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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경림 시/ 7. 파장(罷場)

파장(罷場)신경림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7. 신경림 시/6. 목계 장터

목계 장터신경림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물 여울 모질거든 바위에 붙으라네민물 새우 끊어 넘는 토방 뒷마루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7. 신경림 시/5. 눈

눈신경림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테다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 올랐다가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지상에서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이윽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그때 가서 다 잊는다 해도

7. 신경림 시//4. 가난한 사랑의 노래

가난한 사랑의 노래신경림가난하다고 해서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가난하다고 해서두려움이 없겠는가두 점을 치는 소리방범대원의 호각소리메밀묵 사려 소리에눈을 뜨면 멀리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난하다고 해서그리움을 버렸겠는가어머님 보고 싶소수없이 뇌어보지만집 뒤 감나무에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가난하다고 해서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사랑한다고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뒤에터지던 네 울음가난하다고 해서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버려야 한다는 것을

7. 신경림 시//2. 농무(農舞)

농무(農舞)신경림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7. 신경림 시/1. 신경림 시 모음 41편

신경림 시 모음 41편☆★☆★☆★☆★☆★☆★☆★☆★☆★☆★☆★☆★《1》가난한 사랑의 노래신경림가난하다고 해서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가난하다고 해서두려움이 없겠는가두 점을 치는 소리방범대원의 호각소리메밀묵 사려 소리에눈을 뜨면 멀리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난하다고 해서그리움을 버렸겠는가어머님 보고 싶소수없이 뇌어보지만집 뒤 감나무에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가난하다고 해서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사랑한다고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뒤에터지던 네 울음가난하다고 해서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버려야 한다는 것을☆★☆★☆★☆★☆★☆★☆★☆★☆★☆★☆★☆★《2》가을비신경림..

6. 나태주 시/6. 겨울 연가

겨울 연가나태주한겨울에 하도 심심해도로 찾아 꺼내 보는당신의 눈썹 한 켤레.지난 여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그것들.움쩍 못하게 얼어붙은저승의 이빨 사이저 건너 하늘의 한복판에.간혹 매운 바람이 걸어 놓고 가는당신의 빛나는 알몸.아무리 헤쳐도 헤쳐도보이지 않던 그 속살의 깊이.숙였던 이마를 들어 보일 때눈물에 망가진 눈두덩이.그래서 더욱 당신의 눈썹 검게 보일 때.도로 찾아 드는대이파리 잎마다에 부서져잔잔히 흐느끼는옷 벗은 당신의 흐느낌 소리.가만가만 삭아 드는 한숨의 소리.

6. 나태주 시/5.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나태주사랑하는 마음내게 있어도사랑한다는 말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사랑한다는 그 말끝까지감당할 수 없기 때문모진 마음내게 있어도모진 말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외롭고 슬픈 마음내게 있어도외롭고 슬프다는 말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삽니다모진 마음을 달래며삽니다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숨기며 삽니다.

6. 나태주 시/3. 꽃

꽃.1  / 나태주 다시 한 번만 사랑하고다시 한 번만 죄를 짓고다시 한 번만 용서를 받자 그래서 봄이다.   꽃 2나태주예쁘다는 말을가볍게 삼켰다안쓰럽다는 말을꿀꺽 삼켰다사랑한다는 말을어렵게 삼켰다섭섭하다, 안타깝다,답답하다는 말을 또 여러 번목구멍으로 넘겼다그리고서그는 스스로 꽃이 되기로 작정했다  꽃3 나 태 주예뻐서가 아니다잘나서가 아니다많은 것을 가져서도 아니다다만 너이기 때문에네가 너이기 때문에보고 싶은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안쓰러운 것이고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이유는 없다있다면 오직 한 가지네가 너라는 사실!-''네가 너이기 때문에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가득한 것이다''-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6. 나태주 시/1. 나태주 시 모음 49편

나태주 시 모음 49편☆★☆★☆★☆★☆★☆★☆★☆★☆★☆★☆★☆★《1》3월나태주어차피 어차피3월은 오는구나오고야 마는구나2월을 이기고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돌아와 우리 앞에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구나새들은 우리더러무슨 소리든 내보라 내보라고조르는구나시냇물 소리도 우리더러지껄이라 그러는구나아, 젊은 아이들은다시 한번 새옷을 갈아입고새 가방을 들고새 배지를 달고우리 앞을 물결쳐스쳐가겠지그러나 3월에도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롭고쓸쓸한 사람은 쓸쓸하겠지☆★☆★☆★☆★☆★☆★☆★☆★☆★☆★☆★☆★《2》6월 기집애나태주너는 지금쯤 어느 골목어느 낯선 지붕 밑에 서서 울고 있느냐세상은 또다시 6월이 와서감꽃이 피고 쥐똥나무 흰꽃이 일어벌을 꼬이는데감나무 새 잎새에 6월 비단햇빛이 흐르..

5. 김춘수 시/ 6.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김춘수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새로 돋은 정맥(靜脈)이바르르 떤다.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지붕과 굴뚝을 덮는다.3월에 눈이 오면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밤에 아낙들은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아궁이에 지핀다.

카테고리 없음 2024.11.23

5. 김춘수 시/ 5. 순명(順命)

순명(順命)김춘수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게 되면 고목나무 줄기나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놓고매미는 어디론가 가 버린다.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가서 기척을 해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긴 꼬리의 중간쯤이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5. 김춘수 시/ 4. 능금

능금김춘수그는 그리움에 산다그리움은 익어서스스로 견디기 어려운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그리움은 마침내스스로의 무게로떨어져 온다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눈부신 축제의비할 바 없이 그윽한여운을 새긴다이미 가 버린 그 날과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이 아쉬운 자리에는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익어간다보라높고 맑은 곳에서가을이 그에게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우리들 두 눈에그득히 물결치는시작도 끝도 없는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