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학 산책

김영랑의 시 해설(펌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2. 29. 12:04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의 시 해설(펌)
번호 : 103   글쓴이 : 꽃편지지
조회 : 21   스크랩 : 0   날짜 : 2006.05.23 08:45

영랑 생가

영랑 시비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 영 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성격: 유미적, 낭만적, 상징적

* 어조: 여성적 어조

* 표현: 역설적 표현

* 출전:<문학 3호, 1934.4>

* 주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림

모란에 대한 애착을 통한 인간 신념의 찬미

순수 소망에 대한 기다림과 비애미

* 의의: 이 시는 유미주의적 순수시의 정화라 할 수 있다. 시의 전통적 계승의 면에서 볼 때 김소월을 이어받고 다음에 서정주로 접맥되었다. 이 시는 일체의 관념과 목적 의식을 배제한 예술지상주의적 성격의 작품이다.



감상포인트

서정적 자아: 소망을 품고 기다리는 어느 여성

모란은 지상의 꽃 중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징성

모란이 피기까지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 꽃이 바로 삶의 가치이며 보람

'모란'과 '봄'을 생성과 소멸이 결합한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순환적 속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희망'과 '절망'의 상반된 태도를 함께 지니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의미상 대응 : 모란, 봄, 보람

서정적 자아가 지향하는 세계와 유사 :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 좁고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 다니는 /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기다림→설움→절망→기다림'의 대칭 구조, 순환론적 세계관(기다림 → 좌절 → 기다림)

미의식 비장미(자기 희생이나 슬픔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표현: 1. 나긋나긋하고 감칠 맛 나는 전라도 방언으로 여성적 어투와 자연스러운 운율감 형성함

2. 역설이 한층 비애미를 자아냄

3. 전통적인 기다림의 정서를 시적 정서로 승화시킴



김영랑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출생. 본명은 윤식(允植).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에서 파편에 맞아 사망.



해설

이 시는 영랑이 남달리 좋아하던 모란을 소재로 하여 한시적(限時的)인 아름다움의 소멸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비애감을 표현한 작품으로, '모란'은 실재하는 자연의 꽃인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대유적 기능의 꽃이다.


연 구분이 없는 이 시는 작품 속에 전개되는 시간의 추이로 보아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인 첫째 단락은 1∼2행이며, 미래인 둘째 단락은 3∼4행, 과거인 셋째 단락은 5∼10행, 현재의 넷째 단락은 11∼12행으로 첫째 단락의 반복이다. 첫째 단락에서 시적 화자는 모란이 필 그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둘째 단락에 이르면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모란이 떨어져 다시 슬픔에 잠기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으며, 셋째 단락은 그가 설움에 잠기게 될 미래의 상황을 증명해 줄 뿐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삶의 구도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오직 모란이 피어 있는 순간에만 삶의 보람을 느끼는 시적 화자에게 있어서 모란은 봄과 등가적(等價的) 가치로 그의 소망을 표상한다. 그가 추구하는 소망 세계가 무엇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것이 모란으로 대유된 어떤 절대적 가치의 미(美)라고 한다면, 시적 화자는 모란이 피어 있을 때는 자신의 소망이 성취된 것으로 생각하여 보람을 느끼다가, 모란이 지고 말았을 때는 봄을 여읜 보람을 상실한 허탈감에 빠져, 마치 한 해가 다 지나버린 것으로 생각하는 감상적 유미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화자의 한 해는 '모란이 피어 있는 날'과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날'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9, 10행에서 볼 수 있듯이 모란이 피어 있는 날을 제외한 그의 나날은 '하냥 섭섭해 우는' 서러움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넷째 단락에 이르러 화자는 모란이 피는 날을 계속 기다리고 있겠다는 심경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기다리는 봄이 다만 '슬픔의 봄'이 아닌, '찬란한 슬픔의 봄'임을 시인하게 된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 '찬란한 봄'이라는 의미보다 '슬픔의 봄'이 강조된 표현이라면, 표면적으로는 화자가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기대와 희망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란을 잃은 설움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란에 자신의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비실제적 세계관의 소유자인 화자가 한 해를 온통 설움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그의 봄은 결코 절망뿐인 '슬픔의 봄'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절의 순환 원리에 따라 봄은 또 올 것이고, 봄이 오면 모란은 또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슬픔은 다만 모순 형용의 '찬란한 슬픔'으로 언제까지나 그를 기다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줄뿐이다.


모란이 피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설움에 잠겨 있는 화자의 태도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와 [내 마음을 아실 이]에서 보여 준 바 있는 '내 마음'의 세계를 한층 더 내밀화시키는 것으로, 영랑으로 하여금 외부 사물과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취하지 못한 시 세계만을 펼쳐 보이게 하였으며, 결국 그의 시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영랑의 시세계

영랑의 시는 순수 서정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많은 시가 의미를 크게 강조하거나 관념에 비중을 두기보다는 언어의 미적 구조와 음악성에 치중한다는 점에서는 순수시라고 볼 수 있으며, <내 마음>이라는 주관적 감정의 표출에 몰두한다는 점에서는 서정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순수 서정의 세계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상징시로서의 면모와 이미지즘의 측면이 드러나기도 하며, 또한 존재론적인 생의 인식이 발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에 비관적인 현실 인식과 부정적인 세계관이 일관되게 흐른다는 것은 중요한 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보다 적극적, 투쟁적으로 강조되어 나타나지 않을 뿐이며, 이것조차 언어 미학적인 섬세한 배려가 시의 표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화돼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시를 좀더 자세히 들어다 보면, 그의 시야말로 시의 의미와 가락, 그리고 형식이 유기적으로 잘 통합됨으로써 현실인식이 미의식으로 탁월하게 상승된 예술시의 한 모델이 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가 당대 현실의 참상과 민중들의 고통스런 삶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영랑이 시종일관 언어미학에의 끈질긴 집념은 당대 일제의 포악한 파시즘에 시인이 대처할 수 있는 예술적 은전 방식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로 판단된다. 그가 보여준 한국의 정통적 서정과 가락에 대한 뜨거운 애정, 향토적 정감의 소중함에 대한 재발견의 노력, 그리고 그에 따른 한국어의 시적 가치와 그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깊이 있는 신뢰와 실천적 탐구야말로 바람직한 시인의 사명 완수 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랑의 시에 나타난 '내 마음'에 대하여

김영랑의 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내 마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전 70편 중에서 '마음'이 51건, 마음과 같은 뜻으로 쓰인 '가슴'이 5건, 모두 56건의 마음이 등장한다. 또한 '나는', '나의', '내', '나'에 속하는 말들이 61건이 나오고 있다. 이 밖에도 '마음'이나 '나'의 말을 쓰지 않고 그러한 뜻을 나타낸 것은 더 많다. 나타나 있는 건수로는 '내'와 '마음'이 거의 같은 비례로 전편에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비하여 '우리'는 1건으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바다로 가자'에서 취급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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