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스크랩] 이시하 시모음<제1회 계간정인 시문학상>

월정月靜 강대실 2007. 1. 25. 18:44
제1회 [계간정인 시문학상] 당선작]


『계간정인 시문학상』은 신춘문예 또는 문예지를 통해 1년 이내 등단한 신인이나 시집 발간, 또는 새로이 시인을 꿈꾸는 시인지망생들의 시작품을 접수받아 장래가 촉망되고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뽑아 선발하고 있다. 제1회 시문학상 당선작과 박형준 시인의 심사평을 함께 싣는다.



나무 /이시하


나무의 살을 물어뜯었다 질기고 텁텁하고 아릿했다 나무는 조용히 햇살을 당겨 제 몸에 감았다 나무가 울지 않았으므로 나도 울지 않았다 나는 우는 나무가 보고 싶었고 우는 나무 때문에 아프고 싶었고 아파서 울고 싶었다

햇살을 칭칭 동여맨 나무의 상처는 따스했다.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병아리 발자국 같은 개나리꽃처럼, 개나리꽃 피는 봄날처럼,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따스했다

햇살을 온몸에 바른 나무는 하나님처럼 빛나더니 상처에서 연초록 새싹이 돋아났다 내 잇몸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이빨을 뚫고 나무들이 자라났다 상처에서 자라난 새싹들이 입안으로 날아들자 나무들이 뽑혔다 이빨도 함께 뽑혀나갔으므로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나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한없이 울었고 나무는 끝없이 웃었다

춥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니 햇살이 온데간데없다

나무는 이제 웃지 않았고 나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 나무가 내 등에 기대어 졸기에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살다보면 밤새 나무를 재워야하는, 이런 별스런 날도 있는 것이다.



소란한 집 /이시하


너무 많은 엄마, 너무 많은 아버지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아침이면 수많은 엄마가 와르륵 쏟아져요
비워진 밥그릇 안으로, 캄캄한 입들 속으로
구멍 난 양말 속으로, 부스스한 머리칼 속으로
누릿누릿 뜬 얼굴 속으로, 매케한 콧구멍 속으로
푸념푸념푸념푸념 거품을 물고 쏟아져요

어느땐가 교실 문까지 따라온 엄마를
신발짝 흙 털듯 타악! 떨어내기도 했죠
어깨에도 붙었다가 가방에도 숨었다가
뭉툭한 연필심에 침처럼 묻어있기도 해서
아, 지겹고 지겨워요
그런 날 해는 왜 더디 지는지 몰라
너무 많은 엄마가 저녁밥 지으러 갈 때쯤,

너무 많은 아버지가 구멍가게 평상에서 흘러나오죠
술병에서 흘러나오고, 가게 주인 욕설에서 흘러나오고
밀린 외상값에서 흘러나오고, 빈 주머니에서 흘러나오고
어허, 달아놓으라니까! 움켜쥔 멱살에서 흘러나오고
제기럴제기럴제기럴, 혀가 꼬인 채 쏟아지죠
아, 징글징글도 해요

니 애비 쏟아지기 전에 어여 밥 먹어라
그려? 어디 먹어봐라, 콰르릉, 콰릉!
엎어지는 밥상, 캄캄한 입들, 우는 입들, 빈 입들
쫓겨나는 입들, 닫혀진 입들, 막막한 입들
앙바틈한 사이로 우릉우릉 쏟아지는
너무 많은 아버지, 주워담으려 몰려드는
우우, 너무 많은 엄마!

빈집이 퀘엥퀘엥 울리고
빈 쌀독이 우웅우웅 울리는 저 집,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고래고래 들려오는 저 집,
소란한 저, 저!



자전거를 타세요/ 이시하


가난한 아부지, 눈속엔 꿈이 없어요 막막하고 조용한 방죽 속, 병든 붕어 같은 당신이 애틋하여 결핵 걸린 조그만 딸은 터져나오는 기침을 참으며 방직공장엘 나가요 폐병쟁이란 걸 들키지 않으려 기침도 마음 놓고 못하는데, 기침이 시작되면 재빨리 사람들 틈을 벗어나야 하는데, 배에 힘을 주고 숨을 멈춘 채 기침이 잦아들길 기다려야 하는데, 아버지, 당신은 오늘도 술이 술술 넘어가 좋다셔요

월급을 탔어요, 아버지 나팔꽃같이 환해져선 잠시 웃었어요 나팔꽃은 참 빨리 시들어요,그치요? 시든 꽃처럼 다소곳이 월급봉투를 비웠어요 짐 자전거 한 대와 검정 장화 한 켤레 사서 보냈는데요 아부지, 달려나와 받으세요 이장님 것보다 좋은 그것을요 어서요, 아부지!

자전거를 타고, 검정 장화를 신고, 논으로, 밭으로, 햇살 속으로 사라지세요, 사라져 주세요!
노을을 지고 오세요, 아부지.



