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월정月靜 강대실 2007. 1. 13. 11:26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번호 : 8239   글쓴이 : 서정시인
조회 : 28   스크랩 : 0   날짜 : 2006.12.30 21:04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물/임영조
번호 : 5254   글쓴이 : 善正花
조회 : 6   스크랩 : 0   날짜 : 2006.12.17 10:13
    물 / 임영조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山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女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生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그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눈물이 될까.
孤島를 위하여/임영조
번호 : 303   글쓴이 : 깨꽃
조회 : 14   스크랩 : 0   날짜 : 2007.01.02 21:19

고도(孤島)를 위하여 / 임영조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 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표지 그려진 금표비(禁標碑) 꽂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 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達磨)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體位)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먼 절벽섬 될까?
한평생 모로 서서
웃음 참 묘하게 짓는 마애불(磨崖佛) 같은.

 

 

'임영조' 프로필 


 


이름 : 
임영조

출생 : 
1943년 10월 19일

직업 : 
시인

학력 : 
서라벌예술대학

 


건강에 대하여
몇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未知修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 신년! 해피 뉴 이어!

 

산나리꽃

                        임영조

 

지난 사월 초파일

산사(山寺)에 갔다가 해탈교를 건너며

나는 문득 해탈하고 싶어서

함께 간 여자를 버리고 왔다

 

그런데 웬지 자꾸만

그 여자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잠시 돌아다보니 그 여자는 어느새

얼굴에 주근깨 핀 산나리가 되어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또

내가 사는 마을까지 따라와

가장 슬픈 한 마리 새가 되어

밤낮으로 소쩍소쩍

비워둔 내 가슴에 점을 찍었다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검붉은 문신(文身)처럼 서러운 점을.

                                   

 

임영조(1943~2003)-충남 보령 출생. 서울 대동상고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여 서울전신전화국 토목공사장 급사로 일하며 5년만에 고등학교 졸업.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고향 주산중학교 때 지리교사인 신동엽 시인을 만나 시작 수업하였고, 1970년<<월간문학>> 신인상에 '출항'이 1971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목수의 노래'가 당선되어 등단. 서라벌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 <그림자를 지우며><갈대는 배후가 있다><흔들리는 보리밭>

추모시집 <귀로 웃는 시인 임영조>

 

* 얼마나 후회했으리.

남자나 여자나 사람을 함부로 버릴 일이 아니다.

산나리꽃으로 피고 소쩍새로 울며 따라다니는 것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검붉은 문신처럼 서러운 점이 가슴에 찍히는 것을.

시인은 갔다.

그도 어쩌면 소쩍새가 되어 골골마다 다니며 서러운 점을 누군가의 가슴에 찍으며 울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 그도 산나리꽃이 되어 먼저 핀 산나리꽃과 나란히 서 있으리라. 

 

 

 

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 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문학사상사, 『1993년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우리들 젊은 날의 꿈은

언제쯤에나 마르게 될까요.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의 경지는

과연 얼마만큼이나 나이 들어야 다다르게 될까요.


바람과 외로움을 이겨낸

그 꼿꼿한 노후가

더 없이 우러러 보이는,

갈대의 계절입니다.


끼리끼리 몸을 기댄 채 스스로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는 갈대가

왠지 남의 말 같지가 않은,

가을입니다.

스크랩

동백꽃 패설 / 임영조
번호 : 62940   글쓴이 : 플로우
조회 : 86   스크랩 : 3   날짜 : 2006.11.22 08:26




법당 앞 돌계단 사이에 두고

어린 동백 두 그루 마주 서 있다

새파람 잎들이 공양 받은 햇살을

키질하듯 살랑살랑 까분다, 금새

분분한 소문 같은 금빛가루 부시다

그 무슨 法問법문을 주고 받길래

온통 벌개진 낯으로 키들거릴까

얼마나 솔깃하고 귓맛이 나면

노란 목젖까지 다 보이도록

꽃술을 활짝 열고 자지러질까

용맹 정진하라, 땡그렁!

아니면 파계하라, 땡그렁!

부연 끝 풍경이 수시로 경을 쳐도

동백꽃은 한사코 입 다물 줄 모른다

참 농후하고 불경스런 수작을

불당에서 내내 내려다보는

부처님도 손들고 조용하시다

저 철없이 고운 沙彌사미들 돌연

옷 벗고 정말 파계하면 어쩌나

절 버리고 혹 내게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가슴 설레는

볼수록 낯뜨겁고 황홀한

동백꽃 패설



<시와 사람> 2000.가을

 

 

 

느티나무타불-임영조
번호 : 39   글쓴이 : 고치령
조회 : 7   스크랩 : 0   날짜 : 2006.10.16 16:11

 

임영조시인(1943- 2003) | 시인들 이야기 2006/04/03 15:40
    

임영조시인(1943- 2003)


충남 보령 출신인 임영조 시인은 중학교 시절 지리교사로 부임한 신동엽 시인을 만나 문학공부를 시작해 서라벌예대를 거쳐 1970년 「월간 문학」 신인상과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잇따라 당선되며 등단했다.

1985 제1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고려원)
1988 제2시집 [그림자를 지우며](현대문학사)
1992 제3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세계사)
1997 제4시집 [귀로 웃는 집](창비)
2000 제5시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민음사)
2003 제6시집 [시인의 모자](창비)
시선집 [흔들리는 보리밭](문학사상사,1996)

1989 제23회 잡지언론상(기업 사보 부문) 수상
1991 제1회 서라벌문학상 수상(시 <환절기>)
제3시집으로 제38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5년도 제9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고도를 기다리며>)

 

