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11. 박두진 시/1. 박두진 시 모음 37편

월정月靜 강대실 2024. 11. 29. 11:23

박두진 시 모음 3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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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 당신에게

박두진

내가 당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속도와 거리는,
당신이 내게로 오시는 거리와 속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내 손에 묻어 있는 이 시대의 붉은 피를 씻을 수 있는 푸른 강물,
그 강물까지 가는 길목 낙엽 위에 앉아 계신,
홀로이신 당신 앞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별에까지 들리고, 달에까지 들리고, 가슴속이 핑핑 도는 혼자만의 울음,
침묵보다 더 깊은 눈물 듣고 계시는,
홀로 만의 당신 앞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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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갈대

박두진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하고
언어는 이슬 방울,
사상은 계절풍,
믿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 흘림,
영원 -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 갈긴 칼에
선혈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다.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하면
갈대는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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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겨울 나무 너

박두진


카랑카랑 강추위

빈 들에 혼자 서서
혼자서 너는 떨고 있다.

몸뚱어리 가지 온통, 오들오들 떨고 있다.

파아랗게 얼은 하늘
서리 엉긴 이마,

마지막 한 잎까지 훌훌 떨린 채
알몸으로 발돋움해
손을 젓고 있다.

영에 얼사 부둥켰던
우리들의 영원,
활활 달턴 뜨거움,

해의 나라 달의 나라별의 나라 모두
불러보는 이름들의
듣고 싶은 음성,

벌에 혼자 너만 서서
울음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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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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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꽃과 항구(港口)

박두진

나무는 철을 따라
가지마다 난만히 꽃을 피워 흩날리고,

인간은 영혼의 뿌리 깊이
눌리면 타오르는 자유의 불꽃을 간직한다.

꽃은 그 뿌리에 근원하여
한 철 바람에 향기로이 나부끼고,

자유는 피와 생명에 뿌리하여
영혼의 밑바닥 꺼지지 않는 근원에서 죽지 않고 탄다.

꽃잎. 꽃잎. 봄 되어 하늘에 구름처럼 일더니,
그 바다―, 꽃그늘에 항구는 졸고 있더니,

자유여! 학살되어 바닷속에 버림받은 자유여!
피안개에 그므는 아름다운 항구여!

그 소녀와 소년들과 젊음 속에 맥 뛰는
불의와 강압과 총칼 앞에 맞서는

살아서 누리려는 자유에의 비원이
죽음. 생명을 짓누르는 공포보다 강하구나.

피는 꽃보다 값지고,
자유에의 불꽃은 죽음보다 강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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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꽃사슴

박두진

꽃이김에 모가지가
난만해져 있었다.

피 뻗혀
서른 울음.

간만에 極光(극광) 하나
피고 있었다.

넋이는 고운
칠색.

金剛(금강)에,
金剛에,

푸른 물이 눈동자를
씻고 있었다.

입 한번 다물으면
영원한 침묵.

두 뿔은 먼
星座(성좌)에 걸어 놓고,

네 굽,
네 굽,

까만 굽이 山줄기를
뛰고 있었다.

白樺(백화) 하얀
山崍(산내).

방울방울 땅에 젖어
꽃피 淋?(임리) 떨구며,

골골을 못 잊어워
울어예는 사슴.

한밤에,
한밤에,

모가지가 꽃에 척척
이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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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너는

박두진

눈물이 글성대면,
너는 물에 씻긴 흰 달.
달처럼 화안하게
내 앞에 떠서 오고,

마주 오며 웃음지면,
너는 아침 뜰 모란꽃,
모란처럼 활짝 펴
내게로 다가오고,

바닷가에 나가면,
너는 싸포오
푸를 듯이 맑은 눈 퍼져 내린 머리털
알 빛같이 흰 몸이 나를 부르고,
달아나며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푸른 숲을 걸으면,
너는 하얀 깃 비둘기.
구구구 내 가슴에 파고들어 안긴다.
아가처럼 볼을 묻고 구구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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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당신 사랑 앞에

박두진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가락과 심장에 상채기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 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라까 라보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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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도 봉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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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魔法(마법)의 새

박두진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몇 번만 날개 치면 산골짝의 꽃
몇 번만 날개 치면 먼 나라 공주로,

물에서 올라올 땐 푸르디푸른 물의 새
바람에서 빚어질 땐 희디하얀 바람의 새
불에서 일어날 땐 붉디붉은 불의 새로
아침에서 밤 밤에서 꿈에까지
내 영혼의 안과 밖 가슴속 갈피갈피를
포릉대는 새여

어느 때는 여왕으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어느 때는 품에 안겨 소녀로 되어 흐느끼는
돌아설 땐 찬바람
빙벽 속에 화석하며 끼들끼들 운다.

