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학 산책

[스크랩] 詩人황지우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1. 10. 14:38
 

황지우


◈ 본명 황재우

◈ 1952 전남 해남 출생.

◈ 1972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미학 전공) 입학.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 1973 문리대의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강제입영.

◈ 1979 서울대 인문대 철학과(미학전공) 졸업 및 동 대학원에 입학.

◈ 1980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연혁>이 입선.

◈ 1980 계간 ≪문학과 지성≫에 시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여 등단.

◈ 1980 광주 민주화 항쟁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 1981 광주 민주화 항쟁 가담한 사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

◈ 1983 시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세계의문학』이 제정한 제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 1985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 계간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 1991 현대문학사가 제정한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 1993 '뼈아픈 후회'로 문학사상사에서 제정한 제8회 소설시문학상 수상

◈ 1994 한신대학교 문창과 교수 재직

◈ 1995 조각전(학고재 화랑) 개최

◈ 1999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

◈ 대산문학상 수상

◈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이며, 미술평론가로도 활동 중이다

◈ <<시와경제>> 동인


◈ 주요 저서 목록

-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1986

- 시집 <나는 너다> 풀빛 1987

- 시집 <게 눈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1

- 시선집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 미래사 1991

- 시선집 <聖가족> 살림출판사 1991

- 시집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학고재 1995

-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새로운 시의 길을 찾아서

/ 황지우



시의 출발은 항상 사춘기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를 처음 썼던 때가 중학교 3학년 때 쯤으로 생각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고 괜히 누군가 보고 싶어지곤 했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동경이라고 할까, 설렘이 있던 바로 그 자리가 시가 태어난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자신 대학에서 시작법을 가끔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는 걸 느낀 적이 많습니다. 시에 대해서 일정한 이해나 믿음들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기본적인 약속 아래서 시 쓰기를 해야 할 텐데 딱히 '시는 이런 거다'라고 말하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제 경우에는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나곤 합니다. 후줄근한 차림새의 우편 배달부 청년이 망명 생활 중인 대시인 네루다에게 자꾸 접근하면서 시가 뭔지 좀 가르쳐 달라고 하지요. 이 청년이 시를 필요로 하는 목적은 뻔해서, 시인 하면 떠올리는 것은 여자들한테 편지가 많이 온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베아트리체라는 아름다운 술집 종업원 아가씨에게 접근하기에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써 시를 쓰고 싶어했고, 네루다를 계속 졸라댔지요. 거기서 네루다가 청년에게 알려준 시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은유(隱喩)였습니다. 네루다는 시를 물으러 온 첫 순례자라고나 할까, 순진무구한 청년에게 '시는 은유다'라고 넌지시 일러줍니다.


어느 날 해변가에서 수영을 즐기다 나온 네루다는 편지 한 통을 들고 찾아온 청년에게 지금 자기가 쓰고 있는 시를 읊어주죠. '바다는 일곱 개의 초록 혀이다/나는 바다다/나는 바다다/그 이름을 부르며 절벽을 내리친다' 이런 시를 읊어주니까 청년은 '말들이 어지럽다. 말들이 출렁이는 배처럼 어지럽다'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네루다가 '그래, 그게 바로 메타포라는 거야'라고 일러줍니다. 말들이 흔들리는 배처럼 어지럽다. 말들이 반복되면서 출렁출렁거린다는 것을 흔들리는 배처럼 어지럽다라고 말하는 게 은유라는 거죠.


은유의 눈부신 매혹 앞에서


모든 시가 은유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저 장대한 교향곡, 어마어마하게 큰 대성당 따위의 건축물, 저 신나고 스피디하고 스펙터클한 영화,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매력을 지닌 연극… 이런 여러 장르의 예술에 비한다면 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른바 미디엄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시는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일 뿐이죠. 다른 예술 장르들은 미디엄이 굉장히 크고 매체 자체가 주는 파워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입니다. 시는 미디엄 자체가 언어 외에 아무 것도 없으므로 여러 예술 가운데 시는 가장 시시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언어라는 미디엄을 같이 공유하는 게 소설일 텐데, 시는 짧기도 하고 압축시켜야 하는 등 모든 예술 장르 가운데 어떤 면에서 가장 초라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라하고 시시한 시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힘, 눈부신 매혹을 자랑하는 것은 많은 시인들이 구사하고 있는 은유 덕분입니다. 은유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보들레르의 시들을 흔히 예를 듭니다. 보들레르는 「원수」라는 시에서 '내 청춘은 한갓 캄캄한 뇌우(雷雨)였을 뿐'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내 청춘은 캄캄한 번개였다. 내 청춘은 캄캄한 날벼락이었다' 이 시가 언어로써 성립시키는 '청춘은 번개다'라는 은유를 피카소 같은 대화가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습니까? 그 어느 위대한 작곡가라 하더라도 언어로써 딱 완성되는 청춘의 번개를 어떻게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건축가가 청춘의 뇌우를 대리석을 얹어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은유는 시의 가장 고유한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모든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은유로 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 멋진 표현들로만 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금방 질리고 맙니다. 어떤 삶의 비밀을 알려 주는 내용이 배제된 채, 수사적으로만 은유를 사용할 때 그것은 공허해집니다. 삶의 비밀을 압축하면서 하나의 은유가 성립되었을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이를테면 젊은 시절의 보들레르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악이라고 표현한 현실 속에서, 금치산자로 알콜 중독자로 매도당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자신만의 지고한 이상을 모순어법적으로 이 더러운 현실 속에서 언어를 보석화시켜서 '내 청춘은 캄캄한 번개였다'라는 놀랄 만한 은유를 성립시켰을 때 시는 어떤 예술 장르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시를 쓸 때에는 자전거를 끌고 대시인을 찾아다녔던 우편 배달부와 같은 수준도 못 되었습니다. 연애 편지를 잘 쓰기 위해서 쫓아다니다가 은유라는 것을 체감적으로 터득했지만, 시가 처음 찾아온 사춘기 무렵에 내가 생각했던 시란 지금 생각해도 유치무비한 것이었습니다. 김소월의 '초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혹은 이발소 그림과 함께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라는 속된 경구 수준이었거나, 아니면 소월류의 직설적인 감상주의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손위 형님이 자기가 쓸려고 사다둔 60년대 일기장이 있었어요. 그 일기장에는 매월 그 달에 어울리는 우편엽서 같은 풍경에 시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11월이면 낙엽이 쌓여 있었고, 거기에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시가 적혀 있는 걸 좋아서 외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6월이었던가, 사슴이 멀리 있는 숲을 배경으로 릴케의 '고독'이라는 시가 실려 있었어요. 별것도 아니었는데 '고독 너의 희푸른 이마에 나를 눕히노니' 하는 부분을 읽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슴이 무너져내려 견딜 수 없게 하는 걸 경험했습니다. 아마 다른 많은 분들도 시를 읽으면서 얼마쯤 다르기는 하지만 저와 마찬가지의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주저앉는, 길을 걸어가다가 무릎의 힘이 푹 빠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리는 느낌을 경험한 사람만이 시를 읽을 수 있고 시를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를 쓰고 읽고 즐기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눈, 시의 눈이 가슴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이게 주저앉아 버려야 합니다. 시를 향한 눈이 먼저 열려야 다른 사람의 시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감흥이 반복되면서 눈높이가 점점 올라가고 시적 수위가 높아질 때에 시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가 나를 찾아와서, 시가 들어갈 가슴에 있는 경락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흔히 낙서를 하기 시작합니다. 낙서를 하고 그 낙서가 떨어지는 글자로 끝나지 않고, 대개는 친구건 이성이건 누군가에게 편지, 혹은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모든 시의 출발은 이 일기장과 연애 편지가 아닌가 합니다. 밑 모를 두려움과 함께 자기 자신이 항상 못마땅해 자책하는 심정이 되었을 때, 또는 마음이 밖으로 열려서 누군가가 보고 싶어질 때, 혹은 어떤 곳으로 훌쩍 가버리고 싶어질 때에 품는, 이른바 먼 곳에 대한 동경을 우리는 낭만성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시의 출발점은 이 낭만성, 자기의 다른 것에 대한 그리움, 설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40이 넘고 전업작가로서 시집도 내고 하는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고, 모든 시인들은 최초의 그 자리, 낭만성이라고 하는 불편한 공명통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백발이 성성한 정현종 선생님을 연세대에 가서 뵈었는데, 제가 약간은 속으로 비난하는 투로 '선생님, 선생질 재미있습니까?' 했더니 파안대소를 하시면서 '지금도 젊은 여제자를 보면 연애하고 싶어' 그러더라구요. 아! 저게 시인이구나 항상 어떤 동경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가 시인이구나 하는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문예반 한답시고 고등학교 때부터 벌써 머리가 벗겨진 조숙한 친구 녀석과 같이 서로 불량배 흉내를 내면서 교복도 이상하게 입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를 대학에서도 만났는데, 저보다 시적 수준이 높고 시 써놓은 것을 보면 진도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녀석이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시를 노트에 써서 읽어 보라고 주었습니다. '왜 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나는가'라는 시를 보여 주었는데, 당시 나는 '무슨 시가 이러냐? 이미지도 없고 시어도 아름답지 않고…' 하며 김수영의 시를 못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도 몰랐고 대학에 와서 접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문학지인 「현대문학」 등을 읽으면서 나도 금방 시인이 될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대학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김수영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또 정현종의 시들을 만나면서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 이전에 내가 시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유치한 한낱 감상주의의 똥물에 불과했는지, 얼마나 거짓되게 언어만을 이쁘게 다듬은, 마치 가성으로 입을 모으고 점잖게 노래부르는 여학생 같은 시만에 길들여져 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시적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경멸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일정한 시들에 대한 경멸 혹은, 그 동안 자기가 시라고 생각했던 것, 자기가 써놓았던 시들에 대한 혐오감 따위가 젊은 시절의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내가 써 놓았던 것들이 밤에는 위대한데 아침에는 형편없어지는 그게 정말 속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쓰라림이 진하면 진할수록 시의 눈높이가 올라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눈높이만 높다고 해서 좋은 시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눈높이는 높은데 시는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눈을 높여야 한다는 것. 자신의 눈높이만큼 시를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보는 것, 그리고 낙차에 대해서 진실로 괴로워해 보는 것 그런 괴로움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좋은 시에 대해서 찬탄할 수도 있고, 이런 경멸과 찬탄이 반복되면서 시적 인간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서구적 교양의 굴레를 벗어나



