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학 산책

[스크랩]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월정月靜 강대실 2007. 1. 2. 17:50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인 '붉은 나무젓가락'의

작가가 국문과 3학년 서진연 학우님이시네요.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어려운 주제일 수 있는 남북 분단이나 한.일,삶과 죽음의 이야기들을

세상으로 부터 단절되어 살아가는 두 사람을 통해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06 송년특집-2007 신춘문예 당선작-단편소설>
붉은 나무젓가락

 

글 서진연

1969년 서울 출생

일본 사이타마대학 교양학부 중퇴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재학중

    “무국적 재일동포 시선통해 현대인 내면풍경 잘 그려” : 최종…
    “맨손에 맨발, 행복은 잠시 다시… 갈 길이 너무 멀다” : 꿈…
10년 전,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일문학 강의실 뒷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서는 너를 처음 본 순간 ‘아, 사미…’하며 꽤 오래전의 한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가 20여 년의 그 긴 시간을 넘어 그 모습 그대로 내 강의실로 걸어들어 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네가 그냥 일본인 학생일 뿐이라고 다시 생각했다. 그런데 사미가 일본인을 닮았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너무 많은 기억들이 조금씩 소멸되고 생성되어 전혀 다른 무엇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너를 보았을 때, 아, 사미… 했으면서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런 여러 생각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훑으며 지나갔고, 창백한 얼굴에 붉은 입술의 너는 이내 전형적인 일본인 여학생의 모습으로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첫 강의 시간은 나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학생들의 자기소개로 진행하기로 했다. 오래 밀어 놓았던 논문에 매달리느라 학생들의 입학 서류를 미처 챙겨 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기소개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씩 훑어보며 서류와 인물을 대조해 볼 요량이었다. 나는 먼저 내 소개를 했다. 그러나 나는 ‘김철민’이라는 조선식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다카하시 코오스케’라는 일본식 이름만 말했다. 그리고 소학교부터 고등2년까지 조총련이 세운 민족학교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며 그가 준 옷을 입고 그가 준 간식을 먹으며 공부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조선적에서 일본적으로 귀화한 다음 전학한 일본인 고등학교와 학위를 받고 나서도 모교 밖에서는 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 지금 강의를 하고 있는 이 H대학에 대해서만 말했다. 어차피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굳이 내가 먼저 말해서 한때 외국인이었던 사람에게 자국의 문학을 배운다는 것을 인식시켜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무 편견 없이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해든 그것은 변함없는 나의 방식이었다.

일문학을 지원한 학생들답게 자기소개와 포부는 모두 유창했다. 소세키를 존경한다. 그를 연구하겠다. 하루키를 사랑한다. 그와 같은 글을 쓰겠다. 아이들을 사랑한다. 모국의 언어로 시를 읽어주는 선생님이 되겠다. 나는 창가에 서서 학생들의 서류를 넘기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너의 차례가 되었을 때, 얼굴이 발그레해져 더듬거리던 너의 그 발음에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수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시 자리에 앉는 너를 바라보았다.

―한국이라고 했니?

나는 일본어로 물었고,

―네, 한국이요.

너 역시 일본어로 대답했다.

미처 보지 못했던 너의 서류에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사미가 다시 거기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 역시 곧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멋모르고 내 수업을 듣다 서둘러 강의실을 떠났던 몇몇의 한국인 학생들이 있었다. 일본에서 나서 자란 나에겐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너의 나라에선 나와 같은 조총련계 출신과 어울린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처음 강의를 시작했던 그때와는 시대가 달라져 의식도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냥 어울린다는 것과 공부를 배운다는 것은 사뭇 다른 문제일 것이었다. 어쩌면 내 강의를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에겐 이미 보이지 않는 눈들이 따라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수업을 하면서도 나는 너를 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저절로 알고 떠나게 되기를, 나는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떠나지 않았다. 나를 멀리하지도 않았다. 한국인 학생이 별로 없었던 학교에서 오히려 너는 나를 동류로 인식했던 것일까. 4월도 가고 하얗게 진 벚꽃 잎들이 지천으로 깔려 시들어가고 있을 무렵, 혼자 교내 식당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내 앞에 네가 와 앉았다. 밥을 먹는 동안 내내 너는 그 서툰 일본어로 수업과 과제에 대해, 다른 교수와 학생에 대해, 구내식당의 메뉴에 대해, 두서없이 투덜거렸다. 문득, 주위를 휘이 한번 둘러본 네가 갑자기 내 쪽으로 상체를 낮추었다. 그리고 역시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교수님은 왜 조총련이 되셨어요? 물론 한국어였다.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눈까지 가느다랗게 만들어 뜨고 바라보는 너의 그 터무니없이 낮고 진지한 시선이 좀 우습게 느껴졌다. 너는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물어왔다.

