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국문인협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문학을 좋아하는 많은 애독자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의 모국 대한민국의 많은 시인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시인입니다. 이 자리에는 저처럼 시를 쓰면서 이 이승에서의 삶을 꾸려가는 분들이 많이 와 계신 것으로 압니다. 지금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저의 가장 큰 소망은 지금까지 썼던 그 어떤 시보다 더 좋은 시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단 한 편이라도 길이 남을 명시를
쓰고 싶은 소망 때문에 낮에는 전전긍긍하고 밤에는 전전반측하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이 시를 쓰고 계신 여러분께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여러 날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법 10가지 전수입니다. 제가 1984년에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7권의 시집을 내면서, 또 1992년부터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시작법을
가르치면서 익힌 노하우를 전해 드리는 것으로 강연을 대신할까 합니다. 거창한 강연이 아니라 아주 소박한 내용이어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과 함께 시를 감상하면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인용하는 시는 졸저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시와시학사)에서 다루었던 것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즉, 그 책을 통해 했던 말을 중심으로 강연을 해볼까
합니다.
1. 시는 우리말의 보물창고이다
여러분과 함께 감상해 볼 첫 번째의 시는 김진완이란 젊은 시인의 등단작인 [기찬 딸]입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꽤나 옛날 일이겠지요. 시적 화자의 외할머니가 딸을, 즉 자신의 어머니를 분만하는데, 바로 그 장소가 달리는 기차 속이었습니다.
다혜자는 엄마 이름. 귀가 얼어 톡 건들면 쨍그랑 깨져버릴 듯 그 추운 겨울 어데로 왜 갔던고는 담 기회에 하고, 엄마를 가져 싸아한 진통이 시작된 엄마의 엄마가 꼬옥 배를 감싸쥔 곳은 기차 안. 놀란 외할아버지 뚤레뚤레 돌아보니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들뿐이었는데 글쎄 그게, 엄마 뱃속에서 물구나무를 한번 서자,
으왁!
눈 휘둥그런 아낙들이 서둘러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자 남정네들 기차 배창시 안에서 기차보다도 빨리 '뜨신 물 뜨신 물' 달리기 시작하고 기적소린지 엄마의 엄마 힘쓰는 소린지 딱 기가 막힌 외할아버지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인데요, 아낙들 생침을 연신 바르는 입술로 '조금만, 조금만 더어' 애가 말라 쥐어트는 목소리의 막간으로 남정네들도 끙차, 생똥을 싸는데 남사시럽고 아프고 춥고 떨리는 거기서 엄마 에라 나도 몰라 으왕! 터지는 울음일 수밖에요.
박수 박수 "욕 봤데이." 외할아버지가 태우신 담배꽁초 수북한 통로에 벙거지가 천정을 향해 입 딱 벌리고 다믄 얼마라도 보태 미역 한 줄거리 해 먹이자, 엄마를 받은 두꺼비상 예편네가 피도 덜 닦은 손으로 치마를 걷자 너도나도 산모보다 더 경황없고 어찌할 바 모르고 고개만 연신 주억였던 건 객지라고 주눅든 외할아버지 짠한 마음이었음에랴 두말하면 숨가쁘겠구요. 암튼 그리하야 엄마의 이름 석 자는 여러 사람들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즉석에서 지어진 것이라.
多惠子.
성원에 보답코자
하는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
빌린 돈 이자에 치여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의 엄마 다혜자씨는요,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
여장부지요
기찬,
기―차― 안 딸이거든요.
