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同苦)의 문학 ㅡ이승하론 박찬일(시인)
1. 들어가며 이승하는 최근 {애지}(2006. 봄)에 발표한 시편들에서 그의 시관(詩觀)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인물시 [광대를 찾아서 2―百結]에서는 '유익함·즐거움' 중에서 유익함을 강조하였다.
이 세상에 시방 音이 없다 音이 없는데 어찌 詩가 나오랴
라고 했을 때 "音"을 유익함의 음으로 보는 것이다. '유익함의 音'이 없는 시는, 줄여 말해, 유익함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음이 '유익함의 音'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같은 시에서
音을 갖고 樂을 만들었으니 세상을 꽉 채운 것이 그대 음악이로구나
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의 樂'과 '유익함의 音'이 함께 할 때 "세상을 꽉 채운"다고 한 것이다. 즐거움과 유익함을 동시에 강조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우위에 있는 것은 유익함이다. [광대를 찾아서 2―百結]은
광대여, 거문고 끌어안고서 이 아픈 세상이 크게 울게 하렴 배고프고 목마른 저마다의 생애 음악으로 제대로 한번 위로도 해보고 서럽지 않게…… 마음이라도 아주 옹골차게.
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픔, "배고"픔, "목마"름, "서"러움을 "위로"하는 것이 "광대"의 역이라고 하고 있다. '위로'는 유익함과 인접의 관계에 있다. 광대는 시인을 일컫는 것이다. '유익함'으로, 혹은 '위로'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이승하의 시관을 구체화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승하가 시론을 시로 구체화시킨 것에 부응해서.
2. '한국적 춤' 주목되는 구절이 있었다. 시 한 편의 부속품이 아니라, 시 한 편 전체와 맞먹는 무게가 나가는 구절이었다.
분노가 춤이 되는 세계 [광대를 찾아서 3―處容과 붉은 악마] 부분
넓게 보면 분노도 춤이라고 한 것이다. 분노만 그럴까. 증오·질투들이 모두 춤이 아닌가. 행복한 춤이 아닌가. 증오·질투·분노들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삶의 영역에 있지 않고 죽음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닌가. '개똥참외로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한 이치는 무엇인가. 증오·질투·분노들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한 것이 아닌가. 행복한 증오·행복한 질투·행복한 분노라고 한 것이 아닌가. '행복한 불행'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개똥참외'는 증오·질투·분노들의 메타포이다. '분노가 춤이 되는 세계'라고 한 것은 매우 한국적이다. '한국적'은 '서양적'과 달리 현세를 중시하는 것이 '내용'이기 때문이다. 현세/내세에서 현세를 중시하고, 육체/영혼에서 육체를 중시하는 것이 내용이기 때문이다. '서양적'은 현세/내세에서 내세를 중시하고, 육체/영혼에서 영혼을 중시하는 것이 내용이다. 한국의 시인이 한국적 시를 쓰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한국적이 아닌 시, 한국적이 아닌 해석(혹은 평론)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승하는 '한국적'을 작심하고 보여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작심의 문학'은 앞에서 말한 '유익함' 및 '위로'의 문학과 인접의 관계에 있다). 정체 불명의 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광대를 찾아서' 연작들이 한국적 인물들이 소재였고, 특히 1994년의 시집 {박수를 찾아서}의 많은 시편들이 한국적 인물들이 소재였다. {박수를 찾아서}가 주목되는 것은 시인이 '자서'에서부터 "우리 것" 혹은 "조상의 영혼과 꿈"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 것'을 얼마나 열렬히 사랑해 왔던지요. '우리 것'에는 조상의 영혼과 꿈이 담겨 있어 영원 무궁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박수를 찾아서}는 [처용무], [나는 다시 黃鳥歌를], [調信의 말], [溫祚의 말], [摩耶姑의 말], [元曉의 말]들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 것'을 작심하고 의도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민족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이다. 송희복은 {박수를 찾아서}를 "고전적 고대 이래 한국인이 공유해온 […] 집단무의식에 대한 상상적 탐구의 소산"이라고 하였다. 집단무의식은 대개 '세계적' 집단무의식이다. '한국적 시'와 '민족주의'가 서로 관계없다고 할 수 없다.
