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전문】 -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시집 <김현승 시초>(1957)-
【해설】
이 시는 6ㆍ25 사변 때, 목포시의 후원을 얻어 출간한 계간지 [시문학] 창간호에 실렸다가 첫 시집 <김현승 시초>(1957)에 수록된 작품으로, 이 시인의 초기작에 해당한다.
시인은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견디어 내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제망매가'에서 친족의 죽음이라는 비통한 체험을 종교적 깨달음으로 극복하고자 했듯이, 김현승 또한 슬픔과 고통의 극한에서 절대자를 향한 경건함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시정신이 이룩한 높은 경지의 하나를 본다.
“나는 내 가슴의 상처를 믿음으로 달래려고, 그러한 심정으로 썼다. ‘인간이 신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다. 이 지상에 오직 썩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라는 것이 이 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굽이쳐 가는 물굽이와 같이―나의 시, 그 변모의 과정>에서 -
즉 ‘웃음’을 일시적이요, 가변적(可變的)인 것으로 보고, 신 앞에 흘리는 ‘눈물’은 영원히 썩지 않는 인간의 양심으로 본 것이다. 사실 흔한 것이 ‘웃음’이라면, 눈물은 그만큼 귀하고 값진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눈물’의 추구를 통하여 내향적이고 정신적인 양심의 옹호와 더불어 심화된 생명의 순결성을 신앙적으로 접하며, 헬레니즘(Hellenism)의 낙천적, 향락적 세계가 아니라, 금욕적(禁慾的)인 헤브라이즘(Hebraism)의 진지한 세계로 이른다. 이것이 이 시인의 기독교적, 특히 청교도적(淸敎徒的)인 시 세계이며, 독특한 인간의 탐구라고 할 것이다.
【개관】
▶성격 : 명상적, 상징적, 종교적, 서정적, 기구적
▶심상 : 묘사, 비유, 상징
▶어조 : 경건한 경어체와 기원조
▶제재 : 눈물(눈물의 의미)
▶주제 :
-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영혼의 기원(순결한 삶의 추구)
- 눈물의 순수함에 대한 인식과 슬픔의 극복
- 심화된 생명의 순결성
- 슬픔의 종교적 승화
▶출전 : <김현승 시초>(1957)
【시어의 대응 관계】
▶꽃 : 열매 = 웃음 : 눈물
- 웃음은 '일시적인 기쁨'이지만 눈물은 신이 준 '순수한(정화된) 영원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성】
▶제1연 : 작지만 순수한 생명의 소망
- 화자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로서, 시 전체를 포괄하는 기본 전제 성격
▶제2연 : 나의 전체로서의 이것(눈물)
▶제3~4연 : 가장 값진 이것(눈물)
▶제5연 : 절대자의 존재와 그 섭리
【이 시에서의 ‘눈물’의 의미】
이 작품의 핵심 이미지로서 '눈물'을 발견하는 일은 용이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눈물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있다. 시인은 눈물이 '옥토에 떨어지는 생명'이라고 함으로써 눈물이 일반적으로 슬픔을 환기한다는 우리의 안이한 생각을 배반한다.
눈물은 생명이며 그것도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순수한 것이다. 즉 이 작품에서 눈물은 순수한 생명이라는 내포를 가졌다. 그것은 시인에게 유일무이한 가치다. 동시에 이 눈물은, 꽃과 열매의 관계가 웃음과 눈물의 관계에 상응하는 이런 관계의 관계를 통하여 영원하고 불변적인 가치가 됨을 시인은 암시한다.
꽃은 아름답지만 쉽게 시들므로 그것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다. 마찬가지로 웃음도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다.