― 김진완, [기찬 딸] 전문 {창작과비평}
(1993년 여름호 신인당선작)
승객이라고는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을 가진 농투성이들뿐이지만 이들은 낯선 아주머니의 차내 분만에 한마음으로 동참합니다. 아낙들은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고, 남정네들은 뜨신 물을 구해오고, "벙거지"는 미역 살 돈을 내놓고, 두꺼비상 여편네는 산파 노릇을 해 무사히 한 생명은 "으왕!"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합니다. 이런 여러 사람의 은혜로 태어났다 하여 엄마 이름이 다혜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3연이 보여주는 여성적, 혹은 모성적인 건강함은 가슴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또한 꽤 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1연과 3연 사이에 위치한 "으왁!"이란 의성어가 환기하는 생명 탄생의 고통과 경이로움, "기찬"과 "기―차― 안"이라는 비슷한 음을 이용한 유머 센스 등은 이 시를 명작의 반열에 올리는 데 합심하여 공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오신 어머니가 소주 한잔 마시고 내뱉는 말,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에 있습니다. 참 한국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서민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어머니의 힘, 아니 한국 아줌마의 힘을 나타내는 그 말이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도 되어 있다면 이 시의 맛은 반 이상 줄어들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 시야말로 사투리와 순우리말의 보물창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월과 영랑이, 백석과 정지용이 왜 위대한 시인인가 하면 한국적인 정서를 한국적인 어투와 어조, 사투리와 순우리말로 표현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질료인 언어를 구사할 때, 사투리와 순우리말이 지금은 쓰지도 않는 낡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잘 찾아내어 시에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역만리에서 모국어를 구사하는 문화의 파수꾼이며 창고지기입니다. 언어 학대가 시인의 특권인 양 언어를 못살게 구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미국에서 살면서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습니까? 몸은 비록 미국에 있지만 시인인 이상 모국어를 잘 갈고 닦는 언어의 세공사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2. 시는 특이한 체험의 산물이다
김광림이란 시인이 있지요. 1929년생이시니 올해 연세가 일흔여섯입니다. 함경남도 원상 출생이신 시인은 이른바 이산가족의 일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남북분단의 아픔을 남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계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시가 전개되는데, 시인이 겪었던 일이 어떤 영감이나 상상력, 혹은 비유와 상징의 도움 없이 그야말로 곧이곧대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중학 동창은
마지막 대작을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았단다
반세기가 넘어도 상기
'야' '자'로 통하는 사이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한때는 혀가 굳어져 제대로 말도
못했다며
다시 굳어지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
느닷없이 들고 나온
한마디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
간신히 기어드는 목소리로
----아니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금방 가슴속의 응어리가 터질 것만 같다.
----이 자슥아! 너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앞세워 우리 집에 찾아오셨단 말야
너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길래 나도 놀랐지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지만……
……'제 에미도 동생들도 다 모른다니 이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야'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하긴 그래
어머니는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말렸을까
남행열차를 탄 내게 마냥 손을
흔들어쌌던
누이의 모습이 지금도 삼삼한데
아버지의 노여움에
모두가 모른다고 잡아뗀 모양이다.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
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
기세가 등등해진 녀석은
취기까지 가세하여 사뭇
심문조다.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
그만 울먹이는 소리가 돼버렸는지
'야' '자' 하던
친구가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아냐 잘했어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
이승에선 다시 못 뵈올 부모님 생각에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리고 싶어
상기된 얼굴을 들이대자
이번엔 '야'
'자'가
잘못 눈물단지 건드렸나 싶었던지
시무룩한 목소리로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어쩌랴.
― 김광림, [괜한 소리] 전문 {열린시}
(1996년 4월호)
제목 '괜한 소리'는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중학 동창의 입에서 나온 두 가지 질문인 동시에, 시인 스스로 자신의 대답을 '괜한
소리'로 규정한 자탄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동창생 노인은 마지막 대작이겠다, 술을 마신 김에 평소에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어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늙은 시인 친구는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하고, 급기야 울음보를 터뜨릴 듯 상기된 얼굴이 됩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라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시의 제목이 '괜한 소리'가 된 것이겠지요.
두
가지 질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을 치고, 쓰리게 하고, 결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해 눈시울까지 뜨거워집니다. 수백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물음은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입니다. 청년 김광림은 아버지한테 탈향(脫鄕)의 이유를,
이향(離鄕)의 전말을 말씀드리지 않고서 남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종적을 감춘 아들의 소식을 알아보고자
딸을 앞세워 아들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시인인들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귀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말씀드리지 않았지, 그것이 영원한
생이별의 순간임을 알았더라면 작별의 인사도 고하지 않고 떠나왔겠습니까.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이 한 행 속에는 아버지의 정이 소복이 담겨
있는 정도가 아니라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흘러 넘치는 그 부정(父情)이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입니다.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친구는 일신의 안전을 위해, 혹은 시를
쓰겠다고 아버지한테 말씀도 안 드리고 고향을 떠난 시인 친구를 공박하며, 살아 계시면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묻습니다. 시인은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 속에는 살아 계실 확률보다는
돌아가셨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쪽에서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라고 자탄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뒤에 가서는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라고 자학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는
별다른 시적 기교를 동원하지 않고서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을 솔직히 털어놓아 깊은 감동을 준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 가운데 가슴아픈 경험이 있으면 솔직하게 고백해보십시오. 수치심을 동반한 기억도 좋습니다. 그 체험이 소소한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체험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자산입니다.