―부모님이 그 쪽이셨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었어.

―그런데 왜요?

―글쎄….

딱히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가끔은 그런 식의 질문을 듣기도 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단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터무니없이 직설적인 질문은 처음이었다.

―그럼 공산당은 아니란 말이죠?

너는 여전히 진지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네가 말한 그 공산당이라는 단어의 어감에 나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 나 역시 상체를 숙이고 같은 톤으로 대답해 주었다.

―아마 그럴 거야.

―그럼 됐어요.

너는 다시 상체를 세우고 정말로 됐다는 듯 싱긋 한번 웃어 보이고는 된장국을 들어 젓가락으로 훌훌 저어 마시기 시작했다.

어쩌다 교정을 거닐다 마주칠 때에도, 수업이 끝나고 다음 강의실로 이동 할 때에도, 너는 언제나 접선하듯 빠르게 스치며 낮은 한국어로 인사했다. 그러면서도 한번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은 불편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예의 그 장난기 섞인 동류의식에 나는 점점 익숙해져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너를 외국에서 공부시킬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은 갖춘, 보통 집안의 보통 아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만큼 너는 언제나 거리낌 없이 맑았다. 그러나 나는 곧 네가 휴가시즌이 되어도 아주 잠깐 밖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김치를 사서 보내 달라고 하여 일요일 한낮에 우에노 거리에 있는 한국 식료품점을 찾게 되었고, 거기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너를 만났던 것이다. 본국으로부터의 송금이 전혀 없는 너는 밤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스넥바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또 일요일에는 이 김치가게에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고 했다. 휴가시즌이면 더욱 많은 일을 하여 저축해 놓아야만 한다고도 했다. 나는 어떤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아 조금은 당황하고 있었지만 너는 여전히 맑게 웃었다. 이래 뵈도 저 꽤 신임을 얻어서요, 이 정도의 재량권은 있어요, 하며 한 포기의 김치를 더 얹어주기도 했다.

너는 언제나 맑은 웃음을 날리며 종종 걸음으로 뛰어다녔지만 그래서인지 가끔은 강의 시간에도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런 너를 보며 나는 민족학교에서 일본인 고등학교로 옮기고 난 뒤, 신칸센 철로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했던 나의 지난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 네가 나에게로 온 것은 겨울 휴가시즌이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지금 가도 되나요? 오피스텔의 전화선을 타고 조심스럽게 들려오던 너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너는 얼음처럼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나는 일단 너를 소파에 앉힌 다음 담요를 가져다주고 발밑에 스토브를 놓아주었다. 새 원두의 포장을 뜯어 나무로 된 수동 머신에 적당량의 원두를 덜어 넣고 손잡이를 돌렸다. 갈아 놓은 원두가 있었지만 나는 그 시각에 찾아온 너와 마주 앉기까지의 시간을 좀 더 늦추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커피메이커에 곱게 간 커피가루를 옮겨 담고 생수를 붓고 스위치를 올렸다.

―아기를 가졌어요. 벌써 6개월이 넘어가요.

