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칼럼
시와 감동
얼마 전 모 시지(詩誌)에 특집으로 발표된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은 바 있다. 이들은 어느 시동인회가 지난 10년 동안에 걸쳐 매년 한 사람씩 선정한 수상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니 수천 명의 젊은 시인들 가운데서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신인들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의 작품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기대와는 달리 자못 착잡하기만 했다. 진술의 내용이나 의도를 파악하기도 힘들었고 또한 재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라 근래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다 보면 감동을 얻기보다는 괴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나는 읽다가 짜증스러우면 중간에서 그만 둔다. 그런 작품의 이해를 위해 아까운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시인들에게 왜 작품이 그렇게 되었는가 묻는다면 아마도 ‘새로움의 추구’ 때문이라고 대답할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구태의연한 음풍농월에나 젖어 있어서야 되겠느냐며 새로운 시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새로움을 모색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거나 혁신적인 움직임은 늘 있어 왔다. 그래서 보수와 개혁의 대립이 없는 역사는 이 지상에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새롭게 한다는 의미는 기존의 것들을 무조건 뜯어고친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 가운데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을 바람직한 것으로 바꾼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기존의 것들 가운데서 좋고, 좋지 못한 것들을 우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분별이라는 것이 또한 용이치 않아 보인다. 사람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고 견해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시도된 개혁은 다분히 위험의 소지를 안게 된다. 한편 모든 것이 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이나 본질을 저해하는 개혁은 수용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음식’의 본질은 ‘영양’과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음식은 신체에 유용한 영양가를 함유하고 있고, 구미를 돋우는 맛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누가 기존의 음식을 개혁한다고 영양가를 무시한 빵이나 맛이 없는 음료수를 개발하려 한다면 이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옷’의 제1차적 본질은 ‘신체의 보호’라고 할 수 있는데 누가 만일 아름다운 미감에 끌려 신체에 유해한 어떤 천으로 의상을 만들려 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처럼 본질에 역행하는 개혁은 근본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선 시는 언어 구조물이므로 제1차적으로 ‘언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다음으로 소설이나 수필 등 다른 산문 장르와는 달리 서정시가 지닌 형식적 특징은 그 ‘짧음’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장시가 없는 바 아니지만 이는 시의 보편적 형식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예술 일반의 특성으로 지적될 수 있는 ‘감동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백이나 두보의 작품들이 천 년을 두고 읽히는 것은 감동성 때문이다. 시가 보통의 일상적 언술과 다른 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감동성의 유무로 판별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그러니 시는 ‘감동성을 지닌 짧은 언어 구조물’이라고 그 본질을 규정해도 좋을 것 같다. 시도 수천 년 동안 얼마나 끊임없이 혁신을 해 왔는가. 문학사에 명멸한 수많은 시의 장르들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근래의 큰 변화는 정형시의 틀을 깨고 자유시가 등장한 일이다. 이젠 그 자유시도 다양한 기법들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에서는 자동기술법을 구사하고, 무의미시에서는 대상의 파괴를 시도하기도 한다. 해체시나 포스트모던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시의 내용과 형식을 과감히 깨뜨리는 반란을 꿈꾸기도 한다. 새로운 시도들 가운데서 다수의 호응을 지속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 있다면, 이는 장차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가급적 다양한 시도들이 바람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의 혁신 역시 시문학의 본질을 저해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혁신이 아무리 기발하고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감동성을 지닌 짧은 언어 구조’라는 범주를 넘어선다면 시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의 표현매체는 언어여야 하고, 산문에 육박하는 분량이어서는 곤란하며, 반드시 감동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혹자는 시에서의 감동성 같은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시가 별것인가? 자신의 울적한 기분이나 절박한 심리를 토해내면 그뿐이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이란 무엇인가? 세상을 향한 나의 발언이 아닌가? 들어줄 사람을 상정하지 않는 발언은 있을 수 없다. 독백조차도 자신을 청자로 설정된 발언이다. 하물며 인쇄매체를 통해 세상에 내놓는 작품이라면 독자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감동은 작자의 발언에 대해 세상이 동의하는 반응이다. 논리적 설득이기보다는 정서적 감화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발언은 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반응을 기대하지 않은 독백이라면 혼자서 중얼거릴 일이지 굳이 세상에 드러낼 것이 못된다. 세상으로 하여금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감동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글이 예술의 반열에 낄 수 있는 시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즐겨 읽히는 생명이 긴 작품이 되기를 원한다면 작품 속에 감동을 심어야 할 일이다. 오늘 날 수많은 독자들이 시를 외면한 것은 시에서 감동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금의 우리 시단이 안고 있는 가장 절실한 과제는 어떻게 시를 새롭게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작품 속에 감동을 회복시킬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이시 2006.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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