너는 날카로운 부리로
내 심장의 뜨거움을 찍어다가 벌판에 꽃뿌리고
내가 싫어하는 짐승 싫어하는 뱀들의
그것의 코빼기를 발톱으로 덮쳐
뚝뚝 듣는 피를 물고 되돌아올 때도 있다.

너는
홀로 쫓겨 숲에 우는 어린 왕자의 말이다가
밤마다 달빛 섬에 홀로 우는 학이다가
오색 훨훨 무지개 속 구름 속의 천사이다가
돌로 치는 군중 속의 피흐르는 창녀이다가
한번 맡으면 쓰러지는 독한 꽃의 향기이다가 새여.

느닷없이 얼키설키 영혼을 와서 어지럽혀
나도 너를 알 수 없고 너도 나를 알 수 없게
눈으로 서로 보면 눈이
넋으로 서로 보면 넋이
타면서 서로 아파 깊게깊게 앓는,

서로 오래 영혼끼리 꽃으로 서서 우는
서로 찾아 하늘 날며 종일을 울어예는
어쩔까 아 징징대며 젖어오는 울음
아직도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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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묘지송

박두진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수가 빛나리
향그런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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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默示錄(묵시록)

박두진

나의 사랑하는 이의 꿈이어 거기에 있거라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하늘언덕의 노을자락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하늘꽃의 꽃언덕
그 무지개로도 햇볕살로도 바람결로도
이슬방울로도 하늘 푸르름으로도
짜낼 수 없는 깁,
그 맞닿아야 할 가슴과 가슴의 따스함
입술과 입술의 보드라움
눈과 눈의 깊음
살과 살의 향기로움이 내려 엉긴
아, 어디까지 가도 그 멀음 끝이 없고
언제까지 언제까지 가도 그 오램 끝이 없는
너와 나 닿고자 하는 언덕의 사랑이어
이루어지고 싶은 그 꿈의 꼭대기

자리잡고자 하는 사랑의 알칡이어 거기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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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바다가 바라 뵈는 언덕의 풀밭

박두진

벗꽃이 조금씩 제절로 흩날리는
바다가 바라 뵈는 언덕
풀 밭에 잠자는 꽃에 물든 바람이어.
아직은 땅 속에 잠자는 폭풍이어.
그, 비둘기는 깃쭉지, 작은 羊은 목 줄기에서
지금은 죽음,
소년과 아낙네와 젊은이의 피 뿌림의
꽃잎보다 더 고운 따스한 피의 소리.
그 위에 무성하는
풀뿌리 밑의 울음소리. 가늘은 넋의 소리.
간간한 사투리소리.
그 풀 언덕 바다가 바라 뵈는
조금씩 흩날리는 꽃이 흩는 풀밭 속에
지금은 죽음,
손으로 눈을 가린
봄. 햇살.
날아 올라보고 싶은 비둘기여.
뛰엄뛰고 싶은 羊들이어.
살고 싶은 소년이어.
울어보고 싶은 아낙네여.
말 해 보고 싶은 젊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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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박두진

아아 아득히 내 첩첩한 산길 왔더니라. 인기척 끊이
고 새도 짐승도 있지 않은 한낮 그 화안한 골길을 다
만 아득히 나는 머언 생각에 잠기여 왔더이라

백엽 앙상한 사이를 바람에 백엽 같이 불리우며 물
소리에 흰 돌 되어 씻기 우며 나는 총총히 외롬도
잊고 왔더니라


살다가 오래여 삭은 장목들 흰 팔 벌이고 서 있고 풍
운에 깍이어 날선 봉우리 훌훌훌 창천에 흰 구름 날
리며 섰더니라

쏴아 - 한종일내 - 쉬지 않고 부는 물소리 안은 바람
소리 ... 구월 고운 낙엽은 날리여 푸른 담 위에
흐르르르 낙화 같이 지더니라.


어젯밤 잠자던 동해안 어촌 그 검푸른 밤하늘에 나
는 장엄히 뿌리어진 허다한 바다의별드르이 보았느니.

이제 나의 이 오늘밤 산장에도 얼어붙는 바람 속
우러르는 나의 하늘에 별들은 쓸리며 다시 꽃과 같이
난만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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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별 밭에 누워

박두진

바람에 쓸려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일지 서러움일지 분간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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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랑이 나무로 자라

박두진


바다로 돌담을 넘어
장미가 절망한다
이대로 밤이 열리면
떠내려가야 할 끝
그 먼 마지막 언덕에 닿으면
꽃 등을 하나 켜마.

