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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월정 강대실 첩첩한 산중 산막 오랜 친구 하나 찾아 왔네 먼길 가다 하룻밤 묵고 싶은 길손처럼 소리 소문 없이 들이닥쳤네 기억의 단편은 강 밑바닥 무늬 돌 같이 희미하였네 勤한 별들 기웃대는 하늘 보며 권커니 잡거니 쌓인 회포 풀었네 “잔은 꼭 나가서 들지만 몸은 천하없어도 들어가 눕힌다”고 지새워 소쩍새 노래에 젖으라며 훌쩍 길 나서는 친구, 멀어져가는 등 뒤를 사자봉* 마루 덩두렷이 기다리든 열엿새 달이 졸래졸래 따라나섰네. *사자봉: 필자의 고향 거처 뒷산.

1. 오늘의 시 2014.09.10

못 잊을 사랑

못 잊을 사랑 / 월정 강대실 눈길 걷다가 작달비 생각난다고 어깨 들썩이던 사람아 강 속 덩그런 달 너무 곱다고 울먹이며 전활 주던 못 잊을 여자야 잊었느냐 그 약속, 어느 날 앞산 곰바위가 벌떡 일어나 세상 그리움 죄다 쓸어 간대도 우리들 사랑 변치 말자던 오늘도 고향 동구 밖 선돌로 서서 그리움 꽃밭 가꾸다 이우는 꽃잎 서럽고 떠나보낸 빈 가슴 바람처럼 차가운데 여자야, 못 잊을 내 사랑아! 이 봄 청매실밭 에두른 언덕배기 놀빛 젖은 찔레 향 그윽하여 이토록 네가 그리운 게냐?

1. 오늘의 시 2014.04.28

귀향歸鄕

귀향歸鄕/월정 강대실 하늘 노랗고 해 긴긴 춘삼월 앞산보다 더 높은 보릿고개 허리띠 졸라매기 진절머리 난다며 열여섯에 어린 동생 업고 이삿짐 보퉁이 짊어진 어머니 따라 말만 들은 서울행 기차 탄 쌀순씨. 한강물 풀리면 꽃소식 물어오고 향수가 모닥불 타면 바람 타고 와 돌나물 쑥국 향에 객수 씻던. 해 기울기 전에 객짓밥 청산하고 부르는 손짓 빤히 보일 만한 데다 조붓한 처소라도 한 칸 내겠다더니 청댓잎 서걱이는 소리 잇는 담양호 상류 복리암 언덕배기에 제비 집같이 아담한 둥지 마련 사십오 년 망향의 설움 접고 홑몸 귀향 날, 산천이 앞서 반겼다. 산도 물도 설고 낯까지 서러웠건만 어느새 격이 없어 일촌이 다 사촌 두루두루 쌓은 도타운 정리 꽃 보고 텃밭 갈고 운동 챙기고…… 잃은 반생애 되찾아 산다.

1. 오늘의 시 2013.12.15

하늘길

하늘길 / 월정 강대실 마당귀 모과나무 할 일 없이 그냥 우두커니 먼 산 바라보는 줄 알았습니다. 때가 되면 늘 그랬듯 잎과 꽃 피우고 열매 매다는 줄로 알았습니다. 지명知命 고갯마루 턱 훌쩍 올라앉아 조용히 뒤 돌아보다 알았습니다. 삼시선三時禪으로 빛과 어둠 비와 바람 견디며 잎도 꽃도 열매도 맺고 동안거 하안거 마음공부 하여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하늘길 오르고 있었습니다.

1. 오늘의 시 2013.11.25

견고(堅固)한 고독 //김현승

견고(堅固)한 고독 -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神)들의 거대(巨大)한 정의(正義)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현대문학} 130호, 1965.10)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제목부터가 ..

김현승 //"눈물"

눈물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시인은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견디어 내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제망매가’에서 친족의 죽음이라는 비통한 체험을 종교적 깨달음으로 극복하고자 했듯이, 김현승 또한 슬픔과 고통의 극한에서 절대자를 향한 경건함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시정신이 이룩한 높은 경지의 하나를 본다. * 나의 웃음 : 삶의 환희 * 나의 눈물 : 삶의 고뇌와 시련을 통하여 도달된 절대 순..

김현승//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 -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문예}, 1953.6)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감정 이입의 기법으로 정서를 표출해 온 우리 시가의 전통을 계승했다. 플..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문학 예술」(1956.11) * 가을 : 내적 충실을 기할 수 있는 시간 * 겸허한 모국어 : 영혼의 소리(기도) * 오직 한 사람 : 신, 절대자 * 가장 아름다운 열매 : 가치 있는 이상, 신의 축복, 사랑의 결실 등. * 비옥한 시간 : 보람되고 알찬 가을의 시간 * 굽이치는 바다 : 고뇌와 수난의 인생길 * 백합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