3. 시는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산가족으로서의 뼈아픈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지만 늙어가면서 느낀 쑥스러운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김광림의 시에는 민족사가 담겨 있지만 박남수의 시에는 일상사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 박남수는 미국에 이민을 와 작품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이라 여러분 중에 교분을 나눈 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 박남수, [훈련] 전문
시인의 아내는 자신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것을 예감하고서 홀아비가 될 남편을 위해 혼자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던가 봅니다. 그런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아내를 눈을 감았습니다. 이 작품은 흡사 일기를 시행으로 나눈 듯 시적 기교는 없지만 읽는 이의 가슴을 치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박남수 시인의 젊은 날의 시 가운데 [아침 이미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같은 눈부신 감각을 보여준 시를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는 노년에 들어서서 아주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지사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함으로써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습니다.
4. 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아야 한다
저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순수한 본성은 나한테 잘못을 한 타인을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 타인의 불행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넓게 말해 사랑이지요. 여러분은 신문을 읽으면서 혀를 차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혀를 차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마음이 시를 쓰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타인의 불행에 오불관언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 아닙니다. 다음에 감상해볼 시는 '95년 1월, 빚 때문에 영랑호에 와 자살한 한 가족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일가족 동반 자살의 뉴스가 전해지는 때가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해마다 정말 자주 듣는 뉴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한 결과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났지만 살아난 사람도 중태란 소식, 부도를 막지 못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가족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 또 어른은 살아나고 아이들이 죽었으니 이건 동반자살을 아니라 비속살해라는 등등. 자, 시를 읽어봅시다.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 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 이상국, [물 속의 집]
전문 {현대시학} (1996년 2월호)
어린아이들이야 자살에 자발적으로 동참했을 리 없고, 부모가(흔히 아버지가) 자식을 일단 살해한 뒤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인은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밝혀놓지 않았는데, 1995년 1월에 서른세 살의 남자가 빚 때문에 고민하다 그의 아내와 두 자식의 손을 잡고 영랑호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뛰어들었으니 그야말로 '동반' 자살입니다. 타인의 죽음이므로 시인은 1연에서 이 사실을 담담히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담담히?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제4행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에 이르면 시인의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확, 다가옵니다. 그 겨울의 눈보라는 영랑호를 눈앞에 둔 한 가족을 얼마나 떨게 했을까요. 이 비정한 세상에 남편 없이 팽개쳐질 두 새끼의 목숨까지 거둘 결심을 한 젊은 가장의 굳어 있는 얼굴까지 확, 다가옵니다. 인간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제2연을 쓰게 합니다. 시인은 자살의 현장인, 네 사람의 목숨을 삼키고도 여전히 고요한 영랑호에 고리와 청둥오리들을 보내 조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합니다.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즉, 이제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가족을 시를
통해서나마 한 번 부활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 속에다 집을 만들어서 말입니다. 한때는 단란했을 그들,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빚이 없었던 그
가족의 지난날을 생각하니 하느님이 다 무심하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시인은 하느님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상국은 시를 구상하는 동안, 초고를
쓰는 동안, 퇴고하는 동안, 신이 되었습니다. 시밖에 쓸 수 없는, 언어의 창조주가 말입니다.
미국에서도 폭탄
테러로 어린아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적이 몇 번 있었지요. 이런 소식을 접하고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어쩌지 못해 시 한 편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상국 시인은 자신의 무력감이 서글퍼 제3연을 썼을 것입니다. 제3연의 마지막 행에서는 시인
자신이 느닷없이 등장해 울고 있습니다. 죽은 가족이 시인이 아는 사람들이라 비보를 접하고서 울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는지, 혹은 신문 기사를
보고서 울고 싶었는지, 뭐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자가 이 시를 평하면서 센티멘털리즘이니 감상 과잉이니 하며 비판하는 것도 시인은
개의치 않기로 한 듯합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그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시작 행위를 하되,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렇게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일가족 동반 자살 소식을 접하면 아이들을
살해한 부모의 비정함에 분노하게 됩니다. 정 죽고 싶으면 자기네들이나 죽지 왜 애들을 죽여,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을까 하고 개탄한
뒤, 욕을 몇 마디 덧붙이고는 남의 일이기에 곧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국 시인은 젊은 부부가, 혹은 젊은 가장이 오죽했으면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했으랴 하는 생각에 이어진 연민의 정을 억누를 수 없어 물 속에다 집을 지어주고, 물 속의 집 뜨락에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게끔 하고, 화암사
중들에게까지 부탁하여 목탁을 치게 합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이 우리가 어찌 문학을 한다고 운위할 수 있겠습니까.