밤별이 총총히 내려
쉬다 날아간
풀 향기 짙게 서린
바닷가 언덕
금빛 그 아침의 노래에
하늘로 귀 쭝기는
자유의 전설이 주렁져 열린 나무 아래
앉아 쉬거라.

사랑이 죽음을
죽음이 사랑을 잠재우는
얼굴은 꿈, 심장은 노래
영혼은 기도록 가득 찬
또 하나 바벨탑을 우리는 쌓자.

파도가 절벽을 향해
깃발로 손짓하고
사랑이 나무로 자라
별마다 은빛 노래를 달 때
그 커다란 나무에 올라
비로소 장미로 지붕 덮는
다시는 우리 무너지지 않을
눈부신 집을 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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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山脈(산맥)을 간다

박두진

얼룽진 산맥들은 짐승들의 등빠디
피를 품듯 치달리어 산등성을 가자.

흐트러진 머리칼은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 빛 잇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

咆哮(포효)는 절규. 포효로는 불을 뿜어,
죽어 잠든 골짝마다 불을 지르자.

가슴을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독을 바른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가슴에는 자라나는 애기해가하나
나긋나긋 새로 크는 애기해가 한 덩이.

미친듯 밀려 오는 먼 바다의
울부짖는 파도들에 귀를 씻으며,

떨어지는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다시 솟을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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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새벽바람에

박두진

칼날 선 서릿발 짙 푸른 새벽,
상기도 휘감긴 어둠은 있어,

하늘을 보며, 별들을 보며,
내여젓는 내여젓는 백화(白樺)의 손길.

저 마다 몸에 지닌 아픈 상처에,
헐덕이는 헐덕이는 산길은 멀어

봉우리엘 올라서면 바다가 보히리라.
찬란히 트이는 아침이사 오리라.

가시밭 돌사닥 찔리는 길에,
골마다 울어예는 굶주린 짐승

서로 잡은 따사한 손이 갈려도,
벗이여! 우린 서로 불르며 가자.

서로 갈려올라 가도 봉우린 하나.
피 흘린 자욱마단 꽃이 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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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한체

박두진

노래해다오. 다시는 부르지 않을 노래로 노래해다오.
단 한번만 부르고 싶은 노래로 노래해다오.
저 밤하늘 높디높은 별들보다 더 아득하게
햇덩어리 펄펄 끓는 햇덩어리보다 더 뜨겁게,
일어서고 주저앉고 뒤집히고 기어오르고
밀고 가고 밀고 오는 바다
파도보다도 더 설레게 노래해다오.
노래해다오. 꽃잎보다 바람결보다 빛살보다 더 가볍게,
이슬방울 눈물방울 수정알보다 더 맑디맑게 노래해다오.
너와 나의 넋과 넋, 살과 살의 하나됨보다 더 울렁거리게,
그렇게보다 더 황홀하게 노래해다오
환희 절정 오싹하게 노래해다오.
영원 영원의 모두, 끝과 시작의 모두, 절정 거기 절정의 절정을 노래해다오.
바닥의 바닥 심연의 심연을 노래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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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박두진

푸른 하늘인들 한 줄기 선혈을 안 흘리랴?
의지의 두 뿔이 분노로 치받을 때

태산인들 딩굴으며 무너지지 않으랴?
전신이 노도처럼 맞받아 부딪칠 때

오늘 한 가락 고삐에 나를 맡겨
어린 소녀의 이끌음에도 순순히 따라 감은

불거진 멍에에 山 같은 짐을 끌고
수렁에 철벅거려 종일을 논 갈음은

네굽 놓아 내달리는 벌판의 자유
찌르는 뿔의 승리를 모르는 바 아니라

오늘은 오오래인 오늘은 다만 참음
언젠가는 다시 벅찰 크낙한 날을 위하여

눈 스르르 감고 새김질하는 꿈 한나절
먼 조상 포효하던 산악을 명상하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절렁대는 요령에
대지 먼 외줄기길 千里를 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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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시인 공화국

박두진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한
어쩌면
아무래도 이 세상엔 잘못 온 것 같은
외따로운 학처럼 외따로운 사슴처럼
시인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실로
사자처럼 방만하고 양처럼 겸허한
커다란 걸 마음하며 적은 것에 주저하고
이글이글
분화처럼 끓으면서 호수처럼 잠잠한
서슬이 시퍼렇게 서리어린 비수,
비수처럼 차면서도 꽃잎처럼 보드라운
우뢰를 간직하며 풀잎처럼 때로 떠는,
시인은 그러면서
오롯하고 당당한
미를 잡은 사제처럼 미의 구도자,
사랑과 아름다움 자유와 평화와의
영원한 성취에의 타오르는 갈모자,
그것들을 위해서 눈물로 흐느끼는
그것들을 위해서 피와 땀을 짜내는
또 그것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패배하고 추방되어 가는
아 현실 일체의 구속에서
날아나며 날아나며 자유하고자 하는
시인은
영원한 한 부족의 아나키스트들이다.


