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

[스크랩] 신경림 : 시집 <농무(農舞)>

월정月靜 강대실 2007. 5. 22. 16:51
 시집 <농무(農舞)>

   신경림(申庚林)의 시집. A5판. 120면. 작자의 첫 시집으로 초간본은 1973년 [월간문학사(月刊文學社)]에서 간행되었고, 이를 증보하여 1975년 [창작(創作)과 비평사(批評社)]에서 재간본(B6판. 116면.)이 간행되었다.

  초간본의 체제는 1부에 <겨울 밤> <씨름> <잔칫날> 등 13편, 2부에 <전야(前夜)> <산 1번지(山一番地)> <서울로 가는 길> 등 11편, 3부에 <장마 뒤> <귀로(歸路)> <산읍일지(山邑日誌)> 등 10편이 실려 있다.

  4부에는 <산읍기행(山邑紀行)> <친구> 등 4편, 5부에 <갈대> <묘비(墓碑)> <그 산정(山頂)에서> 등 5편으로 총 43편의 시와 백낙청(白樂晴)의 발문(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재간본의 체제는 1∼4부까지는 초간본대로 하고, 5부에 1편을 추가하여 6편, 6부에 <밤새> <강(江)> <그 여름> 등 9편, 7부에 <어둠 속에서> <산역(山役)> <동행(同行)> 등 8편을 첨가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61편의 시와 백낙청의 발문, 김광섭(金珖燮)의 <제1회 만해문학상 심사소감(第一回卍海文學賞審査所感)>과 저자의 후기(後記)인 <책 뒤에>를 수록하였다.

  이 시집은 신경림의 초기 작품세계와 이후 작품의 방향성을 보여 주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농민으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삶에서 신명을 되찾고자 하는 시세계였다. 특히 시 <농무>에서 1960∼197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의 와중에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붕괴되어 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이 땅에 터를 잡고 있는 농촌 민중들의 삶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즉, 농민들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농무)는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현실을 농민들이 신명난 춤사위를 통하여 극복하려는 의지를 그려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의 성장 기반이 되었던 농촌 사회에 대한 애정과 시인의 현실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농무)에서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이런 시적 형상은 시인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요적 리듬과 쉬운 시어를 구사하여, 이후 1970∼1980년대 민중문학의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1973년에 [월간문학사]에서 간행된 신경림(申庚林)의 대표적인 첫 시집이다. 이 작품집은 농촌에서 볼 수 있는 농악(農樂)을 소재로 하여 소란스러움과 적막함을 대비시켜 한국인들이 숙명으로 지니는 정한의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시 <농무>에서 죽음의 현장인 도수장 앞에 와서야 겨우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개짓을 하면서 어깨를 흔드는 농민들의 발버둥은 약이 오르고 악에 찬 농민의 고통이다. 이 고통은 또 다른 숙명을 낳고 무한한 체념과 그리움을 낳는다.

  이 시집의 특징은 구차스런 의식세계의 장광설이 없고 복잡미묘한 시의 구조로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소박, 간결, 무색의 표현으로 복잡한 의식구조에 중후한 파문을 던져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으로 인도해 주는 데에 있다. 이 작품집의 또 다른 신비한 특징은 농촌 현실에 밀착하면 할수록 생명력 있는 활달한 서민사회의 비장미를 창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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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는 어렵지 않다.

  현대시에 이르면서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소리가 독자만이 아니라 시인 자신들의 입에서도 나올 만큼 어려워졌다. 알 수 없는 시가 독자에게 사랑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그런 게 시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게 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나게 되면서, 가장 사랑받는 문학이었던 시가 독자들로부터 멀어져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기는 변변찮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시인들은 여전히 어렵기만 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얘기할 뿐, 알아듣기 쉬운 목소리를 담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시는 더 이상 민중의 것이라 할 수 없다.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 중기까지 발표된 신경림의 시를 묶어놓은 시집 <농무>는 현대시가 외면했던 민중과 그들의 삶을 다시 시 속으로 편입시켜 놓았다. 우선 신경림의 시는 어렵지 않아서 좋다.