임영조 시론

 형은 말의 톤을 높인다, 문창과의 시는 창작하는 시인이 가르쳐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작품에 서정을 기본으로 한 서사적 구조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독자에게) 깨어쳐 주는 일/즐거움을 주는 일/또는 그 둘을 겸비하는 일’이 시인의 몫이라는 그의 시론은 더욱 간명하다.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 300편을 암송하고 200편을 쓰고 100편을 퇴고하라’는 절대 주문을 한다. 요즘 문청들의 잘못은 시류에 편승하기에만 급급하지 다른 시인의 훌륭한 시를 깊이 읽지 않음에 있다며 흥분한다. 그러고도 어찌 ‘언어미학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겠는가. ‘시란 무엇인가’와 ‘생은 무엇인가’는 동격이란다. 나는 술을 기피하고 형의 낯은 열이 뜨기 시작한다. 그는 거듭 시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갈파한다. 시집 4권을 내고 이미 유명해진 영조 형을 보면 나는 부끄럽다. (그치만 푸른 공기를 나의 폐에 심자! 심장에 팍, 팍, 꽂는 일부터 하자꾸나.) 형은 문학적 알레르기가 하나 있다. 1)종교적 엄숙성, 2)철학적 심각성이 주는 폐해가 못마땅해서 못 살겠단다. 시란 보편적인 삶터에 있다, 시란 발성·발화법이 특이해야 한다! (이건 형식주의자들의 자기 목소리요 낯설게 하기 아닌가.) 이게 영조 형의 구호다. 평범하나 비범하다. 형은 오직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며 터득하려고 애쓴다. ‘지식의 과시’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이성으로 독자를 설득하려 들지 말고 진솔과 정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힘쓰라, 임영조 형의 역설이다. 구닥다리지만 공자의 ‘思無邪’를 아직도 건드려대는 임 시인이다. 시인은 발표하기 전에 <시의 효용론>을 생각하잔다. 아하, 그래서 형이 ‘욕망의 분출이 곧 시는 아니다’고 했구먼. 효용이란 곧 가치일 텐데, 모든 시에 반드시 가치를 부여하라는 주문은 조금 생각할 점이 있지 않을까. 혼자 술에 익은(?) 형이 깨면 좀 물어봐야겠네.

 ‘문학은 진실로 진실해야 한다.’ 형의 말이다. 소월시문학상 수상식에서 낭송한 소감에서 ‘내가 이제까지 본 나는 이미 녹슬고 고장난, 그래서 작동이 뻑뻑하고 불편한 로버트’ 같았다고 형은 실토했다. 일상이라는 ‘마음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생각한 데서 형의 새로운 시작詩作은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詩作을 하고 명상하는 동안 어느덧 종교심이 생겼다. 비록 미사에 잘 참여하지 못하지만, 현재 카톨릭 문우회원이기도 하다. 시업이 종교보다 앞선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앞으로 형은 시 쓰다가 힘이 부치면 삶의 중심축을 신앙생활에도 충실하겠단다. 그는 이렇게 말을 접었다. ‘시인 임영조’란 명함이 매우 좋다고, 진정한 프로가 되고 싶다고. 그렇지요, 내 경우도 평소에 ‘시를 쓴다’가 아니라 ‘시를 한다’는 믿음을 확연히 갖고 있는데. 그렇다, 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 그 자체다. (김강태 커버스토리에서 발췌)  


이 글을 쓴 김강태 시인과 임영조 시인은 2003년 5월 28일 같은 날 별세했다

 

 

 

● 내용보다 향기에, 메시지보다 형식미에/임영조
2005/05/23 오전 7:49 | 시인은 말한다 | []

● 내용보다 향기에, 메시지보다 형식미에/임영조


나의 시쓰기는 한 그루의 꽃나무를 가꾸는(또는 묘사하는) 작업에 비유된다. 내게 있어서 시란 나의 현실적 삶과 사물에 대한 감응을 뿌리로 하되, 골격은 언어에 있고, 시의 향기는 복잡한 유추과정을 거쳐 정제된 이미지에서 우러난다는 아주 보편적인 상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한 그루의 꽃나무를 심고 가꾸는 행위는 개인의 주관적 구도행위에 불과하지만 그 나무를 가꿔 꽃을 피워내면 그것은 주인의 손을 떠나 객관화된다. 바꾸어 말하면 시를 쓰는 행위는 시인의 자발적인 몫이지만 완성된 한 편의 시는 독자의 몫이 된다. 따라서 한 편의 시가 독자의 심금을 울리려면 우선 꽃이 아름다와야 하고 향기는 그윽해야 한다.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 나는 열매도 맺어야 한다. 향기가 없고 꿀이 없는 꽃에는 벌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쓰기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꽃나무를 가꾸듯 혼신을 다해 꽃을 피워내고 독특한 향기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진한 감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러기에 나의 시쓰기는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품게 하는'데 주력한다. 즉 이미지(꽃)와 상상력(향기)에 역점을 둔다는 말로 환언할 수 있겠다.

시란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느낌만을 표백해 내거나 현실적 삶을 단순히 스케치해 내는 것이 아니라 '조화된 아름다움'을 제공해야 한다. 자신의 오감에 감지되는 모든 사물과 현실을 소재로 하되 관념과 형이상학의 세계가 아닌 일상생활과 정서생활이 어우러져 창조성을 높이는 재현에 있다 하겠다.

그래서 나는 흔히 내가 처한 일상의 매듭이나 자연현상을 매개로 직설적 구조와 비유적 구조로 오버랩시켜 양자의 동일성을 발견하거나 파괴하는 형식을 취해 왔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소재에서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인식내용을 판독해 내는 시가 가장 바람직한 시라는 소신을 견지하면서 그러한 시쓰기를 실행에 옮겨 보고자 노력해 왔다.

흔히 접하는 자연현상, 즉 식물·동물·물건 등에서 얻어지는 직관이 시의 소재를 이루는 가운데 비유·연상·유추를 통해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를 거듭 반문하고 성찰하는 내면탐구도 병행해 왔다. 나의 존재와 더불어 타자인 사물에 감춰진 비의와 우주적 신비를 새로운 눈으로 읽어냄으로써 내가 속한 현실과 대결하기 위한 구도행위로 승화되기를 갈구하였다.

나는 우리 시의 맥을 이어온 전통적 시를 서구 모더니즘의 난해성을 빙자하여 고의로 파괴하거나 비약이 지나친 메타포의 잦은 남용과 우회적 진술방법으로 독자를 무시하고 더 나아가 결국엔 자신까지 기만하는 투의 시쓰기를 기피해 왔다. 평이한 언어와 간결한 구문으로 시의 전달 기능과 공감효과를 높이기 위한 화법 구사에 치중해 왔다.


시를 쓰는 일은 곧 세상을 살면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한 사물을 시인만이 갖고 있는 프리즘을 통하여 언어적 구조물로 형상화시키는 작업이라는 정의 아래 시는 내용보다 아름다움이, 메시지보다는 형식미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삶과 늘 접하게 되는 사물에 대한 직관과 치열한 언어미학 탐구를 통해 그것이 나의 시 속에서 어떤 현상으로 전이되고, 어떤 빛을 발하는지 시험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나의 시는 생성되었다. 그러기에 내가 쓴 한 편의 시는 내 현실적 삶의 직설적인 기술이 아니라 그 진동에 의해 증폭되는 내 영혼의 고조된 고백이며,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이웃에게 삼투하기 위한 표현 욕구라 하겠다.