나는 그대로 몸만 돌려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이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냉동실에서 캔으로 된 맥주를 꺼내 들었다. 언제나 하루의 일과를 끝낸 밤이면 살짝 얼려 살얼음이 낀 맥주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곤 했었다.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목을 뒤로 꺾어 쉬지 않고 몇 모금을 마시면, 목울대를 타고 싸아 하니 넘어가는 차디찬 그 느낌이 쌉쌀한 맥주 특유의 맛과 어우러져 가슴의 온갖 먼지가 한꺼번에 쓸려 내려가는 듯하곤 했었다.

―지난 여름 휴가 때, 한국에 잠깐 나갔을 때….

나는 다시 가슴의 먼지를 쓸어 비워놓고 무언가를 준비하는 심정이 되었다.

너는 그해 여름에 사흘 간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이라며 잠시 학교의 내 연구실에 들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오빠가 있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친오빠처럼 너를 돌보아 준 사람이라고 했다. 유난히 공부 욕심이 많았던 너는 열여덟 살이 되어 규정대로 보육원을 나오고 나서 그의 자취방에서 여고도 졸업했고, 그가 군대를 가기 전까지 모아 놓은 돈으로 유학 올 때의 초기 학비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 아직도 고아라… 하며 내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조금은 허탈한 반성의 심정으로 말을 했을 때 너는, 어쩌면 더 많아졌을지도 몰라요. 지난날엔 시대와 전쟁이 고아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개인이 고아를 만들어요, 하며 시선을 슬며시 비껴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런데요, 가끔은 생각해요. 그 개인은 또 사회가 만든 것은 아닐까, 하고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내 엄마가 엄마 자신을 위해 나를 버렸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거든요. 무언가 다른 거창한 이유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지거든요. 너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천천히 말했다. 그때 그래야 하는 이유는 서로 달랐겠지만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은 똑같이 쓸쓸했던 것일까. 자리에서 일어나 너의 찻잔에 더운 물을 부어주고 다시 자리에 앉아 네 시선이 머문 곳을 나도 똑같이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네 움직임과 네 시선을 따라 이동하고 있는 내 시야 안의 풍경들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이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갑자기 말짱해진 본래의 너로 돌아와 그의 복무 기간이 이제 일년 남짓 남았다고, 제대하면 그 역시 일본으로 와서 함께 살 거라고 아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제 가야겠어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때에도, 잘 다녀와. 선물 잊지 말고, 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참동안을 연구실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너의 뒷모습이 교정의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고도 오래오래, 사라진 너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미 돌아왔을 거면서도 너는 그 여름이 끝나도록 소식을 전하지 않았고 나는 휴가시즌이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며 지냈다. 밤이면 실내의 전등과 에어컨을 모두 끄고 창가에 앉아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습한 바람이 아늑하게 불어오던 여름밤의 불꽃축제는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여름 내내 이어졌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너는 그렇게 달라져서 다시 내게로 온 것이었다.

―그가 많이 좋아하겠군.

―네, 그랬겠지요.

―그런데… 그러면 학교는? 공부는 계속해야 하잖아. 그는 알고 있는 건가?

―아니요, 알리지 않았어요. 겨울 휴가 때면 배가 불러 올 거고, 그러면 이 부른 배를 안고 그의 부대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 ….

―말하진 못했지만 이젠 그도 알 거예요.

―어떻게? 그러고 보니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군. 왜?

―죽었어요.

커피메이커의 물이 끓어올라 촤르르 촤르르 커피가 내려지고 있었다. 모카 특유의 진한 향이 주위를 온통 잠식하고 있었다.

―아니, 죽었대요. 지난 10월에… 부대에서… 자살했대요.

갑자기 틀어 놓은 스토브와 커피메이커, 그리고 이 방에 낯선 또 한 사람의 훈기로 유리창엔 하얀 김이 서려 있었다. 손으로 동그랗게 창을 닦아 밖을 내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하얀 눈이 폴폴 흩날리고 있었다.