  “시도 역시 사람이 사람한테 하는 말이요, 또 사람이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고 믿는 우리들”(백낙청의 ‘발문’에서)에게 그의 시집은 반가움과 뿌듯함으로 다가온다. 백낙청의 말대로 “이제 우리는, 보아라, 이런 시집도 있지 않은가라고 마음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농무>는 이제까지 시로부터 소외되어 온 대다수 독자들과 민중 앞에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시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신경림의 작품처럼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들이 주는 기쁨은 특별한 것이다. 그의 시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기를 짓밟아야 하고, 좀 잘 산다는 말을 듣자면 자기와 남들을 아울러 짓밟아야 하는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끼리 떳떳하고 정직하고 또 평등하게 주고 받는 이야기며 노래로서의 시”(‘발문’에서)이기 때문이다.

▶잊혀져 가는 농촌의 정서와 농민에 대한 짙은 애정이 배어있는 시

  따져 보면, 우리 민족 정서의 밑바탕은 어촌도, 도시도 아닌 농촌에 있었다. 그러나 산업 개발과 근대화의 거센 위세 앞에 어느덧 농촌은 차차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농무>는 이처럼 잊혀져 가는 농촌의 정서를 우리에게 리얼하게 되살려 주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실린 40여 편의 시는 모두 농촌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한 편의 시 어느 것이든 오늘날 농촌이 처한 서글픈 사연을 담고 있지 않은 게 없다. 그의 시에는 농촌에 사는 민중에 대한 짙은 애정이 깔려 있다. 그는 농촌을 노래하면서 그들의 현실을 진실하게 그리고자 노력한다. 그의 시가 담고 있는 정서는 민중의 현실에서 비켜서서 오히려 그 현실을 은폐하고 악화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복고주의적, 감상주의적 정한(情恨)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대인다운 냉철한 눈으로 농촌 현실을 보며, 억눌려 사는 그들의 고난과 분노와 맹세를 바로 자기 것으로 삼고 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파장(罷場)>(창작과비평사.1975)-


  신경림의 시에는 아름다원 보이는 풍경의 뒷면에서 몸부림치며 고달프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다. 위에 인용한 시는 빚에 쪼들려 술이나 퍼먹으며 서울을 그리워하는 ‘못난 놈들’의 서글픈 삶을 읊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리고 있는 농촌 풍경은 ‘달이 환한 마찻길’이다. 달이 환할 수가 없는 데도 ‘달이 환한 마찻길’이다.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눈물과 마른 웃음 속에서 진실된 삶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민중의 실의(失意)와 좌절을 전달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환하게 빛나는 삶을 조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 세계를 백낙청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암담한 삶이라도 그것이 발전하는 역사의 한 현징임을 믿고, 독자는 시인과 함께 그 역사를 사는 평등한 인간임을 알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이야기가 못 될 ‘나’의 이야기는 애써 피하고, 인식의 혼란이나 감정의 낭비를 가져오기 쉬운 생소한 낱말들을 철저히 솎아 버린다. 그의 운문은 산문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순탄하게 뜻이 통하면서도, 우머렇게나 바꿔 놓은 듯한 그 시행들은 산문으로 고쳐 놓았을 때 그 진가가 비로소 드러날 만큼 우리말에 내재하는 운율에 밀착되어 있다. 그리하여 <농무>를 비롯한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발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 한다.

