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인수
1945년 출생
1985. 1. 심상신인상에 「능수버들」 외 4편이 당선
1996. 제14회 대구문학상 수상.
2000. 김달진문학상 수상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 심상사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문학아카데미 <뿔> 민음사 <홰치는 산> 대구 만인사 <동강의 높은 새> 세계사
문인수-탑-빗소리 모아 듣다
문인수-나그네
문인수-정읍사의 돌
문인수-가오리연
문인수-간통
문인수-욕지도
문인수-폭우 그치다
문인수-미루나무
문인수-창포
문인수-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문인수-비의 뿌리
문인수-달
문인수-그믐 달
문인수-바다책, 다시 채석강
문인수-정선 가는 길
문인수-주산지
문인수-달 북
문인수-밤하늘
문인수-파냄새
문인수-저수지
문인수-쉬
문인수-뿔, 시퍼렇게 만져진다
문인수-밝은 구석
문인수-젖
문인수-우포늪, 칠십만평에 달한다
문인수-길을 수놓다
문인수-3월
문인수-4월
문인수-독백
문인수-무덤
문인수-밤 늪
문인수-바람, 못 간다
문인수-폭우 바깥으로 간다
문인수-서해
문인수-밝은 날 명암이 뚜렷하다
문인수-풀뽑기
문인수-도망자
문인수-드라이플라워
문인수-11월, 춤
문인수-섬의 새
문인수-고백
문인수-유등연지
문인수-채석강
* 탑 - 문인수
-빗소리 모아 듣다
아무도 안 오고 저, 빗소리 모아 듣다.
커다란 목련 나무에 이제 여나문 개째 꽃망울 툭, 터지는가
운문사 내원암 이 사발 속 같은 골짜기,
산빛 흐릿흐릿 잠긴다.
대숲 또한 묵직하게 시꺼멓게 잠긴다.
두루 다 잠가놓고
끙, 절 들어가 앉는 거 느껴진다.
저 목련,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핀다고?
아니다, 자꾸 흰 돌멩이 하나 올려놓듯 등 달 듯 그렇게
몇억 겁게 한 송이씩 꽃피는 것 같은 봄날,
나도 저 빗소리 모아 오래 탑 쌓고 있다.
* 나그네 - 문인수
저도 모른다.
나그네는 걷다가 왜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는지
모르고 길에서 쉰다.
모르고 올려다보는 저
定處
* 정읍사의 돌 - 문인수
목침만한
강원도 정선에서 주워온 돌은 구멍이 숭 숭 뚫리고 시꺼멓게 찌그러져 영락없는 산골 화전의 초가 한 채가 되었다.
송편만한
경상도 영천에서 주워온 돌은 한 남루한 아낙네가 보채는 아이를 들쳐업고 뉘엿거리는 햇발에 서산 고갯마루를 바라보고 서 있다.
이 돌들을 짝지어 놓아 보았다.
벌써 몇 해가 지났건만
그대 여전히 삽짝 밖에 나와 서 있다.
그대 뿜어 올리는 먼 달빛으로 보이나니
이 수렁을 지나 돌아 가겠다.
* 가오리연 - 문인수
겨울, 황량한 변두라리와 뿔뿔이, 가 닿을 곳 없는 시린 바람과 전깃줄과 펄럭이는, 오늘도 갈피없는 생각과 빛 바랜, 찢어진 종이와 저녁노을과 노을 속의 사내와 사내의 마흔, 마흔의-얼레, 얼레실 풀어 올리는, 언 손엔 논두렁볕, 그 볕 아래 옹기종기옹기종기옹기종기옹기종기옹기종기냉이, 냉이들 같이 울지 않는 언 손, 언 손의 아이들, 아이들 속의 그 아이, 그 아이의- 실업, 실업의 겨울, 황량한 변두리와 뿔뿔이, 가 닿을 곳 없는 시린 바람과 전깃줄과 펄럭이는, 오늘도 갈피 없는 생각과 빛 바랜, 찢어진 종이와
하늘 한 귀퉁이로 만든 것이 가오리연이다.
저문 가슴 언덕 위를 푸득 푸드득거린다.
* 간통 -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녀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해설/추억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문인수의 『간통』에 대하여(김선굉,시인)문인수는 『시와 반시』(1996. 여름호)를 통해 「간통」,「단감나무 이야기」,「담쟁이넝쿨 이야기」등 세 편의 시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비교적 먼 추억의 공간 속에서 원색의 설화를 건져 올린다. 하나의 서사를 서정의 문맥 위로 건져 올리는 그의 솜씨는 날렵하다. 그것은 금방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젖은 비늘을 번쩍이며 퍼덕거린다. 나는 「단감나무 이야기」를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지만, 손 안에서 미끈거리며 뭉클, 만져지는 리비도의 비릿한 냄새에 이끌려 「간통」의 문맥을 따라간다.
짧게 끊어 가는 특유의 단문으로 그는 추억의 심연 속으로, 그 심연의 핵심(서사의 소재)을 향해 직핍해 간다. '꼬리가' 긴 '소문'은 넘실거리는 수면이며, '갈수록 부실해'지는 '이녁의 허리'는 간통의 혐의요, 단서다. '이녁의' '검정 고무신'과 '선무당네의' '옥색 고무신', 그리고 거기에 담긴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간통이라는 이름의 한 마리 물고기가 너무 길게 늘어뜨린 '소문의 꼬리'며, 너무 짙게 풍긴 암내자 너무 길게 땋아내린 '머리끄댕이'다. '나'는 '뚜는 가슴 쓸어 내리며' 수면/ '마당'으로 들어서서는 그놈의 '머리끄댕이'를 단숨에, 냅다 나꿔채는 것이다. 나꿔채서는 물 바깥/ 동네방네로 던져 올린다. '흰 달빛' 아래 알몸으로 나둥그러져 퍼득이는 간통이라는 이름의 물고기, 힘차게 퍼덕이는 그 비릿한 리비도의 실체가 단문으로 정교하게 끊어 간 그의 문체/그물코에 걸린 것이다. 걸려서는 퍼득일수록 더욱 옥죄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는 '한 줌 달빛'으로 무화되어 가는 것이 .
문인수는 가슴에 시퍼런 서정의 강을 지닌 시인이다. 저만치서 합쳐져 소(沼)를 만들기도 하고, 이리저리 갈라져 여울을 이루기도 하는 그 강의 수심은 비교적 깊다. 거기 추억이라는 이름의 온갖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불길에 휩싸'인 '단감나무'나 '내 서방을 다마'신 '선무당네'는 그 중에서 건져 올린 한 마리 물고리인 것이다. 그 강의 수면/(현재)으로부터 40여 미터의 수심/(40여 년 전의 추억)속으로 정확히 잠수해서 '간통'이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고스란히 건져 올리는 그의 서정적 직관이 볼 만하다.