가난하나 다정하고
외로우나 자랑에 찬
시인들이 모인 나란 시의 공화국
아 달처럼 동그란
공화국의 시인들은 녹색 모잘 쓰자.
초록빛에 빨간 꼭지
시인들이 모여 쓰는 시인들의 모자에는
새털처럼 아름다운 빨간 꼭질 달자.
그리고 , 또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얼마든지 휘날리면 하늘이 와 펄럭이는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그렇다 비둘기,.......
너도 나도 가슴에선 하얀 비둘기
푸륵 푸륵 가슴에선 비둘기를 날리자.
꾸륵 , 구 , 구 , 구 , 꾸륵!
너도 나도 어깨 위엔 비둘기를 앉히자.
힘있게 따뜻하게,
어깨들을 겯고 가면 풍겨오는 꽃바람결,

우리들이 부른 노랜 스러지지 않는다.
시인들의 공화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눈물과 외로움과 사랑으로 얽혀진
희생과 기도와 동경으로 갈리어진
시인들의 나라는 따뜻하고 밝다.

시인이자 농부가 농사를 한다.
시인이자 건축가가 건축을 한다.
시인이자 직조공이 직조를 한다.
시인이자 공업가가 공업을 맡고,
시인이자 원정, 시인이자 목축가, 시인이자 어부들이,
고기 잡고 마소 치고, 꽃도 심고, 길도 닦고,
시인이자 음악가, 시인이자 화가들이,
조각가들이,
시인들이 모여 사는 시의 나라 살림을,
무엇이고 서로 맡고 서로 도와 한다.

시인들과 같이 사는,
시인들의 아가씨는 눈이 맑은 아가씨,
시인들의 아가씨도 시인이 된다.
시인들의 손자들도 시인이 된다.
아, 아름답고 부지런한
대대로의 자손들은
공화국의 시민,
시인들의 공화국은 멸망하지 않는다.

눈물과 고독, 쓰라림과 아픔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아는,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억누름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착취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도둑질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횡령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증수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미워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시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위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배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아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모가 없다.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피흘림과 살인,
시인들의 나라에는 학살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강제수용소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공포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집없는 아이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굶주림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헐벗음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거짓말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란이 없다.
그리하여 아, 절대의 평화, 절대의 평등,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사랑.
사랑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이웃들을 받드는,
시인들의 나라는 시인들의 비원
오랜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어쩌면,
이 세상엘 시인들은 잘 못내려 온 것일까?
어디나 이 세상은 시의 나라가 아니다.
아무데도 이 땅위엔 시인들의 나라일 곳이 없다.
눈물과 고독과 쓰라림과 아픔,
사랑과 번민과 기다림과 기도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아는,
시인들의 이룩하는 시인 공화국,
이 땅위는 어디나 시인들의 나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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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버지

박두진

철죽 꽃이 필 때면,
철죽 꽃이 화안하게 피어 날 때면,
더욱 못견디게
아버지가 생각난다.

칠순이 넘으셔도 老松처럼 정정하여,
철죽꽃이 피는 철에 철죽 꽃을 보시려,
아들을 앞세우고
冠岳山,
서슬진 돌 바위를 올라 가셔서,
철죽 나물 캐어다가
뜰 앞에 심으시고
철죽 꽃이 피는 것을 즐기셨기에,
철죽 나물 캐어 드신
흰 수염 아버지가
어제같이 산탈길을 걸어 내려오시기에,

철죽 꽃이 피는 때면,
철죽 꽃과 아버지가
한꺼번에 어린다.

물에 젖은 둥근 달
달이 솟아오르면,
흰옷을 입으셨던
아버지가 그립다.
달 있는 川邊길을
늦게 돌아오노라면
두진이냐 ?
저만치서 커다랗게 불러 주시던
하얗게 입으셨던 어릴 때의 아버지

四月은 가신 달,
아아, 철죽 꽃도 흰 달도
솟아 있는데,
손수 캐다 심어 놓신
철죽 꽃은 피는데,

어디 가셨나
큰기침을 하시며,
흰옷을 입으시고
어디 가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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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어서 너는 오너라

박두진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 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례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설운 가락도 너는 못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여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나던,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어서, 철이야, 너는 늴 늴 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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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오도(午禱)

박두진

백(百) 천만(千萬) 만만(萬萬) 억(億)겹
찬란한 빛살이 어깨에 내립니다.