대학 시절의 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한국어로 된 시가 너무 시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외국 시들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 되고, 외국 시들을 볼 때에 영어나 불어나 독일어로 되어 있는 시들은 너무 멋있는데, 왜 우리 조선말로 된 시들은 멋이 없을까 하는, 어쩔 수 없는 서구적 교양으로 무장된 그 당시 우리 세대들의 분위기를 조장했던 학교 교육 탓으로 문화적 사대주의에 깊게 침윤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감탄했던 것은 영시(英詩)든 불시(佛詩)든, 어떤 나라 시든간에 그들의 시 자체에 자기 형식이 있다,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규제 장치가 있다, 그런 규제 장치 때문에 시를 쓰는 게 어렵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규제 장치를 맞추고 시를 썼을 때의 성취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시라고 생각할 때, 시와 시 아닌 것의 차이를 대체로 어디서 봅니까? 외적인 형식으로 볼 때 풀어쓰면 다 산문인데, 시라고 행 갈이를 합니다. 우리 나라 시에서 시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은 행을 끊거나 잇달아 쓰는 것입니다. 행 갈이 했다고 해서 그게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도 아닌 것을 행 갈이 해서 억지로 시인 체하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단테 신곡의 '세 번째 칸토(Canto)'를 참 좋아하는데 지옥의 문 입구는 신곡 전체가 3부로 되어 있죠. 지옥, 연옥, 천국 그리고 각 부가 33칸토로 되어 있습니다. 3부 33칸토, 각 연이 3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곡을 지배하고 있는 숫자는 3입니다. 신곡 전체가 33 곱하기 3이니까 99칸토죠. 서시가 1칸토 더해져서 전체가 100칸토입니다. 이 숫자는 기독교적인 상징입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 중세인들을 사로잡았던 종교적인 강박관념에서 연유한 거죠. 99에 하나 더해서 100, 100은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건축가가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를 만드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고 할까, 3행으로 되어 있는 각 연은 한 행이 11개의 음절로 되어 있습니다. 각 행의 마지막 단어들의 모음들이 전부 일치해 있습니다. 각 음절은 강약강약 이런 강세에 의한 음악적인 박자감이 있습니다. 13세기 이탈리아 무연시의 형식인데, 14세기에서 셰익스피어 시대까지 소네트 형식과 함께 어떤 것이나 시이기 위한 음악적인 구조, 건축술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 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식으로 감정만 읊조려서는 안 됩니다. 언어를 그야말로 연금술사처럼 가공을 해야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세 번째 칸토(Canto terzo)' 지옥의 입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Per me si va ne la città dolente,


per me si va ne l'eterno dolere,


per me si va tra perduta gente.


Giustizia mosse il mio alto fattore;




전부 'e'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음, 모음, 자음, 모음이 뚜렷이 구분되어, 이태리어 특유의 투명성이 반향처럼 울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음향만이 아니라 여기에 깃들인 의미도 기가 막힌 걸 알 수 있습니다. '나를 거쳐서 슬픔에 잠긴 도시로 가거라/나를 거쳐서 영원한 괴로움 속으로 가거라/나를 거쳐서 사라져 버린 족속 곁으로 가거라'라고 지옥 입구에서 단테가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그 당시 피렌체의 현실이고, '슬픔에 잠긴 도시', '영원한 괴로움' 등은 모두 피렌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억압하고, 견디기 힘든 현실을 두고 '자기를 통해서 가라'고 첫마디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나를 통해서 현실로 가는' 강렬한 주관성은 곧 단테의 문학적 근대성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절절함과 음향적인 자기 질서가 보기 좋게 교직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145'-러브송에서도 마찬가지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Those lips that Love's own hand did make


Breathed forth the sound that said 'I hate'


To me that languished for her sake;


But when she saw my woeful state,


Straight in her heart did mercy come,




1행과 3행의 'make', 'sake'라는 단어로 각운을 맞추었습니다. 2행과 4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운(rhyme)이 잘 맞아 있고, 10음절을 한 행으로 12행을 만들고, 여기에 2행을 추가해서 14행 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태리어와 영어는 전혀 다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음향적인 질서를 지킨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이런 점은 보들레르에게서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이런 외국 시들을 읽으면서 한국어로 시 쓰는 것에 대해서 깊은 컴플렉스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은 부착어여서, 우랄알타이어, 티벳어, 일본어까지 음절이 부착되면서 의미가 발생한다. 속어로는 굴절어라고 하는데 활용에 의해서 그런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닐까. 소월 시에 들어 있는 7.5조 4.4조에는 이런 미터 개념의 가락은 있지만 그냥 가락만 직선적으로 지나갈 뿐이지, 행과 행 사이에 어떤 화성적인 기둥이랄까 음량의 부피가 없다. 우리 시는 평면적이고 가늘다. 나는 왜 이런 후진국에 태어났나' 따위의 정말 터무니없는 자책감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라면을 끓여먹을려고 가스렌지를 켰는데 파란 불꽃들이 돋아났습니다. 그게 풀잎같이 보이더라구요. 파란 보랏빛 풀잎처럼 보여요. '불 속의 풀, 불 속에 피어오르는 풀' 하면서 주절주절거리다가 책상에 와서 그 구절을 하나 써놓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불 속에 피어 오르는 불, 풀 따위의 각운(脚韻)이랄까 하는 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한번 써보면 어떨까 하고 앞단어를 맞춰 봤습니다. 졸시 「메아리를 위한 각서(覺書)」가 그렇게 쓰여졌는데, '불 속에 피어 오르는 푸르른/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하는 대목처럼 '불'하고 '풀'을 앞에다 뺐습니다.