네가 그 사실을 안 것은 그의 시신이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 부대 근처 강물에 뿌려지고 난 뒤였다. 부대 친구라는 사람에게서 이제 연락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거듭 미안하다고만 하는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너는 믿을 수가 없었다. 착한 사람이었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네가 모르는 어떤 고통이 있었다 해도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네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다. 무언가 다른 것인 듯 싶었다. 달려가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무엇을 확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너는 그냥 살았다.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밤이면 스넥바에서 일을 하고 끊임없이 아기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지난 여름에 한국에서 구입해 들어온 왕복 비행기표의 유효기간이 다가오면서, 그를 만나러 가기로 했던 날이 다가오면서 너는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정말로 없을까봐…. 그게 너무 무서워요.

양팔로 가슴을 감싸 안고 우는 너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너는 그날 밤 내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아주 오래 울다 잠이 들었다. 나는 긴 소파에 누워 밤새 뒤척였다. 자면서도 흐느끼고 또 흐느끼면서도 잠을 자는 너를 바라보며 우선은 너를 설득해야 한다는 꽤 현실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 설득의 말들로 일단은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지금 너에게는 공부 이 외의 미래는 없다, 뭐 그런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나는 늘 그렇게 공부를 강요했던 나의 부모님을 떠올렸고 그 어린 시절의 우리 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조선인 아이들이 일본인 학교를 다녔지만 우리 마을 아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마을의 부모들이 한결같이 너무나도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조선인이고 일본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우리 마을 조선인들은 특히나 더 그랬다. 내가 소학교를 들어갈 무렵인 60년대 초반에는 민단에서 설립한 한국인 학교도 없었다. 역시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은 민단에 거의 아무런 지원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라가 부자가 된 지금도 학원시설의 수효와 지원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나라가 부자가 되고 보니 일본의 한국인들 역시 이미 부자들이 되어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지만 그들은 잊고 있는 것 같다.

너처럼 이렇게 공부만 하기에는 너무 가난한 한국인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그에 비해 조선은 일찍부터 조총련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고 가난한 2세들을 위해 민족학교를 세웠다. 지금은 조선의 지원이 끊겨 무척이나 비싼 학비를 내야 하고 거꾸로 이쪽에서 그쪽으로 부족한 물자를 모아 보내야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 민족학교에서는 학비는 물론 먹을 것과 입을 것까지 제공해 주었다. 부모님은 나를 그런 조선인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일본인 학교에 갔을 경우, 가난을 이유로 다른 교포들보다도 더 많이 당하게 될 여러 불합리한 제약과 이지메를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광복 전에 나라가 하나일 때 건너간 그들은 한국이든 조선이든 특별한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사람이 아닌 이상 거기가 어디에서 세운 학교이건 그런 것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조선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특별히 공부를 강요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의사가 되든지 변호사가 되든지 취직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가라 했다. 그 길만이 살길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단 너를 산부인과에 데리고 가기로 했다. 오랫동안 정기 검진을 받지 못한 너의 몸이 우선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전 내내 이어졌던 여러 가지 검사의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였다. 너도 아기도 너무 많이 지쳐 있었다. 네가 아기를 무사히 낳기 위해서는 푹 쉬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담당의는 말했다. 너는 병원 문을 나서면서도 배 안의 아기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꼬옥 쥐고 있었다.

