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최영규 시편

월정月靜 강대실 2007. 2. 9. 16:44
[최영규] 부의(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번호 : 11204   글쓴이 : 제4막
조회 : 34   스크랩 : 0   날짜 : 2001.10.16 01:03

최영규
강원도 강릉출생, 경기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부의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 놓았다.


심사평 : 황동규 , 김주연


신춘문예 응모를 포함, 최근 시들의 동향이 사뭇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뭐랄까, 꽤 부지런한 관찰을 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쇄말주의로 흐르는 느낌이 그것이다. 시가 중심을 향해 긴장된 응집력을 보이는 대신, 어디론가 풀풀 날아가 버리는 듯한 인상이 이즈음 쓰여지고, 발표되는 시들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는 지적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영규씨의 '부의'를 만나고 이를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문상 가기 위해 꺼낸 부의 봉투지에서 쏟아져 나온 꽃씨를 보면서 삶과 죽음을 대비시킨 솜씨는 얼핏 보아 평범하되, 마치 씨앗 속에 숨어 있는 꽃처럼 깊은 지혜와 섬세한 분석을 숨기고 있는 대단한 경지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자의 역량은 다른 작품 '메기 낚시'로도 입증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색과 퇴고를 거듭한다면 꽤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광진리에 가면


작은 포구인 광진리에 가면
바다로 바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도랑이 하나 있다
넓은 백사장에 실금처럼 반짝이며 흐르는 도랑
스며버릴듯 가는 물줄기지만 언제나
뚜렷하게 바다와 만난다
때때로 큰 파도로 바닷물이 역류하기도 하지만
도랑은 이내 제 물줄기를 찾는다
바다의 길고 긴 손끝과 마을의 작은 가슴이 만나는 형상
도랑 옆 모래톱에 앉아보면,
광진리를 찾아오는 모든 것들이
넓디 넓은 바닷가를 놔두고
이 작은 도랑을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둥근 바다를 힘들여 넘어오는 아침이며
돌을 얹은 지붕을 흔들어대는 바람
푸른 달밤이며, 연둣빛 구름
밤을 새우는 오징어배의 눈부신 불빛
깊은 바다의 수압에 눌려 찌그러진
심해어의 야광 눈빛까지도 이 도랑을 통해
光津을 찾아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포구인 광진리에 가면
바다의 마음과 마을의 마음이 만나고있는
작은 도랑이 하나 있다.


詩. 최영규

 

아침에게 / 최영규


매일새벽 나의 차는 강물에 실려 달린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급류로 달리기도 하고
정체된 길목에선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강과 강이 만나는 양수리 정류장에서는
눈부신 아침노을을 태우기도 하고
솜덩이처럼 하얗게 뭉쳐있는 물안개를 태우기도 한다
강의 새벽이 가득 실려있는 나의 차는
갈대밭 사이를 가볍게 날아오르는 물새처럼
힘차게 달린다 창문의 틈새를 지나가는
강바람 소리가 새소리보다도 가볍다
창을 활짝 열어버린다 뒷자석에 타고있던 물안개가
차창을 빠져나간다 안개가 빠져나가고 나면
나의 차 안은 붉은 햇살로 가득 찬다
강물이 다시 소용돌이친다
그제서야 나의 차는 용진나루에 아침 햇살을
내려놓는다.

 

 

 

이종대/ 최영규, 경계(境界)와 원융(圓融)의 시학

번호 : 42   글쓴이 : 아우스딩
조회 : 5   스크랩 : 0   날짜 : 2006.11.21 11:46
최영규, 경계(境界)와 원융(圓融)의 시학