그의 이러한 작업이 미당의 『질마재 神話』와 다른 점은 추억의 깊이다. 미당은 설화적 공간 속으로 내려갔지만 문인수는 유년의 추억 속에서 다시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 말하자면 양자는 서로 시간의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미당이 설화의 원형을 재구성하여 우리 앞에 내놓았다면, 문인수는 아직 숨줄이 한참이나 붙어 퍼득이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 건져 올려 우리의 발 아래 내동댕이치고 있다. 그것에 「간통」과 같은 것일 경우 그 현란한 리비도적 정서의 원색이 주는 탄력으로 인해 그 살아 있음의 감각이 더욱 강하게 전해지는 것이다.『대구민족문학회보』(1997. 가을)
* 욕지도 - 문인수
섬의 길들은 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유동마을 덕동마을 도동마을 대송마을 돌아오는데
내 마음도 꼬아 샛길 치며 꼬리 감추는 길
녹음 속 바람 아래 낮은 지붕들을 묶거나
등이 휜 만(灣)에 내려가 작은 고깃배들을 푼다.
혹은 후박나무꽃 향기의 숱한 파도 소리로 풀려서
그 노래가 밀어 올린 저 절벽 꼭대기
야생으로 나간 염소들이 몰래 몰려 있다.
섬의 길은 섬 안으로 되돌아간다.
* 폭우 그치다 - 문인수
자욱하게 내려꽂힌 저 흰 빗줄기는 하늘뿌리였을까.
폭우 아래, 천둥 번개 아래 흠뻑 뒹군
매맞은 공포는 어딜 갔나
암흑은 녹아 거름이 되었나
비 갠 뒤
새파랗게 새로 돋는 듯한 풀들은 다만 새파랗다.
젖은 풀밭에선 온몸 하늘냄새가 난다.
* 창포 - 문인수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들은 척 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롱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소래네/닥실네/봉산댁/새촌네/분네/개야미
느미/꼭지/뒷모댁/부리티네/내동댁/흠실네/모금골댁/
소득골네/갈 잿댁 우거진 한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 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 채와 북사이, 동백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 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 미루나무 - 문인수
저 동떨어지게 키가 커 싱겁다.
산너머 오십 리 밖 기적소리도 風向도 일단
이 나무에 먼저 감겼다 풀렸다 사윈다.
비쩍 마른 자식, 허우대 껑충한 홀아비 같다.
장마철 여러 날 거꾸로 세워놓은 마당 빗자루 같다
유행가의 느린 몸 동작 같다. 휘파람 같다.
슬 슬 동구 밖까지 걸어나가 하염없이
길쭉한 저 마음
창공엔 기러기 한 줄 그걸 또 슬쩍 건드려
우그리거나 다시 펴기도 하면서
끝 간 데까지 지켜본다.
서 있는 시간의 오랜, 먼 길 같다.
* 비의 뿌리 - 문인수
지상엔 아직 슬픔의 입자가 반짝이며 떠돈다.
비 그치고 개여서 햇볕 쨍쨍한 여름날 오후 지렁이 한 마리가 화단의 나무그늘 흙 속으로 느릿느릿 몸 밀어넣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얼마나 화급한 동작이냐.
웬 毒한 불인지
금세 소각돼 흔적 없어질 것처럼 쫓기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새빨간 끈 같은 것이 참 간발의 차이로 마침내
멀쩡한 대낮의 환한 바닥을 뚫고 길쭉하게 마저 들어갔다.
제, 젖은 암흑과 단단히 비끄러맨 자국인지
그런 구멍이 나 있다.
비의 뿌리가 지금 막 깊이 숨었다.
* 달 - 문인수
너도
보는구나
달은 꼭지점
그러면 우리
이등변 삼각형
서럽구나
너도
* 그믐달 - 문인수
- 건널목에서
저 누군가의 뼈.
어두워질수록 그대
아픔
그대만이 잘 보이는
중천의 그믐달.
* 바다책, 다시 채석강 -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인데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 정선 가는 길 - 문인수
흐린 봄날 정선 간다.
처음 길이어서 길이 어둡다.
노룻재 넛재 싸릿재 넘으며
굽이굽이 막힐 듯 막힐 것 같은
길
끝에
길이 나와서 또 길을 땡긴다.
내 마음 속으로 가는가
뒤돌아보면 검게 닫히는 산, 첩, 첩
비가 올라나 눈이 오겠다.
* 주산지 - 문인수
허리까지 물에 들어간 왕버들 여러 그루가 다 늙도록, 썩어 자빠지도록 나오지 않고 있다.
눈보라, 비바람의 세월을 뚜벅뚜벅 걸어 여기 당도한 보폭이겠다.
저 악산 늠름한 전모가 물에 비쳐 온전하지만 가파르다, 사납다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까지도 물오리 한 마리를 풀어 금세 다 지우시는
어머니 이승에 홀로 남아 지금 깊으시다.
잘 섞였으므로, 사랑이란 말조차 이 일대의 바닥없는 고요를 이루는데
금세 물에 녹아 풀릴 것처럼 한 사내가
카메라를 자동셔트로 맞춰 세운 뒤 애인 속으로 거침 없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
* 달 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 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툭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 밤하늘 - 문인수
지상에서 생긴 온갖 소리는 저마다 한없이 날아 올라가 먼 우주 어느 캄캄한 자리에 생생하게 고스란히 쌓여있고 또 지금도 계속 쌓여갑니다.
어머니 아흔 고개 아래 귀가 아주 어두워졌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몹시 아팠고 슬펐으며 수없이 절망하고 또 미친듯 자주 분개하였습니다.
저의 그런 저런 소리들은 남김없이 모두 당신에게 사무쳤겠지요.
어머니 어두운 귓 속, 밤하늘의 저 잘 닦인 별들은
기나 긴 세월동안 아직도 반짝반짝 안쓰럽습니다.
* 파냄새 - 문인수
노점 아주머니가 지금 부지런히 대파를 다듬고 있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있는 色이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 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 위에 쑥 쑥 뽑아놓는 대파,
파는 벗겨져 하얗게 가지런히 깔리고
건반 같다. 그 옛날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 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의 파껍질들은 아무렇게나 희끗희끗
언 길바닥에 나부끼고 들러붙고 밟히고 깨끗한,
毒한 파냄새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저 아주머니 속에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 같은 인생이 꽉 꽉 채워져
악물려 있을 것이다. 또한
아주머니의 오십대 중반을 시꺼먼 방한복에다 뚤뚤 뭉쳐 눌러 앉혀 놓았으니 낮은,
최종학력의 저 바닥은 사실 이 놈의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 저수지 - 문인수
소나기 퍼 붓는 날 그를 묻었다.
꽃 진 마음 수천수만.
연잎들이 시퍼렇게 너풀너풀 뒤덮여 물이 쌓이는
저수지의 둑길을 길게 걸어 나왔다.
남의 죽음을 빌려 쓰고 제 마음 적신다.
연잎 연잎에, 검은 우산에 몰리는 빗소리가 많다.
누군들 이 슬픔의 집대성 아니랴.
그리하여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뿔, 시퍼렇게 만져진다 - 문인수
책상 모서리에 허리가 떠받혀 오래 아프다.