병원 주차장의 자동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맸다. 네가 한 손에 그 사진을 쥔 채로 달그락거리며 안전벨트의 이음새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서 그 고리를 받아 걸어주어야만 했다. 왼쪽 손으로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며 아기니? 하고 내가 물었고 너는 싱긋 웃으며 네. 여기래요, 하며 한 곳을 가리켰다. 사진의 형태가 희미했기 때문에 그것을 내 손에 들고 가까이 들여다봐야 했다. 거기에는 정말로 사람의 형상 같은 부연 형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두 주먹을 꼬옥 쥐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은 이쪽을 향해 있는 듯, 조금 웃고 있는 듯도 보였다. 어쩌면 이 아기는 사진을 찍기 직전 누구나 그러하듯 치즈, 하고 발음을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아주 잠깐 하고 말았다.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손에 쥔 채로 천천히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그 사진을 너에게 건넸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무얼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너는 아주 매운 아구찜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너를 옆에 태우고 한국음식점이 밀집해 있는 우에노 거리로 자동차를 몰아가면서도, 너무 매워 눈물에 콧물까지 훌쩍이며 아구찜을 나누어 먹으면서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커피 대신 따뜻한 핫초코를 만들어 주면서도, 다시 내 침대에서 잠든 너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내내, 어쩌면 나도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네가 일어나면 우선 풍성한 원피스를 사러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하루에 한 갑씩 피워대던 흡연량을 반 이상 줄였고, 저녁이면 창가에 앉아 마시던 서너 캔의 맥주를 향기 좋은 와인 한 잔으로 바꾸었고, 작은 원룸에 음식 냄새가 배는 것이 싫어 늘 밖에서 해결했던 식사를 가끔은 집에서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이 지쳐 있던 아기는 결국 그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아니 너의 몸을 떠났다. 고무풍선처럼 부풀어만 가는 너의 몸 안에서 이미 너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며 자라가는 아기를 유도분만식으로 낙태시켜야만 했는데, 너는 끝까지 한국으로 돌아가서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조금은 화가 나는 기분이기도 했지만 너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이유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영혼은 바다를 건널 수가 없대요. 아기가 여기서 죽으면 아기의 영혼은 여기 이 낯선 섬나라를 떠돌게 될 거예요. 아기를 아빠에게 보내주고 올게요.

한국엘 다니러 가는 스넥바의 친구와 함께 갈 거라고 했다. 그녀의 집에서 머물 거고 그녀가 돌봐줄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네가 나를 위로했다. 나리타공항에서 너와 네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서 오는 길에 바다로 가는 길로 자동차를 돌렸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영혼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네 말을 생각했고, 저 먼 하늘 어딘가를 날고 있을 너와 너의 아기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미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미의 아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미가 찾아왔던 날 밤도 눈이 참 많이 내렸었다. 창밖에서 철민아, 철민아… 하고 부르던 사미의 목소리. 사미는 교복인 까만 치마저고리 위에 솜을 넣어 두툼하게 누빈 일본식 덧옷을 입고 있었다. 차림은 학교에서 봤을 때의 차림 그대로인데 가방은 들고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그냥 아무 일도 없다고 했다. 그럼 이 시간에 웬일이냐고 물어도 그냥 보고 싶어 왔다고만 했다. 사미는 그날 밤, 하얗게 얼어붙은 들판의 어둠 속에서 얇은 천으로 된 운동화 발로 발밑의 얼음 눈만을 후벼 파다 그렇게 돌아갔다. 가방은 다음날 학교에서, 당 간부의 아들인 학생회장의 꼬붕들이 들고 왔다. 사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미가 뱃속에 아기를 품고 목을 맨 것은 그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다행히 사미와 아기의 목숨은 구했지만 그녀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북조선으로 보내졌다는 말도 있었고, 아주 멀리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는 말도 있었다. 이미 비어있는 사미의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새우고, 역시 같은 마을에 살았던 회장의 꼬붕을 찾아갔다. 그리고 눈밭에서 죽도록 패주었다. 하지만 그 아인 자기의 아기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회장의 아기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은 늘 차갑기만 했던 사미에게 화가 나 있던 회장이 약에 취해 그 일을 사주했지만 사미는 원래 회장의 애인이었다고 했다. 회장과의 그런 관계는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니었고 그때마다 회장은 얼마간의 돈을 주었었다고도 했다. 사미가 사라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올망졸망 귀여웠던 사미의 동생들이 떠올랐다. 녀석을 패주던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패전을 하고 미군이 주둔 중일 때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 더러는 가족들을 위해 그 미군들에게 남 몰래 자신의 몸뚱이를 내어주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 한 세대가 바뀌고 나라도 많이 부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미군들과 자는 여자들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여전히 계속되는 개인의 가난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대부분이 철저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모두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며 끊임없이 투쟁하는 어린 공산주의자들과 히피 흉내를 내며 오토바이로 도로를 질주하고 마약을 하며 프리섹스를 즐기는 어린 자본주의자들이 서로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사미가 사라지고 반 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일본인 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부모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귀화도 해버렸다. 덕분에 더 많은 시간과 땀을 아르바이트하는 데에 써야 했지만, 나를 옭아매고 있던 어떤 끈을 끊어버린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패전과 더불어 한국인에게 일괄적으로 부여했던 조선적에서 국교가 없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 학교에 입학하면서 자동적으로 관념의 북조선적이 되었고, 거기에서 다시 일본적으로 옮기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일본인이 되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이 섬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지문 날인을 하러 가지 않아도 좋았고, 외국인 등록증 없이 거리를 활보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김일성 만세를 외치며 혁명 강령 같은 것을 외우고 자본주의 국가 안에 살면서 공산주의를 배우는 모순 속에서 갈등하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어머니 말씀처럼 열심히 공부만 했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시절에도 도서관과 신칸센 건설 현장을 오가며 공부와 일만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현실의 법과는 무관하게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또 다른 나라가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민족 반역자로, 한국인에게는 적대국인 조총련 출신의 귀화인으로, 일본인에게는 여전히 자국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인식되는, 어디에도 섞일 수 없는 제 4국인이 있었다.



