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박재삼 시편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1. 16. 16:26
 

울음이 타는 가을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박재삼' 프로필


이름 : 박재삼

출생 : 1933년 4월 10일

직업 : 시인

학력 : 고려대학교

수상 : 1956년 제2회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 <박재삼시전집>, 민음사, 199

1933. 4. 10 일본 도쿄[東京]~1997. 6. 8 서울.

시인.

김소월에게서 발원해 김영랑·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은 시인이었다.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고,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의 시는 당시 서정주와 유치환이 서로 반해 추천을 다툴 만큼 출중했다. 시 작품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가락에서 두드러졌다. 우리말을 의미·개념에만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리듬의 중요성을 태생적으로 알아차린 시인이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은 시세계를 구축했으며,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때로 그의 시들은 '퇴영적인 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절창(絶唱) 〈울음이 타는 가을강〉 등에서 드러나듯 '생활과 직결된 눈물을 재료로 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박재삼은 모더니즘·민중주의 등과 같은 경향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대에도 어떤 계파에 몸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향 바다의 비린내가 묻어나는 서정과 비극적 사랑,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했다. 슬픔을 아는 시인이었으며 평생을 가난하고 고달프게 살았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된 이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았으며 위장병과 당뇨병 등 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시작(詩作)과 함께 약 25년간 요석자(樂石子)라는 필명으로 바둑 관전평을 집필해 생계를 해결했으며 바둑계에선 '박국수'(朴國手)로 불렸다.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추억에서 30


박재삼

국민학교를 나온 형이
화월(花月)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그 층층계 밑에
옹송그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
손님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싸서
나를 향해 남몰래 던져 주었다.
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누이동생이
부황에 떠서 그래도 웃으면서
반가이 맞이했다.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 많이 먹었다며
빤한 거짓말을 꾸미고
문득 뒷간에라도 가는 척
뜰에 나서면
바다 위에는 달이 떳는데
내 눈물과 함께
안개가 어려 있었다.

 

 

 

박재삼의 "한"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 내기는 알아 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박재삼의 "추억에서"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닷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어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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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의 "자연"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이 시는 '춘향전'에서 소재를 취하여 새로운 시적 해석을 가한 '춘향이 마음초2'에 해당한다. 이 시의 화자는 춘향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유의 시에는 서정주의 '추천사'가 있다. 추천사의 시는 지상적 사랑의 고뇌로부터 떠난 천상 세계를 그리는 여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춘향을 현대시로 재현한 시인의 수는 적지 않다. 서정주에 앞서 영랑이 있고 뒤로는 전봉건이 있다. 춘향이 그처럼 많은 시인들에 의해 시화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인간의 영원한 시적 주제라는 보편적인 이유 외에도 춘향의 영상이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는 특수성에 기인한다.

박재삼도 춘향의 독백을 빌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사랑의 욕구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임을 말하고 있다.

'내 마음 꽃나무'라는 말 속에는 인간과 자연이 동질적인 것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자연사를 통해 인간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은 인간의 힘으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마치 꽃나무가 피고 지는 것과 같다는 뜻이 이 시에 담겨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 '웃어진다'라는 말은 '지고'라는 동사와 대응하고 있으며, 제목이 '자연'인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감정이 꽃나무처럼 피고 지는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와 같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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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사랑에는

 

난(蘭)을 잘 치는 것은
붓끝에 많은 훈련을 쌓고 쌓아
그것에다 드디어
깜짝 놀랄 신운(神韻)을 곁들여야 하네.

사랑도 한번 보고 반한 다음
거기에 무수한 그리움을 퍼붓고
그런 다음
익어서 저절로 오는 것이라면

나는 아직도
허욕이 앞을 가려
그 완벽한 사랑에는
미진할 따름인가보다.

 

 

 

  봄이 오는 길

 

얼음 풀린 강을 끼고
앓고 난 누님을 모시고.....

이 두 가지를 겸하면
아리아리 저승도 가까운가.

아득한 강 건너 마을엔
복사꽃도 피어나는지

시방 잉잉거리는 벌떼소리
아지랑이 흐르고

산(山) 이마에는 눈 녹는 기척
보얗게 안개 서리고

나는 차마 손짓할 수 없다
봄이 오는 완연한 저 길을

 

 

어떤 여수(旅愁) / 박재삼

 

안동 도산서원 쪽을 가다가

와룡면 어느 과수원을 보았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가지에 휘어지게 열려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경치를 펼치고 있고,

아울러 미칠 것 같은 가을 날씨가

금방 떨어질 듯이

아까움이 꽉 찬 채로 매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과수원을 지키는 사람도 없고

울타리도 없고

길가던 사람은 자기의 길만 가고

이렇게 내 놓으면 도둑놈도 없는 것인가

 

제일 흔한 도둑 마음은 어디로 귀양가고

옛날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하마 들릴 그 착각 속을

꿰뚫을 작정인가

직행버스가 정면을 달렸다

 

 

  한 명창의 노래에서

 

소나무 잔가지에 어리는 바람

그 소슬한 운(韻)처럼 임이여

나도 그대에게 그렇게 닿아가고 싶다.