5. 시는 유머 감각의 산물이다
이상국의 시가 너무 비감하여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이번에는 유쾌한 시를 한 편 감상해봅시다. 미학에서는 아름다움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비장미, 숭고미, 순정미, 우아미 외에 골계미가 있고, 또 하나 미와 반대개념이면서 미의 일종인 추(the ugly)가 있습니다. 우리 시는 너무 점잖고 엄숙한 경향이 있습니다. 언중유골이라고, 엄숙한 가운데서도 농담을 할 줄 알고, 농담을 하는 중에도 뜻을 새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도 시를 읽다가 미소를 짓거나 씩 웃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팔순을 넘기신 우리 할머니 경주이씨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는 의좋은 오누이 모습으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 나누시네. 때는 봄날,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환하게 퍼져나가고 백발 장모가 권하는 일배 일배에 취한 눈멀고 귀먹어 가는 사위는 아주 오랜 옛날도 어제처럼 가까워 흥이 나네. 기억하시는교 빙모님요 막내 처제 낳고 제가 가물치 한 마리 사 가지고 찾아갔지요. 하모 김서방 그 달이 윤삼월 참으로 큰 가물치였제.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 보이네. 갓난애기 처제를 본 우리 큰고모부 선한 눈가 웃음도 보이네. 金粉으로 부서지는 두 분의 옛날 이야기 곁에 버릇없이 누운 나는 살아보지도 못한 저 먼 세월 어슬렁어슬렁 거슬러 올라가는 귀 큰 당나귀,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百年 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新羅瓦當의 웃는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득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
- 정일근, [흑백사진―가물치]
전문
이 시는 상황 설정부터 웃음이 나옵니다.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의 이야기이니까요. 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촉매제가 바로 가물치입니다. 장모가 마흔이 넘어 처제를 낳았으니 본인은 백년 손님인 맏사위 보기가 민망하고, 장인은 사위 맞기가 멋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위는 그래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엄청나게 큰 가물치 한 마리를 사 들고 처갓집에 갑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상황입니까. 그런데 시인의 재능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을 아름다운 금빛으로 도금하는 언어의 연금술에 있습니다.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퍼져나가고", "新羅瓦當의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같은 표현도 그렇거니와, 화자의 팔순을 넘기신 할머니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더없이 정겨워 독자는 감동하게 됩니다. 시 한 편에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따듯한 정감을 이렇게 듬뿍 담을 수 있다니, 아니 흘러 넘치게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6. 시는 새로운 요소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소재와 주제일지라도 표현 방법이 너무 진부하면 시의 맛이 사라져버립니다. 시를 쓸 때는 어느 정도의 실험정신이 시를 맛깔스럽게 하는 양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난
그날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 시도로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기로 한다.
그―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
날―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
통합적으로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나의 알 수 없는 우울증은 조금 더 강도를 높인다. 다음 단계로 그날의 사건과 정황을 그려보기로 한다. 이
단계에서 경계해야 할 점은 육신이 제거된 영혼의 교만함이 고개를 쳐든다는 점이다. 냉정함을 잃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두 번째 시도로
들어간다.
정말이지,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가 떠오른다. 정말 어찌 하라는 건지, 나 부끄러움 넘어선 견디기 힘든 굴욕감에 별들도 차가운 눈빛으로 가슴 깊이 얼음 송곳 밀어 넣는다. 바람에 상처받기 쉬운 겨울나무는 땅의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단단한 겨울에 완강히 저항한다. 그런 잠 못 들기 몇 날인가, 핏발 서린 눈에선 자꾸 마른 눈물 흘러, 말라비틀어진 흔적이 영혼 깊숙이 각인된다.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영혼의 기막힌 알리바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 더 나아가 내 몸 구석구석 굴욕의 상처들이 바람에 제 존재를 알리는 풀잎처럼 우우, 일시에 일어나 실개울로 흘러 비굴한 시 쓰기를 관통하여 뜨거운 태양이 그대의 오만함을 녹여줄 회복기의 봄을 고대하도록 한다. 이쯤 되면 영혼의 교만함이 육체의 단순성을 비웃듯 또다시 고개를 쳐들고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 강성철, [그날] 전문 {현대시}
(1993년 3월호)
시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지요? [그날]이란 제목을 보고 '그 어느 날'이라고 생각한 저의 기대지평은 초장에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시인은 '그날'을 달리
생각해보고자 '그'를 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로, '날'을 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으로 해석해본 뒤, 통합하여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봅니다. '그'는 ①번을 선택했으나 '날'은 세 개 중 마땅한 것이 없어 면도날을 연상한 것입니다. ①번 '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에서 날카롭기 짝이 없는 면도날을 연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윽한 면도날이라니요. 여기서 독자는 시인의 장난에 우롱
당했다는 당혹스런 느낌과 시인의 계산을 못 따라잡았다는 허탈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장난이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제2연에 접어들어서도 강성철은 계속 독자에게 미지의 덫을 놓습니다.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는
면도날을 휘둘러대는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불시에 가한 자네의 행동에 나는 괴롭고 서러워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겨울에 저항하는
겨울나무처럼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냅니다. 고통과 설움은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는 2연 중반 끝 부분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뒤엉킴의 실마리는 아마도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시인이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인이라면 영혼의 불멸 또한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평생 동안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화두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설사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은 이 현실사회에서도 얼마나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까.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온
사람이 죽어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제 대충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육신을 계속 괴롭히는 영혼의 병이 나의 큰
문제인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늘 상처받는 내 영혼의 병인 우울증이 문제인 것입니다.