李 鍾 大

1.
최영규의 시는 문학지형과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서정과 서사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그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이건 서정은 시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확대하여 장르 개념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사상이나 이성보다는 감성을 존중하는 좁은 의미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시의 본질이 서정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시를 읽으며 서정을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그동안 시가 서정을 잃어버렸거나 약화되고 그밖에 다른 시성(詩性)과 시적 장치들이 생산되고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시에서 서정성을 찾기 힘든 것은 그것을 전근대적인 것이거나 비현실적인 것, 현실도피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통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현대의 시론이 다양한 관점에서 세분되고 정교해진 것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실제로 이론이 시를 철저히 분석할 수 있고 그 패러다임 안에서 자아와 세계를 온전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믿음은 갈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오히려 시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 시를 그 본질로부터 유리시키는데 결정적 힘을 발휘하는 권력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서정과 서사는 세계에 대한 태도로 구분된다. 서사가 자아와 세계의 이원주의에서 비롯되는 대립과 갈등의 세계관이라면 서정은 자아와 세계 사이에 거리를 두지 않는 일원론이다. 서사가 환기시키는 정서가 파토스적이라면 서정은 동화나 투사의 정서를 촉발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통념을 지나치게 따르면 스스로의 한계에 봉착하기 쉽다. 또한 서정을 농경시대의 것으로, 서사를 산업사회의 것으로 분리시켜 받아들이는 태도도 숙고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그들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산업사회, 자본주의 시대에 요구되는 서정성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일상적 삶을 그 진원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가 요구하는 서정시는 센티멘탈에 토대를 둔 자기기만적인 시,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휴머니티가 배제된 시와는 다르며 \'자연합일(自然合一)\' \'물아일여(物我一如)\' 등으로 통칭되는 전통적인 것과도 구별된다. 전통적 서정시에서 세계는 대체로 자연에 한정되었고 자아와 세계에 대한 지성적 탐색이 전제되지 않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열등한 자아의 우등한 세계에 대한 동경의 산물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본질적 의미의 서정성이 상실되고 감상의 늪에 빠진 서정시에 대항하여 정신주의시를 찾는 시대, \"서정의 시대는 끝났어 / 서정연습시대가 있을 뿐이야\"라고 외치는 어느 시인의 말이 절규로 들리는 시대이다. 최영규의 시가 새로운 의미를 지닌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최영규 시의 서정성은 그가 주목한 대상에서부터 드러난다. 그의 시적 공간에는 우리가 그동안 주변에서 흔히 보아 온 사물들로 가득하다. 거기에는 고유명사에 해당하는 지명과 초목 그리고 시골 장터와 그 장터를 기웃거리는 인물, 농경과 산업사회의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마음 두지 못하는 인물 등이 두루 포함된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옛 풍경과 현재의 일상, 그리고 그 경계가 공존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이 목격한 것을 때로는 와이드 스크린, 때로는 그 스크린의 한 구석에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사물 하나를 고배율의 현미경으로 확대시켜 독자들의 나안(裸眼)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울러 대상을 격변의 흐름 속에 놓기도 하고 시간을 정지시킨 공간에 홀로 놓아두기도 한다. 그러나 사물들은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에 누적된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경험과 융합시키는 탐색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시인은 사물의 본성과 그것을 드러내는 언어를 탐색하며, 사물을 단순한 경(景)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충전되는 정(情)의 언어적 탐색까지를 중시한다. 사물과 언어에 대한 탐색은 대상이 시인의 내면으로 내투사(內投射)한다는 점에서 사물을 타자로 인식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의 시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눈은 주체의 것이지만 그 주체는 전도되어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대상이 주체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경계(境界)와 원융(圓融)의 산물이다.

2.
따라서 최영규의 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형의 서늘한 감동을 제공한다. 첫째는 일상의 낯익은 사물에 주목하여 그것을 새롭게 환기시켜 주는 데서 오는 것이며, 둘째는 응시의 결과로서 얻어진 삶의 통찰력을 공유하는 즐거움이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는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사물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거기서 그 사물의 속성과 내재된 질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지각에 멈추지 않고 지평을 확대하여 현재의 모습과 그것이 아닌 다른 것과의 차이를 파악할 때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사물에 옮겨 담아 독자가 그 사물에 몰입한 연후에 그 안에 담긴 시인의 말을 알아차리게 하거나 시인은 침묵한 채 사물이 독자에게 말을 하게끔 하는 소통코드를 통하여 자신이 목격한 사물과 세계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예컨대 다음의 시는 세계 속에 던져진 사물과 우주(宇宙)가 어떠한 관계인지를 보여주는 시편이다.

봉투를 꺼내어
부의賻儀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새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라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민히 올려놓았다.
<부의 賻儀>, 전문