그러나 이와 대립되는 열매와 눈물은 영원하고 불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작품의 주제는 영원한 가치로서의 생명의 순수성이다. 시인은 이런 주제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눈물의 핵심 이미지로써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시구 풀이】
<나의 웃음> : 삶의 환희
<나의 눈물> : 삶의 고뇌와 시련을 통하여 도달된 절대 순수의 세계
<더러는/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가끔은 하찮은 존재이나마 기름진 땅에 떨어지는 씨앗과 같이 맑고 깨끗한 생명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흠도 티도/금가지 않는/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럽히지 않은 나의 순결한 존재는 오로지 눈물을 통해 표현될 수 있는 뿐이라는 뜻이다. 즉, '눈물'이야말로 내 영혼의 가장 순수하고 순결한 부분이라는 의미이다.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 눈물만이 나의 흠 없고 티없는 모든 것이나 그것마저 불순하다고, 그래서 더욱 맑고 가치 있는 것을 내놓으라 한다면.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 내가 최종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은 궁극적인 가치, 다시 말해 절대자에게 바칠 수 있을 만큼 지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오직 눈물뿐이라는 뜻이다.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을 상징한다. 반대로 '열매'는 그 덧없는 것에 의해서 성취된 고귀한 가치를 뜻한다. 이 구절은 밀알 하나가 썩어서 수많은 열매를 만든다는 성서의 비유를 연상케 한다.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신다> : '웃음'은 '아름다운 나무와 꽃'과 마찬가지로 덧없는 인생의 즐거움을 뜻하고,'눈물'은 '열매'와 상응하면서 삶의 고뇌와 시련을 거쳐 도달한 정화된 영혼의 상태를 가리킨다.
【내용 풀이】
▶제1연 : (일상적인 죄악과 불순에 살고 있지만) 때로는 옥토에 떨어지는 씨앗과 같이 작으나, 맑고 깨끗한 생명이 되고 싶어라. ‘생명이고져’는 ‘생명이고 싶어라’의 뜻. ‘∼져’는 희망 보조형용사 ‘지다’의 감탄형 어미다. 따라서 1연은 이 시의 감정과 기원(祈願)이 가장 고조되어 있으며, 시풍은 주지적(主知的)인 것이 특색이다.
▶제2연 : (이 세상에서) 흠도 티도 없고, 금가지 않은, 온전히 맑고 깨끗한 나의 전부는 오직 이 눈물뿐이다.
- ‘눈물’을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생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의 모든 것에서 오직 참회하는 ‘‘눈물’만이 흠도 티도 금가지 않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이것은 ‘눈물=슬픔’으로 보던 재래의 관념을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시적 해석이며, 이 시의 독창성이 되기도 한다. ‘나의 전체’는 나의 모든 것 중에서 대표된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생명’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며, ‘이뿐’은 ‘눈물뿐’의 뜻이다.
▶제3∼4연 : (눈물 말고)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내어놓으라 할 때에도, (내가 바칠 수 있는) 나의 가장 최후로 지닌 것은 오직 눈물뿐이다.
- ‘눈물’이 진리의 최고 가치로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 따라서, 1연에서 옥토에 떨어지는 씨앗과 같이 작으나, 맑고 깨끗한 ‘생명’이 되고 싶다고 한 것을 상기할 적에 ‘눈물=생명’의 개념이 성립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눈물’의 추구― 그것은 작으나, 맑고 깨끗한 ‘생명’의 추구였던 것이다.
▶제5연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결국은 시들어 가는 것을 애석하게 보시고, 꽃이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 주신 조물주(造物主)께서는, (그와 같이 나에게도) 나의 웃음을 만들어 그것이 너무도 헤픈 것을 아신 때문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셨다.
- 식물과 인간의 상관적 구조다. 즉, ‘꽃=열매’(식물)와 ‘웃음=눈물’(인간)로 병렬되었다. 이것은 ‘꽃=웃음’과 ‘열매=눈물’의 도식(圖式)이 된다. 화려한 꽃보다는 ‘열매’가 더욱 소중하고, 인생의 기쁜 웃음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불완전하며, 오직 ‘열매=눈물’만이 가장 값진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즉, 내향적인 눈물에서 인생의 참다운 미(美)와 가치를 찾고 있다.
【감상】
시인 김현승이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신에 의지해 잊으려고 쓴 작품으로, '고독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시인답게 고백체로 씌어졌다.
