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를 만들기 위한 실기 수업 ▲이승하 / 중앙대·문예창작학 © <교수신문>(2006.2.22)
문예창작학의 학문적 특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개인적인 경험담을 몇 가지 들려드린다. 1979년에 ‘중대 문창과’에 입학했지만 곧바로 휴학계를 냈다. 휴학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을 일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문학을 ‘업’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직업이 아니라 평생의 업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 휴학하는 동안 입시에 치어 제대로 읽지 못했던 김유정과 이상, 김동리와 황순원, 김승옥과 이청준, 알베르 카뮈, 도스토예프스키, 보들레르와 랭보……. 독서삼매에 빠져 나날을 보내면서 자신감이 없어 휴학을 한 나를 책망하고 또 책망했다.
대학에 들어오니 평소에 우러러보았던 서정주와 구상, 김동리 선생이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분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젊디젊은 신상웅, 김은자 두 분의 열강을 들으면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학과의 분위기는 문학판이 아니라 정치판이었다. 곧바로 광주항쟁이 일어났고 다수의 학우가 운동권이 되어 교문을 등졌다. 친구 몇몇은 지명수배자가 된 탓에 연락도 할 수 없었고, 학내에 프락치가 있다는 소문에 이어 학과의 아무개가 정보기관의 프락치라고 거론되어 다들 목소리를 낮춰야 했다. 학우들이 전단지를 뿌리고 보도블록을 깨어 투석전을 벌일 때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친일문학론, 쿠바혁명사, 중국현대사, 4·19혁명론……. 문학이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깨달아간 대학시절이었다.
2학년에 올라가자 학우들은 정확히 운동권과 문학파와 주당(酒黨)파 세 부류로 나뉘었다. 문학파였던 나는 죄책감에 휩싸여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교문을 등진 학우들의 학점을, 정권이 두 번 바뀐 뒤 강사 신분인 내가 주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문예창작학과는 국어국문학과와 많이 다르다. 국어국문학과에서는 현대문학과 고전문학과 국어학의 기초학문을 가르치지만 문예창작학과에서는 시인, 소설가, 극작가, 방송작가, 자유기고가, 출판편집인 등을 양성하기 위해 실기 위주로 가르친다. 교과목에 시론, 소설론, 시문학사, 소설문학사 등도 있긴 하지만 절반 이상이 실기 수업이다. 시, 소논문, 콩트, 소설 등을 써오게 하여 학우들이 돌아가면서 작품에 대해 평(우리는 이를 난도질이라 한다)을 하고 교수가 마지막에 강평(우리는 이를 확인사살이라 한다)을 한다. 작가론이나 시인론 시간에도 교수의 강의가 아니라 학생의 발표 위주로 수업이 이뤄진다. 글재주와 아울러 발표력도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스스로 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직접 글을 많이 써보는 것이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는 문인이 된다. 그런데 ‘문인’이 직업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졸업생이 많이 갖는 직업은 학원 논술강사,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만화와 게임의 스토리 작가, 잡지사 기자, 기업체 홍보실 직원, 출판편집회사 직원, 방송국 스크립터 등이다. 글을 잘 쓰면 어디에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아예 다른 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방면에서 일가를 이루기도 한다. 젊은 날의 문학 공부가 올바른 사람을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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