―어때? 몸은?

―괜찮아요. 아주 좋아요. 그런데요, 여기 한국의 산부인과 병실은 온돌이에요. 그 방에 누워 있다가 수술실로 옮겨졌다가 다시 또 거기서 링거를 맞고 미역국을 먹고 했는데요, 정말 따뜻했어요. 링거를 다 맞고도 세 시간이나 더 자고 나왔다니까요. 친구도 옆에 쪼그리고 누워서 같이 잤어요.”

전화를 걸기 전에도, 또 걸면서도 나는 네가 흐느끼면 어쩌나 내내 걱정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들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있다 해도 그것은 너무나도 상투적인 위로의 말일 뿐이었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그런 말들을 주절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네가 먼저 괜찮아요, 라고 말하며 마치 고향집에 다니러 간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씩씩한 네가 고마웠다.

나는 그날 밤 집에 있던 코냑 한 병을 다 비우고 잤다.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어떤 내용인지는 기억하기 어려운 어지러운 꿈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네가 있었고, 사미가 있었고, 네가 사미가 되고, 사미가 또 네가 되었다. 정말로 꿈을 꾼 것인지 가수면 상태에서 갖은 상념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이미지들을 본 것인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너는 아기를 담아 불룩했던 배가 홀쭉해졌다는 것 외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것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나 역시 그렇게 보고 느끼기로 했던 것 같다. 네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듯 나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면 다시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고 식사는 여전히 밖에서만 해결한다는 것 정도였고 그것은 네가 내게 오기 전부터의 습관이었으므로 달라졌다고 말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의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끔씩 한 밤중에 자다가 깨어 내게로 와서 내 침대에서야 다시 잠이 드는 너를 위해 작은 등 하나를 켜 두다가, 나 혼자 있을 때에도 그것을 끄지 않은 채로 잠이 들게 된 것 정도였다. 너에게도 그것은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었을 것이다. 가끔씩 밤이면 자다가 깨어나는 일, 한 번 깨면 다시 잠들지 못하는 일, 그리고 또 가끔은 꿈속으로 찾아드는 낯선 영혼들 때문에 가위 눌려 잠들기를 겁내며 항상 작은 불을 켠 채로 잠을 자고,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밤에는 그 슬픔과 공포에 눌려 아직도 그 꿈속을 헤매 듯 울며 내게로 전화하던 일. 그 낯선 영혼들은 언제나 네가 잠들기 직전 어떤 신호들을 보낸다고 했다. 아주 조금씩 잠의 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그보다 조금 늦게 잠드는 다른 한쪽의 의식이 느끼기 시작하면 침대에 눕힌 몸이 비정상적으로 가라앉으며 조금씩 굳어온다고 했다. 아, 또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다시 몸을 움직여 잠들지 않으려고 해 보지만 이미 몸은 굳어 있고, 이미 방문 앞에서, 머리맡에서, 때로는 창가에서 그 낯선 영혼의 그림자들이 일렁이고 이내 거의 얼굴 윤곽까지 선명해진 그들이 너를 바라본다고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굉장히 슬픈 표정으로 서거나 앉아 잠들어 누워 있는 너를 바라본다고 했다.

