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름바름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가냘픈 햇살 앞에 굼벵이처럼 날리는 눈발도 어찌하지 못한다.
절벽처럼 깎아지른 세상 세월에 비겨댄 듯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에 시린 손 문지르면 다사로운 체온이 햇살처럼 퍼져온다
사람論 / 허형만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땐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 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백담사 가는 길
찔레꽃머리 아득히 흐르는 구름 먼산에 우렷하게 걸리고 구룡동천 계곡 아삼삼한 강대소나무 한 그루 미륵불로 서서 어서 오너라 환한 웃으심 보이십니다. 여기서 백담사는 얼마나 남았지요 묻는 내 속마음 다 안다는 듯 애기똥풀 꿀을 빨던 모시나비 모시진솔 펄럭이며 저만치 앞서 날아갑니다. 굼 깊은 산 물소리도 넌출넌출 따라갑니다.
석도에서
이곳에선 신라인 장보고를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장보고를 찾으려면 장보고를 묻지마라 장보고를 아는 사람은 없고 법화원을 아느냐 물어야 비로소 장보고를 만날 수 있느니 장보고가 세웠다는 赤山 법화원 나도 NO.0012534번째 손님으로 석가여래 옆 그림 속 신라인 장보고를 가까스로 만났느니.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 / 허형만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가 되셨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계셨다 수많은 사리들을 거느리시며
내가 보기엔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시지만 원래 사람이 매긴 나이란 게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넓으신 그늘에 쉬다가
어찌나 한기가 드는지 벌떡 일어나 두 손 모으고 우듬지가 보일 때까지 우러렀다 한사코 햇살 탓만은 아닐 터 휘추리와 애채 사이를 포롱포롱 건너다니는 멧새의 깜직한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였다 그때였다 수많은 사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댔고 고요한 파동은 서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와는 무관한 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신 분 한 분 계셨다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체로 걸러내시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대로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 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사랑의 등불이 빛나는 아침 - 허형만
춘설차 새잎 돋는 소리로
귀가 시려운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머언 인생의 향로 위에
펄럭이는 의지의 깃발을 꽂고
우리네 사랑의 등불 하나
불 밝혀 빛나는 아침,
이제 돛을 올려라
두 몸이 한몸 되어
힘차게 향로를 달리리라.
때로는 비바람 풍랑 속에
때로는 깊은 밤 어둠 속에
고난의 뱃길에도
사랑의 등불만은 더욱 빛나리니
主여, 어둠을 헤치시고
主여, 비바람을 막으시고
우리네 사랑의 등불을 지키소서.
영원에서 영원으로
빛나는 불빛이
사그러들지 않게 하소서.
꺼지지 않게 하소서.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 중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새벽 산책 중에 들었던 소리 중에서 가널가널한 풀벌레 소리만 입력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땅으로 되돌려 보내세요 먼 훗날 어느 새벽 별 하나 돋듯 고객님의 음성사서함이 켜지면 갈매빛 만만한 풀벌레 소리 비로소 가슴 적시는 사랑인 줄 알겠지요
운석隕石을 어루만지며/허형만
함께 있다는 것, 길림성吉林省운석박물관에서 8백 만 년 전에 길을 잃은 별 하나 어루만지며, 함께 있다는 것이 이토록 짜릿한 걸 잊고 살았다. 사랑하는 당신, 지금 나의 손바닥에 신호를 보내고 있는 이 우주의 박동소리처럼 나도 당신의 심장 속에 별로 박히고 싶다.
밤비 / 허형만
비가 나리는 밤이면 어머니는 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 방문여는 버릇이 있다
방문을 열면 눈먼 외할머니 소식이 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 육순의 어머니
공양미 삼백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 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다시며 외가댁에 다녀오신 오늘
묘하게도 밤비 내리고 방문을 여신 어머니는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젖어
"차라리 돌아가시제 돌아 가시제"
이름을 지운다 / 허형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대로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 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 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현대시학 2006년 5월호
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는냐
봄날 하늘하늘 날리는 꽃잎만 보아도 눈물이 난다 꽃잎에 반짝 머금은 햇살에도 눈물나더니 소주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보고 싶다 생각만으로 눈물부터 피잉 도니 어인 일이냐 보이는 것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왜 이다지도 유정해지느냐 몹쓸 눈물이 먼저 뽀르르 앞서느냐
위 시의 주인공인 순천고등학교 출신의 시인 허형만 교수의 시비 제막식이 31일 순천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 순천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허형만 시인의 '동전 한 닢' 시비제막식 ⓒ데일리안
이날 행사는 허형만 시인의 후배이자 문단시인인 양해열씨를 비롯한 고교 후배들이 선배인 허 교수를 위해 순천고 교정에 시비를 마련한 걸로 알려졌다.
이날 교정에는 허 교수의 친지와 동료 후배등이 허 교수의 '동전한 닢'의 시가 새겨진 시비제막식을 지켜봤다.
특히 추운 날씨 속에서도 이날 행사를 지켜본 한 지인은 "허 교수가 남긴 동전 전 한 닢'이라는 시는 초등학교 6학년 국어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의미있는 시로 추억이 어린 교정에 시비를 세워 감개무량하다"라고 말했다.
◇ 본지와 인터뷰를 하는 허형만 시인 ⓒ데일리안
허형만 시인은 데일리안과의 인터뷰를 통해 제막식을 치룬 심경을 짤막하게 밝혔다.
오늘 모교 교정에 시비를 세우게 된 경위에 대해 허 교수는 "순천고 후배인 양해열 시인을 중심으로 한 후배 문인들이 모교 출신 선배를 알리고자 자발적으로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싣린 '동전 한 닢' 이라는 본인의 시를 새겨 이런 행사를 치르게 됐다"라고 그간의 과정을 밝혔다.
2005년도에 '첫 차'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간, 지금까지 11번째 시집을 냈다고 그간의 소회를 밝힌 허 교수는, '동전 한 닢'은 80년대 중반에 쓴 시로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시라고 소개했다.
허 교수는 "동전이지만 사람으로 간주하고 모든 생명있는 것을 사랑하자는 주제의식으로 지금까지를 시를 써왔고, 특히 이 시는 2002년도부터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의 본인의 시상(詩想)은 "우주만물 앞에 모든 이는 겸손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그러한 가치관으로 시를 쓰며 평론가들이 본인의 시에서 그런 것들이 나타나고 진솔한 삷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허 교수.
2002년에 영국 IBC 인명사전에 <세계의 시인>으로 등재되고 2005년도에는 <세계 100대 교육가>로 선정될 정도로 국제적인 지명도를 지닌 시인으로 성장했지만, 본인의 시(詩) 그대로 '겸손함과 진솔함'이 얼굴과 말에서 그대로 묻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