순환과 인연의 너른 세계를 보여주는 시로,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예사로이 보지 않는 태도에서 탄생된 시다. 부의(賻儀)는 사자(死者)의 여비이기도 하고 그를 보내는 의식에 사용되는 경비이기도 하다. 그 부의를 넣을 봉투 속에서 발견된 채송아 씨앗과 부의는 각각 생명과 죽음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고 그 충격은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력에 근거한다. 화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경험은 화자의 내부에 따로따로 축적되어 있다가 그 이질적 경험들이 모여 새로운 인식,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한 봉투 안에 담겨진다는 것은 한순간에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는 힘을 발휘한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관념적 인식의 구체화는 시인이 응시(凝視)를 통하여 현상적, 이지적, 감정적 등의 경험적 요소를 융합하여 사물과 그 사물을 담는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터득한 결과이다. 아울러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피웠다가 다시 씨앗으로 돌아오는 순환은 비단 씨앗에게만 한정되는 이치가 아니다. <복제에 대하여3>의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라버린 밤나무를 베어 모닥불을 피우고 그 불꽃들이 밤하늘의 새로운 별이 된다\'는 대목이나 <밤(栗)>에서 \'땅에 묻힌 밤을 파내는 순간 밤꽃이 안개처럼 하얗게 피어있는 밤나무 숲을 만난다\'는 대목 등도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 발견의 순간들이다.
응시(凝視)가 전제되지 않은 사물의 대상화는 묘사를 통하여 비슷한 세계를 재현시킴으로써 독자의 경험을 확인할 뿐이지만 이처럼 언어와 이미지의 장력에서 벗어난 사물의 시적 결합은 감수성을 확대시키고 정서를 심화시켜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요컨대 시인의 관조는 우리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보고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준다. 그 탐색은 사물에 한정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것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더욱이 시인은 자신의 발견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화자 스스로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않은 듯한 태도이며 새로운 발견을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는데서 이 시는 더욱 빛난다.

3.
누구에게나 스스로 갈망하는 삶과 세계가 요구하는 일상의 법칙 사이에 항존하는 균열을 경험하고 그것이 고통의 단초로 작용하던 시절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진행될수록 이러한 모순에서 야기되는 고통은 점점 희미해져, 대체로 유년기를 벗어날 무렵이면 자신의 존재양식보다는 관계양식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나이만큼이나 그 편향은 심해진다. 그때부터 자아와 세계 사이에 실재하는 균열은 이미 고통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련된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리고 만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훼손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있는 일상의 법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때, 감상과 관념의 부주의한 범람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세계의 부조리로 인한 고통을 상기시키는 한 편의 시는 삶의 정신적 동반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다음에 읽을 <복제에 대하여2>가 그러한 시편에 속한다.

깨꽃이 피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밝혀놓은 전등빛 아래
깻잎을 딴다
가슴팍까지 차오르도록 웃자란 줄기 끝으로
쉼없이 터져나오는 새순들
그 빛깔만으론 연두빛의 신록처럼
싱그럽기만하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분무되는 물줄기를 맞으며
언제 꽃대를 올리고 꽃을 피워야 하는지
밤낮을 잊어버린