때문에 나는 내 시가 진솔한 고백 자체로서 공명되길 소망할 뿐 현실 참여로 사회개혁에 이바지할 수 있다거나 우리네 삶의 방향을 거창하게 제시해 주는 교시난 사상 같은 독선을 의도적으로 도입하지 않는다. 하나의 조화된 질서와 미학적 세계가 응축된 한 편의 시에서 음미할 수 있는 철학이나 사상은 독자 스스로 읽어낼 몫이고 즐거움이지, 시인의 의도된 계산으로 전달되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자의에서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칠팔십년대에 민중의 이름으로 만연시킨 상투적 외침과 허위의식으로 포장된 목소리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던가를, 서구 모더니즘의 아류들이 실험시라는 미명 아래 구가해 온 허장성세가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던가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독자의 감수성을 일깨우기보다 목적의식이 강한 시, 인생론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알량한 지식으로 위장된 시, 경악과 충격적인 언어로 모자이크된 난해시들이 얼마나 많은 독자를 어리둥절케 했고, 외면하게 했는가를 지켜보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시가 위상을 잃고 사회 일각의 문화적 장식품으로 치부된 채 관심권 밖으로 자꾸만 소외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지켜보면서 시인 스스로의 책임 또한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시인이라고 해서 현실적인 상황이나 사태, 시대적 조류나 변화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도 없지만 둔감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 자신의 현실적 삶과 시의 소재나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그 존재를 수용하고 또 한편 대결하면서 언어에 대한 애착과 함께 보다 신선한 감동으로 미지의 세계로 삼투하려는 화법을 구사하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란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웃과 함께 나누는 감흥이며, 아픔이며, 열정과 정서이며, 언어의 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의 효용을 전제로 하고 내 시쓰기에 대한 시론을 정리하자면, 이웃과 대화를 트는 데 있고, 그 화법은 보편적인 소재로 친숙감을 느끼게 하고, 개성적인 발성법으로 감흥을 이끌어내려는 소망에 있다.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화법은 무엇일까? 이는 누구나 알아듣기 쉽고, 독특한 언어구사에 있다. 물론 시의 언어와 일상적인 대화의 언어는 다르다. 일상적인 언어는 단순히 전달기능만 수행하고 소멸하지만, 시의 언어는 전달기능과 함께 계속 존재하는 언어다. 시인을 일컬어 '언어의 연금술사'라 하지 않던가. 이 말이 과연 유효하다면 시인은 언어를 골라 쓰는 솜씨가 누구보다 탁월해야 한다. 아무한테서나 들을 수 있고, 아무나 구사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이면서 애정과 진실성이 돋보이는 언어, 전혀 대체할 말이 없을 만큼 용도가 분명하고 필연적인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면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되 일상적이 아닌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시쓰기는 일상어를 시어로 환치하는 작업과 함께 사물의 속뜻을 새로 읽어내는 일, 그리고 복잡하고 미묘한 내부의 경험을 외부로 전달하려는 표현욕구로 요약할 수 있겠다.

앞서 말한 내부의 경험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시를 쓰면서 재생해 내는 제2의 경험이다. 이 경험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시인 누구나 겪어 내야 할 법칙일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쓰면서 서서히 전이되는 제2의 경험은 이미 나의 내부에 잠재된 또 다른 경험과 인식이 충돌하고 혹은 융합하여 새로운 창조물로 진화되는 것을 발견하는 쾌감을 맛보게 된다. 그 쾌감 때문에 나는 아직도 이 고통스런 시쓰기를 거듭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비중을 두는 것이 사물의 속뜻 읽기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자유로운 연상작용으로 넓은 이미지의 세계로 이끌어가기다. 시인은 늘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물 안에서 여러 가지 특이한 것, 복잡한 것,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다. 만물은 타자에 의한 관념과 인식의 허물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민들레꽃', '제비꽃'이라 지칭되는 꽃이름과 '까마귀', '소쩍새'라고 지칭되는 새이름은 그 존재의 의향과 상관없이 타자에 의해 입혀진 허울들이다. 그 허울을 벗겨내고 직관과 연상·유추·비유를 통해 상상의 공간을 넓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입혀 주는 것이 시인의 의무일 것이다. 왜냐면 시의 독자는 단순한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체험이나 감정을 통해 새로운 존재의 의미를 찾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 하는 참으로 구구하고 까탈스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늘 시의 향기에 주력하는 시쓰기를 이십여 년 동안 계속해 왔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시를 통해 시의 향기를 스스로 맡아 본 적이 없다. 그런 불만과 욕구 때문에 나는 쓰고 또 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백 년 넘은 느티나무의 뚫린 구멍을 보고 생의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시인의 시적 방법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즉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서 출발하여 삶의 의식(儀式)과 사유의 자재(自在)에 도달하는 그의 시적 성취와 방법은 결코 시가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생이 크고 장대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꺼뭇한 앙가슴이 동굴처럼 허한 느티나무의 구멍에서 배알까지 빼주고 지은 절 한 칸/스스로 空이 되는 적멸궁으로 인식하는 행위나 중심을 잡기 위해 무게를 덜여생을 지탱하는 힘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 시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현상을 극적 이미지로 변형시키면서 새로운 개념과 의미를 탄생시킨다. 그리하여 마침내 느티나무를 타불(陀佛)로 인식하고 있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시인이 발견하고자 했던 깨달음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시적 주체와 시적 대상이 외면적 등위를 이루면서 동시에 감정적 등위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극적이면서도 우의적(寓意的)이다. 사물을 통해 인간화되는 우의(寓意)는 곧잘 시인이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서 동일성과 차이, 보편과 구체, 이미지나 의미 등과 같이 시인과 대상 사이에 놓여 있는 간격을 건강한 상상력으로 봉합시켜 둘 사이의 관계를 친화적 관계로 복원시켜 놓는다. 이에 따라 우의(寓意)는 냉소나 비꼼보다는 여유와 웃음, 위트와 관조와 같은 긍정적 태도를 함의한다. 임영조의 시는 이처럼 한 사물을 통해 그의 삶을 노래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니며 무수한 존재에 생명을 입힌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의 내면과 겹쳐지면서 활력과 의미를 얻는다. 이는 자기 부정의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자기 부정의 기저에는 사물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중심을 이루며 그 어떤 고통의 순간이라도 순치(馴致)된 고통으로 웃음과 여유와 같은 페이소스를 짙게 깔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모자 //임영조
번호 : 203   글쓴이 : 자운영
조회 : 14   스크랩 : 0   날짜 : 2006.01.27 11:13


나의 새해 소망은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별러도 쓰기 어려운
모자 하나 선물 받는 일이다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행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주는 모자 같은 것

돈 주고도 못 사고 공짜도 없는
그 무슨 백을 써도 구할 수 없는
얼핏 보면 값싼 듯 화사한 모자
쓰고 나면 왠지 궁상맞고 멋쩍은
그러면서 따뜻한 모자 같은 것

어디서나 팔지 않는 귀한 수제품
아무나 주지 않는 꽃다발 같은
'시인'이란 작위를 받아보고 싶다
어쩌면 사후에도 쓸똥말똥한
시인의 모자 하나 써보고 싶다
나의 새해 소망은.

