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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강 시//18. 저녁 잎사귀

18.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한 백 년쯤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내 몸이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나는 후회했다알 것 같다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볕 속을 걸어야 한다거기 저녁 잎사귀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잠긴다

1. 한강 시//16. 어깨 뼈

16. 어깨뼈 사람의 몸에서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두려우면 움츠러들고당당할 때면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목덜미와 어깨 사이가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햇빛이었으면나직한 오월의바람소리였으면

사랑의 두 얼굴

사랑의 두 얼굴/ 월정 강대실  이제 그만 동거 끝내자고거실 꽃분 남창 아래로 내놓으며, 문득생각을 해 본다 내 사랑의 두 얼굴. 아비 아들 범벅 금 그어 먹는 건 아니되두 아들 어느새 자라 앞산도 들쳐 멜 만하여책가방 내려놓게 되면 다음 날 부터는눈앞에 얼씬도 말라 이르곤 한. 성미 칼칼한 바람 기웃거린다 싶으면 유난히도 호들갑을 떨며 거실로 맞아들여삼동을 눈 맞추며 고운 꿈 키우다햇살의 은사로 꽃 피워 고운님 모셔라며진자리 마른자리 골라 돌보는.   선뜻이 파도 더 센 인해로 뛰쳐나가허위허위 나래치는 모습 안타깝기도 하지만머잖아 태산준령을 맨발로 넘어야 하기에   뒤를 받칠 건 맵고 쓰거운 훈계와지금껏 바쳐 온 붉은 정성을 다한 기도뿐어찌 못할 야누스 같은 내 사랑의 두 얼굴.초2-821

1. 오늘의 시 2024.10.17

1. 한강 시//15. 2월

15.  2월 나의 어머니, 쉰 두살, 윗입술이 잘 부르트시고, 반세기를 건너오시면서도 웃을 때면 음조나 표정이 소녀같은, 아니 소년같은 분.고즈넉한 저녁 딸과 마주앉아 마늘을 까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피리소리, 바람 찬 창으로 두리번거리던 딸은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 못 한다. 이렇게 또 봄이 온다는 건가. 딸은 믿을 수가 없다. 구성진 가락은 다뉴브강의푸른 물결, 윤심덕이 부른 노래.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곳···  좋은 날은 다 지나가버린 것 같아요 엄마어머니 조용히 웃으신다너도 지금 좋을 적 아니냐이젠 저도 책임져야 될 나이가 된 걸요, 곧 졸업이에요어머니 일어나 가스렌지 불을 줄이신다느그 외할무니 하시던 말씀이 다 맞어야···비 피할라고 잠깐 굴에 들어갔다 나온 것맨이로 그렇게..

1. 한강 시//14.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4.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하루가 끝나면서랍에 저녁을 넣어 둔다저녁이 식기 전에나는 퇴근을 한다저녁은 서랍 안에서식어가고 있지만나는 퇴근을 한다하루의 무게를 내려놓고서랍에 넣어 둔 저녁은아직도 따뜻하다나는 퇴근을 한다저녁이 식기 전에퇴근을 하면서저녁을 꺼내어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하루의 끝에서퇴근을 하고서랍에 넣어 둔 저녁을 꺼내면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나는 퇴근을 한다퇴근을 하면서저녁을 꺼내어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하루의 끝에서

1. 한강 시//13. 효에게

13. 효에게(작가가 아들에게 쓴 편지)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겁먹은 얼굴로아이가 말했다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밀려오길래우리 몸을 지나 계속차오르기만 한 줄 알았나보다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내 다리를 끌어안고 다시 뒤로 숨겠지마치 내가그 어떤 것,바다로부터조차 널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기침이 깊어먹은 것을 토해내며눈물을 흘리며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마치 나에게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하지만 곧너도 알게 되겠지내가 할 수 있는 일은기억하는 일뿐이란 걸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시간과成長,집요하게 사라지고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처음부터 모래로 지은이 몸에 새겨두는 일..

1. 한강 시//12. 조용한 날들

12. 조용한 날들아프다가담 밑에서하얀 돌을 보았다오래 때가 묻은손가락 두 마디만 한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좋겠다 너는,생명이 없어서아무리 들여다봐도마주 보는 눈이 없다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무엇에게도아프다가돌아오다가지워지는 길 위에쪼그려 앉았다가손을 뻗지 않았다

또 다른 출근 날

또 다른 출근 날/ 월정 강대실 귀때기가 새파랬던 시절첫 출근의 북받친 감격 떠올리며면접도 이력서도 하나 없이 쌍수로 맞는새 터전으로 나선다천하없어도 그 자리에 거꾸로 달려서라도밥과 보람의 길 열라 포장해 주는번질번질 다림질 된 와이셔츠때때로 바꿔 매던 넥타이도 버리고달랑 자유로움 하나 걸치고 간다뒷주머니에 물병 하나시집과 메모지와 볼펜 손에 챙겨 들고느긋이 가재 뒷걸음으로 가도 좋고버스가 시간을 빼먹어도 여유롭다문은 사방 군데 열려 있고 산마을 벗들일면식 없어도 모두 다 반갑다허나, 꼭 지킬 건 놀빛에 젖으란다솔잎 향 진동한 바람에 흠뻑 취하고산자락 찾아 든 산그늘에 안겨우화등선 하늘에 꼭 오르라 이른다. 초2-823.

1. 오늘의 시 2024.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