깻잎을 딴다

마지막 잎을 따내고
깨꽃이 피면
밭을 갈아버려 끝을 내는
깻잎농사.
<복제에 대하여2>, 전문

같은 씨앗을 질료로 삼으면서도 <부의 賻儀>가 삶과 죽음에 대한 자연의 질서를 서늘한 감동과 함께 제공했다면 이 시는 그 자연의 질서와 원리를 거역하는 세계의 폭력을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부의 賻儀>에서 확인된 것처럼 씨앗의 존재이유는 자신 안에 담겨있는 우주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데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그 씨앗의 생성을 억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세계의 정체를 강렬한 생명력과 대비시켜 상기시킨다. <부의 賻儀>가 자연이 지닌 질서의 아름다움과 영원함을 그리고 있다면 <복제에 대하여2>는 거역하고 싶은 인간 질서의 비정함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밤새도록 환한 양계장의 불빛이나 깨밭에 \"밤낮으로 밝혀놓은 전등빛\"은 그 기능이 같다. 어둠을 인위적으로 제거해버린 전등빛은 실용성과 합리주의가 가치체계의 기준이 되는 세계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또 그것은 \'별을 보고 길을 찾아가던 시대\'의 사람들, 예컨대 조선시대의 시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자연의 질서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생존법칙이기도 하다.
\"깨\"들은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생명력으로 쉼없이 싱그러운 새순들을 키워내지만 그들의 의지는 무참히 꺾여진다. 깨들의 질서 속에서 깻잎은 생명의 영속성을 위한 과정일 뿐이며 깨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지속시킬 꽃과 열매이다. 그러나 실용성과 합리주의의 잣대는 깨로부터 꽃과 열매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깻잎을 요구하고 거기서 깨들은 성장을 저지당한다. 그것을 지각하는 순간에 목격되는 \"가슴팍까지 차오르도록 웃자란 줄기 끝으로 / 쉼없이 터나오는 새순들 / 그 빛깔만으론 연두빛의 신록처럼 / 싱그럽기만\"한 깨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 처절함은 깨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으로 치환될 때 자연스레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이 시 역시 화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목격한 깨밭 풍경을 감정의 침투없이, 관념의 유혹을 단호하게 배제한 채로 보여줄 뿐이다. 그 결과 화자는 침묵하지만 \'깨\'가 말을 한다. \'깨\'가 지르는 그 절규는 기호로 드러나지 않지만 주체적 독자의 내면세계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 아울러 그 힘은 독자가 돌아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숙고로서 구체화 될 것이다. 우리들 삶의 세목을 차지하는 일상의 모습이 때로는 폭압을 받는 깨에 투영되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가하는, \"마지막 잎을 따내고 / 깨꽃이 피면 / 밭을 갈아버려 끝을 내는\"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 질서에 대한 역행의 도달지점이 생명의 복제라는 시인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현실인식은 값지고 소중하다. 더욱이 독자들의 머리에,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그 호소의 주체가 화자가 아니라 독자의 투사(projection)체인 \'깨\'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세계에 내재된 부조리와 모순을 읽어내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의 언술방식이 있다. 첫째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판단과 요구에 따를 것을 강요하거나 내밀한 고백의 형식으로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 주기를 갈망하는 방식이고, 둘째는 자신의 목소리를 사물에 옮겨담아 독자가 그 사물에 몰입한 연후에 그 안에 담긴 시인의 말을 알아차리게 하거나 시인은 침묵한 채 사물이 독자에게 말을 하게끔 하는 방식으로, 시인의 상상력은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언어와 사물을 연계 통합시키지만 그들의 관계는 긴밀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세계에 내재된 모순과 부조리를 들추어 내고 그것의 개혁을 직접 외치는 것은 시인의 몫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인이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자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은 공허한 구호나 초등학생의 반성문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한 방식은 언어 탐색의 고통을 수반하지 않으므로 누구나 그 유혹을 물리치기 쉽지 않다. 그것을 예방하는 길 가운데 하나는 자아와 대상 사이에 미적 거리를 확보하는 길이다. <부의 賻儀>와 <복제에 대하여2>를 비롯한 시편들은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응시와 탐색이 빛나고 그것을 드러내는 형식미학을 성취한 시라고 할 수 있다.

4.
왕국유(王國維)에 따르면 경계는 정(情)과 경(景)으로 구성된다. 경(景)만으로는 시가 되지 못하고 정(情)만으로 이루어진 시는 좋은 시가 못된다. 따라서 좋은 시는 정과 경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일컬어 경계의 시학이라고 했다.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시작(詩作)에서 그것의 실천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설령 경(景)에서 촉발된 여러 가지의 정(情) 가운데 각별한 하나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의 결합방식을 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장력의 강도는 시의 완성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론으로 질서화, 체계화시키려고 노력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결국은 시인의 사물과 세계에 대한 집요한 응시와 탐색으로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당연한 사항이지만 그 출발은 일상이다. 최영규의 시는 대부분 일상의 삶에서 우러나온다. 생활인으로서 시인의 연배가 겪었던 분주함, 절망, 그러면서도 세상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으려는 심연의 시선이 그의 시를 탄생시키는 동인(動因)이다. 기본적으로 시는 삶과 동거할 때 그 빛을 발한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과 동시대를 지배하는 욕망에 따르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견뎌내려는 성찰은 값진 것이다. 뻔뻔한 심오함 보다 부끄러운 따뜻함이 스며있는 시가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최영규의 시는 논리적이지도 이론적이지도 못하다. 그의 시적 사유는 조직된 것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진실함과 간절함이 농축되어 있다.
두루 알려진 사실이지만 개성의 객관화는 시의 본질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개인 정서의 숭고함, 강렬함이 아니고 작품으로서의 융합을 일으키는 예술적 과정, 즉 압력의 강렬함\"이라는 엘리어트의 지적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압력의 강렬함은 사물과 언어에 대한 탐색, 동시대인들이 두루 섭취할 수 있는 심미적인 형식 등을 요구한다. 결국 시를 이루는 여러 요소, 사물과 사물, 경(景)과 정(情), 주관과 객관의 등의 관계가 원융(圓融)을 이루는 시가 좋은 시다. 최영규의 시는 그 과정의 산물로 그 지난(至難)한, 그러나 즐거운 여정의 즐거움을 독자에게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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