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시를 쓰는가》
신 경 림
1) 민중의 삶에 뿌리박은 시
제가 소위 문단이라는 데를 나온 지 어느새 20년이 더 넘었습니다.
저는 처음 문단에 나와서 2,3년 글을 썼을 뿐 그 후 10여년을
문단이라든가 글과는 인연을 끊고 시골에서 떠돌이생활을 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제가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문제를 심각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아무런 의식도 없이 글을, 시를 써 왔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제가 문단에 갓 나왔을 때의 시에 [갈대]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주위의 친구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칭찬도 받았고 저 자신도 이 시로
인해서 시를 쓴다는 일에 자신을 가졌던 시입니다.
짧은 시이니 여기서 외워 보기로 하겠습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시골 사람들과 어려움을 같이 겪고, 억울함을
함께 당하고, 가난을 더불어 맛보면서, 저는 여태까지의 제 시가
얼마나 거짓된 삶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시를 10여년이나 버리고 있었던 것은 제가 지리적으로
서울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러한 깨달음 탓이었다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 무렵, 50년대 말 60년대 초의 시골 농촌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
있었습니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큰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여서이기도 했지만,
곳곳에서 죽음의 냄새가 났고 모든 들이며 산이며 강에 원귀들이
떠돌고 있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고장의 주인들은 지쳐 있었고, 하루에 밥 세 끼 먹는 것,
오직 이것만이 삶의 보람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 저는 이것이 6·25라는 민족분단의 비극이 가져온 전쟁 또는
가난이라는 피상적인 현상에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곳곳의 피폐한 땅, 그 고장 사람들의 허물어진 삶에서 역사의 깊은
상처를 볼 수 있었고 이 시대, 이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골 또는 농촌이 이렇게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담배 밭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싸매고 담배
잎을 따는 여인에게서, 메나리를 부르며 김을 매는 농부들에게서,
쇠전에서, 광산에서, 공사장에서, 백중날, 잔칫날, 혹은 운동회
날, 끈질기고 꿋꿋한 생명력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제게 더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이러한 삶이 사장되어 있는, 빠져 있는 시가 어떻게
참다운 시가 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이러한 사람이 서로 이어지고 형상화되어야만 그 시가
정말로 살아 있는 시, 살아 있는 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는 다른 자리에서도 여러 번 얘기한 바 있습니다만, 우리의
시는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 아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듯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 오늘의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가 집약되어 있는
곳이 바로 민중의 삶의 현장입니다.
또한 서구의 그릇된 풍조, 그릇 수입된 실용주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만 따지는 데서 오는 정신적 허무주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제가 말한, 여러분도 시골을 다녀 보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이 민중의 끈질기고도 꿋꿋한 생명력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민중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 하고 의문을
제기할는지도 모릅니다. 또 일부에서는 민중이란 말 자체를
불온시하여 색안경을 쓰고 보려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또 그 소리야 하고 눈살을
찌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얘기란 뻔한 것이라 하며 외면을
하기도 합니다.
역대의 지도자들은 민중 또는 국민이 역사의 주체요,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아마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우리 민중은 단 한번도 역사의 주체나 나라의
주인으로 대접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농민이나 노동자가 처해 있는 형편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민중의 삶에 깊이 뿌리박은 문학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조리나 악에 대하여 과감히 도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그것의
보전이나 발전을 위한 일이 될 것입니다.
민중의 삶에 깊이 뿌리박은 글, 우리가 쓰는 것은 이러한 것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민중의 삶에 깊이 뿌리박은 시, 민중의 삶에서
우러나온 글이라 해도 그것이 민중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감히 이것을 참으로 좋은 글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특히 시에 관해서 말씀드린다면,
지금 대부분의 독자들은 시를 외면합니다.
무슨 말장난인지 모르겠다는 타박을 저는 제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많이 듣습니다. 너무 어렵다는 것이지요.
대학 4년을 마친 사람들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거기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입니다.
물론 이런 항의가 시를 직접 쓰는 입장에서 볼 때,
전부 옳은 것은 아닙니다.
시인에게는 시가 어려워지지 않을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가짜도 있어서 자기도 잘 모르면서 어리뻥뻥한 가운데
어려운 시를 쓰게 되거나 그것이 근사해 보여서 어렵게 쓰는 사람도
없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득이 어렵게 쓸 수밖에 없는 시, 이런 시까지 가짜와 도매금으로
넘겨서는 부당하다는 데는 저도 이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난해시, 어려운 시를 얘기하면서 서구의 근대문학사까지
끌어다 붙일 것은 없겠지만, 현대는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세상입니다.
이 개인주의는 한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매스 미디어 등
의사교통 수단의 극도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고립시킵니다.
이 고립된, 소외된 상태에서 오늘의 시인은 시를 시작합니다.