 

매미소리

                                임영조


아그배나무 가지 매미가 우니

포플러나무 그늘 매미도 운다

저마다 덥다 덥다 외롭다 운다

감나무 가지 매미가 악쓰면

벚나무 그늘 매미도 악쓴다

그 무슨 열 받을 일이 많은지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운다

조용히들 내 소리나 들어라

매음매음…씨이이…씹팔씹팔

저 데뷔작 한 편이 대표작일까

경으로 읽자니 날라리로 읽히고

노래로 음역하면 상스럽게 들린다

선생(蟬生), 단에서 그만 내려오시죠

듣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

저 혼자 심각해서 우는 곡비들

찜통 속 부아만 쩔쩔 끓인다

저토록 제 가슴 다 끓이고 나야

물엿처럼 졸아드는 말복 끝머리

멋쩍어 허물 벗고 잠적하는 것일까

오늘도 시집 세 권이나 받았다

나도 짐짓 열 받은 매미기 되어

이 열 치 열… 한 여름 난다.

 

 

 

매미소리/임영조
번호 : 50   글쓴이 : 계요등
조회 : 28   스크랩 : 0   날짜 : 2006.11.02 08:16

매미소리

                                임영조


아그배나무 가지 매미가 우니

포플러나무 그늘 매미도 운다

저마다 덥다 덥다 외롭다 운다

감나무 가지 매미가 악쓰면

벚나무 그늘 매미도 악쓴다

그 무슨 열 받을 일이 많은지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운다

조용히들 내 소리나 들어라

매음매음…씨이이…씹팔씹팔

저 데뷔작 한 편이 대표작일까

경으로 읽자니 날라리로 읽히고

노래로 음역하면 상스럽게 들린다

선생(蟬生), 단에서 그만 내려오시죠

듣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

저 혼자 심각해서 우는 곡비들

찜통 속 부아만 쩔쩔 끓인다

저토록 제 가슴 다 끓이고 나야

물엿처럼 졸아드는 말복 끝머리

멋쩍어 허물 벗고 잠적하는 것일까

오늘도 시집 세 권이나 받았다

나도 짐짓 열 받은 매미기 되어

이 열 치 열… 한 여름 난다.

 

임영조 - 간
번호 : 230   글쓴이 : 디오니소스
조회 : 11   스크랩 : 0   날짜 : 2006.04.11 02:09
나의 다비는---임영조 론...
번호 : 266   글쓴이 : 타라
조회 : 36   스크랩 : 0   날짜 : 2005.02.19 20:02

 

 

이 다음 나 세상 뜨고 나면

깨끗이 태워 화장하려면

생나무 장작불론 타지 않으리

그동안 나는 너무 오래

조마조마 속 태우고 살아서

잘 마른 장작불로 태워야 하리

옹기 굽듯 관 불로 태워야 하리

안면도 야산 송림 한 채 다 태울

소나무 장작불로 태워야 하리

원하건대, 나의 다비는

건성으로 부르는 찬송가 사절

목탁만 멍이 드는 독경도 사절

내 생의 옹이마저 온전히 태워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의 가벼움

내 안의 기억까지 가루가 되는.

 

 

 

 

    ―「나의 다비는」 전문

 

 

 

 

 

 

 

 

 

“이 다음 나 세상 뜨고 나면/깨끗이 태워 화장하려면/생나무 장작불론 타지 않”을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나는 너무 오래/조마조마 속 태우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죠.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약자에 속하기 때문에 ‘조마조마 속태우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용기있게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지 못하고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나 관습에 묻고 있지만, 그 불안과 아픔과 좌절과 분노가 어떠한 것인지 세월의 강을 여러번 걸어 본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는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자신의 죽음을 “생의 옹이마저 온전히 태”우는 것이고 “내 안의 기억까지 가루가 되는” 것이라고 바라는 것에, 깊은 공감과 교감을 갖는 것이기도 하군요.

 

임영조란 시인을 처음 접했던 것은 그의 시 "풍란"이란 작품에서 였습니다.

 

결혼을 한 후 6년 동안 아이가 없는 형수님을 보고

그 형수님이 어느날 아이를 낳으면서

여성 상위니, 여자도 직업이 있어야 하느니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없으니,

반 귀머거리요. 반 벙어리로 6년을 버티다가

출산과 동시에 "나도 풍란입니다"라고 외치는 그의 시

"풍란"을 읽으면서  아직도 못한 회환과 꾹꾹 참아내고 있던 한(恨)함에 대해 깊이

새기었던 시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 그의 시를 읽으면서 매번 느끼는 것은

 

사물을 의인화 하는 표현능력도 탁월 할 뿐 아니라, 시인의 세계에 대상을 사실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늘 자신의 즐 거움과 슬픔, 분노와 안타까움 그리고 호기심들을

몇번의 여과지에다 걸러 내어 비추는 시 세계가 거울을 비추든 제 자신을 비추게

해주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시인은  이 세계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서도 타인의 모습을 비추어 자신의 내면도 들춰 보는 듯 합니다.

그 결과 시인의 거울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꽃이 의인화되어 들어 있기도 하고, 달려가고 싶은 길이 들어 있기도 하며, 꼭 이루고 싶은 사랑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고 이 세계의 대상을 넉넉하게 이해하고 좋아하며 유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면 살수록 검불 같은 세상에/속 타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랴”(「방화」).

 이 싯귀가 무심코 살아가는 제 인생을 둘쳐보는 듯하며,

나의 다비드에서 느껴지는 거울이 저를 자조적이게 그리고  각성하게 하는  밤입니다.