시인은 "굴욕의 상처들"과 "비굴한 시
쓰기", "그대의 오만함"과 "영혼의 교만함" 등 온갖 자극적인 언어를 동원하면서 굴욕과 비굴, 영혼의 교만함에서 벗어나기를, 고통과 설움이
끝나기를, 그 무엇보다 우울증이 완치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제2연 끝 부분에 이르러 '그날'이란 글자의 분석에 몰입했던 이유가
밝혀집니다.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불면증 환자가 잠을 청하기 위해 숫자를 백, 아흔아홉, 아흔여덟, 아흔일곱…… 하면서 밤이 깊도록 세고 있듯이 강성철은, 아니 [그날]의 시적 화자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그날'이라는 글자를 분석하는 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글자 분석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애를 썼건만 화자의 우울증이 회복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니까요. 이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이 괄호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늘 어긋나기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숨은 세계에서 승냥이처럼 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나와 타인은 다들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고, 나의 우울증은 심화되기만 합니다. 읽고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시,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 동안 뜻이 풀리는 이런 시가 오히려 매력적인 시일 수 있습니다. 1980년대에 한국 시단을 풍미했던 이른바 해체시라는 것에 대해서도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갖고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호 풀기나 미로 찾기 같은 시 읽기이지만 그 속에 오묘한 진리가 들어 있거든요.
7. 시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노래한다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체의 동일한 운명은 태어난 이상 마땅히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가장 보편적인 소재요 주제입니다. 제게 소설작법을 가르쳐주신 김동리 선생님은 "소설로 쓸 만한 소재가 없어 고민하는 학생은 '죽음'을 갖고 써보게. 우리에게 죽음만큼 친숙한 것은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텔레비전 뉴스나 조간신문에 누군가의 '죽음'이 보도하지 않는 날이 있던가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루를 살면서 하루를 죽이는, 즉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작품을 쓰다가 소재나 주제가 고갈되었다고 여겨지면 누군가의 죽음을 갖고 시를 써보십시오. 죽음이 아니면 탄생과 늙음과 질병 가운데 하나를 택해 써보셔도 좋겠습니다.
묘비들 사이로
아이가 달려온다
기억의 저편으로 아득히 건너간
생애들이
몇 줄 글자로 남아
무릎 키 세우고 있는 사이
네 살배기 아이가 무어라 소리치며
저쪽에서 뛰어 온다
Beloved Wife and Mother
1939-1980
이국 땅에서의 크고 작은 기쁨
설레임과 회한의
날들
꿈결같이 아득히 사라지고
조국 하늘 아래 한 여인의
평생은
한 줄 이국 글자 묘비명으로 남았는데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칭호만이
한
남자의 사십 년 생애가 남긴 모든 것이어서
의·학·박·사
이름 위에 새겨놓은 네
글자
살아남은 자의 애달픈 마음
그 옆의 묘비는 전하는데
내가 지상에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풍경처럼
줄지어 선 비석들 넘어
딸아이가 온다
팔랑팔랑
꿈속 나비 같다
― 김기중, [공원 묘지에서]
전문 {현대시} (200년 2월호)
김기중은 외국의 한 공원 묘지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사뭇 처연한 심사에 사로잡혀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시에 나타난 가족사는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40년을 살아 지상에 남겨놓은 것은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호칭이 전부였습니다. 즉, 의학박사의 신분으로 외국의 묘지에 묻혔으니 한 남자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에 공부가 차지한
세월이 거의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조국의 하늘 아래 남아 있던 아내의 '평생'이 남편의 묘비에 한 줄 이름으로 남게 되었을 뿐이니 그 감회가
착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착잡한 감회가 마지막 연에 담겨 있습니다.
