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으로 기능하게 하는 정보는 세포핵에 있는 DNA에 G, A, T, C 등 네 종류의 염기배열의 형태로 수록돼 있다. 이를 사람의 '게놈(유전체)'이라 한다(김대식 교수)
30억개의 염기를 나는 본 적이 없는데
게놈이란 소리만 들으면 '개놈'이라고 들리니
개놈에게도 '게놈'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인간게놈 프로젝트여
이 시대의 유전자에 이상은 없는가
이 땅의 개같은 놈들 유전병을 치료할
인간개놈 프로젝트는 없는가
이 시대의 영혼은 아직
푸르른 남천을 오르지 못하고 있다
살다보면 /허형만
무문토기처럼 투박한 안개가 서서히, 느리게, 겹겹으로 에워싼다 통근버스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나아가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차창 가까이 바싹 조여오는 안개의 날렵한 혓바닥 앞에 차 안에 갇힌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살다보면 때로 이렇게 숨결마저 발목잡히는 일이 많다
우리도 차라리 안개가 되든가 안개 속에 녹든가 허공중에 물방울로 증발되든가 우주의 반짝이는 눈물로 굳어지든가 그리하여 마침내 알타이 우코크 고원 베르떽 계곡의 지워지지 않는 안개처럼 우리 모두를 구름 위에 서있게 하든가 살다보면 때로 이렇게 시간마저 발목잡히는 일이 많다.
풀꽃 한 송이 /허형만
-기도
그대 보고자운 풀꽃 한 송이
오늘도 바람결에 흔들리면서
사랑합니다 그대여 허락하소서
그대 확실한 언약 아닐지라도
오시리라 목이 긴 풀꽃 한 송이
진실한 사랑이란 왜 이리 외로운지
오늘따라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들판으로 밀려오는 은밀한 고요
그대 기다리는 풀꽃 한 송이
오늘도 구름결에 숨어 살면서
그립습니다 그대여 찾아드소서
풍 경 /허형만
여린 산벚꽃
사이사이
화개동천
그 깊고 서늘한
시간의 물소리
훤해진 자리 /허형만
출근길 光木 1호선 국도변에 어느날 잡목림이 서서히 잘리워지고 있었다 떡갈나무 아카시아나무 볼품없는 조선소나무까지 언덕배기로 올라갈수록 밑둥만 남고, 며칠이 지났다 밑둥도 뿌리 뽑히고 그렇게 벌목지역이 넓어지면서, 지금까지 도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언덕배기가 갑자기 훤해졌다 그 훤해진 자리로 수많은 초옥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 다시 며칠이 지난 뒤 늦은 귀가길이었다 달도 별도 구름에 가리워 천지분간 어려운 밤 그 언덕배기 집집마다 이승의 어떤 빛보다 더 밝은 등불 하나씩 내걸고, 길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 길 밝히고 있었다 대낮에도 그 자리가 훤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하동포구에서 /허형만
섬진강 긴 숨소리가
얼마나 깊은지
하동포구에 서보면 안다
가랑비 촉촉히
산 그림자도 푹 삭아버린 날
뱃사공은 보이지 않고
헤오리떼
섬진강 숨결 한 자락씩 끌며
마치 꿈길인 양 날아오른다
비에 젖은 알몸 훤히 드러낸 채로.
寂滅을 위하여 /허형만
나는 지금 어딘가로 떠난다
나는 지금 어딘가로 떠나서
그 어딘가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서
마침내 나마저도 떠나고자 한다
꽃집에서 한 단의 후레지아를 샀다 허망보다 깊은 색, 짙노란 꽃잎들이 천천히 다가와 나의 얼굴을 부벼댔다 한꺼번에 내뿜는 뜨거운 콧김, 그 아찔함! 최후의 사랑처럼 한 단의 후레지아는 이미 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어딘가에서 돌아오고자 한다
나는 지금 어딘가에서 돌아와
그 어딘가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돌아와
마침내 나마저도 잊고자 한다
속 도 /허형만
매일 아침 일곱시 반이면 어김없이 출근길에 오르는 光木국도변에는 속도를 측정하는 이동카메라가 숨겨져 있다 햇살 좋은 봄날 금천에서는 벌 나비와 교접하는 배꽃들의 거친 숨소리가 찍히고 남평 오거리에서부터 나주 방면으로 뻥 뚫린 길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맨발로 떼지어 달리는 소나기의 뒷발꿈치도 찍히고 어린 코스모스들이 셋! 넷! 복창하며 갓길로 줄지어 등교하는 학다리쯤에선 달작지근한 안개의 혓바닥도 찍히고
매일 저녁 여섯시면 어김없이 귀가길에 오르는 光木국도변에는 속도를 측정하는 이동카메라가 숨겨져 있다 무안군청 앞을 벗어날 때 가로수 백양나무잎이 톡, 부러지는 순간의 아찔한 전율이 찍히고 고막원역 앞 신호등을 무시하고 날아오르는 회오리바람의 당당한 오만도 찍히고 광주로 들어서는 언덕배기 구석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덜 녹은 눈더미의 오디빛 입술도 찍히고
소 리 /허형만
허옇게 뼈만 남은
서어나무
골수에 구멍이 뚫려있다
그 구멍에서
까막딱따구리가 쪼다 남은
소리가 들렸다
딱다그르르
아득한 생애를 그리워라도 하듯
서어나무 으스스 몸 떠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이 산 어느 계곡 쯤으로
우레가 흐르는가
딱다글 딱다글
그 작은 구멍들마다
연두빛 잎 틔우는 소리로
가득 술렁였다
서어나무
잠시 생생한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 사라졌다
아니본 듯 떠나라 했다.
5월이 와도 피어나지 못하는 한라산 철쭉
허형만
이 나라에 태어나
난생 처음 한라산 상상봉을 오르면서
오월 산천 흐드러진 철쭉
여기서만은 꽃망울도 터지지 않았다.
으레 봄날이 오면 피려니 했던
철쭉 한 송이도 피어내지 못하는
한라산 상상봉을 오르면서
우리는 얼마나
크낙한 희망으로 서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심원한 핏줄기로 뿌리박고 있는지
안개 속 가녀린 햇살에도
괴로워했다.
그렇구나, 한라산 상상봉까지
떠밀리고 떠밀리어
오월이 와도 피어나지 못하는
이 나라의 서러운 철쭉을 두고
누가 아름답다 하느냐
봄이라 하느냐.
―「철쭉」
밤비/ 허형만
비 나리는 밤이면
어머니는
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
방문 여는 버릇이 있다.
방문을 열면
눈먼 외할머니 소식이
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
육순의 어머니.
공양미 삼백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
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시다?
외가댁에 다녀오신 오늘,
묘하게도 밤비 내리고
방문을 여신 어머니는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젖어
차라리 돌아가시제.
돌아가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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