純銀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 후략) <1967년>
* 겨울 서정시의 대표격인 시다
이 시의 묘미는 자연 현상의 눈인 적설을 생명의 큰 순환으로 읽어낸 데 있다
눈이 쌓인 원시림이 석탄이 되고, 탄부의 손에 의해 채탄이 되고,
이층방 스토브의 꽃불이 되고, 하늘로 올라가는 기운이 되고, 다시
숲으로 내려 앉는 눈이 되는 그 시간의 돌고 돎 ㅡ 둥근 궤적을 시인은
읽어내고 있다. 이돌아옴의 발견이 이 시를 빼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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