술이란 단어가 금방 떠올라 불, 풀, 술, 술 처마신 몸과 넋에 제일 가까운 등 울, 물, 줄, 둘 첫 단어의 유음 현상을 의도적으로 뺐습니다. 불에서 둘에 이르기까지 소리가 메아리 되어 나가는 그런 의도라고 할까, '불 속에 피어 오르는 푸르른/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술 처마신 몸과 넋의 제일 가까운/울타리 밑으로 가장 머언/ 물소리 들릴락말락/줄넘기하는 쌍무지개/둘레에 한세상 걸려 있네'라고 읊었습니다. 줄넘기하는 무지개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까. 이걸 써놓고 그날 밤은 흥분해서 잠을 못 잤습니다. 아, 나는 천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두려움이 왔습니다, 이건 한밤의 착각이 아닐까 하는.


다음날 봤는데 견딜 만해서 다시 정서해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께 가지고 갔습니다. 나는 굉장하다고 말해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재미있다고 하시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제가 시를 발표한 지 20년이 넘습니다만, 그 어떤 평론가도 이 시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두 번째 시집에 실린 「뱀풀」이라는 시에서는 음향적인 조건을 더 작위적으로 했어요. '열'자도 맞추고 두운, 각운을 다 맞춰 봤습니다. 역시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즉 어떤 평론가도 여기까지 의식이 안 와 있었습니다. 한번도 거론된 적이 없습니다. '현단계 한국시에서 이 두 시는 실패했다.


우리말로 시를 쓸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행 갈이로도 음향적인 장치로도 이미지로도 시가 되게 하는 절대적인 보존을 못해주는데,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그래 내가 시를 쓰지 말자.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쓰자. 시적인 것을 찾아보자. 결국 어떤 텍스트를 얻은 문장을 시 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일 거다. 시적인 것은 뭐냐. 시적인 것은 모든 성공한 시 속에 들어 있다. 모든 시가 성공한 시인 것은 아니지만, 시적인 것은 성공한 시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를 아는 사람은 그 말을 압니다. 시라는 것은 도사들만 하는 건가 하는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시를 아는 사람만이 정확하게 알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시와 관련된 여러 현상들 속에, 얼마만큼 시적인 것에 대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이를테면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등에서 여고생들이 줄서 있는 시집들 속에는 사이비 시들이 대부분입니다.


시 비슷한 것을 우리가 시라고 생각하거나 제가 사춘기 때 시라고 생각했던 것 그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눈높이는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저는 시적인 것의 추구를, 형태 파악을 통해 지금까지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어떤 반시(反詩)적인 것 가운데서 찾았는데, 시를 쓰는 전략만이 아니라 80년대의 고통스러웠던 권위주의 독재체제하에서 현실에 항의하고자 하는 메시지로서 형태를 비판하고 이상한 짓을 한동안 자행했었습니다. 대단히 파괴적이고 한국문학의 자폭에 이른 수준이죠. 그런데 자폭이라도 해서 우리 언어가 얹혀져 있는 현실이 참으로 문제 있다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불교의 선(禪)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더 이상 나갈 길이 없는 모든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들의 운명이기도 하지요.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저는 『임제록(臨濟錄)』을 읽게 되었습니다. 임제 스님의 법어들은 뭔지 모르겠고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법어에 이르게 하는 착어들, 힌트들인 게송(偈頌)이 굉장히 시적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구절에선가 골이 갈라져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한문 두 구절이었는데, 번역하면 '비온 뒤 장강이 하얗게 하얗게 흐르도다'입니다.


그 구절을 접수했을 때, 중학교 때는 가슴이 주저앉았더라면 이번에는 정수리가 뽀개져 버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눈이 한 껍질 벗겨져서 열린다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해 놓고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시적(詩的)인 것이 선적(禪的)인 것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그것은 우리말로 시 쓸 때 우리 안에서 시는 깨달음이 아닐까, 시적 인식이 어떤 것을 시적으로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방법으로 선적인 사고, 이것이 뜬금없이 우리 주변에 깔려 있는 시시한 일상들 속에, 시적인 것으로 순간순간 반짝거리면서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선적인 눈으로 보면 그전에 별것도 아닌 것들이 어마어마해지고, 뭔가 도사리고 있고, 시적으로 보였다고 할까요. 그래서 시와 선이 비슷한 것인데, 단지 선은 언어를 불신하고, 불립문자를 으뜸으로 치지요. 그래도 화두선(話頭禪)은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시도 언어가 팽배해 있으면 시가 되지 않아요, 언어를 가능하면 줄여야 합니다.


언어를 현저히 결핍시키는 것이 시이죠.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의 밸런스가 시일 터인데, 시는 오히려 말하지 않은 것, 여백에서 숨겨 두었던 것, 여기가 시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은 꼭 해야 할 것만 간신히 하는 것이 시이다, 언어의 결핍이되 역시 언어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시와 선은 상당히 닮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선은 언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깨달음을 얻으면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지만, 시는 도의 경지까지 가버리면 끝나버리죠. 시는 도의 경지까지 가면 안되고 그 근처에서 어른거리다가 다시 내려오고 하는 경계상의 떨림이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의 담양 체류 시절, 「게눈 속의 연꽃」이라는 시집에 그런 저의 흔적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적인 것이 놓여 있는 성층권, 즉 정신의 성층권, 거의 산소가 희박해서 숨도 쉴 수 없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없었고 또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다가 문득 거꾸로 추락해서 진흙 속에 처박혔다. 그래서 저는 어두운 선으로서 인간의 심층에 놓여 있는, 어두운 것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해서 이번에 나온 시집에는 선적인 깨들음을 많이 담고자 애썼습니다.


가령 정신병자가 복도를 강으로 착각하고 건너지 못하듯, 모든 시적인 메타포의 원리는 착각입니다. 환자는 고통을 받겠지만, 멀쩡한 사람이 복도를 강으로 생각하면 시가 됩니다. 고통을 받기는 하지만, 정신 질환적인 내용 자체는 어떤 시적인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신질환자의 착란이 시인 것은 아니지만, 90년대의 이념이 상실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아파하는 지나온 한 시대의 정신적 풍경을 그려보고자 했던 게 작년에 나왔던 시집 「어느 날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입니다. 아무튼 한국시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 말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현실 인식과 시적 형식의 대응구조-------- 황지우론

/ 류철균


1. 들어가는 말: 황지우 시의 총체적 이해를 위해 ----


시인이란 삶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끝없는 부정(否定)의 정신으로 다양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어떤 객관적인 논리로 삶에 대한 해답이 내려질 수 있다면 그 순간부터 시인은 존재 이유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가깝게는 시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멀리는 그 시대, 그 사회에 대한 전망에 이르기까기 시인은 이미 규정지워진 모든 정의들을 회의하고 비판하며 그 고정관념의 카테고리 밖에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이런 소수의 질문자가 존재할 때 그곳은 보다 새롭고 바람직한 비젼을 간직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시인의 시를 비평하면서 그가 제기하는 질문들이 그야말로 원론적이라고 얘기되는 막연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몸담은 '지금'의 삶 속에서 '이곳'의 이웃들에게 던져지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의 한국문학은 어떤 질문자를 갖고 있을까? 특히 시에 있어서 누가 가장 첨예하고 불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이런 문제에 접했을 때 우리는 80년대의 문단에서 갖는 황지우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황지우는 우리의 시에 커다란 새로움(newness)을 던져주었다. 그 새로움이 어떤 진정성을 띠고 있으며 어떻게 평가받아야 하는가는 뒤에서 논의될 문제지만 소설적 요소의 도입, 신문기사나 계시문의 생경한 인용, 도표나 컷의 삽입 등 그의 극단적인 형식파괴는 기존의 시개념에 중요한 안티테제를 제시했다.