―밤이면 밤마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영혼들이 찾아오는데…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난 아무것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들은 왜 나를 찾아오는 걸까요. 하지만 정작 그는 오지 않아요. 영혼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데, 그래서 그 사람은 나를 만나러 오지 못 하나 봐요.

너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 너를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어깨까지 꼭꼭 여며주고 나서 환기를 위해 창문을 조금 열어 놓은 채로 한 개비의 담배를 피우고 다시 창문을 닫고 소파에 모로 누워 또 오래 너를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새로 겨울이 왔다.

어쩌면 네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던 것은, 아니 정확히 말해 이미 떠나버린 너를 만난 것은 학회 세미나가 열린 후쿠시마 현의 작은 온천마을에서 이틀을 머물고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거기다 눈이 많이 내리고 지진이 발생해서 기차도 드문드문 끊긴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벽에 전화를 걸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금 그리로 갈게요. 어떻게 가야 해요? 라고 묻는 너를 나는 말릴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니?

―아니요.

―그럼? 또 꿈을 꾸었니?

―네. 꿈을 꾸었어요.

―오늘 돌아갈 거야. 12시쯤 여기 일정이 끝나니까, 눈길이 미끄럽다고 해도 오늘 밤 안으로는 도착할 거야.

―함께 차를 타고 오면 돼요. 차로 오는 길은 더 멀다면서요.

―오기 힘들 텐데… 여긴 깊은 산속이야. 신칸센도 안 다니고, 오늘은 기차도 드문드문 끊겼다고 하던데. 오다가 발이 묶일 수도 있어.

―어떻게 가면 돼요?

너는 정말로 왔다. 굽이굽이 눈길을 헤치고 기차를 세 번씩이나 갈아타고 왔다. 하얗게 눈에 묻힌 플랫폼으로 기차가 들어오고, 거기서 내린 네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개찰구 밖에서도 보이던 작은 역사에서부터 우리는 다시 자동차로 12시간을 달려 동경으로 되돌아왔다. 되돌아오는 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을 상기시켰다.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환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설국에서 출발하였으니 터널로 들어가기 전에도, 터널을 빠져나오고 나서도 온통 눈이었다. 길 양쪽으로 치워놓은 눈으로 작은 계곡을 이룬 길. 눈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서있는 하얀 나무들. 굽이굽이 계곡마다 쌓인 눈 더미 사이로 거기 먼 곳에 은빛으로 묻힌 집들의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올랐다.

너는 차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고 쭈그리고 앉아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세운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어 괴고 손으로는 차창 쪽으로 한껏 기울어진 머리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가끔 머리카락 사이에 묻은 손의 위치를 바꾸어 손등으로 턱을 괴고 무릎을 움직여 조금씩 고쳐 앉을 뿐 너의 움직임은 아주 작았다. 어느새 짧은 산 속의 겨울 해가 지고 짙은 어둠으로 은빛 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너는 그렇게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하니?

―아기.

―아기?

―네… 내 아기.

너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무심하게 말을 이어갔다.

―분만대기실에 있을 때요. 너무 아팠어요. 아, 하면서 친구가 짧은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뒤로 주저앉았어요. 그리고 빠르게 병실을 나가는 거예요. 간호원이 들어오고 역시 당황해 하며 황급히 나가고 또 의사가 들어오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에게도 느껴졌는 걸요. 어떤 물체가 걸려 있는 느낌. 나중에 그 친구가 술에 취해 말해줬어요. 나무젓가락처럼 가느다란 다리가 먼저 나왔었대요. 이미 형태는 다 갖추어졌고 가는 핏줄들이 말갛게 비치는 붉은 나무젓가락….

