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본명 김윤식 전남 강진출생
1.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2.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3.강 물
잠 자리 서뤄서 일어났소
꿈이 고웁지 못해 눈을 떳소
벼개에 차단히 눈물은 젖었는듸
흐르다못해 한방울 애끈히 고이었소
꿈에 본 강물이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언덕을 혼자서 지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강물은 철 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꿈도 떠실고 갔소
꿈이 아닌 생시 가진 설움도
작고 강물은 떠실고 갔소.
4.5월 아침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즈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마는
이 아침 새 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을 흔드오
자랑찬 새 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버렸대서야
불혹이 자랑이 아니 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밀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인가 보오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이고
내사 불혹을 자랑턴 사람.
6.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7.지반추억(地畔追億)
깊은 겨울 햇빛이 따사한 날
큰 못가의 하마 잊었던 두던길을 사뿐
거닐어가다 무심코 주저앉다
구을다 남어 한 곳에 쏘복히 쌓인 낙엽
그 위에 주저앉다
살르 빠시식 어쩌면 내가 이리 짖궂은고
내 몸 푸를 내가 느끼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어지다?
못물은 치위에도 달른다 얼지도 않는 날세
낙엽이 수없이 묻힌 검은 뻘 흙이랑 더러
들어나는 물부피도 많이 줄었다
흐르질 않더라도 가는 물결이 금 지거늘
이 못물 왜 이럴고 이게 바로 그 죽음의 물일가
그저 고요하다 뻘흙속엔 지렁이 하나도
꿈틀거리지않어? 뽀글하지도 않어 그저
고요하다 그 물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
하나도 없어?
햇빛이 따사롭기야 나는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꼈는데.
여나문해? 그때는 봄날이러라 바로 이 못가이러라
그이와 단 둘이 흰 모시 진설 두르고 푸르른
이끼도 행여 밟을세라 돌 위에 앉고
부풀은 봄물결 위에 떠노는 백조를 희롱하여
아즉 청춘을 서로 좋아하였었거니
아! 나는 이지음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끼는데.
8.발 짓
건아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듸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에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어놓은 바람이어니
포근히 옮겨 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다리 날아본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9.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