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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가신 지도 어언 5년 반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선생님의 파안대소―활짝 웃으시는 표정이 얼른 떠오르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귓가에 금방이라도 들려올 듯 쟁쟁합니다. 수업시간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시거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총평을 해주셨는데 사당동 예술인마을의 선생님 자택에서 뵈었을 때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저를 반기셨지요.
선생님! 아직도 저는 선생님의 애제자였는지 많고 많은 제자 중 한 명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시절에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이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네", "앞으로 제발 이런 시는 쓰지 말게"라는 말씀을 줄기차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어린 제자의 기를 살려주기는커녕 시간마다 혹독한 선고를 내려 저는 시 창작 수업이 들어 있는 날이면 꼭 술집에 가서 막걸리를 몇 잔 마시고 귀가해야 했습니다. 갈지자걸음으로 버스를 타러 가면서 "미당은 갔다!"고 외쳐댄 적도 많았지만 술이 깨면 선생님이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상기하면서 시를 썼습니다.
시정신이란 건 감성으로건 지성으로건 반드시 가슴의 감동이란 걸 거쳐야만 하네. 가슴앓이 병자가 쇼크를 피하듯이, 시인이라면 마땅히 겪어야 할 저 많은 연옥의 문을 닫아걸고, 사고(思考)의 간편(簡便) 속으로 편승하지 말게. 고도한 정서의 형성은 언제나 감정과 욕망에 대한 지성의 좋은 절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세.
8차 학기 중에서 다섯 번이나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생님 강의의 요지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반드시 가슴의 감동이란 걸 거쳐야만 한다, 고도한 정서의 형성이 있어야 한다, 감정과 욕망에 대한 지성의 절제가 필요하다……. 대학노트에 몇 번을 받아 써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된 선생님의 말씀이었지만 이 말씀은 저에게 마이동풍이었지요. 좌절과 절망, 자학과 회복의 시절이 저의 대학시절이었습니다. 1학년 2학기 때부터 4학년 1학기를 마칠 때까지 칭찬의 말 제대로 해준 적이 없는 제자가 딱했던가 봅니다. 1983년 가을이었습니다. "이제 4학년인데 신춘 준비는 하고 있는가? 수업시간 중에 발표했던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제일 자신 있는 걸로 골라 정서를 해서 갖고 오게." PC가 보급되기 전이었습니다. 대학노트에 또박또박 정서를 해서 갖다드렸더니 엉뚱하게도 선생님은 댁 전화번호를 불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주말께에 전화를 주게. 내가 우리 집 찾아오는 방법을 가르쳐줄 테니까."
말씀하신 날 전화를 드렸더니 몇 시쯤에 어디서 버스를 타고 내려서 구멍가게를 어떻게 찾고 어떻게 걸어오면 '서정주'라고 쓰인 문패가 보일 거라는 말씀. 꾸뻑 인사를 올리고 무릎을 조아려 앉았더니 스승은 기적과도 같이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내가 안 본 시가 많더구만. 유연한 시가 많아 놀랐네."
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지요. '유연한 시'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대충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대학을 다닌 80년대 전반기는 광주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시민과 학생들의 원혼이 책상 사이에 돌아다니던 시기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현실 참여적인, 혹은 민중 지향적인 시가 아니면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것 자체가 쑥스러웠던 때였습니다. 제 또래 대학생들의 우상은 김수영과 신동엽, 김지하와 김남주였습니다.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에서도 정치적인 함의만을 들추고 있었으므로 수업시간의 발표작은 당연히 리얼리스트의 시여야 했고 모더니즘은 타기의 대상이었습니다. 학우들 가운데 위장취업자와 지명수배자가 한두 명이 아닌 시대였으니, 낭만주의자의 내면일기 같은 시를 수업시간 중에 내놓다가는 학교 인근 술집에 발도 못 붙일 경직된 분위기였습니다. 그때는 '녹화사업'이라 하여 군대에 강제로 징집되어 간 학우들이 의문사하고, 분신자살하는 대학생과 근로자가 속출하는 시대였습니다. 저로서는 시에서 중요한 것이 몽상과 감성이 아니라 역사의식과 사회 변혁을 위한 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는 학우들의 눈치를 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를 발표했던 것이고, 선생님은 호된 꾸지람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지요.