 



 

 

 

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

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

재앙을 만난 생의 몸부림

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

.
.
.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

한 입이 내는 奸과 諫 차이

한 몸속 肝과 幹 사이는 그렇게 먼가

....


-임영조 시인의 詩<간>중에서..

 


4월입니다.

첫날을 맞이하는 하늘은 잿빛으로 흐리기만 합니다.

화창해야 할 봄하늘에다 누군가

잔뜩 간을 해놓은 것만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목마다 봄꽃들이 눈부시게 나부끼며

활짝 활짝, 웃고 있는 4월의 아침입니다.



같은 소금으로...간을 하는데도,

푸성귀는 푹 기가 죽고

생선은 뻣뻣해집니다.



삶의 재앙을 만난 두 生의 몸부림,

그 적멸의 행간은

참으로 멀기만 합니다.



여말에 요승이 임금 업고 까불 때,

간 잘 맞춘 임박은 승지가 되고

간하던 임향은 괘씸죄 쓰고

남포 앞 죽도로 귀양가서 소금이 되었다는데!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세상에..우리 스스로 간이 되는 일,

참으로 힘겨운 일 중의 하나인 듯 합니다.



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운....

간,

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毒이라 하는데...



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

입맛이 돌아야 살맛이 나는 세상,

살맛 나는,

입맛 도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간 잘 맞추는

행복한 4월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박선희 시인>

 

 


나는 너무 멀리와 있네 /임영조
번호 : 7419   글쓴이 : 봄보리
조회 : 22   스크랩 : 0   날짜 : 2006.06.11 00:08
      나는 너무 멀리 와 있네 임영조 어딘가에 떨어뜨린 단추처럼 어딘가에 깝박 놓고 온 우산처럼 도무지 기억이 먼 유실물 하나 찾지 못해 몸보다 마음 바쁜 날 우연히 노들나루 지나다 보네 다 잡아도 놓치는게 세월이라고 절레절레 연둣빛 바람 터는 봄 버들 그 머리채 끌고 가는 강물을 보네 저 도도하게 흐르는 푸른 물살도 갈수록 느는 건 삶에 지친 겹주름 볕에 보면 물비늘로 반짝이는 책 낙장 없이 펼쳐지는 대장경이네 어느 한 대목만 읽어도 아하! 내 생의 유실물이 모두 보이고 어영부영 지나온 산과 들이 보이네 내 마음 속 빈터에 몰래 심어둔 홀씨 하나 싹트는지 궁금한 봄날 거룻배 노 저어가 찾고 싶은 날 오던 길 새삼 뒤돌아보면 이런! 나는 너무 멀리 와 있네. .
그 섬에 가면 - 임영조
번호 : 4226   글쓴이 : 소낙비
조회 : 58   스크랩 : 0   날짜 : 2006.09.10 17:11
    그 섬에 가면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사람들 더러 아는 척 해도 실은 가는 길도 모르고 무엇이 있는지는 더욱 모르는 외딴 섬 하나를 나는 안다 햇볕과 바람 유독 넉넉하고 정갈한 그 섬에 가면 홀로된 여자가 몇 뙈기의 외롬꽃을 가꾸며 산다 온 하루 김을 매고 속된 꿈 솎고 저물면 밤하늘에 총총한 별이 되는 섬 여자 나는 몰래 그녀를 사랑한다 가을볕 붉게 타는 수수밭 지나 고운 소금 뿌린 듯 메밀꽃 하얀 고샅길 질러 바다로 가노라면 꽃게처럼 웅크린 인가 몇 채 졸 뿐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다,무시로 참새떼소리 왁자한 탱자울 넘어 날아든 꿀벌들의 입맞춤이 진한지 참깨꽃 은방울이 섬 온 채를 흔든다. 그늘 깊은 뒷산 잡목숲에는 탁목조 한 마리가 산해경(山海經)읽듯 괭나무 찍는 소리로 하루해가 저물고 노을 젖은 은박지로 구겨진 바다 물빛 풍금소리 은은한 그 섬에 가면 나 혼자 엿듣는 방언이 있다 감쪽같이 나누는 사랑이 있다 아련하게 니스칠한 추억이 있다 세상과 먼 그 섬에 가면. 詩 임 영 조 수록 詩集 [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 中에서

 

 

[[詩]] 배롱나무 아래서/임영조
번호 : 1648   조회 : 9   스크랩 : 0   날짜 : 2006.02.24 13:44

대책없는 봄날/임영조
번호 : 797   글쓴이 : 木場
조회 : 33   스크랩 : 0   날짜 : 2006.06.28 09:20


 		
대책없는 봄날/임영조 
얼마 전, 섬진강에서 가장 이쁜 
매화년을 몰래 꼬드겨서 
둘이 야반도주를 하였는데요. 
그 소문이 매화골 일대에 
쫘악 퍼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도심의 공원에 산책을 나갔더니, 
아 거기에 있던 꽃들이 
나를 보더니만 와르르- 웃어젖히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요. 
거기다 본처같은 목년(목련!)이 
잔뜩 부은 얼굴로 달려와 기세 등등하게 
넓다란 꽃잎을 귀싸대기 때리듯 날려대지요, 
옆에 있는 산수유년은 말리지도 않고 
재잘대기만 하는 폼이 꼭 시어머니 편드는 
시누이년 같아서 얄밉기만 하고요, 
개나리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꼼지락거리며 
호기심어린 싹눈을 내미는데요, 
아이고, 수다스런 고 년들의 입심이 
이제 꽃가루로 사방천지에 삐라처럼 날리는데요, 
이 대책없는 봄을 어찌 해야겠습니까요. 
 

배롱나무 아래서

    

-임영조

    

   

 

어제 피운 바람꽃 진다

팔월염천 사르는 농염한 꽃불

밤 사이 시들시들 검붉게 져도

또다른 망울에 불을 지핀다

언제쯤 철이 들까? 내내

자잘한 웃음소리 간드러지는

늙은 배롱나무의 선홍빛 음순

날아든 꿀벌을 깊이 품고 뜨겁다

조금 사리 지나고 막달이 차도

좀처럼 下血이 멎지 않는 꽃이다

호시절을 배롱배롱 보낸 멀미로

팔다리 휘도록 늦바람난 꽃이여

매미도 목이 쉬어 타는 말복에

생피같이 더운 네 웃음 보시한들

보릿고개 맨발로 넘다가 지친

내 몸이 받는 한끼 이밥만 하랴

해도, 오랜 기갈을 견뎌온 나는

석달 열흘 피고 지는 현란한 修辭

네 새빨간 거짓말도 다 믿고 싶다

그 쓰린 기억 뒤로 가을이 오고

퍼렇게 침묵하던 벼이삭은 패리라

처서 지나 한로쯤 찬이슬 맞고

햇곡도 다 익어 제 무게로 숙일 때

나는 또 한 소식을 기다려보리라

보름 넘어 굶다가 밥상을 받듯

받기 전에 배부른 배롱나무 아래서.

