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스크랩] 뼈아픈 후회 / 황지우 님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1. 13. 15:51


        뼈아픈 후회 황 지 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에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문학과지성사. 1998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中에서...
출처 : 늘푸른 강물처럼
글쓴이 : 하늘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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