녹색 잔디에 불이 일어난 서기 2002년 6월이었지 대∼한민국! 함성을 지르는 도깨비들이 있었어 그놈들은 "오∼ 필승 코리아"란 글자가 적힌 요상한 방망이를 들고 있었지
예선전, 16강, 8강, 4강…… 그놈들은 그예 스탠드에서 내려와 손에 손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어 벽을 넘어서 한 마음으로 둥글게 둥글게 강강수월래를 추었어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주 금남로에서 웃으며 노래하며 빙글빙글 돌며 놀았지 그놈들은 도깨비가 아니라 광대였어 [광대를 찾아서 3―處容과 붉은 악마] 부분
2002년 월드컵에서 "오∼ 필승 코리아"를 반복하는 '붉은 악마들'과 민족주의(혹은 국수주의)가 서로 관계없다고 할 수 없다. 일사불란한 붉은 악마들은 '한편으로' 홍위병을 연상하게 하였다. 히틀러 유겐트를 연상하게 하였다. 이승하는 '한국적 춤'을 찬양하는 민족주의자인가.
3. 경계를 넘어서는 삶 이승하를 민족주의자로 단정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승하는 한국인 '원효'를 소재로 또한
두 소매 휘두르며 번뇌를 내몰고 껑충껑충 뛰며 경계를 넘어서 온 세상 떠돌아다니며 노는 광대처럼 나 이제부터 자유롭게 살려고 하오 [광대를 찾아서 5―元曉(617∼686)] 부분
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하는 원효가 "경계를 넘어"선 삶을 산 것처럼 경계를 넘어선 삶을 사는 것을 동경하고 있다. 경계를 넘어서는 삶을 사는 자는 "자유"의 삶을 사는 자이다.
첩첩 산골 암자에서 구한 것이 저 저잣거리 사람 사는 마을의 장터에서 다 팔고 있었소 佛은 무엇이며 法과 僧은 또 무엇이겠소 나 이제 저 사람들 앞에서 가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노래하고 춤추려 하오 [광대를 찾아서 5―元曉(617∼686)] 부분
원효의 삶이 부처와 범부의 경계를 없애고, 성과 속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었다면, '佛 法 僧'과 저잣거리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었다면, 이승하의 삶은, 혹은 삶의 목표는, "온 세상 떠돌아다니며 노는 광대처럼 […] 자유롭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를 통해 저잣거리의 삶을 강조하고 있지만, 불·법·승과 저잣거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지만, 정작 이승하가 강조하는 것은 저잣거리이다. 저잣거리의 자유이다. '저잣거리의 자유'에 대해 이승하는 이미 '원효'를 소재로 한 다른 시에서 피력했었다.
두 소매 휘두르며 번뇌를 내몰고 껑충껑충 뛰며 경계를 넘어서 온 세상 떠돌아다니며 노는 광대처럼 나 이제부터 자유롭게 살아보려 하오 우리 누구나 밥그릇 들고 살다 밥그릇 놓으면 생도 그만일 것을 나 이 참에 끊을 것 죄다 끊고
아무 거리낌없이 노래하고 춤추며 사람으로 살려고 하오, 요석공주여. [원효, 無 舞를 추다] 부분
역시 원효의 "경계를 넘어서"는 삶, '저잣거리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4. '현실의 세계 시민' "사람은 관념의 세계 시민은 될 수 있어도 현실의 세계 시민은 될 수 없다." 최인훈의 {화두}에 나오는 말로 기억한다. '첨예한 현실'에 부딪쳤을 때 '민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현실의 세계 시민'이 되기는 어려운 일일까. 이승하의 '민족적' 시편들을 세계 속의 민족적 시편들로 볼 수 있다. '가장 동정적인 인간이 최고의 인간'이라고 하는 계몽주의적 세계시민사상의 구체화라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민족간의 관용, 서로 다른 종교간의 관용을 요구하는 계몽주의적 세계시민사상의 구체화라고 볼 수 있다.
①아픔이 어린 나를 어른으로 만들었고 설움이 젊은 나를 늙은이 되게 했으나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해 이 악물고 살아왔고 억지로, 억지로 살아왔다 [빼앗긴 시간―군대위안부 황옥임 할머니의 영결식을 보고]({인간의 마을}) 부분
②자살 테러 폭탄이 폭발한 순간 굉음 속에서 울음 터뜨리며 막 태어난 아기가 있었을까 팔레스타인의 산모여 오래 참았기에 목숨 하나 탄생시킬 수 있구나 [목숨들]({인간의 마을}) 부분
한국의 "위안부"(①)에게 동정을 보내고 있다면 역시 어려운 처지의 "팔레스타인의 산모"(②)에게도 동정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위안부에게 동정을 보내는 것을 한국인 위안부에게 동정을 보내는 것이 아닌, 인간 위안부에게 동정을 보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마을}에 실린 시들 중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아다니는 미군 병사의 넋두리]와 [먼 아프리카]도 세계시민사상의 구체화이다. 생태주의 시편들 또한 세계시민주의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생태주의는 생명을 생명 전체에서 보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생명 전체에는 나도 포함되고 너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연의 미생물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생태주의를 '세계시민주의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특히 이승하의 '생명'에 대한 관심을 고려하면 그렇다. 자연의 미생물도 세계시민에 포함시키는 '생명사상'이 이승하의 생태주의이다.