또 30년대의 이상이나 <3.4문학>동인들의 전례처럼 시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이같은 도전은 황지우를 평가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에 의해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황지우를 읽는 우리는 그의 질문이 여기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시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방법론적 새로움은 현실에 대한 첨예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못했을 때 기존의 체제가 은연중에 조장하는 비현실적 무관심을 도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황지우는 이렇나 위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그의 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시가 가진 방법론적 새로움과 함께 그런 새로움들이 드러내는 시인의 현실인식에 착목해야 할 것이다.


문학작품이 단순히 방법론적인 형식과 그것이 표현하는 내용으로 이분되는 성질의 것이 아닌 한, 시인의 현실인식과 시적 형식사이에는 상당한 대응관계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80년대의 삶 속에서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얼마만큼 필연적 의미망을 획득하고 있으며 그의 방법론적 새로움이 어떻게 자리매김되는가 하는 것은 결국 그가 현실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 어떤 인식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의 드러냄이 현실에 대해 어떤 대응구조를 가지는가에 좌우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황지우의 현실인식을 낳게 한 80년대 상황에 대한 검토와 함께 그에 대응하는 시의 진정성에 관한 시인의 관점을 밝히는 데서 이 논의를 출발시켜 나가겠다. 논의의 성격상 그의 시 하나하나에 대한 정치한 분석보다는 현실의 상황과 시적 형식간의 대응관계를 추출하는데 주력하게 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2. '80'년대의 상황과 시의 진정성.---------


황지우의 시를 읽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10.26 이후 노도처럼 솟아 올랐던 민주화의 열기와 민족의 향방에 관한 활발한 정치적 토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80년대 5월 이후 사회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유포된 정치적 무관심과 허무주의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80년대 5월을 전후로 한 이런 의식상의 단층은 '80년대 초반기에 왜 그렇게 소설이 위축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시쟝르가 융성하게 되었나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그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이 가져온 파장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방향성 같은 큰 문제로부터 한 개인의 문학관 같이 작고 내면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위 [학림그룹]으로 불리는 황지우,이성복, 김정환 들이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했던 모교의 어느 단대지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80년의 봄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커다란 패배였으며 엄청난 아픔이었다. 그 아픔은 자학을 낳았고 역사는 운명이라 불리웠다. 우리는 스스로를 객체화하고 흩어져 갔다.


--서울대 법대지[FILDES]시론,1984



이것은 물론 다분히 주관적인 발언이지만 당시 사회 일각의 정신적 풍토를 짐작케 한다. 한때 저마다 토론에 활발히 참여하며 스스로 역사발전의 주체세력이라 믿었던 지식인들은 이론과는 판이하게 전개되는 역사 앞에 경악했고 결국 자신의 사회적 존재가 이미 '위에서' 만들어진 지식소유자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좌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같은 인식은 또다른 갈등과 이어졌다. 그것은 무력한 지식인 대신 상황극복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민중의 현실태가 민중의식이란 가능태에 비해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이처럼 암울한 현실 앞에 시인들은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기 작품의 준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딜레머에 빠졌다.


김정환을 비롯한 민중문학론의 계열처럼 '이 땅의 우매한 갈증, 우매한 사랑'에 대한 친화력으로 그 준거를 삼을 수 없었던 황지우는 자기 시의 진정성(sincérité)을 새로운 곳에서 찾았다.똑 같이 전위적인 새로움을 보여주는 다음 두 시에서 황지우의 시적 방향모색을 알아보자.



1)…1978년: [날 먼저 죽이고 나가라. 이놈아] 어머니 울면서 말리다 . 친동생 끝내 광화문으로 나가다. 통대 99% 지지같은 사람은 9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다. 홍표 나와서 컴퓨터 회사 취직하다. 출판사에, 수입 오펴상에, 섬유 수출업에, 하나씩 둘씩 들어가다. 더러 결혼도 하고 그런 때나 가끔 서로 얼굴 보다. 생(生) 지리멸렬해지다. 그런 생의 먼데서 여공들 해고되고 한 달에 한 번 대구로, 김해로 동생 면회가서 옷과 책 넣어주다.


1979년: 대통령 죽다.그리고 어느 날, 문득,멀리서,모두,한꺼번에 돌아 오다.


--- {활엽수림에서} 끝 부분------



2) 오늘 아침 버스를 타는데 뒤에서 두번째 오른쪽 좌석에 누군가 한 상 걸게 게워낸 자국이 질펀하게 깔여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서로 먼저 앉으려다 소스라치면서 달아났다. 거기에는, 밥알 55%, 김치찌꺼기15%, 콩나물 대가리 10%, 두부 알갱이 7%, 달걀 후라이 노른자위 흰자위 5%, 고추가루 5%, 기타 3% 순으로 천지신명이시여 이게 우리의 지상의 양식이랍니다. 퍼부어 주세요, 퍼먹여 주세요


--- {버라이어티쇼 1984} 중에서 ---



시인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이 역사적 에피소드들을 통해 제시되고 있는 1)은 서사구조라는 비(非)시적인 요소가 오히려 시적 긴장(tention)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특이한 시이다. 그 이야기-서사구조가 제시하는 뒤틀린 삶의 단면 단면들이 일관된 분위기를 조성하며 적절한 호흡을 맺어주고 있다. 유신하의 경직된 상황에서 이상과 우정의 이름으로 그물코처럼 자신의 삶을 얽어매던 의미들이 뿔뿔이 떠나감을 느낀 시적 화자에게 '79년의 일련의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2)는 1)에서 한꺼번에 돌아온 것처럼 느꼈던 삶의 의미들이 그 뒤의 상황전개 후에 어떻게 변모해 버렸는가를 연상작용을 통해 보여준다. 이 시의 대상, 즉 누군가 토해 놓은 오물은 시적 화자의 진술 속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영역으로 이동하면서 의미론적 전환(Semantic shiff)을 일으키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걸게 게워낸 자국'으로 보이던 것이 '밥알 55% ' 같은 내용물의 분석을 통해 그 오물의 주인이 소시민임을, 그리고 이런 빈약한 안주로 과음을 해야했던 그의 아픔을 암시하고 끝에는 이 같은 아픔이 '우리의 지상의 양식'이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이것도 시인가'하고 의아해할 1), 2)와 같은 양식파괴의 형태로 황지우는 상황이 규정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그는 다소 우회적인 효과를 통해 이 침묵의 영역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같은 상황하에서 민중에 대한 직설적인 친화력을 지식인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진실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도피주의적인 지적 조작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세계의 불모성에 대한 황지우의 분노, 야유, 풍자가 현실극복의 전망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맹렬한 비판들에 그런 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황지우의 시가 현실의 질곡과 한계를 반대한 몸부림만 보여줄 뿐 현실극복의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없다는, 그래서 역사적 비관론에 빠져 있다는 비판들은 먼저 시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황지우의 입장과 변별되어야 할 것이다.


황지우의 시는 '시를 노래한다'는 식의 심미적 자율성에 대한 집착을 경멸하지만 일단 우리의 사회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시가 현실의 질곡과 한계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태도를 보인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당연히 공적인 이데올로기와 또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어야 하기에 시가 사회현실 속에서 하나하나의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 할 때에는 그것은 기존의 체제가 조장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거짓화해에 편입되는 것이며 '당연히 있어야 할 반대주장'이 되는 것이다.


황지우가 인식하는 시의 진정성은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에 끊임없이 반성의 계기를 지어주는 변증법적 긴장이다. 시는 이 진정성을 위해 '한 시대를 감시하는' 끝없는 질문의 형태, 끝없는 부정의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황지우는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한 시대가 가고 또 한 시대가 왔지만 우리의 동시대와 맺어진 것은 악연입니다.