아시다시피 모서리의 안쪽이 구석이고
구석의 바깥쪽이 모서리인데
이 단단한 명.암의 어떤 내용이
이 책상에서 불쑥 나온 원목의 어떤 일갈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날 일부러 한 대 쥐어박은 걸까
그러나 무슨, 악의에 찬 공격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벌목 현장의 열대 우림을 쩌억 갈라붙이며 우지끈
쓰러졌을 때, 그때 지축을 흔든 우레의 뿌리,
혹은 엄청난 수령의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저릿하다
그 여진이겠지만, 아직도 직진인 것 같다.
창공을 찌르며 내처 홀로 가는 외뿔, 그런 정신이
老巨樹의 망한 몸이 이 책상 어디에
책상으로 가부좌를 튼 오랜 시간 내내
그대로 옹이 박혀 있었구나 나는 종일 빈둥거렸으니
무슨 길을 잡아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고
부질없는 근심들이 밀어 올린 외로움은 쥐뿔도 아니어서
병인 것 같다. 오늘 다시
떠받힌 데를 들여다보니 멍이 다 들어 있다.
드높은 우듬지 끝이 시퍼렇게 만져진다
* 밝은 구석 - 문인수
민들레는 여하튼 노랗게 웃는다.
내가 사는 이 도시, 동네 골목길을 일삼아
ㅁ자로 한 바퀴 돌아봤는데, 잔뜩 그늘진 데서도
반짝! 긴 고민 끝에 반짝, 반짝 맺힌 듯이 여럿
민들레는 여하튼 또렷하게 웃는다.
주민들의 발걸음이 빈번하고 아이들이 설쳐대고
과일 파는 소형 트럭들 시끄럽게 돌아나가고 악, 악,
세간 부수는 소리도 어쩌다 와장창, 거리지만 아직
밟히지 않고, 용케 피어나 야무진 것들
민들레는 여하튼 책임지고 웃는다.
오십 년 전만 해도 야산 구릉이었던 이곳
만촌동, 그 별빛처럼 원주민처럼 이쁜 촌티처럼
민들레는 여하튼 본시대로 웃는다.
인도블록과 블록 사이, 인도블록과 담장 사이,
담장 금 간 데거나 길바닥 파진 데,
민들레는 여하튼 틈만 있으면 웃는다. 낡은 주택가,
너덜거리는 이 시꺼먼 표지의 국어대사전 속에
어두운 의미의 그 숱한 말들 속에
구석자리에, 끝끝내 붙박인 "기쁘다"는 말,
민들레는 여하튼 불멸인 듯 웃는다.
* 젖 - 문인수
오랜만에 고향엘 다녀왔다.
대구에 가면 이런 거 흔하고 흔합니다 헐하고 헐합니다 하고 말렸으나 어머니는, 나도 많이 늙었다 오래는 더 못 살겠다 하시면서, 무말랭이며 머귀나물 매운 풋고추 같은 걸 자꾸 챙겨 주셨다. 이만큼 전송 나오시다가 또 쫓아들어가 다른 거 한 보퉁이 들고 나오셨다.
무릎 앞에다가 이것들을 끌러놓고 깊이 냄새를 맡는다 어느덧, 여름밤 천지에 가득하고 그윽한 먼 별빛,
긴 바람의 젖을 물고 나는...
* 우포늪, 칠십만 평에 달한다 - 문인수
우포늪 칠십만 평에 달하는 물에 달빛이 풀린다. 달빛에 널어 말리는, 잘 마르지 않는 어둠은 전반적으로 많이 묽어졌으나 저 산, 저 산, 그리고 둑의 몇 그루 왕버들이며 발 아래 물갈대 숲엔 지금 시꺼멓게 몰린 고뇌가 오히려 더욱 깊다. 응혈처럼 그러헥 거뭇거뭇 팬 데가 숱하지만 아랑곳없이 물오리는 또 어디서 비명을 꽥 꽥 질어대는지 여기 저기 끊임없이 이는 둥근 물이랑은 그러나 허퍼 아무것도 묶지 않고 다만 저 무수한 중심의 水生, 水棲여. 그 흘레의 기미가 다투어 번져 나간다. 좀더 잘 보이는 세계는 그만큼 널리 젖어 있구나, 칠십만 평에 달한다.
* 길을 수놓다 - 문인수
가을 불붙는 길을 끌다 또 이놈의 애가 쓰리다.
청송 옥계 그 깊은 풍악(楓嶽)의 길이 시뻘겋게 꿈틀거리다 마침내 영덕 앞바다에 제 머리를 밀어넣는다.
파도가 허이옇게 끓어오른다.
단 쇠 식는 소리가 난다.
저 먼 배 천천히 수평선 너머 잠기는데
긴, 질긴 고삐인 상처는 끝내 그를 풀지 않으리
집에 돌아와 어둠 속에다 길을 수놓다.
* 3월 - 문인수
아직은 바람이 차다 하면서
누가 밤중에 깜깜한, 찬 부엌으로 내려갔다.
군불 한 소끔 더 때고 들어왔다.
잉걸 화롯불도 새로 들여온 것 같았다.
나도 선잠을 걷고 화롯불 앞에 쪼그려 앉고 싶었던 것처럼
방금 자리 뜬 저 아이들처럼
이글이글 올라온 이 한 무더기 동백꽃 쬐보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은 또 먼 땅 속에서 두런두런거리는 것 같다.
아직은 때때로 바람이 차다.
* 4월 - 문인수
절을 에워싼 산빛이 수상하다.
잡목 사이로 여기저기 펄럭 걸린 진달래.
단청 엎질린 것 같다.
등산로를 따라 한 무리
어린 여자들이 내려와서 마을 쪽으로 사라진다.
조용하라, 조용히 하라 마음이여
절을 에워싼 산빛이 비릿하다.
* 독백 - 문인수
평일의 인기척 없는 산길은 골똘하다. 저녁노을 어느덧 심중으로 몰린다. 저 엄청 큰 소리가 더디 독백이랴, 세상 모든 고개 숙인 자들이 한꺼번에, 붉게 한번 울부짖고 싶구나. 내 탓이오, 꽉 다문 입 속이 또 깜깜하게 홀로 저문다.
* 무덤 - 문인수
그믐달이로구나.
그 무엇으로 한 생이
한 생이 실로 야위어 가야 하나
그 먼 길이 벼루어낸 뼈 하나
뼈 하나 천천히 휘어
천천히 휘어 암흑 속으로 드누나
암흑 속으로 드누나
저 웃음!
오, 저런 무덤.
* 밤 늪 - 문인수
달빛이 늪의 물에 오래 가만히 있다.
달빛 풀리는 물이랑이, 바람 타는 갈대숲이 추는
춤, 춤 속으로 흘러들 뿐 하염없이 오래
가만히 있다. 딴 짓 하지 않는다.
으스름 아래 어디 저 집요한 소쩍새 있다.
개구리 물오리 풀벌레 소리 또한 오래
딴소리하지 않는다. 저 몇 그루 뚝버들의 시꺼먼,
산의 시꺼먼 대가리들 또한 왈칵,
재채기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 오래,
무슨 일이 참 많다. 이 소란한, 방대한 고요가 그것인데
누가 밤새도록 걸어놓은 양수기의 발동 소리가,
거기에 발이 툭, 걸린 내 마음까지도 다시 긴
둑길을 따리 천천히 흘러들어간다. 딴 짓,
딴소리하지 않는다. 오래 가만히 있다.