어떻든 저는 대학시절을 총정리하자는 뜻에서 100여 편 습작시 가운데 완결된 60여 편을 정서해서 선생님께 보여드렸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대학노트를 되돌려주시면서 "갖고 가서 보게", 이 한마디만 하실 뿐 제 시의 개선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씀이 없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보았습니다. ◎는 A학점의 시, ○는 B학점의 시, △는 C학점의 시, 아무 표시가 없는 것은 D 내지는 F학점이라는 뜻인 듯했습니다. 이런 부호만 있을 뿐 선생님의 글씨는 한 글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생님의 취향과는 전혀 다른 모던한 시에 ◎ 표시가 많았습니다. 신춘문예를 의식하고 쓴 시들(그 당시에는 '신춘문예 경향'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었거든요)에는 하나같이 아무 표시가 없거나 간간이 △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신춘문예 심사를 해오신 선생님께서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지 않고 적당히 흉내를 내는 시에는 가혹한 평을 해주신 것입니다.
저의 신춘문예 당선작은 '畵家 뭉크와 함께'였습니다. 바로 선생님이 뽑아주셨지요. 황동규 선생님은 최종심에 오른 기형도의 [겨울 판화] 연작에 애정을 가지셨던 듯한데 연장자인 서정주 선생님의 제자 사랑 고집을 꺾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등단 이후 '폭력'과 '광기' 나날과 '불안'과 '공포'의 순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선생님의 시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기'(氣)에 대한 탐구를 하는 데 제 딴에는 혼신의 열정을 기울여 왔습니다.
등단 이후 23년 동안 제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것이 바로 기의 시학이었습니다. 전혀 유약하지 않은 서정시 말입니다. 우리 조상의 '풀이'와 '놀이'의 정신이 수많은 광대와 예인의 몸에 깃들어 있음을 저는 공연장이며 바닷가 마을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맺힌 것이 있으면 무당을 불러서라도 풀고, 일을 마친 뒤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겼습니다. 우리 민족의 특징이 '한'에 있다고 본 것은 오류였습니다. 고려조 때의 최자와 이인로, 이규보가 주장한 우리 시의 근본은 '기'였습니다. 기운과 기백이 넘치는, 풍자와 해학이 넘쳐나는 신라의 향가와 고려가요, 민요와 무가, 판소리와 민속극…….
저는 어두운 공연장에서 노트를 꺼내 들고 취재를 했고, 사람들을 찾았고, 관련 서적을 뒤적였습니다. 오래된 신문과 잡지를 도서관이며 헌 책방을 뒤져서 찾고 열심히 스크랩했습니다. 마당극과 탈춤을 보고 크게 감동했던 대학시절까지 합치면 27년 동안 저는 이 일에 제가 바칠 수 있는 열과 성을 몽땅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1994년에 {박수를 찾아서}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었지요. 요즘에는 고승들의 삶을 추적하거나 광대들의 유희정신을 들춰보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불교도는 아니지만 고승들의 삶 자체에서 인생철학을 배웠고, 고대가요와 고려가요, 향가와 불교설화 등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보는 과정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광대를 찾아서' 연작시는 18편을 썼습니다. 아아, 그러나 작품마다 때로는 과유불급이요 많은 경우 역부족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서 쓴 시들만을 모아 한 권의 시집을 묶어볼까 합니다. 6주기에 맞춰 시집을 들고 묘소에 참례하고자 6년 동안 준비를 했습니다. 시집을 정리하는 내내 자네 시는 시라고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 울렸습니다. 스승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함에,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엄습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고개 숙여 빕니다.
2006년 7월 15일 제자 승하 삼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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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일자 :
2006년09월 |
⊙ 작품장르 :
편지 |
⊙ 글 번 호 :
208069 |
⊙ 조 회 수 :
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