나는 물러날 길이 없습니다. 도저히, 그러나.


한 시대를 감시하겠다는 사람의 외로움의 질량과 가속도와 등거리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죄의식에 젖어 있는 시대, 혹은 죄의식도 없는 저 뻔뻔스러운 칼라 텔레비젼과 저 돈범벅인 프로야구와 저 피범벅인 프로권투와 저 땀범벅인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와 그리고 그때마다의 화환과 카프레이드 앞에


---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끝부분



우리는 이 시에서 황지우의 거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는 양식파괴의 효과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시를 쓰는 자신의 행위가 풀려날 길 없는 '한 시대를 감시하는' 것인 이상 전통적인 시문법이니 음악이니 하는 문제는 그에게 무의미하다. "저 뻔뻔스러운 칼라 "에서 그가 가진 현실인식의 일단을 보거니와 황지우는 이 혐오스런 사회현실이 우리에게 가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억압을 드러내기 위해 기존의 사회가 규정하는 시적 정식을 넘어 새로운 전위적 형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이 황지우가 믿는 시적 진정성이다. 우리가 관습 속에 규정짓고 있는 시는 규정지워졌다는 것. 그 자체가 기존의 사회현실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에서 보면 지금 '시란 이런 것이다'를 규정하는 기존의 지적 권위는 혐오스런 현실의 체제와 표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며 당연히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알고 있는 장르의 계급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황지우의 믿음을 뒷받침한다. 서사문학이 봉건귀족사회의 한 전형이며 소설(Novel)이 근대 부르조아 계급의 지적 산물임을 밝혀낸 이론들은 모든 장르는 계급적 실존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요, 가사, 판소리의 고유한 전통에 외세와 함께 갑자기 등장한 우리의 시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존재하려는 황지우의 시가 기존의 시에 대해 반전통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상에서 황지우가 가진 부정적 현실인식이 장르의 계급성에 관한 인식을 매개로 시적 형식과 이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면 황지우의 시가 갖는 이같은 현실인식과 시적 형식의 대응구조는 어떻게 구체화 될 수 있을까?



3. 별개의 것이 되기와 그 변모. -----------



시는 해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앞서의 논의들은 최근 황지우의 시에 대해 제기 되었던 많은 비판들을 되새기게 만든다. 특히 황지우의 시가 현실극복의 구체적인 전망을 던져주지 못한다는 민중문학쪽의 관점은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황지우가 지적조작의 시에 의해 성취하는 것이 단지 개인적 구원에 지나지 않음을 뜻한다. 개인적 구원은 가짜 구원이다. 사회전체의 구원이 없이 개인적 구원은 실제로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 )



결국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지금 이곳'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며 지적 조작에 의한 문득 벗어남은 자기 기만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 성민엽, <시적 지성의 두 모습> {우리 세대의 문학2}



이러한 비판은 시가 삶에 대한 공동체적 문제의 해답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시의 진정성에 대한 이런 인식은, 그러나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찍이 20년대 임화가 "문예비평에서 조선적 성격의 가장 중요한 점을 폐쇄된 정치비평, 사회비평의 한 개 방수로(放水路)"라는 데서 찾았듯이 사회 상황이 경직될 때마다 이같은 인식론상의 태도는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시가 정말로 사회적 구원을 성취할 수 있을까 하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만약 그럴 수가 없다면, 시는 그 시대 그 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부정하고 질문할 뿐이라는 위의 인용에서처럼 '자기 기만적인 환상'으로 매도되고 있는 일련의 시들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바로 위의 평론이 인용했던 다음 두 시를 살펴보자.



1)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파리는 파리목숨입니다.


이제 울음소리도 없습니다.


파리 여러분!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 {에프킬라를 뿌리며} 전문



2)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낄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끝부분



황지우의 제1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나오는 1) ,2)의 두 시들은 그의 시세계 전체를 관류하는 폐허적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인간'이란 말은 정말 말 뿐이고 실제로는 모두가 파리목숨인 초토, 이것이 황지우가 보는 우리의 현실이다. 어떠한 인간적인 행위도, 거부의 '울음소리도 없는' 이 땅에 대한 절망이 그의 메시지로 파악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쉽게 말해 여기는 사람 살 곳이 못된다 운운하는 이런 진부한 이야기가 어떻게 독자들의 눈에 강한 새로움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그가 형식파괴적 새로움이 갖는 독특한 진술방법, 즉 문제에 대한 일차적인 반추를 포기하고 과감히 별개의 것이 되기를 시도한 데에 있다. 그의 메시지는 작자 자신과 상황이 시적 화자로부터 별개의 것이 됨으로써 반성적 자아와 반성되는 자아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관계라는 새로움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1)의 예에서 두드러진다. 시대의 총체적인 착취에 의해 비인간화된 우리가 파리에 비유된다. 여기는 초토라고, 파리는 파리목숨이라고 얘기하는 시적 화자는 분명히 파리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있다. 이 1행에서 4행까지의 진술이 시대의 억압에 아파하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동일시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시적 화자는 파리에게 --다시 말해 시인 자신을 포함한 우리에게 에프킬라를 뿌리는 것이다. 시적 화자를 세계내 존재(In-der-welt-sein)로서의 시인과 별개의 것으로 만드는 이 5,6행의 진술이 '우리는 파리목숨'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냉소주의에 새로운 긴장을 집어넣고 있다.


2)의 예 역시 낭만적 아이러니를 통해 상황과 시적 화자가 별개의 것이 되고 있다. 이 시의 공간적인 배경은 영화관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그러나 그 배경이 단순한 영화관이 아니라 우리의 관료주의 사회를 암시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기존의 사회체제는 애국가 앞에서 기립한다는 체계적 장치를 통해서 전국민을 관료화하고 국민적 통합을 달성하려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적 화자는 그 애국가의 영상 속에서 상황과 별개의 것이 되는데 그는 을숙도를 나는 새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세상을 떼어 메고 이 세상 밖으로 뜨기를 꿈꾸는 것이다.


폐허적 현실에 대해 별개의 것이 됨으로써 자신의 현실인식을 새로운 질문의 형태로 제시하는 황지우의 시는 제2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로 옮겨오면서 더욱 깊이를 더해간다. 시인 자신의 모습이 {활엽수림에서}처럼 피상적이고 단편적으로 드러나던 제1시집과 대조하면 무엇보다 시속에 생활이 풍부해지고 자기 부정과 자기반성의 과정을 통해 현실을 보는 그의 눈이 따뜻해지고 있다.



1)

나는 UHF방송을 즐겨 청취한다. 특히 '자연의 신비' 같은 프로에서 나는 알바트로스새가 어떻게 암컷 수컷을 찾고 교미하고, 새끼낳고, 겨울을 나고, 봄에는 마젤란해협으로 돌아오는가를 유심히 보았다.


일주일 전 그 집 대문 앞에 '조선일보 사절' 이 붙여져 있었는데. 오늘 아침 그집 대문 앞에는 '조선일보 절대사절'이라고 붙여져 있었다.


--- {그들은 결혼한지 7년이나 되며} 중에서



2)

겁부터 난다. 나는 눈을 감고 가수(假睡)상태에 들어간다.


너 민중없는 민중주의자, 가짜! 냄새 나! 꺼져!


나는 왜 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적전에서 자꾸 뒤돌아보는가. 80년대는 막장이냐. 최전선이냐.


너 살아 넘어갈래, 죽어 돌아올래. 그렇지만


돌아보라 가장 현실적인 색은 탄색(炭色)이다. 그대 손은 묻어 있다.