갯벌은 서서히 등 껍질을 드러내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다 어버이들의 일터 바다는 침묵을 거두고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헛기침하다 너털웃음 웃다 소리도 내지르고 [기쁨의 간조에서 슬픔의 만조까지]({인간의 마을}) 부분
지렁이가 살고 있는 "갯벌"이 "살아 움직"인다고 한 것, 나아가, "바다"가 "헛기침하"고 "너털웃음 웃"고 "소리도 내지르고" 한다고 한 것이 생명을 생명 전체에서 보는 관점이다. 살아 있는 인간처럼 '살아 있는 갯벌', '살아 있는 바다'라고 한 것이 생명을 생명 전체에서 보는 관점이다.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이 아니다. {인간의 마을} 2부의 시편들이 생태주의 시편들이다. 한 곳에 생태주의의 시편들을 모은 것은 '생태주의'를 알리려는 것이다. 혹은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을 알리려는 것이다. 생명을 생명 전체에서 보는 관점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곳은 {뼈아픈 별}의 [적멸보궁 앞에서 별을 보다 4―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법흥사에서]였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나와 동시대를 살다 가는 모든 타인은 외따로 떨어져 죽어가는 존재일까 아닐 게다, 이 불가해하고 불가사의한 떼려야 뗄 수 없는 우주망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게다
"타인"을 인간에만 한정시킬 이유가 없다. 이 지점에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다음에 논의할 '소멸'에 대한 것이다. 생명을 생명 전체에서 보는 생태주의의 관점에도 "죽어가는 존재"(위의 시)가 끼어 들고 있다. 생태주의에도 소멸이 끼어 들고 있다. 소멸도 '생명 전체'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소멸은 동전의 양면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5. 소멸의 보편성·소멸의 필연성 이승하의 시 세계에서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소멸하는 존재에 대한 것이다.
이승하의 시 세계는 고통의 기록물이다.
홍용희의 말이다. 홍용희는 이어서 고통의 세목들로 "질병, 전쟁, 폭력, 노환, 장애, 궁핍"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승하 본인 역시 고통에 대한 관심을 명시적으로 밝혔었다.
많은 시인들이 사물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지만 나의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길 없는.
필자는 고통 중에서도 '왕의 고통'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승하에게도 왕의 고통으로 간주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인용했던 [적멸보궁 앞에서 별을 보다 4―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법흥사에서]의 한 부분을 다시 보자.
나와 동시대를 살다 가는 모든 타인은 외따로 떨어져 죽어가는 존재일까 아닐 게다, 이 불가해하고 불가사의한 떼려야 뗄 수 없는 우주망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게다 다름 아닌 소멸의 고통이다. 소멸의 고통이 왕의 고통인 것은 소멸이 보편성의 원리 및 필연성의 원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정언명법(正言明法)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리고 반드시 소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위의 구절에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드라망의 세계관을 읽지 않고, 소멸의 보편성 및 소멸의 필연성을 읽은 것은 소멸의 보편성 및 소멸의 필연성에 대한 고통이 이러한 상상(혹은 인식)을 하게 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들도 소멸의 보편성 및 소멸의 필연성에 대한 고통이 비슷한 상상(혹은 인식)을 하게 한 경우의 구체화이다.
