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활화산
나지막한 현무암 돌담길 같았던 사람, 큰 눈에
제주 바다 푸른빛 담고 있던 사람,
내심(內心) 깊어 묵묵했으나 손이 따뜻했던 그가
중문의 베릿내 해안에 흰 꽃 피웠다. 한 줌 뼛가루로 피운 흰 바람꽃, 그런 꽃 피운다고 누가 좋아하나? 묻기도 전에, 기어이,
물의 집이고 삶의 ‘물집’이던 고향 바다와 하나 되었다.
그는 시의 활화산이었다.
제주 오름을 사랑하고, 제주 문화와 역사를 뜨겁게 꽃피우고 싶어 하던 사람,
관광단지 된 조그마한 바다 마을 베릿내, 옛날 그 숨비소리를 끝끝내 품은 숨비기꽃 때문이었을까?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를 지키려 애쓰던 그가
제주 칸나의 시뻘건 꽃잎같이 터져 솟구치던 시만 남겨놓고, 풍문도 없이
바다의 화엄이 되었다. 예순,
아직 몇 구비나 남아 있는, 걸어가야 할 길을 제주 바다, 그 경계 없는 푸른빛 속으로 끌고 가 버렸다.
전율에는 거짓이 없다던, 아아
제주의 시인 정군칠!
날개 없이 날 수 있다던 달의 난간, 그 아슬한 송악산 절벽의
꽃이 된 시인, 기어이 벼랑 기어올라 영영 지지 않는 바다의 화엄이 되고만 시인,
그러고 보니, 이별이라는 말, 참 칼끝 같다.
형님, 평안이 가세요. 마지막 인사에도 묵묵부답, 그저 파도에 씻겨갈 뿐이어서 더 막막한 그리움.
그래. 그 바다에는 이승과 저승, 경계 없으니 이별도 없다.
7월 폭염 아래, 더 시퍼렇게 일어서는 우리들 그리움만 남겨놓고.
* '물집'은 정군칠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 시 몇 곳에 정군칠 시인의 시 구절을 인용했다. 시의 자연스런 표현을 위해 별도 표시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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