* 바람, 못 간다 - 문인수
제 몸 일으켜 떠나는 이별을 믿는지.
대숲에, 대숲에,
또 시퍼렇게 쓸어안으며 울부짖으며 무너지는
바람,
못 간다.
* 폭우 바깥으로 간다 - 문인수
친구를 묻었다. 바람 불고 억수 퍼 부었다. 우리 모두 젖었다. 친구는 이제 젖지 않을 것이다. 젖을 수 없을 것이다. 번개 우뢰 우르르 번쩍 울부짖는 친구 아내의 목구멍 속으로 뻗쳐 들어가는 것 보였다. 친구는 이제 그 어떤 분노도 일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 만류해 산 내려왔다. 세찬 비바람 자꾸 앞을 가렸다. 친구는 이제 앞 가로막히지 않을 것이다. 절망, 절망할 수 없을 것이다. 헤쳐 나갈 일 그 무엇 없을 것이다. 그녀는 또 뒤돌아보며 몸부림쳤다. 우리 모두 멀거니 뒤돌아 보았다. 친구는 이제 뒤처져 그렇게나마 오지 않을 것이다. 올 수 없을 것이다.
저 산 뿌옇게 뒤덮는 폭우, 폭우.
우리는 익히 이 폭우를 안다.
하관과 함께 그녀는
구덩이 속으로 미친 듯 뛰어들려고 했다.
한 길 구덩이 속에 생이 잠기랴.
이 폭우 다 묻히는 곳, 친구는 폭우 바깥으로 가고
우리 또한 폭우 바깥으로 간다.
* 서해 - 문인수
서해 땅끝은 완만하다. 바람아래해변 물머리의 첫 입술이
또한 아무런 낙차 없이 충격없이 그것을 받아 감아들이며
깊이 내려보낸다.
잘 삭은 고요인 海底, 그런 조짐이 그렇게 몸에 발리는
바람 아래
해지고 어둠 드는 것이다 딴전이나 부릴밖에......
* 밝은 날 명암이 뚜렷하다 - 문인수
현관문을 연 순간 찰칵,
사진 찍힌 것 같다. 오랜 장마가
갈라터진 것인데 환한,
깨끗한 소리가 났다.
온 몸이 들은 장면이다. 살아 움직였다는 자각이
전면 화들짝 놀란, 그런 반사광의 표정이
흰 뜰에도 역력하다.
2003년 7월 23일, 오전 열 한 시를 막 넘고 있다. 지금
이 햇살 아래 서 있다. 기념비적이다.
용서라는 말의 섬광이여
사랑한다고 말하려 하는 마음이 적는 저 느린 글씨.
지렁이 한 마리가 길게 스미고 있다. 어둠 속 깊이,
깊이 젖어야 뿌리가 되는 저 길......
헤아려 보니 상사화 열 두 송이,
그 새까만 그늘이 새것이다.
* 풀뽑기 - 문인수
아버지 따라가 묵정밭을 맨 적 있습니다. 쇠비름풀 여뀌 발랭이서껀 이런 저런 잡초들 수없이 뽑아 던졌습니다. 검붉은 맨살의 흙이 드러나면서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나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일평생 마침내 논 서른 마지기 이루고, 그러나 송충이같은 자식들, 그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어 버리고 빈 들 노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일흔 중반 넘어서면서 망녕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사 관심거리가 하나 둘 줄어들더니, 마을이나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식솔들의 잦은 불상사에 대해서도 영 남의 일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자식들, 심지어는 늘 곁에서 수발드는 어머니 보고도 당신 누구요, 우리 집사람 못 봤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버지,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 그 논에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섰습니다.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렸습니다. 품 안의 새끼들을 어르고 입안의 혀같은 당신의 아내와 자주 두런거렸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아버지, 검불같이 남아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 도망자 - 문인수
밤새 눈 내려 덮여있다.
저 일격이 날 때려 눕혔던 것일까
세상 모든 길이 날 풀고 돌아가 버렸다.
사라진 기억들이 삼엄하다.
낯선 곳에서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흰 복면의 어떤 죄여.
* 드라이플라워 - 문인수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는다.
말린 장미.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바스러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뾰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은 독한 상처이거나 먼 길 소실점,
그 끝이어서 문득, 문득 찔린다.
이것이 너 떠난 발자국 소리이다.
* 11월, 춤 - 문인수
11월, 이 빈 당간지주에 뭘 걸치고 싶다.
단풍 붉게 꿈틀거리며 바람 넘어가는 저 산능선
다리 벌리고 서서 오래 바라본다.
저걸 걷어 길게 걸쳐 입고 싶다.
파장에 홀로 남아 거나하게 한잔
아, 탈진한 生의 거대한 춤,
저녁노을에다 섞어 활 활 몸 넘고 싶다.
* 섬의 새 - 문인수
섬의새들이하루종일한꺼번에여러번날아오릅니다.
가장커다랗게멀리나는것이섬인듯싶습니다.
생각은저리무수하고간절합니다.
그러나발목너무
깊은
섬
* 고백 - 문인수
선운사 동백, 그 상처 붉게 붉게 절며 당도하는 곳
가마미 바닷가에 한 사내 서 있었네.
가마미 앞바다에 폭설이 있었네.
폭설이 있었네, 그렇듯 죄 말하고 나서
저 긴 수평선, 긴 수평선에 걸쳐 오래 자고 있네.
* 유등연지 - 문인수
9월 유등마을 연지엔 연잎들이 모두 나와 물을 덮고 있다. 누가 물가 풀섶에 빛바랜 운동화 한 켤레를 가지런히 벗어놓았다. 저런, 낡은 죽음의 이미지조차도 이쁜 꼬리지느러미를 달고 짧게 사라진다. 배고프다 문득, 연잎에 이는 한바탕 소나기 소리가, 그런 바람의 비늘이, 달빛 냄새가 궁금하다. 아, 꽃지고도 많이 남은 초록 날짜들이 남몰래 빨아먹는 슬픔이 있다.
* 채석강 - 문인수
채석강의 장서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
긴 해안을 이룬 바위 벼랑에
격랑과 고요의 자국이 차곡차곡 쌓였는지
種의 기원에서 소멸까지
하늘과 바다가 전폭 몸 섞는 일,
그 기쁨에 대해
지금도 계속 저술되고 있는 것인지
또 한 페이지 철썩, 거대한 수평선 넘어오는
책 찍어내는 소리가 여전히 광활하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작은 각다귀들
각다귀들의 분분한 홀레질에도
저 일망무제의 필치가 번듯한 배경으로 있다.
이 바닥 모를 깊이를 잴 수 있겠느냐
미친 듯 몸부림치며 헐뜯으며 울부짖는
사랑아, 옆으로 널어 오래 말리는
채석강엔 강이 없어서 이별 또한 없다.