 

    

 - 임영조 시집 "시인의 모자"(창비시선 223) 중에서

 

대책없는 봄날/임영조
번호 : 797   글쓴이 : 木場
조회 : 33   스크랩 : 0   날짜 : 2006.06.28 09:20


 		
대책없는 봄날/임영조 
얼마 전, 섬진강에서 가장 이쁜 
매화년을 몰래 꼬드겨서 
둘이 야반도주를 하였는데요. 
그 소문이 매화골 일대에 
쫘악 퍼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도심의 공원에 산책을 나갔더니, 
아 거기에 있던 꽃들이 
나를 보더니만 와르르- 웃어젖히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요. 
거기다 본처같은 목년(목련!)이 
잔뜩 부은 얼굴로 달려와 기세 등등하게 
넓다란 꽃잎을 귀싸대기 때리듯 날려대지요, 
옆에 있는 산수유년은 말리지도 않고 
재잘대기만 하는 폼이 꼭 시어머니 편드는 
시누이년 같아서 얄밉기만 하고요, 
개나리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꼼지락거리며 
호기심어린 싹눈을 내미는데요, 
아이고, 수다스런 고 년들의 입심이 
이제 꽃가루로 사방천지에 삐라처럼 날리는데요, 
이 대책없는 봄을 어찌 해야겠습니까요. 
 


염소를 찾아서 3.....임영조..
번호 : 129   글쓴이 : 임성애(8반))
조회 : 20   스크랩 : 0   날짜 : 2006.09.02 16:14

염소를 찾아서 3 / 임영조

 

                          
고2 때 기말시험 보던 날
납부금 안 냈다고 쫓겨난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식구들 몰래
새끼 밴 염소를 내다 팔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삼십 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판 걸 알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뿌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삼월................임영조
번호 : 1417   글쓴이 : 원종이엄마
조회 : 15   스크랩 : 0   날짜 : 2006.03.08 11:46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한 꽃샘바람

먼 산이 꿈틀거린다



나른한 햇볕아래

선잠 깬 나무들이 기지개켜듯

하늘을 힘껏 밀어올리자

조르르 구르는 푸른 물소리

문득 귀가 열린다


누가 또 내 말 하는지

떠도는 소문처럼 바람이 불고

턱없이 가슴 뛰는 기대로

입술이 트듯 꽃망울이 부푼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 까

온 종일 궁금한 삼월

그 미완의 화폭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 놓고

찬연한 부활을 기다린다

 

이삭의 노래 / 임영조
번호 : 1770   글쓴이 : 박동진
조회 : 8   스크랩 : 0   날짜 : 2006.02.24 22:03

이삭의 노래 / 임영조


이젠 고개를 들지 않겠습니다.
前生에 지은 罪까지 익어
저절로 숙여지는 이 가을
하늘은 참 맑고 멀군요.
진작 익은 者는 떨어져 숨고
아직 덜 익은 것들만
빳빳이 고개 들어 시끄러운 때
나는 또 무슨 말을 할까요.
그저 이름도 없이
하얀 겨울 속에 파묻혀
가장 서러운 가락 아니면
자당한 말씀으로 썩겠습니다.

 

 

덩굴장미 / 임영조
번호 : 2010   글쓴이 : 박동진
조회 : 4   스크랩 : 0   날짜 : 2006.04.04 19:51
덩굴장미 / 임영조



오월 한낮 햇볕 아래
나른한 골목길 인적 뜸하다
누가 사는 집일까?
화사한 웃음소리 담을 넘는다
새빨간 립스틱 진하게 칠한
저 여자들 오늘이 곗날인가?
모처럼 하나같이 화색이 돈다
낮술 한 잔 걸친 듯 농염한 입술
귀 빌려 주면 무슨 말할까?
온몸이 지레 후끈거린다
못본 척 그냥 걷는다, 이봐!
새파란 덩굴손이 어깨 툭 친다
왜요? 돌아다보니, 오호호……
선혈이 낭자한 드라큐라
화려한 염문처럼 뒤따라온다
사방에 짜한 매혹적인 저 몸내
그 여자 입이 참 얇다
색이 너무 진하면 담을 넘듯
그 여자 입이 참 얇다
색이 너무 진하면 담을 넘듯
가시울 쳐도 새는 화냥끼
슬쩍 한 송이 꺾어?
그 여자 몸은 온통 가시다!

 

 

나도풍란 / 임영조
번호 : 2011   글쓴이 : 박동진
조회 : 15   스크랩 : 0   날짜 : 2006.04.04 19:51

나도풍란 / 임영조



남녘 끝 섬마을서 시집 와
육 년 남짓 애를 갖지 못하고
죄인처럼 살아온 우리 형수가
오늘은 <나도> 하고 말문을 텄다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
참았던 슬픔 모두 다 터져
하얀 분냄새로 웃는 형수여
그 웃음 깊은 속 누가 또 알리

대관절 가슴에 서린 한이
얼마나 크고 사무쳤길래
푸르고 질긴 잎에 예서체(隸書體)로 숨겼다가
오뉴월 눈시린 서릿발로 치는가

(참고 기다린 자 복이 있나니)
아픔도 터지면 꽃이 되는가
오랜 산고(産苦)를 비로소 풀듯
코끝 아려오는 향긋한 몸내로
세상과 눈인사를 트는 꽃이여,

나는 듣는다
우리가 밀쳐둔 기억 밖에서
절망처럼 죄어드는 세월을 감고
슬픈 씨를 수태한 여인의 개화(開花)
그 서럽고 빛부신 이야기를 듣는다.