딸아이는 아마도 성묘하러 온, 죽은
이의 자식이겠지요. 줄지어 선 비석들, 즉 수많은 주검을 뛰어넘으며 가장 최근에 죽은 이의 한 점 혈육이 꿈속 나비같이 팔랑팔랑 옵니다. 사서
중 하나인 {장자}에는 장주가 꿈속에서 본 나비의 고사가 나옵니다. 장주가 꿈에서 호랑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호랑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물화(物化)'를 설명하는 고사가 생각납니다. 사람의 생이란 일장춘몽이며 남가일몽이란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생에 아무리 집착한들 저승사자의 방문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이며,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일 뿐일까요?
예술은, 시는 우리 목숨을 부활할 수 있게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사후에 우리가 써놓은 시를 읽고 누군가 감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 독자의
마음속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영원 회귀를 꿈꾸는 것입니다.
8. 시는 문명비판을 지향한다
20세기를 풍미했던 가장 강력한 시적 사조는 모더니즘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이 표방하고 있는 정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문명비판입니다. 영화는 기술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문명과 친화가 잘 이뤄지는데 문학은 이상하게도 문명하고는 좀처럼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정보를 제공하고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며 오락의 기능을 다하는 컴퓨터를 갖고 쓴 시가 있습니다. 어언 10년 전 일이 되었는데, 러시아의 한 해커가 인터넷을 통해 시티뱅크에 침투해 1천만 달러를 훔쳐간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를 잘 다루면 복면을 하고 은행털이 강도로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미국의 10대 해커들이 뉴저지 공군기지의 한 연구소에 침투한 일이 발생, 미국 사회를 경악케 하기도 했고, 1997년 초에는 호주와 에스토니아의 해커들이 3만 통이 넘는 전자 메일을 쏟아 부어 버지니아 랭글리 공군기지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마비된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정보 전달이라는 약과 함께 시스템 파괴라는 병을 주는 것이 컴퓨터입니다. 컴퓨터가 사람의 머리와 손발을 대신하여 정보사회의 중요한 전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학계에서는 '테크노 의존증' 혹은 '컴퓨터 중독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명병이 등장하여 급속히 확산되는 중이라고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기기 자체에서 나오는 전자파도 문제이지만 컴퓨터를 너무 오래 사용하는 바람에 시력장애·경근완 질환(목·어깨·팔에 통증이 오는 병)·두통·소화불량 등의 신체장애는 물론 대인기피증·광장공포증·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컴퓨터를 많이 다루는 현대인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컴퓨터를 소재로 한 시를 젊은 시인들이 쓰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 대다수는 사실 눈만 뜨면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를 꺼야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이
기억력 나쁜
고물 PC를 새 걸로 바꾸기로 결심.
언젠가 PC 카탈로그에서 보았던
삼성 알라딘을 사리라 마음먹는다
내 글이 안 되는 건 순전히
도구가 용산 조립품 286AT이기 때문이라
밤마다 기도하며 써
보았지만
고매해야 할 내 시들은 언제나 날림 조립식인 걸
알라딘을
사야지!
그의 자판을 요술 램프처럼 살살 만져 주면
나만의 유능한 종이
나타나
내 명령어들을 충실히 실행할 것이다
넘치는 하드
용량,
풍만한 그의 언어는
이 미궁에서 나의 탈출을
도우리라
사실 이 느림보 286AT에도 요정이 있다
언젠가 치약으로 열심히 PC 본체를
닦다가
난 보고 말았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
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를,
나를 비웃으며 다시 제 집인 양 기어
들어가는
그 자식을 향해 재빨리 플로피 디스크를
몇 번이나 쑤셔 넣었다 뺐다
하며
압살을 노렸지만 디스크만 에러났던 기억.
가끔 모니터 속의 내 글
위로
그 바퀴들이 지나가지는 않을까,
그는 너무 두렵다
내가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어쩌면 이전에 헥사를 지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는 것도
그 요괴임에 난 짙은 혐의를 두었다
베네치아
워드게임에서
'바퀴벌레'란 단어가 내려와 나를 덮칠 때,
난
확신하였다
나의 체제는 이미 위협받고 있었다
놈은 밤마다 용량 작은 하드를
기웃거리며
내 글을 비웃을 거 아닌가?