--- {박쥐} 중에서---



제2시집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1)의 시는 시집 전체를 통해 보이는 황지우의 커다란 변모를 시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시적 화자 '나'의 진술 속에 시인 자신이 두 개의 각기 다른 지각대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 '그'이며 또 하나는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본 '알바트로스'이다. "그들은 결혼한지 7년이 되며 아들 제 771104-156282와 딸 제 790916-244137호가 있다"라는 시의 시작에서 보듯이 별개의 것이 된 시적 화자의 시각은 철저히 일상적이고 객관적인 자기성찰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1)의 인용부분처럼 그 시각은 주관적인 쪽과 객관적인 쪽으로 번갈아 나타나면서 자기존재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다. 일찍이 보들레에르가 그의 시 {알바트로스}에서 현실의 논리에 순응하지 못하고 고통과 괴로움에 사는 시인의 운명을 지상에 떨어진 알바트로스새에 비유했던데 착안하여 티브이 브라운관에 나타난 "교미하고, 새끼낳고 겨울을 나는" 알바트로스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묘사하다가 다시 전혀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선일보 절대 사절'이라는 팻말을 얘기하며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같은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은 2)에 와서 극적인 자기부정과 반성으로 발전하다. 앞서 별개의 것이 됨으로써 현실을 새롭게 보여주고 부정하려했던 황지우에겐 이처럼 '적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적전에서 자꾸 뒤돌아보는' 자기반성(Selbstreflexion)의 과정이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현실에 적용했던 부정의 정신은 똑같은 논리로 자신의 민중적 세계관과 '위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존재가 일치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부정은 '너 살아 넘어갈래 ' 같은 희언 (word fun)의 효과를 통해 자기비하나 자학에 빠지지 않고 '가장 현실적인 색은 탄색' 이라는 인식을 낳는다. 바로 이것이 불모의 반대라는 표현아래 흔히 황지우와 같이 묶여지는 박남철과 다른 점이다.


각양각색의 형식파괴로 인해 치열하다 못해 차라리 전투적이었던 그의 부정정신은 "이제는 중산계급이 되어버린 즉 속악화된" ({상징도(象徵圖)찾기}) 자기 존재에 그 반성의 눈이 미치면서 세계에 실재하는 타자(Otherness)와 자아와의 근본적인 화해를 바라게 된다. 우리는 가장 최근에 씌여진 그의 시들에게 이같은 인식의 변모가 보다 온건하고 절제된 시적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내 관절속으로


산 너머 먼 비가 오려고 할,


내 눈깔에 잔뜩 낀 먹구름


뒤안 대밭에 이는 소란한 부채소리


대숲 상단에 새로 돋는


불붙는 연초록


외치고 싶도록 눈부심


바람타는 숲 전체가 괴로움


이속에 집짓고 삶


{담양} 전문



세계의 근본적인 화해를 바라는 그의 갈망은 "바람타는 숲 전체가 괴로움"이라는 포괄적인 인식에서 출발한다. 담양대숲으로 상징되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시대상황의 부정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산너머 먼 비'가 오려 한다. 그러난 이것은 더 이상 별개의 것이 아니라 '내 눈깔에 잔득 낀 먹구름'인 것이다.


이렇듯 세계와의 유대와 화해를 갈망하는 시인의 인식변화를 고찰해보면 우리는 가장 최근의 시를 수록한 제2시집 후반부에서 왜 그의 양식파괴적인 전위성이 사라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황지우 시의 객관적 의의-------------



지금까지 우리는 황지우의 시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시적 형식의 관계를 이 시대의 사회상황에 대응하여 나타난 시적 진정성에 관한 그의 견해,그리고 '별개의 것이 되기'로 규정한 양식파괴적 새로움과 자기반성에 따른 그 변모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황지우의 작품들은 시가 해답이 아닌 철저한 부정정신을 통한 질문의 형태로 존재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존의 형식을 탈피한 새로움을 보여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고, 또 이러한 태도로 인해 별개의 것이 됨으로써 얻어진 부정정신의 논리적 환기력이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 속에 심화됨에 따라 그 시적 형식이 변모해 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폐허적 현실인식과 별개의 것이 되기'에서 '자기 반성과 절제된 시적 형식'으로 귀결되는 황지우의 시세계는 현실인식과 시적 형식의 포괄적인 대응구조를 상정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리고 시의 진정성과 관련하여 황지우의 시는 어떻게 가치평가 받아야 할 것인가? 이 같은 질문은 예술적 창조의 본질로부터 시적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 양상을 철저히 분석하는 데서 그 답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여기서는 지면상 앞서 논의된 황지우의 시세계에 국한하게 되겠다.


시가 자아를 세계에 드러냄으로써 자아의 세계인식을 확인하고 질문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은 황지우의 경우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에 앞서 전제해야 할 것은 그 세계가 관념적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과 접맥되어 있어 항상 시적 자아와의 불일치가 예상된다는 점이다.


첫째 양상은 자아가 만나는 세계가 부정적으로 심지어 페허적으로 인식 될 때이다. 시인은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에 끊임없이 반성의 계기를 지어주는 변증법적 긴장을 통해 경험적 현실세계를 부정하게 되고 이러한 부정의 부정은 의미없고 뒤틀린 기존의 세계가 규정한 시적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경험적 현실세계를 파괴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이같은 시인의 시도는 여러 가지 언어적 낯설게 하기(making strange)를 동원하게 되는데 풍자, 역설, 파격, 상황의 뒤틀림 등 황지우 형식파괴적 시들에 나타나는 모든 기교들이 그것이다.


둘째는 첫번째 단계에서 나타난 부정의 부정(dir Negation der Ndgation)이 세계의 부정적인 모습을 "이제는 중산계급이 된, 속악화"한 상태로 내면화한 자기존재에까지 그 눈이 미치면서 치열한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의 내면세계를 갖추게 될 때이다. 이렇게 되면 그는 뒤틀리고 얽어매인 세계의 여러 타자들과의 근본적인 화해를 위해 자기식의 전망을 보다 일상적이고 절제된 형식을 통해 내보이게 되는 것이다 .


이런 맥락에서 시의 진정성을 상정하고 그와 관련하여 황지우의 시를 가치평가하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1장 서두에서 인용했던 성민엽의 비판처럼 시는 사회적 구원과 개인적 구원 중의 어느 하나를 양자택일하고 그 하나를 첨예화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형상화를 통해 우리를 억압하는 세계의 경험적 리얼리티를 부정하는 것이다. 부정적이고 페허적인 현실의 폭력 속에 물화(物化)된 개인의 개성과 왜곡된 공동체적 삶은 시에 있어서 오로지 꾸준한 부정의 작업을 통해 지양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황지우는 시가 갖는 부정정신이라는 총체적인 본질을 통해 현실세계와 시적 형식에 대한 첨예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그 질문은 80년대를 보는 그 나름의 현실 인식과 그에 대응하는 시적 형식 속에 단단한 의미망을 획득하고 있다고 본다.


이제 이 글을 맺으면서 한마디 부언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행한 논의의 제측면이 황지우 시의 비밀을 밝혀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이 갖는 총체적인 의미는 어떠한 비평적 논점으로도 완벽히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가 지금까지 전개해 온 이 논의도 그의 작품이 갖는 총체성에 비한다면 극히 미미한 것이며 단지 그 객관적인 의의의 일단을 밝히는 데 불과한 작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황지우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려는 이유는 그의 시가 주는 감동의 세계와는 또 다른 이 객관적인 논리의 세계가 '문학의 자리넓힘'이라는 입장에서 한가닥 의미있는 작업임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세계와의 근본적인 화해를 갈망하게 된 황지우의 시가 아직까지 역사적 유대감의 전망은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 땅의 현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문제제기와 성찰의 위해서는 이땅의 현실을 형성해 온 ' 이땅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부정과 극복의 정신들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현실세계와 시적 형식의 밀접한 대응구조를 띠고 전재되는 황지우의 문제의식이 '역사'와 ' 이 땅의 현실'과의 만남이 성취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가리라 믿는다.