이웃과 연결이 없는 사고, 자기의 생각을 극단으로 몰고 가서 마침내 잡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의 순수한 것을
말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마침내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진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이때의 시는 당연히 남에게, 이웃에게, 독자에게 호소한다는 뜻을
완전히 포기한 것입니다. 시라는 것은 고독할수록 좋다느니,
시는 단 한 사람의 이해를 얻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느니 하는
자포자기적인 궤변이 나오는 것도 다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난해시, 어려운 시에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덮어놓고 이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어떠한 그럴 듯한 구실에도 불구하고, 난해시가 생겨나는
가장 큰 원인은 민중적 바탕을 잃은 데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민중에 대한 지적 오만 내지 경멸이
그 밑바탕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시는 극소수의 선택된 자들에 의해서만 소유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역사적 반민중적 엘리트주의가 여기 깔려 있는
것이라는 비난조차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너희들이 모른들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는 지적 오만은, 기실 우리를
위해서 너희들은 굶주려도 좋다,
우리들을 위해 너희들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조선왕조시대의 양반의 사고방식과 그다지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다.
거듭 얘기하건대
난해시의 탄생은 본질적으로 민중 경멸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쉬운 시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시, 민중이 알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하면
시의 타락이다, 문학의 타락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저도 그러한 비판·비난을 여러 차례 들어 왔습니다.
이러한 비판·비난의 근저에는 시란 또는 문학이란 일부 선택된
소수자에 의해서 독점되고 향유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발상이 깔려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식화가 가능한, 또 언젠가는
반드시 의식화되어야 할 민중과, 의식화가 불가능하며
의식화되어야 할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대중을 동의어―같은
뜻의 말로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시가 소수의 선택된 자들의 손에서 놓여나 대중 또는
민중에게 돌아가면, 시가 가진 신비한 힘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가 표현된 것 이상의 내적 신비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는 본질적으로 작자와 독자가 어떤 느낌을 함께 하는 데서
그 발생과 존재의 의의가 찾아지는 까닭입니다.
거듭 말하는 것이 되겠지만 시는 소수 선택된 자에게서 놓여
민중의 품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그 풋풋한 생명력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또,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면, 그것이 바로
민중의 취향에 영합하자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지는
분이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또 쉬운 시를 쓰자는 얘기인 만큼, 시의 수준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우려하시는 분이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견해가 단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쉽사리 깨닫게 될 것입니다.
비유컨대 상대방이 알아듣도록 얘기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반드시
아첨하는 것이 아니며,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한다 해서 가령 상대방이 지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다 해도 그
얘기의 수준이 상대의 수준으로 낮아지지 않는 것이나 한가지
입니다.
표현이 쉽다는 것이 수준이 낮다는 것은 되지 않습니다.
쉬운 표현 속에 얼마든지 깊고 넓은 뜻이 담길 수 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좀 우스운 얘기지만 어려운 표현으로는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제 경험에 의한 깨달음입니다.
또 아마도, 민중에게 이해되는 시를 써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20년대 말·30년대 초에 적극적으로 번졌던
계몽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의문을 제기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브나로드운동, 귀농운동 등은 일제하에서 민족적 자각에
눈뜨기 시작한 농촌의 요구에 응한 지식인, 학생 등의 운동
으로서, 국내의 무장독립운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룩한 성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인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브나로드운동이라든가 귀농운동 또는 <조선일보>가 벌였던
문맹퇴치운동 등은 많은 몽매한 농민들로 하여금 한국적 현실에
눈뜨게 했고, 또 영농의 과학화, 생활의 합리화 등을 통하여
농촌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운동에 있어서 농민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도시의
지식인 또는 학생이 이 운동의 주체였다는 것이 이 운동의
한계였습니다.
지식인·학생의 운동이 관념화되고 상투화됨으로써 참다운 농민적
입장이 간과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은 민중을 대상으로
한 글을 쓰자든가 그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는 일은 민중과 삶을,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함으로써 최종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냐,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또 민중이 이해하는 시를 얘기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한글전용 문제입니다.
한문은 이제 단순히 중국의 글자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유산이라고, 최근에 어느 저명한 분이 주장한 것을 본 바도
있지만, 한자가 우리의, 우리 민족의 문화적 총화를 이룩하는 데
또 민중의 생활 향상이나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데 또 민중의
생활 향상이나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데 얼마나 커다란
장애가 되었던가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경제의 독점이나 정치의 독점이 나쁘듯이 문화의 독점도 나쁜
것입니다.
한문은 결국 문화의 독점 현상을 빚었으며 그 해독은
오늘날에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한자의 비과학성과 비능률성 때문에 이미 그 본고장에서조차
존폐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늘, 이 고장에서만 죽어라고
한문에 매달려 있는 꼴은 보기에도 역겨울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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