무슨 시가 이래,
하면서도
내가 방심한 사이 내 연애시를 도용해
행여 또래 암컷들을 사귀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나의 신성한 작업실에서……
온갖 상스런 상상들이
아!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
아, 나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 김창진, [알라딘을 사야 한다] 전문
{문학예술} (1998년 여름호)
컴퓨터는 우리의 친구이자 원수이고 상관이자 부하입니다. 컴퓨터를 소재로 한 이 시를 유심히 읽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술 램프를 문지르면 '유능한 종'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천일야화} 속 유명한 이야기의 그 유능한 종이 알라딘이죠. 이 시에서는 삼성전자에서 만든 신형 컴퓨터의 제품명이 알라딘이므로 알라딘은 중의법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형과 구형의 차이가 아닙니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들"에 대한 이해가 이 시를 이해하는 요체가 됩니다. 요정·바퀴벌레·요괴는 같은 존재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놈들은 시인이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고, 내 연애시를 도용해 암컷들을 사귀고, 나의 약한 정신을 도굴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서의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해악을 준다고 알려져 있는 발 빠른 곤충인 그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들어 있는 정보를 파괴하고, 제 마음대로 침입해 남의 정보를 빼 가는 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존재입니다.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라는 구절로 보아 그들은 증식까지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연후에 시인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힘주어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타인을 향해서는 경고를 주고, 스스로는 각성하자고 다짐해본 것입니다.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등장해 암약하는 해커와 바이러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저는 이 시를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시는 문명비판시이며 일종의 현실풍자시입니다.
9. 시는 독자 감동을 지향한다
근년에 들어 저는 광고 문구 속에 '고객 감동'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고 들었습니다. 광고인들도 이제는 광고주가 만든 제품에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어 있으니 쓰던 것을 버리고 우리 제품으로 바꿔 쓰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지요. 향상된 기능으로 당신들을 감동시킬 만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시가 지향하는 최고의 미덕이야말로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격렬한 감동이든 잔잔한 감동이든 시를 읽으며 느낀 감동은 우리의 뇌리를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아버지 따라가 묵정밭을 맨 적 있습니다. 쇠비름풀 여뀌 바랭이서껀 이런 저런 잡초들 수없이 뽑아 던졌습니다. 검붉은
맨살의 흙이 드러나면서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나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일평생 마침내 논 서른 마지기 이루고,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 그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어 버리고 빈 들 노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일흔 중반 넘어서면서
망령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사 관심거리가 하나 둘 줄어들더니, 마을이나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식솔들의 잦은 불상사에 대해서도 영 남의 일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자식들, 심지어는 늘 곁에서 수발 드는 어머니 보고도 당신
누구요, 우리 집사람 못 봤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버지,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 그 논에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섰습니다.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렸습니다. 품안의 새끼들을 어르고 입안의 혀 같은 당신의 아내와 자주 두런거렸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아버지,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 문인수, [풀뽑기]
전문 {문학과창작} (1997년 10월)
아버지를 따라가 묵정밭을 맸던 어린 날의 추억에서부터
시는 전개됩니다. 쇠비름풀·여뀌·바랭이 같은 잡초들을 수없이 뽑아 던져야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태어나는데,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 논 서른
마지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이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고 기진맥진한 아버지는 노을녘에 서서 빈 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슬픈 초상은 빈 들, 즉 당신의 피땀으로 일구었건만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가 된 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삶의 비애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아버지는 일흔도 중반이 넘어 노인성 치매를 앓는 환자가
되셨는데, 증세가 나날이 심해져 자기 아내도 못 알아볼 지경에 이릅니다. 망령은 들었어도 아버지는 소몰이며 땅을 일구는 일에 인이 박인
농투성이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논도 없는데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서고,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리는 망령을 보입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그간
가족의 녹아 내린 애간장이 어떤 색깔을 띠고 있는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윤회를 믿는 불가에서는 전생의 원수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나를 아들로 보아주지 않는 슬픔, 죽음을 목전에 두고 헛소리를 하는 아버지를 마냥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슬픔이 목젖을 차고 오릅니다. 이 슬픔은 은유나 상징 같은 시적 기교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문인수는 그저 뭉툭한 필묵으로(평이한
필체로) 아버지의 초상화를 스케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잡초를 수없이 뽑아 던졌던 아버지는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을 끝내는 뽑아서 땅에
던집니다.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눈물을 감추고 있어 오히려 눈물겨운 마지막 연입니다. 한평생 풀
뽑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마지막으로 땅에서 뽑아 반듯하게 관에 드러누움으로써 생애가 완성되었습니다. 뽑혀진 풀이
흙의 일부가 되듯이 인간의 육신도 흙의 일부가 됩니다. 문인수는 아버지의 초상을 이 시에 그려놓은 것일 테지만, 저는 땅을 파며 한 생을 살다
땅으로 들어가 마감하는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의 모습을 [풀 뽑기]라는 한 편의 시를 통해서 봅니다. 아버지의 풀 뽑기도 개간을 위한 창조
행위였고, 아들의 [풀 뽑기]도 '시'를 이룬 창조 행위였으니 그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인은 이 시에서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있지만, 뭇 독자의
심금은 그것 때문에 울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장미를 미의 하나로 취급해온 것일 테지요.