황지우의 세상을 보는 눈

-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



황지우의 시는 솔직하다.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를 읽으면 시인 황지우의의 일상이 드러난다. 시인의 어머니는 아프고 아내는 시인에게 잔소리가 많고 시인은 전시회를 준비하는 예술가이고 시나리오 때문에 타르코프스키를 만나기도 했었다는 것이 시집 속에 드러나 있다. 시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사회는 개인이 만들어 가는 것이고 개인의 사회에 대한 반응을 적절한 어휘로 표현해 내는 것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어떤 감흥을 일으키면 금상첨화임에 틀림없다. 황지우의 시가 그런 경우이다. 보기 드물게 최근 발표된 시집 중에서도 빛난다. 그의 일상성의 시가 압축된 시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를 먼저 읽어보면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 거실이 飜譯劇 부대 같다.

중앙에 가짜 가죽 소파 하나, 그 뒤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고, 세잔風 정물화 한 점, TV 세트,

窓을 향한 幸運木 한 그루, 그리고 폼으로 갖다놓고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書架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

그렇지만 이 무대에서 번역될 만한 비극은 없다.

(96-97쪽, 시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의 일부)



하루동안의 일 - 아침에 세수하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시인의 살아가는 곳이 번역극 무대가 되고 TV나 아내는 주요 등장인물이 되어 버린다. 이제는 무너진 소련의 모태가 된 마르크스의 책들은 단지 멋으로 사 놓았다는 것을 회상하기도 한다.



나는 이부자리에 떨어져 있는

치모 한가닥, 오래 내려다보고 있다가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 들어낸다.

(27쪽, 시 '8월16일' 일부)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깊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30쪽, 시 '수은등 아래 벚꽃'의 일부)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 놓았구나

(39쪽, 시 '재앙스런 사랑'의 일부)


이제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다 만났다고 생각하는데도

왜 좋은 여자들은 계속 나타날까, 이런 의문은

가끔 비행기 탈 때면 들어.

고향에서 사느니 鄕愁가 더 나아.

(92쪽, 시 '우울한 겨울2' 일부)




이렇게 황지우을 통해 세상을 보고 또한 우리는 한 개인의 세상을 보는 눈을 드려다 볼 수 있다. 그의 사상에 동의하면 시가 감명 깊을 것이고 사상이 다르다면 그를 인정해 주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초라해지는 한 개인을 발견하기도 한다. 요즘 같은 어려운 시대는 더욱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을 느끼는 사람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황지우 역시 예외는 아닌데, 황지우는 지구 위에 저 혼자 있는 것 같다는 그대의 편지를 두 번 읽기고 하고(44쪽) TV도 재미없고 비디오도 재미없어져 끝내는 자꾸 혼자 있고 싶어진다는 비밀이 생기기도 하고(130쪽) 아내에게서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85쪽) 누군가 늘 시인을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생기기까지 한다(82쪽).


이런 세심한 반응은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는 하지만 황지우의 경우, 이런 짐이 아니길 바란다. 짐이라면 그에게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세상을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예술하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시나리오처럼 쓰여진 시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젊은 여자 목소리: 어딜 가나 꼭 날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씩

있어. 어쩌지? 종이컵 커피는 안 마실래.

.

.

.

또 다른 젊은 남자 목소리: 하루종일 섹스만 생각나. 뇌가 다 녹아

버릴 지경이야

(118-119쪽, 시 '지하철역에 기대고 서 있는 석불'의 일부)





대지의 순정

고은 (시인)



우리 황지우를 만나노라면 몇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우러난다. 그 하나는 그를 만나기만 하면 만사에 대한 안도감이 생겨나서 이 세상에 대해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신뢰감이 아니라 일종의 불가사의에 가까운 풍요에 해당한다. "황지우의 삶만큼 궁핍의 시대를 넘어선 초궁핍의 도량을 갖춘 시인이 어디 있을까" 하고 나는 여러 시인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에게는 언제나 슬프도록 넉넉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담고 있는 푸짐한 몸조차도 그 마음이 만들어내는 마음의 기구인지 모른다.


어느 때는 추운 겨울의 저녁 무렵에 헤어지면서 저 젊은 것이 너무 큰 궁리를 트고 있구나 어쩔거나 하고 나는 걱정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이 멀어지면서부터 나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나버렸거나, 아니 남아연방에라도 가 있는 것처럼 가슴이 저리는 그리움으로 달떠버리는 것이다. "에이 지우!"하고 그의 뒤를 쫓아가 그의 등짝을 탁 치고 싶은 것도 그래 본적이 없기 때문에, 여태껏 그에 대한 그리움 안에 포함된 예감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나는 시인 지우를 사랑해 마지않는다. 그에게 천부적으로 결핍된 사실주의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사실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달리, 그의 자유에 대한 무한한 질곡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질곡까지도 자유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1980년 5월 전국 비상계엄령의 극한상황에서 죽도록 얻어맞아서 같은 유치장에 들어 있던 강만길 교수가 피범벅이 된 볼기짝을 어루만지고 주물러줄 때도 그는 무던히도 어떤 무위를 자유를 누렸을 것이 틀림없다. 고통을 제례로 삼는 한 젊은 시인의 아름다움은, 그가 미학을 전공한다는 것과 동떨어져서 실로 처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도 외칠 줄 모르고 울부짖을 줄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그는 시 한 편이 나올 때 여러 의식의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의 촬영은 마지막 현상에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하는데, 이 과정이야말로 그의 독창적인 비극이다.


나는 이런 황지우에게 무엇이든지 맡기고 싶다. 예술보다 인생을. 아냐. 인생보다 예술의 그 당돌한 직입!을



우리 황지우를 만나노라면 또 한 가지 생각을 물리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위태위태하다. 내일 한 시인이 시를 내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바로 선방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에서도 그는 고립되고, 선방의 파초 잎새 아래서도 고립된 어정쩡한 상태로 한 무사승이 되어, 스승도 동반도 없이 있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되기 이전에 이미 선의 지경에 들어가 마음껏 노닐고 있는 성부르다. 다만 화두 하나를 붙들고 단전에 화두를 심어놓기보다는 몇 천의 공안, 몇 천의 화두를 두루두루 들어다 놓았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도 인연이 다하면 터벅터벅 산을 내려와, 이제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옛 삼거리 주막에라도 들러 그 주막에 앉아, 왱하고 날아오는 파리 두어 마리와 더불어 궂은비 오는 들 가운데 왜가리나 바라보면서 담뿍 취해서, 점점 그의 얼굴은 취한 부처 얼굴로 웃음이 번져 나올 것이다. 안주 한 번 집어먹지 않은 채.


사실인즉 그는 타고나기를 비승비속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만큼 일찌감치 이 세상의 모순과 황홀에 눈떠 그것을 터득한 소년기를 지나, 그가 시인으로 나오자 마자 그는 퍽이나 늙수구레한 덕망을 이끌고 원융과 2분법의 사고를 치러내면서, 그에게는 동서양이 하나의 어항 안에서 헤엄치다가 동작을 멈추다가 하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는 입산의 위험이 있고 산에서는 하산의 위험이 있다. 교묘한 것은 엘리어트가 에즈라 파운드를 찬양한 것 이상으로, 그는 이런 두 위험 가운데서 정말 교묘하게 그의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교묘함은 퍽이나 단호하다. 그가 <운주사>에서 바로 <대인동>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과정은 일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은 진흙덩이와 잘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그가 진흙 이불을 덮는다 해도, 그가 피워낼 것은 한 송이 내지 여러 송이 연꽃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이 연꽃의 아름다움이 관념의 미학으로 죽어버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연꽃과는 십만 팔천 리나 떨어진 진흙덩이와의 접촉을 지향한다. 생각해보라. 연꽃이 연꽃만이라면 이미 꺾어져 죽은 연꽃, 시들어가는 연꽃인 터이다. 하지만 그 꽃이 진흙구덩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살아 있는 황홀이 아닌가. 그래서 황지우의 관념은 용해에 기여한다.