1945년 출생
1985. 1. 심상신인상에 「능수버들」 외 4편이 당선
1996. 제14회 대구문학상 수상.
2000. 김달진문학상 수상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 심상사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문학아카데미 <뿔> 민음사 <홰치는 산> 대구 만인사 <동강의 높은 새> 세계사
문인수-탑-빗소리 모아 듣다
문인수-나그네
문인수-정읍사의 돌
문인수-가오리연
문인수-간통
문인수-욕지도
문인수-폭우 그치다
문인수-미루나무
문인수-창포
문인수-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문인수-비의 뿌리
문인수-달
문인수-그믐 달
문인수-바다책, 다시 채석강
문인수-정선 가는 길
문인수-주산지
문인수-달 북
문인수-밤하늘
문인수-파냄새
문인수-저수지
문인수-쉬
문인수-뿔, 시퍼렇게 만져진다
문인수-밝은 구석
문인수-젖
문인수-우포늪, 칠십만평에 달한다
문인수-길을 수놓다
문인수-3월
문인수-4월
문인수-독백
문인수-무덤
문인수-밤 늪
문인수-바람, 못 간다
문인수-폭우 바깥으로 간다
문인수-서해
문인수-밝은 날 명암이 뚜렷하다
문인수-풀뽑기
문인수-도망자
문인수-드라이플라워
문인수-11월, 춤
문인수-섬의 새
문인수-고백
문인수-유등연지
문인수-채석강
* 탑 - 문인수
-빗소리 모아 듣다
아무도 안 오고 저, 빗소리 모아 듣다.
커다란 목련 나무에 이제 여나문 개째 꽃망울 툭, 터지는가
운문사 내원암 이 사발 속 같은 골짜기,
산빛 흐릿흐릿 잠긴다.
대숲 또한 묵직하게 시꺼멓게 잠긴다.
두루 다 잠가놓고
끙, 절 들어가 앉는 거 느껴진다.
저 목련,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핀다고?
아니다, 자꾸 흰 돌멩이 하나 올려놓듯 등 달 듯 그렇게
몇억 겁게 한 송이씩 꽃피는 것 같은 봄날,
나도 저 빗소리 모아 오래 탑 쌓고 있다.
* 나그네 - 문인수
저도 모른다.
나그네는 걷다가 왜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는지
모르고 길에서 쉰다.
모르고 올려다보는 저
定處
* 정읍사의 돌 - 문인수
목침만한
강원도 정선에서 주워온 돌은 구멍이 숭 숭 뚫리고 시꺼멓게 찌그러져 영락없는 산골 화전의 초가 한 채가 되었다.
송편만한
경상도 영천에서 주워온 돌은 한 남루한 아낙네가 보채는 아이를 들쳐업고 뉘엿거리는 햇발에 서산 고갯마루를 바라보고 서 있다.
이 돌들을 짝지어 놓아 보았다.
벌써 몇 해가 지났건만
그대 여전히 삽짝 밖에 나와 서 있다.
그대 뿜어 올리는 먼 달빛으로 보이나니
이 수렁을 지나 돌아 가겠다.
* 가오리연 - 문인수
겨울, 황량한 변두라리와 뿔뿔이, 가 닿을 곳 없는 시린 바람과 전깃줄과 펄럭이는, 오늘도 갈피없는 생각과 빛 바랜, 찢어진 종이와 저녁노을과 노을 속의 사내와 사내의 마흔, 마흔의-얼레, 얼레실 풀어 올리는, 언 손엔 논두렁볕, 그 볕 아래 옹기종기옹기종기옹기종기옹기종기옹기종기냉이, 냉이들 같이 울지 않는 언 손, 언 손의 아이들, 아이들 속의 그 아이, 그 아이의- 실업, 실업의 겨울, 황량한 변두리와 뿔뿔이, 가 닿을 곳 없는 시린 바람과 전깃줄과 펄럭이는, 오늘도 갈피 없는 생각과 빛 바랜, 찢어진 종이와
하늘 한 귀퉁이로 만든 것이 가오리연이다.
저문 가슴 언덕 위를 푸득 푸드득거린다.
* 간통 -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녀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해설/추억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문인수의 『간통』에 대하여(김선굉,시인)문인수는 『시와 반시』(1996. 여름호)를 통해 「간통」,「단감나무 이야기」,「담쟁이넝쿨 이야기」등 세 편의 시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비교적 먼 추억의 공간 속에서 원색의 설화를 건져 올린다. 하나의 서사를 서정의 문맥 위로 건져 올리는 그의 솜씨는 날렵하다. 그것은 금방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젖은 비늘을 번쩍이며 퍼덕거린다. 나는 「단감나무 이야기」를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지만, 손 안에서 미끈거리며 뭉클, 만져지는 리비도의 비릿한 냄새에 이끌려 「간통」의 문맥을 따라간다.
짧게 끊어 가는 특유의 단문으로 그는 추억의 심연 속으로, 그 심연의 핵심(서사의 소재)을 향해 직핍해 간다. '꼬리가' 긴 '소문'은 넘실거리는 수면이며, '갈수록 부실해'지는 '이녁의 허리'는 간통의 혐의요, 단서다. '이녁의' '검정 고무신'과 '선무당네의' '옥색 고무신', 그리고 거기에 담긴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간통이라는 이름의 한 마리 물고기가 너무 길게 늘어뜨린 '소문의 꼬리'며, 너무 짙게 풍긴 암내자 너무 길게 땋아내린 '머리끄댕이'다. '나'는 '뚜는 가슴 쓸어 내리며' 수면/ '마당'으로 들어서서는 그놈의 '머리끄댕이'를 단숨에, 냅다 나꿔채는 것이다. 나꿔채서는 물 바깥/ 동네방네로 던져 올린다. '흰 달빛' 아래 알몸으로 나둥그러져 퍼득이는 간통이라는 이름의 물고기, 힘차게 퍼덕이는 그 비릿한 리비도의 실체가 단문으로 정교하게 끊어 간 그의 문체/그물코에 걸린 것이다. 걸려서는 퍼득일수록 더욱 옥죄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는 '한 줌 달빛'으로 무화되어 가는 것이 .
문인수는 가슴에 시퍼런 서정의 강을 지닌 시인이다. 저만치서 합쳐져 소(沼)를 만들기도 하고, 이리저리 갈라져 여울을 이루기도 하는 그 강의 수심은 비교적 깊다. 거기 추억이라는 이름의 온갖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불길에 휩싸'인 '단감나무'나 '내 서방을 다마'신 '선무당네'는 그 중에서 건져 올린 한 마리 물고리인 것이다. 그 강의 수면/(현재)으로부터 40여 미터의 수심/(40여 년 전의 추억)속으로 정확히 잠수해서 '간통'이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고스란히 건져 올리는 그의 서정적 직관이 볼 만하다.