영화며 컴퓨터
게임 등 재미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진 오늘날 시의 기능, 시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기상천외한 실험과 발명 및 파괴로 과학적 언어로밖에
대화할 줄 모르는 우리의 인식지평을 넓혀주는 것이 첫째 역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대끼느라 무뎌진 우리의
가슴에 서정의 물살을 와 닿게 해 잠시나마 감동하게 하는 것, 그 기능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서정의 물살이 워낙 약해 비록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감동하거나 감격할 일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감동적인 시는 이렇듯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슬픔의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0.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거짓말이다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의 제목은 '정동진역'입니다. 가운뎃부분에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보이는 시입니다.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 김영남, [정동진역] 전문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김영남은 등단작의 제목을 그대로 첫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그 첫 시집의 해설을 제가 썼기에 이 시의 생산 과정을 본인한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래시계'이던가요,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
장소가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정동진역은, 1996년까지만 해도 해돋이 관광 명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 경치가 제법 괜찮다는 것
정도가 몇몇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지요. 어느 신문기자가 누군가로부터 정동진역 풍광이 좋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갔다와서는 '알려지지 않은 곳,
그러나 가볼 만한 곳'이라며 그곳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김영남은 그 기사를 읽고 일필휘지하여 이 시를 썼습니다. 물론 가본 적이
없었지요. 신문기사 한 쪼가리도 유심히 읽는 관찰력이 그에게 시인이란 타이틀을 붙여주었습니다. {죄와 벌} {테스} {여자의 일생} 등 세계명작
가운데 짧은 신문기사를 읽고, 그것을 갖고 쓴 것이 아주 많습니다. 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관찰하고 기록하기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든 영화든
관찰의 안테나를 세우고 유심히 보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친구의 이야기든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든 유심히 들으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생명체가 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는 열려 있는 총체입니다. 시는 그 어떤 인접예술과도 교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되 시적 진실을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정동진역에 전혀 가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시를 썼다고 하여 우리는 시인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는 저는 시가 시인 자신의 체험의 산물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신문기사를 읽은 간접체험에다가 상상력을 보태어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혹은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안 보고도 본
척, 안 겪고도 겪은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또한 시인입니다. 시인은 신문기사를 보고도, 책을 읽고도, 영화를 보고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을 직접 체험한 양 둘러칠 수 있는 능력이 시인됨의 기본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시인의
자격으로 왔으니까 마지막으로 제 시를 한 편 낭송해 드릴까 합니다.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 졸시,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전문
솔직히 말씀드려 이 시는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제
아버님은 이날 이때껏 입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십니다만 올해도 고향에서 밭농사를 짓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은 많은 독자가 대부분 실제상황인 줄 알고 제게 물어왔습니다. 부친을 간병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다는 위로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는 재미교포 2세인 루이스 최가 쓴 {생명일기}(김유진 옮김, 김영사 간행)라는 간병기를 보고 제
체험인 양 가져와서 쓴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성기 운운하는 대목은 그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식물인간의 상태가 된 어른을 간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기록되어 있는 그 책을 보고 만약 제 아버지가 저런 상태가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상해보면서 한 편의
시를 썼던 것입니다. 이 시가 시적 진실을 추구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책을 통한 간접체험을 직접체험으로 슬쩍 바꿈으로써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간접체험과 상상력은 그 한계를 무한정 확장해 줍니다.
자, 그럼 이것으로써 제 강연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얘기를 경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열 가지 방법론에 입각하여
전개한 제 얘기가 여러분의 시작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작품 쓰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이승하 시인
1960년 경북 의성에서 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현재
중앙대학교 교수.
시집으로「사랑의 탐구」(1987),「우리들의 유토피아」(1989),「욥의 슬픔을
아시나요」(1991),「폭력과 광기의 나날」(1993),「박수를 찾아서」(1994),「생명에서 물건으로」(1995)가
있으며,
시론집으로「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1997),「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1999),「한국 현대시 비판」(2000),「한국 시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2001)가 있다.
이 밖에 소설집「길 위에서의 죽음」(1997)과 시선집「젊은 별에게」(1998)가 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시로 등 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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