①나는 움직일 것이다 죽어서도 원자와 핵 혹은 분자로 남아
아니, 별 구름 그리고 강으로 이 우주의 한 귀퉁이에 남아. [저렇게 움직이는 것들]({뼈아픈 별}) 부분
②목이 잘린 채 푸드득거리던 닭 목이 비틀린 채 뺑뺑이 돌던 풍뎅이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고 슬피 울던 고양이 다 이 우주의 어느 귀퉁이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이라는 그것만을 나는 안다 [완전히 사라지는 목숨은 없다]({뼈아픈 별}) 부분
"죽"지만 "원자와 핵 혹은 분자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①). "목이 잘린 […] 닭", "목이 비틀린 […] 풍뎅이",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은 "고양이"들이 "우주의 어느 귀퉁이에/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②). 우주를 거대한 '하나'의 존재로 보고 있다. 거대한 하나의 존재 속에서 생성과 소멸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고 있다. 소멸의 보편성·소멸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을 세계시민사상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소멸은 민족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다. 소멸은 세계에 관여한다. 벤야민의 말을 빌면 인류史·자연史는 소멸의 인류史·소멸의 자연史이다. 소멸의 보편성·소멸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은 관점의 확장에 기여한다. 이를테면 민족적 사건도 인류보편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도 넓은 의미의 소멸에 관한 시집이다. '폭력과 광기'도 소멸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도 소멸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정신병동"에 있는 "미친 누이"는 소멸하는 누이였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혹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누이였다. '소멸'에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음'(혹은 '다시 만날 수 없음')이 크게 내포되어 있다.
6. 소멸에 대한 동고(同苦) 소멸에 대한 고통이 있다면 소멸에 대한 동고가 있다. 소멸하는 것에 대한 동고가 있다. 소멸이 인류적인, 세계적인 소멸이라면 역시 인류사에, 세계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소멸하는 존재에 대한 동고는 이를테면 소멸한 존재에 대한 관심, 혹은 소멸한 존재에 대한 예의로 나타난다. 글을 읽는 것도 살아 있는 자의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글을 읽는다.
오늘도 나 죽은 사람의 글을 읽는다 […] 죽은 사람의 시를 읽는다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글]({인간의 마을}) 부분
죽은 자에 대한 동고를 넘어 죽은 자에 대한 예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사람의 글"은 동양에도 있고 서양에도 있다. 이승하는―인용에서는 생략되었지만―죽은 사람의 도덕경을 읽는다고 하였고, 죽은 사람(?)의 성경을 읽는다고 하였다. 의식적·의도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승하적'이다. 이승하적은 특수를 노래하면서도 보편을 의식하는 것이다. 민족을 얘기하면서 세계를 얘기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을 동시에 얘기하는 것이다. 세계시민주의로서의 동고의 사상은 이미 등단작에서 그 단초를 드러내었다.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畵家 뭉크와 함께] 부분
"세기말의 […] 무수한 학살극"에 대해 분노하고 세기말의 무수한 학살극의 구체화인 "보트 피플"에 대해 동고하고 있다. 더듬거리는 것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충격과 분노와 동고들은 인접의 관계에 있다. 윤호병은 이승하의 시 세계를 개인사와 세계사의 만남으로, 혹은 사적 체험으로서의 고통에서 세계사적 체험으로서의 고통으로의 전진으로 파악하였다.
시적 헬리콘니즘, 말하자면 시신 뮤즈의 정신을 지배하는 감성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시적 네오-헬리콘니즘, 즉 개인에서 공동체로, 한 나라의 역경에서 세계사의 수난사로 […] 나아가고 있다.
7. 나가며 내 필생의 화두는 '고통의 뜻을 알자'는 것 [지렁이 괴롭히기]({인간의 마을}) 부분
"고통"에 대해 아는 것은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자는 계몽주의자이다. 세계시민주의자이다. 대한민국인의 아들들의 고통도 있고 이라크인의 아들들의 고통도 있다. 둘 다 시적 화자를 아프게 한다. "가장 同苦的 인간이 최고의 인간이다." 이승하는 가장 동고적인 인간이다. 이승하는 한국인이고 세계인이다. 고통에 대해 동고한다는 것은 고통의 제거를 기대하는 것이다. 고통 없는 사회, 고통 없는 세계를 기대하는 것이다. 서두['1. 들어가며']에서 말한 '유익함의 전달'로서의 문학관과 '同苦'의 문학관은 그래서 동전의 양면이다. 개선과 변혁의 문학관이라는 점에서 같다. 개선과 변혁의 문학관은 계몽의 문학관이다. 동고의 문학은, 계몽주의 시대의 레싱식(式)으로 말하면, 독자들로 하여금 동고를 연습시킴으로써 이웃의 불행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는 것이다. 이승하는 이웃의 불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독자를 기대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고통의 세목에 '소멸'이 있는 것이다. 이승하에게 소멸의 고통은 제1의 고통이다. 혹은 소멸을 바라보는 고통이 제1의 고통이다. 소멸이 '보편적 소멸'이라는 점에서 세계시민주의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문제는 소멸의 제거이다. '세계내적존재'인 인간은 소멸의 제거에 참여할 수 없다. 세계외적존재가 필요한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