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사치 외 1편-고은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1. 20. 11:20
사치 외 1편 / 고은 | 시창고 2006/11/1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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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치 / 고은


어린 시절, 고향 바닷가에서 자주 초록빛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빨랫줄은 너무 무거웠고 빨래가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오랜 병(病)은
착한 우단 저고리의 누님께 옮겨갔습니다.
아주 그 오동(梧桐)꽃의 폐장(肺臟)에 묻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누님은 이름 부를 남자가 없었고
오직 "하느님!" "하느님!"만을 불렀습니다.
저는 파리한 채, 누님의 혈맥(血脈)은 갈대밭의 애내로 울렸습니다.
이듬해 봄이 뒤뜰에서 살다 떠나면
어쩌다 늦게 피는 꽃에 봄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름 한동안 저는 흙을 파먹고 울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렸고 마을 뒤 넓은 간석농지(干潟農地)는 홍수에 잠겼습니다.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찬 세면(洗面) 물에 제 푸른 이마 주름이 떠오르고
그 수량(水量)을 피해 가을에는 하늘이 서서 우는 듯했습니다.
멀리 기적(汽笛)소리는 확실하고 그 뒤에 가을은 깊었습니다.
모조리 벗은 나무에 몇 잎새만 붙어 있을 때,
누님은 그 잎새들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맑은 뜰 그 땅 밑에서 뿌리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더 푸르기 때문에 제 눈 빠는 버릇이 자고
그러나 어디선가 제 행선지(行先地)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님께서 기침을 시작한 뒤 저는 급격하게 적막하였습니다.
차라리 제 턱을 치켜들어 보아도
다만 제 발등은 노쇠(老衰)로 복수(復讐)받았습니다.
마침내 제가 참을 수 없게 누님은 피를 쏟았습니다.
한 아름의 치마폭으로 고히는 그것을 껴안았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보았습니다, 누님의 깊은 부끄러움을.

그리고 그 동정(童貞) 안에 내숙(內宿)한 조석(潮汐)을.
그 뒤로 저의 잠은 누님의 잠이었습니다.
누님의 내실(內室)에는 어떤 고막(鼓膜)이 가득 찼고
저는 문 밖에서 순한 밤을 한 발자국씩 쓸었습니다.
누님께서 우단 저고리를 갈아입던 날,
저는 누님의 황홀한 시간을 더해서
겨울 바닷가를 헤매이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봄의 음력(陰曆), 안개 묻은 빨랫줄을 가리키며
누님의 흰 손은 떨어지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울지 않고 그의 흰 도자(陶磁) 베개 가까이 누워
얼마만큼 그의 혼을 따라가다 왔습니다.


 

 

문의 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고은 시인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소설·수필·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전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1998년 시집 『속삭임』간행.
1999년 시집 『머나먼 길』간행 .
2002년 시선집 『어느 바람』(백낙청 엮음) 출간.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시선집 간행.
미국 하바드대학 하바드옌칭 연구교수.
버클리대 객원교수 역임.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현재 유네스코 세계 시 아카데미 회원(한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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