낯익은 밥 냄새/이시하


저노무 동백,
내년엔 파버려야 쓰긋다

둥근 뼈가 마늘 쪼개다 하는 푸념
동백이 엿듣고는 파르르 떤다
내 몸에 오소소 소름 돋는 소리
살갗들이 귀 쫑긋 세우는 소리
어무니, 버릴 거면 저 주세요
오이야, 후딱 가져가그라
내 몸 하나 지탱허기두 구찬은데
성성한 저것을 우예 돌보누
어여 파가라, 하신다

당신 가신 후
혼자 남을 동백이 노상 근심인 게다
잘 살까 싶은 게 애물단지인 게다
흙까정 퍼가라, 낯선 곳서 살려믄
지 먹던 밥 냄새라도 맡아야지

나무에게도 고향이란 게 있을까
나고 자란 곳의 바람, 하늘, 햇빛, 눈, 비 같은 것들을
나이테 사이사이에 끼워두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서 때로 저 먹던 밥 냄새 그리워
시름시름 말라가기도 하는 걸까

마늘을 다 쪼개신 어머니, 휘둘휘둘 나가신다
나는야 죽을 때까정 여그, 내 밥덩이 먹구 살란다,
하시며,



저녁 무렵/이시하


여린 목소리가 엄마라고 불러줄 때
명치끝서 짠한 아픔 같은 게
눈물 같은 게
비어있던 가슴 안으로 먹먹하게 차오르고,
왜 그래, 울먹울먹하는 아이의 어깨에
흐린 안개 같은 것이 피고
안개는 또 내 눈에서도 피고
엄마라고 불리는 것이 애틋해
모질던 마음 헤프게 벌어지던
저녁 무렵,

눈치 없는 달맞이꽃 가두었던 달빛을 환하게 터트리고
토닥토닥, 흔들리는 어깨를 그러모아 두 팔로 단단히 묶고

엄마 여기있어, 어디 안가
뭉글뭉글한 게 눈 안에 가득해져서
끔벅이지 않아도 왁왁 쏟아지고,
울어?
아니야
눈에서 물 나오잖아
안개야, 안개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거야
참 신기하다
그래, 참 신기하지?
여린 목소리가 금방 환해지고
흔들리던 어깨도 가만히 따스해지고
달맞이꽃 저 혼자 그만 무안해져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아련한
저녁 무렵,



홍등을 읽다/ 이시하


당신은 헐값에 나를 읽어요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요
침을 바른 당신의 손, 끈끈하고 질척한 당신의 손,
혀 같은 당신의 손이 나를 읽을 때면
내가 꽃인 게, 늘 꺾여야 하는
꽃 같은 여자인 게 싫어져요
당신은 나를 포르노로 읽어요
삼류 비디오 테잎 보듯 해요
하이틴 로맨스 정도라면 눈 딱 감고 읽혀줄 텐데요
당신의 충혈된 눈이 무서워요
눅눅한 집,
곰팡이 핀 벽,
바퀴벌레 우굴 대는 싱크대 서랍,
당신이 나를 읽을 때면 왜 그런 것들이 떠오르죠?
스멀거리는 그림자 때문에 현기증이 일어요
감탄도, 클라이맥스도 아니라구요
당신이 나를 포르노로 읽는 동안
나는 음습한 괴기 소설을 상상해요
소리를 지르죠
진저리나는 일상에 대해,
불결한 밤꽃 향기에 대해,
남아프리카의 어린 꽃들에 대해,
에이즈에 대해,

오늘도 당신의 붉은 혀는
헐값으로 산 어린 꽃을 읽어요
죽음을 볼록하게 안은 알 밴 꽃들이
웃는 듯, 입을 벌리고 있어요
물, 물, 무울,

당신은 언제나 불, 불, 부울로 읽는군요.


ㅡ심사평ㅡ

생동감 넘치는 감각의 언어
ㅡ박형준(시인)

현실과의 대결의식 없이 내면에만 치우치면 좋은 시를 얻기 힘들다.이 점은 특히 막 시단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신인들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투고작들은 대개 낭만성에 바탕한 시적 유형에 속해 있다. 우리가 항용 말하는 낭만주의란 개인의 감정을 극대화하여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상상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낭만주의적 시가 개인의 감정만을 중요시한다는 편견이다. 사실 문예사조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개인의 고도로 폭발하는 감정을 중요시하는 한편으로 ‘타자’에 대한 발견을 중요시한다. 이때의 타자란 민족도 될 수 있고, 자연도 될 수 있고 주변의 친한 친구나 그보다 더 밀접한 육친이 될 수도 있다. 굳이 이런 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좋은 시란 개인의 감정에만 빠져들지 않고 거기에 사회와 자연 등 사물과 다리를 놓는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신인은 자신의 감정을 사물에 이입한 은유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서정의 치열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시하 시인의「나무」외 5편은 사물의 이면을 만져내는 감각적 재능이 눈에 띈다. 몸에서 그냥 흘러나오는 힘찬 구어체의 언어들은 자유분방하게 폭발하는 상상력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가령 자신을 소란한 집’으로 비유하여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간섭하는 가족을 풍자하면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을 보여주는 시편(「소란한 집」), 또는 몸 파는 여자를 내세워 한사코 포르노로 읽으려는 남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음습한 괴기 소설’을 상상하는 시편(「홍등을 읽다」) 등은 자기 존재에 대한 탐색을 늦추지 않는 여성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시하 시인의 시편들에서 보이는 가족 혹은 여성 화자들이 감상적인 점은 불만이다. 앞으로 감각의 언어를 한층 단련하여 존재의 핵심에 가닿는 단단한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ㅡ박형준(朴瑩浚)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87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구(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등단.
1994년 첫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간행 이후『빵냄새를 풍기는 거울』(1997)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등이 있음. 제15회 동서문학상 수상.
1996년 제1회 꿈과시문학상 수상
출처 : e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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