그의 이러한 작업이 미당의 『질마재 神話』와 다른 점은 추억의 깊이다. 미당은 설화적 공간 속으로 내려갔지만 문인수는 유년의 추억 속에서 다시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 말하자면 양자는 서로 시간의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미당이 설화의 원형을 재구성하여 우리 앞에 내놓았다면, 문인수는 아직 숨줄이 한참이나 붙어 퍼득이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 건져 올려 우리의 발 아래 내동댕이치고 있다. 그것에 「간통」과 같은 것일 경우 그 현란한 리비도적 정서의 원색이 주는 탄력으로 인해 그 살아 있음의 감각이 더욱 강하게 전해지는 것이다.『대구민족문학회보』(1997. 가을)
* 욕지도 - 문인수
섬의 길들은 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유동마을 덕동마을 도동마을 대송마을 돌아오는데
내 마음도 꼬아 샛길 치며 꼬리 감추는 길
녹음 속 바람 아래 낮은 지붕들을 묶거나
등이 휜 만(灣)에 내려가 작은 고깃배들을 푼다.
혹은 후박나무꽃 향기의 숱한 파도 소리로 풀려서
그 노래가 밀어 올린 저 절벽 꼭대기
야생으로 나간 염소들이 몰래 몰려 있다.
섬의 길은 섬 안으로 되돌아간다.
* 폭우 그치다 - 문인수
자욱하게 내려꽂힌 저 흰 빗줄기는 하늘뿌리였을까.
폭우 아래, 천둥 번개 아래 흠뻑 뒹군
매맞은 공포는 어딜 갔나
암흑은 녹아 거름이 되었나
비 갠 뒤
새파랗게 새로 돋는 듯한 풀들은 다만 새파랗다.
젖은 풀밭에선 온몸 하늘냄새가 난다.
* 창포 - 문인수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들은 척 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롱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소래네/닥실네/봉산댁/새촌네/분네/개야미
느미/꼭지/뒷모댁/부리티네/내동댁/흠실네/모금골댁/
소득골네/갈 잿댁 우거진 한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 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 채와 북사이, 동백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 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 미루나무 - 문인수
저 동떨어지게 키가 커 싱겁다.
산너머 오십 리 밖 기적소리도 風向도 일단
이 나무에 먼저 감겼다 풀렸다 사윈다.
비쩍 마른 자식, 허우대 껑충한 홀아비 같다.
장마철 여러 날 거꾸로 세워놓은 마당 빗자루 같다
유행가의 느린 몸 동작 같다. 휘파람 같다.
슬 슬 동구 밖까지 걸어나가 하염없이
길쭉한 저 마음
창공엔 기러기 한 줄 그걸 또 슬쩍 건드려
우그리거나 다시 펴기도 하면서
끝 간 데까지 지켜본다.
서 있는 시간의 오랜, 먼 길 같다.
* 비의 뿌리 - 문인수
지상엔 아직 슬픔의 입자가 반짝이며 떠돈다.
비 그치고 개여서 햇볕 쨍쨍한 여름날 오후 지렁이 한 마리가 화단의 나무그늘 흙 속으로 느릿느릿 몸 밀어넣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얼마나 화급한 동작이냐.
웬 毒한 불인지
금세 소각돼 흔적 없어질 것처럼 쫓기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새빨간 끈 같은 것이 참 간발의 차이로 마침내
멀쩡한 대낮의 환한 바닥을 뚫고 길쭉하게 마저 들어갔다.
제, 젖은 암흑과 단단히 비끄러맨 자국인지
그런 구멍이 나 있다.
비의 뿌리가 지금 막 깊이 숨었다.
* 달 - 문인수
너도
보는구나
달은 꼭지점
그러면 우리
이등변 삼각형
서럽구나
너도
* 그믐달 - 문인수
- 건널목에서
저 누군가의 뼈.
어두워질수록 그대
아픔
그대만이 잘 보이는
중천의 그믐달.
* 바다책, 다시 채석강 -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인데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 정선 가는 길 - 문인수
흐린 봄날 정선 간다.
처음 길이어서 길이 어둡다.
노룻재 넛재 싸릿재 넘으며
굽이굽이 막힐 듯 막힐 것 같은
길
끝에
길이 나와서 또 길을 땡긴다.
내 마음 속으로 가는가
뒤돌아보면 검게 닫히는 산, 첩, 첩
비가 올라나 눈이 오겠다.
* 주산지 - 문인수
허리까지 물에 들어간 왕버들 여러 그루가 다 늙도록, 썩어 자빠지도록 나오지 않고 있다.
눈보라, 비바람의 세월을 뚜벅뚜벅 걸어 여기 당도한 보폭이겠다.
저 악산 늠름한 전모가 물에 비쳐 온전하지만 가파르다, 사납다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까지도 물오리 한 마리를 풀어 금세 다 지우시는
어머니 이승에 홀로 남아 지금 깊으시다.
잘 섞였으므로, 사랑이란 말조차 이 일대의 바닥없는 고요를 이루는데
금세 물에 녹아 풀릴 것처럼 한 사내가
카메라를 자동셔트로 맞춰 세운 뒤 애인 속으로 거침 없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
* 달 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 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툭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 밤하늘 - 문인수
지상에서 생긴 온갖 소리는 저마다 한없이 날아 올라가 먼 우주 어느 캄캄한 자리에 생생하게 고스란히 쌓여있고 또 지금도 계속 쌓여갑니다.
어머니 아흔 고개 아래 귀가 아주 어두워졌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몹시 아팠고 슬펐으며 수없이 절망하고 또 미친듯 자주 분개하였습니다.
저의 그런 저런 소리들은 남김없이 모두 당신에게 사무쳤겠지요.
어머니 어두운 귓 속, 밤하늘의 저 잘 닦인 별들은
기나 긴 세월동안 아직도 반짝반짝 안쓰럽습니다.
* 파냄새 - 문인수
노점 아주머니가 지금 부지런히 대파를 다듬고 있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있는 色이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 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 위에 쑥 쑥 뽑아놓는 대파,
파는 벗겨져 하얗게 가지런히 깔리고
건반 같다. 그 옛날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 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의 파껍질들은 아무렇게나 희끗희끗
언 길바닥에 나부끼고 들러붙고 밟히고 깨끗한,
毒한 파냄새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저 아주머니 속에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 같은 인생이 꽉 꽉 채워져
악물려 있을 것이다. 또한
아주머니의 오십대 중반을 시꺼먼 방한복에다 뚤뚤 뭉쳐 눌러 앉혀 놓았으니 낮은,
최종학력의 저 바닥은 사실 이 놈의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 저수지 - 문인수
소나기 퍼 붓는 날 그를 묻었다.
꽃 진 마음 수천수만.
연잎들이 시퍼렇게 너풀너풀 뒤덮여 물이 쌓이는
저수지의 둑길을 길게 걸어 나왔다.
남의 죽음을 빌려 쓰고 제 마음 적신다.
연잎 연잎에, 검은 우산에 몰리는 빗소리가 많다.
누군들 이 슬픔의 집대성 아니랴.
그리하여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뿔, 시퍼렇게 만져진다 - 문인수
책상 모서리에 허리가 떠받혀 오래 아프다.