 

그러나 이는

여든 살 도(道)로도 안 되는 꿈

아, 그래서

살이 묻은 피가 묻은

내 재산(財産), 이 목소리

갈아오던 간장(肝臟) 밭

송두리째 찢어서 뽑아서

몸부림으로 바쳐 노래하노니.

 

 

  겨울 나무를 보며

 

스물 안팎 때는

먼 수풀이 온통 산발을 하고

어지럽게 흔들어

갈피를 못 잡는 그리움에 살았다.

숨가쁜 나무여 사랑이여

 

이제 마흔 가까운

손등이 앙상한 때는

나무들도 전부

겨울나무 그것이 되어

잎사귀들을 떨어내고 부끄럼 없이

시원하게 벗을 것을 벗어버렸다.

 

비로소 나는 탕에 들어앉아

그것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기쁘게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음을

부우연 노을 속 한 경치로서

조금씩 확인할 따름이다.

 

 

 

 

  병후에

 

봄이 오는도다.
풀어버린 머리로다.
달래나무처럼 헹구어지는
쌍긋한 뒷맛
이제 피는 좀 식어
제자리 제대로 돌 것이로다.

눈여겨 볼 것이로다, 촉트는 풀잎,
가려운 흙살이 터지면서
약간은 아픈 기(氣)도 있으면서
아, 그러면서 기쁘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이
형(兄)뻘로 보이는 넉넉함이로다.

땅에는 목숨뿌리를 박고
햇빛에 바람에
쉬다가 놀다가
하늘에는 솟으려는
가장 크면서 가장 작으면서
천지여!
어쩔 수 어쩔 수 없는
찬란한 몸짓이로다.

 

 

 

 

   강물에서

 

무거운 짐을 부리듯
강물에 마음을 풀다.
오늘, 안타까이
바란 것도 아닌데
가만히 아지랭이가 솟아
아뜩하여지는가.

물오른 풀잎처럼
새삼 느끼는 보람,
꿈 같은 그 세월을
아른아른 어찌 잊으랴,
하도한 햇살이 흘러
눈이 절로 감기는데……

그날을 돌아보는
마음은 너그럽다.
반짝이는 강물이사
주름살도 아닌 것은,
눈물이 아로새기는
내 눈부신 자욱이여!

 

 

 

    나룻배를 보면서

 

저 만장(萬丈) 같은 넓은 못물 위에
사람은 작은 배를 만들어
띄워보지만
결국은
물결의 반짝반짝
빛나는 영원한 무늬를
약간은 지웠다는 것만
아픈 자국이 되어 남는데.

사랑이여
나는 그대에게
가까이 가려고 한 욕심이
그대의 그지없는 조용한 가슴에
상처만 남겼느니.


박재삼 시집 <사랑이여> 실천문학사

 

 

 

 겨울 나무를 보며

 

스물 안팎 때는

먼 수풀이 온통 산발을 하고

어지럽게 흔들어

갈피를 못잡는 그리움에 살았다.

숨가뿐 나무여 사랑이여.

 

이제 마흔 가까운

손등이 앙상한 때는

나무들도 전부

겨울 나무 그것이 되어

잎사귀들을 떨어 내고 부끄럼 없이

시원하게 벗을 것을 벗어 버렸다.

 

비로서 나는 탕에 들어 앉아

그것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기쁘게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음을

부우연 노을 속 한 경치로써

조금씩 확인할 따름이다.

 

 

                                         섭리

                 그냥 인고하여 수목이 지킨 이 자리와

                 눈엽(嫩葉)이 봄을 깔던 하늘마리 알고  보면

                 무언지 밝은 둘레로 눈물겨워도 오는가.


                 신록 속에 감추인 은혜로운 빛깔도

                 한량없는 그 숨결 아직은 모르는데

                 철없는 마음 설레어 미소지어도 보는가 .


                 어디메 물레바퀴가 멎은 여운처럼

                 겁잡을 수 없는 슬기 차라리 잔으로 넘쳐

                 동경은 원시로웁기 길이 임만 부르니라.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