                                           - 백낙청의 ‘발문’에서 -

▶겸손함과 소박함에서 나오는 자기 절제와 질박함의 미덕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말자. 분수를 알자.”라는 ‘소박한 소신’으로 시를 쓴다는 신경림의 작품은 확실히 겸손하고 친근하다. 그것은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의 설움과 자연의 순리를 벗삼으며, 참된 시인의 길을 걸으려는 그의 지극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겸손함과 소박함에서 나오는 자기 절제와 질박함의 미덕이 그의 시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물고기가 바다를 떠나 살아갈 수 없듯이, 민중의 삶에 스스로를 의탁하는 문학이 결국은 살아남아 승리하리라는 예언이 올바른 것이라면, 신경림의 시는 아마도 그런 가능성을 가장 많이 지닌 오늘날의 우리 문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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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신경림씨 시집 <농무>

  신경림씨의 시집 <농무> 초판이 나온 것은 1973년초였다. [월간문학사] 간행의 3백부 자비 출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집을 자비 출판하는 것이야 관례에 속하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월간문학사]가 정식 등록조차 돼 있지 않은 이 무허가 유령 출판사의 정체인즉, 한국문인협회의 기관지인 [월간문학]과 관련돼 있다.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한 시인은 절친한 지기인 소설가 이문구씨가 편집을 맡고 있던 이 잡지의 명의를 잠시 빌리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농무>가 그 뒤 20년 이상 한국 시의 한 흐름을 주도하며 독자들과 후배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시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 시집은 다음해 시인에게 제1회 만해문학상을 안겨 주었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야심적으로 기획한 <창비시선>의 제1권으로 재출간됐다.

  <창비시선>의 무녀리로서 <농무>는 좁게는 이 기획의 성격을, 넓게는 민족문학 진영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어느 정도 규정해 주었다. <농무>가 지니는 그같은 규정력은 평론가 유종호씨에 의해 `선행 시편의 추문화'라는 개념으로 정리된 바 있다. 이 시집의 어떤 점이 앞선 시들을 한갓 추문(醜聞)으로 만든 것일까?

  김수영이나 신동엽과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60년대까지의 한국시를 지배한 것은 현실에서 벗어나 언어를 번롱(飜弄)하는 모더니즘의 그릇된 작풍이었다. 다수 대중이 몸담고 살아가는 현실로부터 떠난 시는 당연히 그 현실의 주인인 대중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고, 시와 현실, 시와 대중 사이의 괴리는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시집 <농무>의 새로움은 내용에 있어서 60년대 농촌의 곤핍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어휘와 문장을 동원했다는 점으로 크게 구별된다.

  (전략)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하략)             - <겨울밤> 일부 -

  신경림씨는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돼 시단에 나왔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로 시작해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로 끝나는 `갈대'를 비롯한 그의 초기작은 앞에서 든 시집 <농무>의 전반적인 기조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시인이 등단 이듬해 초까지 시를 발표하다가는 홀연 낙향한 뒤, <겨울밤>을 발표하는 65년말까지 10년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는 사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때까지 내가 썼던 시들에 대해 회의도 생겼고, `불온한' 독서회에 가담해 있던 차에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이 미칠 파장이 두렵기도 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농사도 지어 보고 광산이나 공사장 일도 하고 장사도 하다 보니 10년이 훌쩍 지나가더라.”

  <농무>에 그려진 농민적 삶의 세목은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시인이 고향인 충북 충주를 비롯해 문경ㆍ평창ㆍ영월ㆍ춘천 등지를 떠돌며 보고 겪은 일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농사는 안 되고 세상은 갈수록 힘겨운 씨름 상대로 변해가는데 농민들과 날품 인부들은 술에나 취하고 광태(狂態)를 연출하는 것으로 현실을 잊고자 한다. 울분과 절망에 휘둘리던 농민들은 문득 짐을 꾸려 서울을 향한다. 하지만, 그들을 맞은 서울은 서울이 아니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 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 `산 일번지' -

  시집 <농무>의 또다른 축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역사적 격동이 민초들에게 가한 시련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모두/싫어졌다”는 “대학을 나온 사촌형”,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낸” 죽은 당숙, “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고 주정을 하는 또다른 당숙 등이 그 시련을 대변한다.