 

호박꽃 / 임영조
번호 : 2012   글쓴이 : 박동진
조회 : 7   스크랩 : 0   날짜 : 2006.04.04 19:51

호박꽃/ 임영조


쩔쩔 끓는 삼복염천
성남 변두리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듯 좌판을 벌여놓고
아무튼 열심히 사는
내 고향 점례를 보았습니다
남이야 뭐라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고
질펀한 맨땅에 퍼질러 앉아
호호호호 샛노란 웃음도 파는
억척스런 점례를 보았습니다
더러는 상스러운 이웃과 함께
객적은 농담도 좀 주고 받으며
아둥바둥 온몸으로 기어가
아픈 삶을 움켜쥐는 덩굴손
내 고향 점례를 보았습니다
헤어진 지 스물여섯 해만에.

 

강 건너 등불 2 / 임영조
번호 : 2021   글쓴이 : 박동진
조회 : 12   스크랩 : 0   날짜 : 2006.04.06 03:40

강 건너 등불 2 / 임영조



방배동 호프집 '피카소'에 가면
-그렇게도 다정했던 그때 그사람
언제라도 눈 감으면 보이는 얼굴
거나한 시인 김명인이 무반주로 나온다

상기된 왕방울눈 지그시 감고
유독 검은 뿔테 안경만 환하게 뜬 채
저 홀로 심각하고 애절한 십팔번을 뽑는다

- 밤하늘에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아아아 당신만을 잊지 못할까?

솔로로 어둠켜는 소야곡
그대 추억의 강은 어찌 그리 깊은가
방배동의 밤이 뽕짝조로 출렁거리고
사당동의 별들이 덩달아 박자 맞추는
그대 한이 언제 그리 컸던가
강물은 슬픔이 깊을수록 푸르지
등불은 어둡고 외로워야 빛나고

- 사무치게 그리워서 강변에 서면
눈물 속에 깜박이는 강 건너 등불

그랬구나, 우리는 저마다
세월이 흘러가도 내보이기 무엇한
그리움을 하나씩 품고 있구나
남모를 아픔 같은 한 같은
강 건너 등불을 갖고 있구나

 

꽃을 위하여 / 임영조
번호 : 2000   글쓴이 : 박동진
조회 : 5   스크랩 : 0   날짜 : 2006.04.03 15:28
꽃을 위하여 / 임영조


꽃이여,
오늘 아침 비로소 터진
네 초경의 선홍빛 아픔을
내게 들킨 꽃이여,
오히려 내가 더 무색하구나
아무리 숨겨도 숨길 수 없는
최초의 그 부끄러운 경험을
나 혼자 황홀히 기억하고 있음을
꽃이여, 부디 용서해다오
나는 지금 불순하게도
너의 가장 솔직한 고백
속깊은 내력의 은어까지도
감히 사랑하고 싶구나.

익명의 스냅 / 임영조
번호 : 2002   글쓴이 : 박동진
조회 : 4   스크랩 : 0   날짜 : 2006.04.03 15:28
익명의 스냅 / 임영조


봄소풍 나온
할머니들 대여섯이
오순도순 화투를 친다
손주 같은 햇살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는 잔디밭에서
노년(老年)을 말리듯 화투를 친다
이미 색 바랜 광(光)과 남은 소망을
한 장씩 탁탁 던지고 나면 왠지 허전하고 저린 손이여
못내 아쉽고 덧없는 세월이여
송학(松鶴)이 앉았다 날아간 자리에
매화가 피고 지고
객혈하듯 벚꽃이 흥건한 방석
때아닌 국화, 철 이른 모란 난초
덩달아 피고 지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하느님도 구경하기 심심하신지
싸리순을 짐짓 내미는 봄날
이런 날은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단순한 기쁨이 좋다
익명의 스냅이 좋다.

겨울 만다라/임영조
번호 : 56   글쓴이 : 김문억
조회 : 1   스크랩 : 0   날짜 : 2006.06.07 23:25

                 겨울 만다라/임영조

 

대한 지나 입춘날

오던 눈 멎고 바람 추운 날

빨간 장화 신은 비둘기 한 마리가

눈 위에 총총총 발자국을 찍는다

세상 온통 한 장의 수의에 덮여

이승이 흡사 저승 같은 날

압정 같은 부리로 키보드 치듯

언 땅을 콕콕 쪼아 햇볕을 파종한다

사방이 일순 다냥하게 부풀어

내 가슴 속 빈 터가 확 넓어지고

먼 마을 풍매화꽃 벙그는 소리

들린다. 참았던 슬픔 터지는 소리

하얀 운판을 쪼아 또박또박 시 쓰듯

한 끼의 양식을 찾는 비둘기

하루를 헤집다 공친 발만 시리다

아니다, 잠시 소요하듯 지상에 내려

요기도 안 될 시 몇줄만 남기면 되는

오, 눈물겨운 노역의 작은 평화여

저 정경 넘기면 과연 공일까?

혼신을 다해 사바를 노크하는

겨울 만다라!

 

            * 만다라는 부처의 깨달은 경지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공의 경지를 체득한 것이기에 오묘하고 신비로운 형상을 지닌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만다라에 해당하는오묘하고 신비로운 장면은 무엇일까

아직 해동바람으로 한겨울보다 더 추위를 느길 수있는 입춘에 빨간 장화를 신은 비둘기 한 마리가 눈 위에 발자국을 찍는 장면으로 시는 시작 된다.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을 한 장 수의에 덮였다고 했으며 비둘기가 먹이를 찾아 땅을 쪼는 것을 '압정같은 부리로 키 보드 치 듯 언땅을 쪼아 햇볕을 파종한다 ' 고 했다

자연 경관에서 움직이고 있는 샘명체를 섬세하게 포착하여 새로운 비유로 재구성하는 시인만의 솜씨가 뛰어나다.

그리고나서 이 장면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다양한 이미지를 통하여 만다라같이 화려하게 전개된다

 

이 시의 요체는  비둘기가 땅을 파 헤치며 먹이를 찾는 모습을 또박또박 시 쓰는 것에 비유한 것이라고 하겠다. 지극히 평화로우면서도 애처로운 그 모습은 지상의 운판 위에 몇 줄의 시를 남기는 시인의 모습으로 인식된 것이다

한 끼의 양식 대신 몇 줄의 시를 남기는 그 모습은 마치 공의 경지를 찾아 사바을 탐색하는 수도자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이 장면을 '겨울 만다라' 라고 지칭하였다.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사소한 정경에서 생명의 소중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것을 높은 정신의 차원으로 승화사킨 데 이 시의 아름다움이 있다.

    -올해의 좋은시 .현대문학 참조-

 

초정.