아시다시피 모서리의 안쪽이 구석이고
구석의 바깥쪽이 모서리인데
이 단단한 명.암의 어떤 내용이
이 책상에서 불쑥 나온 원목의 어떤 일갈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날 일부러 한 대 쥐어박은 걸까
그러나 무슨, 악의에 찬 공격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벌목 현장의 열대 우림을 쩌억 갈라붙이며 우지끈
쓰러졌을 때, 그때 지축을 흔든 우레의 뿌리,
혹은 엄청난 수령의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저릿하다
그 여진이겠지만, 아직도 직진인 것 같다.
창공을 찌르며 내처 홀로 가는 외뿔, 그런 정신이
老巨樹의 망한 몸이 이 책상 어디에
책상으로 가부좌를 튼 오랜 시간 내내
그대로 옹이 박혀 있었구나 나는 종일 빈둥거렸으니
무슨 길을 잡아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고
부질없는 근심들이 밀어 올린 외로움은 쥐뿔도 아니어서
병인 것 같다. 오늘 다시
떠받힌 데를 들여다보니 멍이 다 들어 있다.
드높은 우듬지 끝이 시퍼렇게 만져진다
* 밝은 구석 - 문인수
민들레는 여하튼 노랗게 웃는다.
내가 사는 이 도시, 동네 골목길을 일삼아
ㅁ자로 한 바퀴 돌아봤는데, 잔뜩 그늘진 데서도
반짝! 긴 고민 끝에 반짝, 반짝 맺힌 듯이 여럿
민들레는 여하튼 또렷하게 웃는다.
주민들의 발걸음이 빈번하고 아이들이 설쳐대고
과일 파는 소형 트럭들 시끄럽게 돌아나가고 악, 악,
세간 부수는 소리도 어쩌다 와장창, 거리지만 아직
밟히지 않고, 용케 피어나 야무진 것들
민들레는 여하튼 책임지고 웃는다.
오십 년 전만 해도 야산 구릉이었던 이곳
만촌동, 그 별빛처럼 원주민처럼 이쁜 촌티처럼
민들레는 여하튼 본시대로 웃는다.
인도블록과 블록 사이, 인도블록과 담장 사이,
담장 금 간 데거나 길바닥 파진 데,
민들레는 여하튼 틈만 있으면 웃는다. 낡은 주택가,
너덜거리는 이 시꺼먼 표지의 국어대사전 속에
어두운 의미의 그 숱한 말들 속에
구석자리에, 끝끝내 붙박인 "기쁘다"는 말,
민들레는 여하튼 불멸인 듯 웃는다.
* 젖 - 문인수
오랜만에 고향엘 다녀왔다.
대구에 가면 이런 거 흔하고 흔합니다 헐하고 헐합니다 하고 말렸으나 어머니는, 나도 많이 늙었다 오래는 더 못 살겠다 하시면서, 무말랭이며 머귀나물 매운 풋고추 같은 걸 자꾸 챙겨 주셨다. 이만큼 전송 나오시다가 또 쫓아들어가 다른 거 한 보퉁이 들고 나오셨다.
무릎 앞에다가 이것들을 끌러놓고 깊이 냄새를 맡는다 어느덧, 여름밤 천지에 가득하고 그윽한 먼 별빛,
긴 바람의 젖을 물고 나는...
* 우포늪, 칠십만 평에 달한다 - 문인수
우포늪 칠십만 평에 달하는 물에 달빛이 풀린다. 달빛에 널어 말리는, 잘 마르지 않는 어둠은 전반적으로 많이 묽어졌으나 저 산, 저 산, 그리고 둑의 몇 그루 왕버들이며 발 아래 물갈대 숲엔 지금 시꺼멓게 몰린 고뇌가 오히려 더욱 깊다. 응혈처럼 그러헥 거뭇거뭇 팬 데가 숱하지만 아랑곳없이 물오리는 또 어디서 비명을 꽥 꽥 질어대는지 여기 저기 끊임없이 이는 둥근 물이랑은 그러나 허퍼 아무것도 묶지 않고 다만 저 무수한 중심의 水生, 水棲여. 그 흘레의 기미가 다투어 번져 나간다. 좀더 잘 보이는 세계는 그만큼 널리 젖어 있구나, 칠십만 평에 달한다.
* 길을 수놓다 - 문인수
가을 불붙는 길을 끌다 또 이놈의 애가 쓰리다.
청송 옥계 그 깊은 풍악(楓嶽)의 길이 시뻘겋게 꿈틀거리다 마침내 영덕 앞바다에 제 머리를 밀어넣는다.
파도가 허이옇게 끓어오른다.
단 쇠 식는 소리가 난다.
저 먼 배 천천히 수평선 너머 잠기는데
긴, 질긴 고삐인 상처는 끝내 그를 풀지 않으리
집에 돌아와 어둠 속에다 길을 수놓다.
* 3월 - 문인수
아직은 바람이 차다 하면서
누가 밤중에 깜깜한, 찬 부엌으로 내려갔다.
군불 한 소끔 더 때고 들어왔다.
잉걸 화롯불도 새로 들여온 것 같았다.
나도 선잠을 걷고 화롯불 앞에 쪼그려 앉고 싶었던 것처럼
방금 자리 뜬 저 아이들처럼
이글이글 올라온 이 한 무더기 동백꽃 쬐보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은 또 먼 땅 속에서 두런두런거리는 것 같다.
아직은 때때로 바람이 차다.
* 4월 - 문인수
절을 에워싼 산빛이 수상하다.
잡목 사이로 여기저기 펄럭 걸린 진달래.
단청 엎질린 것 같다.
등산로를 따라 한 무리
어린 여자들이 내려와서 마을 쪽으로 사라진다.
조용하라, 조용히 하라 마음이여
절을 에워싼 산빛이 비릿하다.
* 독백 - 문인수
평일의 인기척 없는 산길은 골똘하다. 저녁노을 어느덧 심중으로 몰린다. 저 엄청 큰 소리가 더디 독백이랴, 세상 모든 고개 숙인 자들이 한꺼번에, 붉게 한번 울부짖고 싶구나. 내 탓이오, 꽉 다문 입 속이 또 깜깜하게 홀로 저문다.
* 무덤 - 문인수
그믐달이로구나.
그 무엇으로 한 생이
한 생이 실로 야위어 가야 하나
그 먼 길이 벼루어낸 뼈 하나
뼈 하나 천천히 휘어
천천히 휘어 암흑 속으로 드누나
암흑 속으로 드누나
저 웃음!
오, 저런 무덤.
* 밤 늪 - 문인수
달빛이 늪의 물에 오래 가만히 있다.
달빛 풀리는 물이랑이, 바람 타는 갈대숲이 추는
춤, 춤 속으로 흘러들 뿐 하염없이 오래
가만히 있다. 딴 짓 하지 않는다.
으스름 아래 어디 저 집요한 소쩍새 있다.
개구리 물오리 풀벌레 소리 또한 오래
딴소리하지 않는다. 저 몇 그루 뚝버들의 시꺼먼,
산의 시꺼먼 대가리들 또한 왈칵,
재채기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 오래,
무슨 일이 참 많다. 이 소란한, 방대한 고요가 그것인데
누가 밤새도록 걸어놓은 양수기의 발동 소리가,
거기에 발이 툭, 걸린 내 마음까지도 다시 긴
둑길을 따리 천천히 흘러들어간다. 딴 짓,
딴소리하지 않는다. 오래 가만히 있다.
