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달
생전 그가 좋아하던 목련이었다. 저녁 가느다란 바람 속에서 하얗게 빛나던 그것은
뿌리 끝에서 몸통을 타고 올라온 음계가, 떨면서 입을 열고 심연의 침묵을 나무 끝에 매달아 흔드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남양주 봉인사의 지장전에 잠들어 있다.
그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
창원행 고속버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려 안간힘 쓰던 햇빛의 언어들,
말하려 해도 침묵의 움푹 파인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이내 흐느낌이 되던 생각들,
입 다문 그대로, 또 다른 심연에서 어둠 껍질을 벗기며 하얗게 떨리는 음계로 피어나고 있었다.
이름 부르면 조금 느리게 돌아보던 몸짓, 출판사 일 마치고 부천행 급행전철을 타러 종종걸음 치던 뒷모습처럼 생생하게
오늘도 어스름 저녁을 흔드는
흰 목련.
마음 끝에 울컥, 솟구쳐 걸리는 흰 달처럼
생전 별 말 하지 않고 말하던 그가 불쑥 요렇게 찾아와 말 걸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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