  시집 <농무>의 무대는 시인의 고향인 충주시 노은면 연화리 장터와 보련골, 그리고 충주시 일대다. 13대 선조 때부터 들어와 살았다는 보련골은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보련산(764m) 아래의 아주 신씨 집성촌이다. 산과 계곡, 적당한 크기의 들을 두루 갖춘 아름다운 고장은 구한말부터 광산이 개발되면서 광산촌이 됐다. 시인의 탄생지인 입장(立場)은 광산 개발에 따라 시장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큰길가에 세워진 마을이다. 이 크지 않은 면소재지에도 처음으로 4층짜리 연립주택이 세워져 `노은 빌라 분양 개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낀다. 보련산의 그 많던 탄광은 오래 전에 폐광돼 보련골은 전형적인 농촌의 면모를 되찾았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그 정경의 어디에서도 30년 전의 울부짖음은 들을 수 없다.

  보련산 너머 남한강변의 <목계나루>는 <농무>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시인의 또다른 대표시인 <목계장터>의 무대가 된 곳이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방물장수가 앉아 쉬곤 했던 주막은 속절없는 세월에 쫓겨 간 곳이 없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를 대신해서는 매점의 산뜻한 파라솔이 성하(盛夏)의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아든 길손들을 맞이한다. 폐쇄된 나루 아래쪽에는 지난 73년에 세운 목계교가 시의 이야기를 과거로, 과거로 밀어내고만 있다.  - [한겨레신문](1996. 8. 9) -


<친근한 언어로 담아낸 `70년대 삶', 현실 그대로 묘사 새 장>

  비탈진 달동네 개똥이네집. 지붕이 비만 오면 샌다거나 공장에 나가는 순이가 얼굴이 헬쓱하다는 이야기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도 없는 일처럼 꾹꾹 덮어 두는 게 제대로 세상을 사는 방식임을 가르치고 또 익히던 시절. 그야말로 가난이 죄라서 문학예술마저 그 가난을 드러내기를 주저했고, 오히려 외면하고 말았던 시절.

  <농무>라는 한 권의 얇은 시집이 조근조근 되새겨낸 세계는 현실의 사실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사건이 될 만했다. 얻어 쓴 조합 빚과 술집 색시의 분 냄새와 담뱃진내 나는 화투판이 소외의 장막을 활짝 걷어젖히고 신선한 시어가 되어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는 화두를 접한 ‘못난 놈’들이 비로소 소줏잔을 들이키며 당당히 어깨를 흔들 수 있게 되었던 것.

  열일곱 살 무렵 <농무>가 아직 내 책꽂이에 꽂히기 전, 까까머리 나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던 나름대로 ‘잘난’ 문학소년이었다. 쥐뿔도 없는 내가 잘난 척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시를 척척 써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기술을 나에게 전수한 것은 요샛말로 모더니즘이었다. 가증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언어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으며, 삶의 남루와 슬픔을 함부로 까발리지 않아야 한다는 자기 제어 장치도 마련해 두고 있는 터였다. 나는 향기롭기만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겨운 풍경들이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에는 나와 어울려 놀았으나, 내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 담겨 있던 풍경들이 생생하게 다시 인화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시집 속의 평범한 좌우명 하나가 실제로 시골 큰집 내 사촌 형의 책상 앞에 붙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시집 속에 쓸쓸하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세계가 그렇게 눈부신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었다니! 게다가 구태여 말을 비비 꼬지 않더라도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며, 한 토막의 이야기도 서정을 만나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롭게 배웠다.

  원래 이 시집은 한 이름 없는 출판사에서 시인이 자비로 5백부 한정판을 낸 뒤에 1975년 <창비시선> 제 1권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이십 년이 지나도록 시집을 찾는 이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니 과히 시를 쓰고자 하는 문학청년들의 빠뜨릴 수 없는 교과서가 되고 있다 하겠다.

                  -안도현: <새로 읽는 그 작품>(조선일보.1997. 9. 23) -


출처 : 김영관의 국어방
글쓴이 : 재봉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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