 

담배를끊고 /임영조-구슬이
번호 : 100   글쓴이 : 지젤
조회 : 1   스크랩 : 0   날짜 : 2006.09.15 10:17

담배를 끊고

임영조



드디어 담배를 끊었습니다

삼십 년 남짓 내 생각을 지펴준

마법의 쏘시개를 버렸습니다

그만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

관계를 지속해 준 습관성 내연

나는 너무 오래 그 맛에 빠져

시간을 태우고 몸을 태우고

내 반생을 홀딱 태워먹었습니다

밤낮 피워 무는 몇 개비의 허무로

연막을 치고 공복을 채우려다 그만

데었던 상처 또 데기도 했습니다

새벽잠도 엷어지는 금단증

바꿔 꾸는 꿈조차 뒤숭숭하여

꽁초같은 공상도 비벼 껐지요

어정쩡한 내연을 이제야 청산하듯

담뱃재처럼 식은 사랑 떨구듯

마지막 피우던 담배불 끄고 이젠

모락모락 바람이나 피워봐?

맨입이 심심하고 건조한 날은

스스로 한 개비 담배가 되어

남은 생을 뻐끔뻐끔 태워보지만

이따금 생각납니다, 내내 몸 섞고 살던

오, 그리운 악처 같은 맛

 

 

나의 다비는---임영조 론...
번호 : 266   글쓴이 : 타라
조회 : 36   스크랩 : 0   날짜 : 2005.02.19 20:02

 

 

이 다음 나 세상 뜨고 나면

깨끗이 태워 화장하려면

생나무 장작불론 타지 않으리

그동안 나는 너무 오래

조마조마 속 태우고 살아서

잘 마른 장작불로 태워야 하리

옹기 굽듯 관 불로 태워야 하리

안면도 야산 송림 한 채 다 태울

소나무 장작불로 태워야 하리

원하건대, 나의 다비는

건성으로 부르는 찬송가 사절

목탁만 멍이 드는 독경도 사절

내 생의 옹이마저 온전히 태워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의 가벼움

내 안의 기억까지 가루가 되는.

 

 

 

 

    ―「나의 다비는」 전문

 

 

 

 

 

 

 

 

 

“이 다음 나 세상 뜨고 나면/깨끗이 태워 화장하려면/생나무 장작불론 타지 않”을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나는 너무 오래/조마조마 속 태우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죠.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약자에 속하기 때문에 ‘조마조마 속태우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용기있게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지 못하고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나 관습에 묻고 있지만, 그 불안과 아픔과 좌절과 분노가 어떠한 것인지 세월의 강을 여러번 걸어 본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는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자신의 죽음을 “생의 옹이마저 온전히 태”우는 것이고 “내 안의 기억까지 가루가 되는” 것이라고 바라는 것에, 깊은 공감과 교감을 갖는 것이기도 하군요.

 

임영조란 시인을 처음 접했던 것은 그의 시 "풍란"이란 작품에서 였습니다.

 

결혼을 한 후 6년 동안 아이가 없는 형수님을 보고

그 형수님이 어느날 아이를 낳으면서

여성 상위니, 여자도 직업이 있어야 하느니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없으니,

반 귀머거리요. 반 벙어리로 6년을 버티다가

출산과 동시에 "나도 풍란입니다"라고 외치는 그의 시

"풍란"을 읽으면서  아직도 못한 회환과 꾹꾹 참아내고 있던 한(恨)함에 대해 깊이

새기었던 시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 그의 시를 읽으면서 매번 느끼는 것은

 

사물을 의인화 하는 표현능력도 탁월 할 뿐 아니라, 시인의 세계에 대상을 사실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늘 자신의 즐 거움과 슬픔, 분노와 안타까움 그리고 호기심들을

몇번의 여과지에다 걸러 내어 비추는 시 세계가 거울을 비추든 제 자신을 비추게

해주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시인은  이 세계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서도 타인의 모습을 비추어 자신의 내면도 들춰 보는 듯 합니다.

그 결과 시인의 거울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꽃이 의인화되어 들어 있기도 하고, 달려가고 싶은 길이 들어 있기도 하며, 꼭 이루고 싶은 사랑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고 이 세계의 대상을 넉넉하게 이해하고 좋아하며 유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면 살수록 검불 같은 세상에/속 타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랴”(「방화」).

 이 싯귀가 무심코 살아가는 제 인생을 둘쳐보는 듯하며,

나의 다비드에서 느껴지는 거울이 저를 자조적이게 그리고  각성하게 하는  밤입니다.

 

 

 

 

조팝나무꽃 - 임영조
번호 : 11477   글쓴이 : 워니..
조회 : 79   스크랩 : 0   날짜 : 2003.05.23 21:13



매봉산 초입 오르막길에

갓 핀 한 무리 조팝나무꽃

앙증한 웃음소리 눈이 부시다

너무 귀엽고 예뻐 넋놓고 보다

어느새 손이 가서 쓰다듬는다

아직 여리고 비린 잇바디 세듯

조심조심 어루만지자, 덥석

하얀 젖니가 손가락을 깨문다

이 얼얼하고 황홀한 촉감!

간지럽고 환한 통증이 좋다

때 탄 손은 꽃들이 먼저 아는지

고개를 살래살래 젓다가 울컥

흰 젖을 토해놓는 조팝나무꽃

너무 고와 눈 시린 갓난아기다

어서 손 치우세요!

이 멋쩍고 부끄러운 내 손은

어디다 감출까 쩔쩔매는 나이다

그래도 너를 보면 내 피도 잘 돌아

온 종일 둥둥 얼러주고 싶구나

늙마에 어디 가서 몰래 본

돌잡이 딸 안고 눈웃음을 맞추듯.







시집 : 시인의 모자


[임영조] 강가에서 2
번호 : 20959   글쓴이 : 류빈
조회 : 110   스크랩 : 1   날짜 : 2005.12.14 09:39
강가에서 2



임영조




고봉으로 얹힌 달빛이 넘쳐
산등 타고 부시게 흘러내린다
빈 자리를 채우는 서늘한 날염
희게 바랜 강물이 옥양목 같다
멀어지는 뒷모습 너무 그리워
돌팔매 하나 힘껏 날린다
중세의 청동거울 깨지는 소리
밤이 훔푹 패인다
강이 돌아눕는다
일파만파
물너울이 펼쳐주는 책장을
나는 쉰 살 남짓 죄 까먹도록
다 읽지 못하고 예까지 왔다
세월의 아들 강이여, 다시는
사람 사는 마을로 오지 말고
아주 멀리멀리 내빼버려라!



*
임영조 시집 [시인의 모자/창작과 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