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던
- 최정례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쇼핑 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그 나물에 그 밥
쟁반만 한 다알리아에 주먹만 한 벚꽃
그 노래에 그 타령
지난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훌쩍이면서
여기는 블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블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블루베리 케익을 만들자구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놔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 달란 말이야
초승달, 밤배, 가족사진
끝을 날카롭게 구부리고 지붕 위를 떠가는 초승달
왜 입 안에 신 침이 고이는 것일까
껍질 반쯤 벗겨진 사이로
신물 주르륵 흘러내리고 노란 껍질
익다 못해 터진 그 사이로 안개처럼 떠 있는
앞에는 키 작은 아이들 뒤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100년 전 사람들 단장을 짚고 안경을 쓰고
줄줄이 서 있던 일족의 흑백사진
한 잎 배를 타고 칠흑의 밤을 노 저어 가던 그 집
그 집 벽 위 액자에도 저런 빛깔의 과일이 한쪽 떠 있었던 것만 같다
먹어본 듯하나 아직 먹어보지 못한
주르륵 지붕 위로 미끄러져 내리던
100년도 전에 그 집 사람들 미끄러져 가면서
남자가 입덧 중인 여자에게
열매를 꺼내 한 쪽씩 입속에 넣어주고
아기들에게도 쪼개주고
둘러앉아 한쪽 눈을 찌그리며 터뜨려 먹고 있는데
그때 밀감도 아니고 오렌지도 아니고 신 살구빛의 그것이 먹고 싶어
어미의 갈비뼈 밑으로 기어들어간 그 기억 때문일까
깜깜한 밤하늘 뚫고 신 살구빛의 새초롬한 달
신물 터져나오면 한쪽 눈이 찌그러지다 환해지는데
그 집 액자에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고
밤배 탄 사람들
아직도 기린처럼
그 열매 끌어내려 터뜨려 먹으며 가고 있는지
잔뜩 구부리고 초승달 미끄러져 내린다
슬픔의 자루
어머니가 꼼짝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오줌과 똥을 치우느라 엎드려 있는데
병원 밖 멀리 기차가 배추벌레처럼 꿈틀거리고
느닷없이 그 짐승이 거기를 가로질러 갑니다
그 짐승의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무뚝뚝하기도 하고 흐느적거리기도 하고
석양 무렵이었습니다
햇빛 무서운 대낮에도 마주친 적 있습니다
아이가 잊고 간 도시락 갖다주러 가다가
반짝이는 잎 그물 사이로
농담처럼
그 짐승이 휙 지나는 겁니다
털 오라기 하나 떨구지 않고
길모퉁이 만개한 제비꽃 속으로
두 귀를 펼친 코끼리처럼
잎 그물 속에 출렁이다가
딱정벌레 오리나무 속 갉아먹는 소리 속으로
어느 날인가는 막다른 골목에서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된 그가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던 것도 보았습니다
내미는 손 잡혀버릴 것만 같아
손 내밀지 못하고
묶어서 자루에 넣어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는데
지난 유월 오빠가 집 앞 계단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왜 자꾸 그 생각이 나는지 모릅니다
그가 잡아 지고 왔던 자루
그는 우리에게 아이스케키를 사다준 것이었는데
자루 속에는 젖은 얼룩과 막대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온몸을 잊으려고
양귀비는 거북 눈속에서 하늘거리고
낙화암은 옆구리에 삼천궁녀를 거느렸네
차바퀴 밑에는 고양이가
늑골 아래에는 암세포가
야옹거리며 야옹거리며 사네
종합병원 건너편 저 멀리에
기차가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초록 배추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꿈틀거리며 건널 때
겨자씨 속엔 눈폭풍이
뻐꾹 소리 속엔 먼 산이
온몸을 잊으려고
이 세상 냄새를 잊으려고
눈꺼풀 속으로 백일몽 속으로
절벽 아래로 밪꽃 잎 아래로
흩날리네 흩날리네
하산
그때 나는 숲에서 나와 길에 올랐다
검은 떡갈나무 숲 한 뼘 위에
초승달 눈 흘기고 있었다
숲에서 나오자 세상 끝이었다
우리 밑에 잣눌려 부스럭대던 잎사귀들
아이처럼 지껄이던 산 개울 물소리
아무 생각 없이 나눈 악수는
흘러 흘러 흘러서 바위틈으로 스며들고
숲애서 나오자 깜깜했다
허공중에 피었다 곤두박질 치는 것
깨진 접시 조각처럼 잠시 멈춰 있던 것
보았느냐고, 묻고 싶은데
갑자기 숲은 아득해져서
지나간 잎사귀들만 매달고 흔들리고
최정례 시인
1955년 경기도 화성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0년『현대시학』에 시 「번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94년 첫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1998년에 두번째 시집 『햇빛 속에 호랑이』, 2001년에 세 번째 시집 『붉은 밭』
2006년 네번 째 시집 『레바논 감정』간행. 1999년 제10회 김달진 문학상, 2003년 이수문학상 수상. 2007년 현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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