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신]시의 네 단계
임보
로메다 님, 신춘문예에 당선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군요. 좀 실망이야 되겠지만 너무 애석해 할 것도 없습니다. 지난번에 내가 얘기한 것처럼 문예작품의 평가는 선자(選者)의 주관에 좌우됩니다. 그러니 당선은 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너무 일찍 등단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당신을 위한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약관의 나이로 화려하게 등단하는 문인들 치고 후세에 좋은 작품을 남긴 경우는 별로 흔치 않습니다. 조기 등단이 오히려 자만을 길러 글공부를 등한케 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어떤 시인은 데뷔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형상은 등단 무렵 작품에 쏟았던 치열한 정성을 등단 후에는 쏟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등단의 시기가 늦어질수록 글에 대한 단련의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고, 장차 큰 작품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로메다 님, 등단에 관한 얘기는 이제 이만하고 오늘은 시의 네 단계에 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시를 평생의 과업으로 밀고 나가려면 보다 넓은 시야로 시를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의 길을 더 깊고 멀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시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데도 다음의 네 단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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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네 단계>
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 작품의 생성은 그 시인이 지니고 있는 언어 운용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 시인의 총체적인 정신 활동(미의식, 비평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 탐구의식 등)의 결과인데 이러한 요인들의 우열을 객관적으로 가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에 대한 모든 평가는 따지고 보면 평가자의 주관적인 기호에 근거하기 마련이다. 소위 J.C.랜섬이 내세운 ‘형이상의 시’(metaphysical poetry)나 (랜섬은 시를 대상을 노래한 사물시(physical poetry)와 생각과 감정을 노래한 관념시(platonic poetry)로 양분한 뒤, 이 둘을 통합하는 형이상의 시를 이상적으로 생각했음.) I.A.리차즈가 제시한‘포괄의 시’(inclusive poetry)라는 것도 결국 그들의 개인적 가치관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리차즈는 '포괄의 시'와 '배제의 시'로 구분하여 '포괄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에 관한 논의는 따로 할 것임.) 역대 동양적 시평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종영(鍾嶸)이나 사공도(司空圖) 등의 ‘시품설(詩品說)’들 (이들은 시의 품격을 24시풍 등 다양하게 분류하고 있으나 객관성이 없는 것들임) 역시 인상주의 범주 내에서 시도된 것에 불과하다. 어떠한 경우라도 시의 평가에 대한 객관적 논의가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품의 우열을 따지는 문제와는 달리, 한 시인의 생애를 통해서 변모해 가는 작품의 경향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는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개의 식물들이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잎을 떨구는 과정을 계절에 좇아 자연스럽게 밟아 가듯이 시인들 역시 그들 생명의 역정에 따라 세계[대상]를 보는 태도도 변모해 간다. 이 변모의 역정을 나는 다음의 네 단계로 설정해 보고자 한다.
제1기 모방(模倣)의 단계
주체[自我]의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 곧 세계와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며 수용하는 단계다. 대상의 모방[描寫], 현실의 재현(再現)이 중요시된다. 따라서 감각의 기능 및 관찰력이 주도하고 수사법상 비유가 빛을 발한다. 리얼리즘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계다.
제2기 탐색(探索)의 단계
현상에 대한 회의, 현세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감추어진 본질의 세계에 대한 탐색, 이상 세계의 추구, 나아가서는 피안(彼岸)에의 염원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을 움직이는 어떤 원리(眞理)를 터득, 묘오(妙悟)에 이르고자 한다. 감각보다는 직관, 투시적 혜안이 주도한다. 수사상 상징법이 원용되고 사조상 상징주의에 닿아 있다.
제3기 창안(創案)의 단계
역시 기존의 세계에 대한 부정 정신에 근거한다. 그러나 강한 주체의식의 발동으로 새로운 세계를 모색한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탈세계라는 입장에서 보면 파괴적인 것으로 보이나 대상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면에서 보면 순수한 창조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회화에서의 추상 내지는 비구상의 단계에 해당된다.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꿈꾼다. 환상적인 상상력이 주도한다. 폭력적 병치가 사물을 얽는다. 이른 바 무의미의 시라는 것이 이 단계에 속하는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제4기 방치(放置)의 단계
자아와 세계에 대한 긍정으로 되돌아오는 단계다. 제1, 2단계는 자아보다는 세계가, 제3단계는 세계보다는 자아가 주도를 하지만 여기서는 자아와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아니 세계 속에 자아가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단계다. 달리 말하면 무욕청정(無慾淸淨), 귀의자연(歸依自然)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유유자적(悠悠自適), 무애불기(無碍不羈)하여 드디어는 탈기교(脫技巧), 치졸(稚拙), 무법(無法)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시의 열반경(涅槃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곳이 바로 선인(先人) 문사들이 선망했던 이상적인 경지다.
서두에서 나는 시 작품의 객관적인 평가의 불가함을 거론했다. 이 네 단계에 속한 작품들의 우열도 물론 일괄적으로 논의할 수 없다. 독자들과의 관계까지를 따지면 더더욱 그렇다. 대상을 생동감 있게 그린 사물시가 놀라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노래한 형이상학적인 시가 우리를 깊은 사색의 바다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혹은 기발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기이하고 낯선 시세계가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기도 하고, 마치 어린이의 그림처럼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치졸한 작품이 혼탁한 우리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니 어느 한 단계의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역시 설득력이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작품 아닌 시인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으로 남는다. 시인의 역정(歷程)이라는 것 말이다.
앞에서 나는 시인의 역정을 설명하면서 그 예로 식물의 생태를 들춘 바 있다. 그런데 식물의 생태가 한결같지 않은 것처럼 (어떤 놈은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기도 하고, 어떤 놈은 봄 아닌 가을에 꽃을 만들기도 한다) 시인들의 역정 역시 앞에 제시한 네 단계를 한결같이 밟아 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인은 제1의 단계에서 평생 안주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시인은 제2의 단계에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시인들은 제3 혹은 제4의 단계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제4의 단계에 이른 시인들이 그렇게 흔치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4의 단계가 시인의 연치(年齒)와 무관치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달관(達觀)에 이르는 수심(修心)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는 훌륭한 작품에 대한 기대 못지 않게 훌륭한 시인에 대한 기대도 크다. 어쩌면 전자보다 오히려 후자에 대한 비중이 더 클지도 모른다. 한 시인의 초연한 삶을 통해 우리들의 궁극적인 염원인 어떻게 살 것인가의 그 지난(至難)한 문제의 매듭이 혹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리라.
시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는 힘겨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시대의 사표로 시인을 설정한다. 그래도 아직은 그들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시인 중에서도 네 번째 방치의 단계에 이른 시인들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인을 단순한 장인(匠人)으로 보지 않고 구도인(求道人)으로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졸저『엄살의 시학』(태학사)pp.15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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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다 님, 오늘도 골치 아픈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군요. 이 얘기도 따지고 보면 내 주관적인 가치관에 근거한 것이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시의 먼길을 내다보면서 앞날을 설계할 때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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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강좌는 <자연과 시의 이웃들(rimpoet.pe.kr)>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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