* 바람, 못 간다 - 문인수
제 몸 일으켜 떠나는 이별을 믿는지.
대숲에, 대숲에,
또 시퍼렇게 쓸어안으며 울부짖으며 무너지는
바람,
못 간다.
* 폭우 바깥으로 간다 - 문인수
친구를 묻었다. 바람 불고 억수 퍼 부었다. 우리 모두 젖었다. 친구는 이제 젖지 않을 것이다. 젖을 수 없을 것이다. 번개 우뢰 우르르 번쩍 울부짖는 친구 아내의 목구멍 속으로 뻗쳐 들어가는 것 보였다. 친구는 이제 그 어떤 분노도 일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 만류해 산 내려왔다. 세찬 비바람 자꾸 앞을 가렸다. 친구는 이제 앞 가로막히지 않을 것이다. 절망, 절망할 수 없을 것이다. 헤쳐 나갈 일 그 무엇 없을 것이다. 그녀는 또 뒤돌아보며 몸부림쳤다. 우리 모두 멀거니 뒤돌아 보았다. 친구는 이제 뒤처져 그렇게나마 오지 않을 것이다. 올 수 없을 것이다.
저 산 뿌옇게 뒤덮는 폭우, 폭우.
우리는 익히 이 폭우를 안다.
하관과 함께 그녀는
구덩이 속으로 미친 듯 뛰어들려고 했다.
한 길 구덩이 속에 생이 잠기랴.
이 폭우 다 묻히는 곳, 친구는 폭우 바깥으로 가고
우리 또한 폭우 바깥으로 간다.
* 서해 - 문인수
서해 땅끝은 완만하다. 바람아래해변 물머리의 첫 입술이
또한 아무런 낙차 없이 충격없이 그것을 받아 감아들이며
깊이 내려보낸다.
잘 삭은 고요인 海底, 그런 조짐이 그렇게 몸에 발리는
바람 아래
해지고 어둠 드는 것이다 딴전이나 부릴밖에......
* 밝은 날 명암이 뚜렷하다 - 문인수
현관문을 연 순간 찰칵,
사진 찍힌 것 같다. 오랜 장마가
갈라터진 것인데 환한,
깨끗한 소리가 났다.
온 몸이 들은 장면이다. 살아 움직였다는 자각이
전면 화들짝 놀란, 그런 반사광의 표정이
흰 뜰에도 역력하다.
2003년 7월 23일, 오전 열 한 시를 막 넘고 있다. 지금
이 햇살 아래 서 있다. 기념비적이다.
용서라는 말의 섬광이여
사랑한다고 말하려 하는 마음이 적는 저 느린 글씨.
지렁이 한 마리가 길게 스미고 있다. 어둠 속 깊이,
깊이 젖어야 뿌리가 되는 저 길......
헤아려 보니 상사화 열 두 송이,
그 새까만 그늘이 새것이다.
* 풀뽑기 - 문인수
아버지 따라가 묵정밭을 맨 적 있습니다. 쇠비름풀 여뀌 발랭이서껀 이런 저런 잡초들 수없이 뽑아 던졌습니다. 검붉은 맨살의 흙이 드러나면서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나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일평생 마침내 논 서른 마지기 이루고, 그러나 송충이같은 자식들, 그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어 버리고 빈 들 노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일흔 중반 넘어서면서 망녕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사 관심거리가 하나 둘 줄어들더니, 마을이나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식솔들의 잦은 불상사에 대해서도 영 남의 일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자식들, 심지어는 늘 곁에서 수발드는 어머니 보고도 당신 누구요, 우리 집사람 못 봤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버지,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 그 논에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섰습니다.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렸습니다. 품 안의 새끼들을 어르고 입안의 혀같은 당신의 아내와 자주 두런거렸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아버지, 검불같이 남아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 도망자 - 문인수
밤새 눈 내려 덮여있다.
저 일격이 날 때려 눕혔던 것일까
세상 모든 길이 날 풀고 돌아가 버렸다.
사라진 기억들이 삼엄하다.
낯선 곳에서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흰 복면의 어떤 죄여.
* 드라이플라워 - 문인수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는다.
말린 장미.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바스러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뾰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은 독한 상처이거나 먼 길 소실점,
그 끝이어서 문득, 문득 찔린다.
이것이 너 떠난 발자국 소리이다.
* 11월, 춤 - 문인수
11월, 이 빈 당간지주에 뭘 걸치고 싶다.
단풍 붉게 꿈틀거리며 바람 넘어가는 저 산능선
다리 벌리고 서서 오래 바라본다.
저걸 걷어 길게 걸쳐 입고 싶다.
파장에 홀로 남아 거나하게 한잔
아, 탈진한 生의 거대한 춤,
저녁노을에다 섞어 활 활 몸 넘고 싶다.
* 섬의 새 - 문인수
섬의새들이하루종일한꺼번에여러번날아오릅니다.
가장커다랗게멀리나는것이섬인듯싶습니다.
생각은저리무수하고간절합니다.
그러나발목너무
깊은
섬
* 고백 - 문인수
선운사 동백, 그 상처 붉게 붉게 절며 당도하는 곳
가마미 바닷가에 한 사내 서 있었네.
가마미 앞바다에 폭설이 있었네.
폭설이 있었네, 그렇듯 죄 말하고 나서
저 긴 수평선, 긴 수평선에 걸쳐 오래 자고 있네.
* 유등연지 - 문인수
9월 유등마을 연지엔 연잎들이 모두 나와 물을 덮고 있다. 누가 물가 풀섶에 빛바랜 운동화 한 켤레를 가지런히 벗어놓았다. 저런, 낡은 죽음의 이미지조차도 이쁜 꼬리지느러미를 달고 짧게 사라진다. 배고프다 문득, 연잎에 이는 한바탕 소나기 소리가, 그런 바람의 비늘이, 달빛 냄새가 궁금하다. 아, 꽃지고도 많이 남은 초록 날짜들이 남몰래 빨아먹는 슬픔이 있다.
* 채석강 - 문인수
채석강의 장서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
긴 해안을 이룬 바위 벼랑에
격랑과 고요의 자국이 차곡차곡 쌓였는지
種의 기원에서 소멸까지
하늘과 바다가 전폭 몸 섞는 일,
그 기쁨에 대해
지금도 계속 저술되고 있는 것인지
또 한 페이지 철썩, 거대한 수평선 넘어오는
책 찍어내는 소리가 여전히 광활하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작은 각다귀들
각다귀들의 분분한 홀레질에도
저 일망무제의 필치가 번듯한 배경으로 있다.
이 바닥 모를 깊이를 잴 수 있겠느냐
미친 듯 몸부림치며 헐뜯으며 울부짖는
사랑아, 옆으로 널어 오래 말리는
채석강엔 강이 없어서 이별 또한 없다.
출처 : 소리없는 아우성
글쓴이 : breez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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