저쪽으로 고개를 한껏 기울여 더 가냘프게 도드라진 목선의 서늘함이 아름다웠지만 너는 이미 비어 있었다. 본래의 너는 저 눈 속에 묻어버린 듯 서늘하게 빈 모습으로 껍데기만이 함초롬히 앉아 있었다. 파리하게 무표정한 얼굴에 흔들리지 않는 시선은 여전히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는 듯, 그 어둠 너머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듯. 그때 이미 육신을 버린 너의 영혼은 어느 낯선 곳을 헤매고 있었던 걸까. 저 설국의 어딘가에서, 아니면 더 먼 예전에 지나간 고장의 어느 곳에서, 너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던 걸까. 나는 어디로 가야 다시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걸까. 너의 아기가 몸속에서 태동을 알릴 때 지났던 어느 길가 숲, 혹은 네가 바다를 건너오기 전 매일 지나다녔을 골목길 어느 모퉁이, 새벽을 가르며 달리는 낡은 버스 안,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언 몸을 녹이며 새벽 미명을 바라보았을 도서관의 복도 끝 창가, 혹은 부대 앞 작은 여관방.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그곳에 남겨진 너의 영혼을 따뜻하게 안아 데려올 수 있었던 걸까. 서늘하게 앉아 그 빈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던 너였지만 그 모습 그대로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리고 시간이 너를 채워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게 곁에 있던 나도, 덧없이 흐르던 시간도 너를 채우지 못하고, 그날의 예감대로 너는 내게로 걸어 들어왔던 모습 그대로 다시 걸어 나갔다.



다녀올게요, 너는 가볍게 인사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몇 걸음 뒤에 남겨진 나를 돌아보며 싱긋, 맑게 웃어 보였다. 네가 그와 네 아기를 만나러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기를 보냈던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그들 곁으로 가버렸다는 것은 너를 배웅하고 돌아오고 나흘이 지난 뒤, 너의 그 스넥바 친구가 전화로 알려 주어서야 알았다. 한밤이었고 봄은 너무 멀리 있었다. 나도 너처럼 그냥 살았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네가 내 방에 남기고 간 칫솔이며 양말이며 볼펜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살았다. 가끔 한밤에 깨어 자기 전에 켜 둔 작은 등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렇게 깨어난 밤이면 오래 방안을 서성이기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창에 서리는 뿌연 김을 바라보며 추운 겨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생각을 했고 빨리 여름이 되어 창을 열고 여름 내내 이어지는 불꽃놀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 겨울은 매년 계속되었던 것이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었다.

공항에서 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길가의 작은 사당을 서너 개쯤 지나쳤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문득, 기억해 냈다. 만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조상신이나 마을의 수호신 등을 모셔두는 그 사당은 어느 마을에나 한 두 개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이 나라에는 유난히 떠도는 영혼들이 많다고 어릴 때 어머니가 말했었다. 어머니는 지난 전쟁 때문이라고도 했고 예로부터 무사 중심의 나라에서 비명횡사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도 했었다. 그리고 돌아갈 고향을 두고 남의 나라, 남의 흙에 묻힌 수많은 우리 조선의 영혼들이 그렇게 떠도는 것이라고도 했다. 어쩌면 영혼은 바다를 건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너의 말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훗날 내가 죽으면 내 영혼 역시 이 섬나라를 떠돌게 될까. 그러나 나는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자랐다. 나는 한번도 이 섬나라 밖으로는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떠돌지 않을 것이다. 내 아이가 없다 해도 이 땅에 있는 다른 아이들이 나를 모셔 줄 것이고 나는 어느 마을, 심지어는 도시의 한복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 사당 안에서 편안히 쉬게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인지 너는 한번도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꿈결로나마 한번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너는 지금 행복한지 모르겠다. 네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너의 나라에서… 그런 너를, 나는 죽어서도 만나러 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가끔은 쓸쓸해지기도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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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게재 일자 2006/12/29

출처 :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글쓴이 : 최명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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