우리 황지우를 만나노라면 어디 이 따위 따름이겠는가.


그는 대지의 시인이다. 그에게는 이런 정의가 하나의 완결로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요령부득의 행로를 무한히 보장하는 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의 길에는 종국적인 목적이 없다. 가는 것과 오는 것의 분별도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는 을지로를 광주항쟁의 전사 윤상원의 이름을 따서 윤상원로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러나 지극히, 비정치적이도록 1차원을 벗어나 있다. 그런 길을 가는 그에게는 실지로 어떤 약속이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지상의 을지로이건 지하철의 을지로이건 그는 그 길을 간다. 그 을지로에서 광교를 건너 종로의 어느 곳에 가야 하는데, 이는 종로에서의 약속 때문이다. 그러는 그는 상투적으로 종로를 박관현로라고 부르기를 꿈꾸지 않는다. 아무튼 종로 2가의 약속장소로 그는 간다. 약속을 도중에 잊어버리지 않는 것으로도 그는 믿을 만하다.


그런데 그 도중에 다른 친구를 만난다. 그 친구와의 만남은 그의 시에서처럼 먼데서 오고 있는 <너>인지 모르는데, <너>를 기다리는 <나>도 감으로써 만나는 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친구와의 만남 때문에 종로에 가는 약속장소를 까먹거나, 우선 그런대로 그 약속을 시간으로부터 분리시켜 보류하고, 새로 만난 친구가 이끄는 대로, 마치 그 친구와의 만남 때문에 이에 앞서 약속이 있었던 것처럼, 어느 술집에 들어가 항상 젖어 있는 그의 눈을 껌벅이며 전혀 비시적인 현실을 시적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하나의 만남도 그냥 내쳐버리지 않고 소중한 것으로 보내고 나서, "아 이제부터 약속장소로 가야 한다"고 일어선다. 그가 종로의 약속장소에 갔을 때는 이미 거기에 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떠나버린 뒤였다. 그는 그 공허를 이기적으로나 이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대체 그의 마음 속에 이럴 경우 그 무엇이 들어가 있는 것이가. 아주 잘 그려진 만다라와 같은 무위이리라.


이런 시인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두 가지를 다 준다. 자유의 행복과 음모의 불가능성이 그것이다.



우리 황지우를 만나노라면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시대의 속도와 함께 가버리고 그 이름만 남은 것! <순정>이 아직 그에게는 온전히 남아서 <순정의 멸종>을 막아내고 있다.


아마도 어떤 사려깊은 여자가 시인 황지우의 눈을 보게 된다면 잠깐 보고 말 수 없을 것이다. 그 눈이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우수와 무조건적인 평화, 그리고 남에게 털끝만치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자존심 따위에 사로잡혀 하염없어할 것이다.


여기에다 그의 운명에서 떼어낼 수 없는 순정이라니. 드 때문에 그는 퍽이나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생각건데 그의 시가 이른바 형태 파괴적이든 무엇이든, 거기에 거의 돌연변이와 같은 돈오주의적 해학이나 풍자의 자취가 역연한 바 있고, 이는 고전주의적인 운율 따위로부터 자유분방한 자동서술에 도달하는 역량은, 필경 그의 비극성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그를 흉내내는 일련의 시인들의 그것이 상당한 헛수고를 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즉 비극정신 내 비극의 미학을 다지지 않은 상태의 파격이란, 경망스러운 작위의 유희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시인의 순정과 해학이 시인적 품성과 시적 품격을 지켜줄 때, 거기에 황지우의 빗소리와도 같은 시의 미학이, 그가 터뜨리는 철학적이기까지 한 직관의 배열은, 그의 능란한 시각예술적 감각과는 달리 어떤 음악의 단계를 실현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80년대 이래 줄곧 그때그때의 시대적 격동기에 그 자신의 몸을 부딪치면서도, 결코 어느 편에도 불화를 일으키지 않으려다가 그 대가는 화해의 형이상학으로밖에 받아내지 못하면서, 순정 가운데서 떠나고 순정 가운데서 지치기도 했다.


이 같은 시인의 순정은 바로 그 고향의 황토 산야에서 얻어진 것이고, 역사적으로 광주항쟁과 깊이 관련되고 있다.


그는 몇 권의 시집을 낼 때마다 그의 동료적 찬미 가운데로부터 점점 그의 시에 대한 지지를 넓혀감으로써, 80년대 이래 남한 시단의 대표적 존재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둔탁하기조차 한 몸짓은 이런 위상에까지도 둔탁하다. 그는 시인 그 자체로서만 만족하고 있다.


마치 그가 한 남편으로서, 한 아버지로서 완벽하지 못한 대신, 시인 자신에게도 허다한 연기와 나태를 동반하는 작업이면서도 그 모든 역할을 그 대신 누군가가 해주는 것처럼 꾸려나가는 사실은 거의 이적에 가깝다.


나는 시인 황지우를 사랑한다. 이 말을 몇 번 거듭해도 싫증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그것은 그의 시가 쌓아온 성과와 함께 앞으로 그의 시가 쌓을 빛나는 성과가 반드시 우리 시의 역사에 대해서 한 흐름을 이루어나갈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가 추구하는 선방의 계송세계와 현실의 구체적 정서 변용을 아우르며 새로운 시의 전망을 펼칠 때, 거기에 시인 황지우의 한 국면이 완성될 것이다.


우리 황지우는 축복을 할 수 있는 시인이다. 그 공덕으로 그는 끝내 커다란 축복 가운데 살 것이다. 그것은 미래이기보다 약속된 현재이다.



[황지우 시인의 시집에 얽힌 일화]

/하종오


황지우 시인의 시집 ‘어느날 나는 흐린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 얽힌 일화입니다.


황 시인은 이 시집을 묶으면서 제목을 시집에 실린 시들 중 한 편의 제목인‘등우량선(等雨量線)’으로 하자고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출판사 편집부 담당자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런 제목은 안 된다는 거였지요.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시집은 근래 드문 베스트셀러 시집이 됐고, 덕분에 황 시인은‘내 집 마련’까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울시내 대형 서점들이 올해 상반기 베스트셀러를 발표했습니다. 황 시인의 시집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목록을 보고 든 생각 때문입니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종합 50위에 든 시집은 1권, 종로서적이 발표한 종합 50위에 든시집은 5권이나 됩니다.


정말 한국은 대단한 ‘시의 나라’입니다. 1년에 발간되는시집만 1,500여 권입니다. 그 중 몇몇은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지구상에 이처럼시를 사랑하는 국민은 없다”고 외국 시인들은 부러워합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한국을비롯해 칠레, 콜롬비아 같은 남미 국가들처럼 자본주의가 완성되지 않은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기현상”이라고비꼬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이번 베스트셀러 목록에 든 시집들 중 이른바 문단에서 인정받는 시인,시집이 발표되고 언론매체나 문학지에서 리뷰가 된 시집은 단 한 권도 없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시집이 만약 ‘등우량선’이라는어려운 제목으로 나왔다면 그처럼 베스트셀러가 됐을까요? 아닐 겁니다.


한편으로 보면 이건 우리 문단의 시인들이 대중의정서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큰 우려가 드는 것은 대중적인 시집이 가져올 그릇된 영향입니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들은주로 청소년들의 ‘팬시 상품’처럼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과서에 실린 빼어나다는 시들조차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입시를위한 해체의 대상이 되는 판국에,


‘정신을 담는 최고 수준의 예술 형태’라는 시가 대중의기호에 영합해 아무렇게나 ‘유통’되는 상품으로 전락해서는 안될 겁니다.


“시를 읽어도 세월은가도, 시를 읽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러나 시를 읽으며 보낸 사람에 비해 시를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낸 사람은불행하다.”


한 젊은 시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값싼 언어에만 노출되는 세월은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리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생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출처 : 좋은시
글쓴이 : 詩人의 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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