작품 전반에 성서적인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는 것처럼 김현승은 기독교주의적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1연의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의 주체는 눈물이다. 이것은 <마태오의 복음서> 13 : 23에서 '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라고 했듯이 시인의 눈물은 열매를 맺기 위한 절대가치이다.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려 해도 '흠도 티도/금가지 않은/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이어서 눈물은 시인에게 있어서 완벽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연의 시드는 꽃보다는 열매가 절대적이듯이,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절대적이라는 의미와 대응한다. 따라서 눈물은 시인에게 있어서 절대가치를 지니는 것이며 신의 뜻이므로 신께서 열매를 맺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김현승은 사랑하던 어린 아들을 잃고서 그 지극한 슬픔을 기독교의 신앙으로 견디어 내면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시인은 슬픔과 눈물을 피하기보다 겸손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는 눈물이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은총이라고 여김으로써 그 고통을 넘어서는 종교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절대자 앞에서 경건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 지닌 욕망과 기쁨 따위가 결국은 일시적인 것임을 깨닫는 일이다. 그러면 이들을 모두 버리고도 남는 것은 무엇인가? 김현승은 슬픔, 곧 눈물이라고 답한다.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 한계와 고통을 맛보는 순간에 가장 순수하고 진실하여진다는 것이다. 눈물은 첫째 연이 노래하듯이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며, 가장 진실한 순간에 있어서의 사람이 가진 것의 전부이다. 우리가 신 앞에 드릴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갚지고 확실한 것도 눈물이다.
이와 같은 생각의 흐름을 통해 김현승은 눈물이 피해야 할 것이기보다는 신이 사람에게 내려 준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보는 경지에 도달한다. 그것은 마치 나무의 꽃이 시든 뒤에 열매가 열리도록 한 신의 섭리와도 같다. 웃음이 잠시 피었다가 지는 삶의 꽃이라면 슬픔과 눈물은 그 열매에 해당된다고 그는 노래한다. 그리하여 그는 역설적으로 눈물이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신의 은총이라고 여김으로써 지극한 슬픔을 이겨내는 종교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시 정신이 이룩한 높은 경지의 하나를 본다. (김흥규: <한국의 현대시>)
비애의 감정이 지나치면 사람들은 그냥 거기에 주저앉아 절망하기 쉽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눈물'을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라 했다. 새로운 생명을 싹틔울 씨앗을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후반부의 '열매'를 예비하고 있다.
화자는 ‘슬픔을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케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또 화자는 종교적 경지에서, '웃음'이 잠시 피었다 지는 '꽃'이라면, '눈물'은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신의 은총과 같은 '열매'라고 여김으로써 슬픔을 극복해 내고 있다.
이 시는 ‘나무(나) → 꽃(웃음 : 외면적) ↔ 열매(눈물 : 내면적)’의 구조를 가진다.
우리는 여기서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시인의 진실하고 비통한 ‘눈물’이 세속적인 슬픔의 강을 건너서 신 앞에 이르고, 그것이 비통하게 참회하면 할수록 가장 진실한 가치의 실체이며, 순수한 생명의 덩어리로써 최후의 순수 감정과 정신적 피안(彼岸)에 도달하는 기독교적 정신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 시는 지금까지의 ‘눈물’의 개념이 전혀 독창적인 입장에서 빼어난 가치관으로 포착된 시인의 높은 시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조남익: <현대시 해설>)
인간의 삶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헬레니즘적인 낙천 향락적인 타입과 헤브라이즘적인 금욕적 진지한 타입이다.
이 시의 작자는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매사에 양심을 중히 여기고, 모든 문제를 심각하고 진지하고 열렬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자기를 늘 반성하고, 생의 보람을 물질적인 것에서보다 정신적인 것, 내성적인 것에서 찾으려 한다. 화려한 꽃보다 진실한 열매를 더 소중히 여기고, 외향적인 웃음보다 내향적인 눈물에서 인생의 미와 가치를 찾으려 한다.
인간이 신에게 헌납할 수 있는 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라, 정직하고 진실한 참회의 썩지 않는 눈물뿐이라고 노래함으로써 헬레니즘적인 금욕(禁慾)의 진지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작가의 기독교적인 정신을 기저(基底)한 심화된 생명의 순결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조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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