자꾸 더 나의 위에
압도(壓倒)하여 주십시요.

이리도 새도 없고,
나무도 꽃도 없고,
쨍 쨍, 영겁(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광야(曠野)에
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
온 심혼(心魂), 전(全) 영(靈)이
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
너무도 당신은 가차이 오십니다.

눈물이 더욱 더 맑게 하여 주십시요.
땀방울이 더욱 더 진하게 해 주십시요.
핏방울이 더욱도 곱게 하여 주십시요.

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
피 흘린 상처(傷處)마다 만져 주시고,
기진한 숨을 다시
불어 넣어 주시는,

당신은 나의 힘.
당신은 나의 주(主).
당신은 나의 생명(生命)
당신은 나의 모두……

스스로 버리려는
벌레 같은 이,
나 하나 끓은 것을 아셨습니까.
뙤약볕에 기진(氣盡)한
나 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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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저 고독

박두진

당신을 언제나 우러러 뵈옵지만
당신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음성에 접하지만
당신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에 계셨다가
너무너무 어떤 때는 가까이에 계십니다.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고 할 때
나는 나를 더욱 알 수 없고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하실 때
비로소 조금은 나를 압니다.
이 세상 모두가 참으로 당신의 것
당신이 계실 때만 비로소 뜻이 있고
내가 나일 때는 뜻이 없음은
당신이 당신이신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서만 나를 찾고
나에게서 당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당신 때문에 사실은 울고
나 때문에 당신이 우시는 것을 압니다.
천지에 나만 남아 나 혼자임을 알 때
그때 나는 나의 나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도 나는 나를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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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절벽가(絶壁歌)

박두진

절벽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별들이네.
별들이 아니라 서서 우는 절벽들이네.

별들이 별들 위에
절벽이 절벽 위에 있네.

절벽이 절벽 아래에도 있네.
절벽이 절벽 앞에, 절벽 뒤에,
절벽이 절벽 안에도 있네

절벽은 절벽끼리 손을 서로 닿지 않네.
절벽은 절벽끼리 말을 서로 할 수 없네.

절벽이 절벽끼리 눈을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귀를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입을 서로 막네.

절벽들의 햇불을 절벽들이 못 보네.
절벽들의 절규를 절벽들이 못 듣네.

절벽은 스스로
사랑의 뜨거움을 말하지 않네.
절벽은 그 외로움
절벽은 그 분노
절벽은 그 내일에의 절망을 말하지 않네.

절벽의 가슴속엔 쏟아지는 별의 사태,
절벽들의 가슴속엔 피와 꿈의 비바람,
절벽들의 가슴속엔 펄펄 꽃이 지네.

어디에나 홀로 서서 절벽들이 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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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精(정)

박두진

그때 처음 열리던 하늘의 응결된
푸른 정기 처음 숲의 초록 바람
처음 바다 처음 강의 파도 소리 여울 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태양의 금빛 촉감
처음 타오르던 지열
처음 만발한 꽃들의 향기,
처음 울음 울던 맹수들의 포효
처음 지저귀던 새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헤엄치던 물고기의 비늘무늬
처음 걸리던 하늘의 무지개
처음 밤의 별빛 달빛, 그때
처음 사람들의 입맞춤의 첫대임
첫번째 황홀의 울음 울던 부끄러움
처음 타오르던 노을빛 네게서 어린다.

그때 처음 사람들의 첫 낱말
처음의 오해 처음의 노여움
처음 사람의 첫 증오 피흘림
처음 만나는 죽음의 두려움과 서러움
네게서 보인다.

너는 지금 나의 창가 오월
바람이 뜰의 그 신록의 잎새 사이 먼
천산 산맥의 청청한 햇살에 젖어
불어와 서성대는 책상에
그러나 의젓이 그러나 잠잠하게 볕살 속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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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天台山 上臺(천태산 상대)

박두진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랗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하도 홀로 어느 날에 심심하시어
하늘 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내 당신 홀로
노니시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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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청산도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 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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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칠월의 편지

박두진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사자(獅子) 새끼 냄새가 난다.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장미(薔薇)꽃 냄새가 난다.

그 태양을 쟁반만큼씩
목에다 따다가 걸고 싶다.
그 수레에 초원(草原)을 달리며
심장(心臟)을 싱싱히 그슬리고 싶다.

그리고 바람,
바다가 밀며 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 빛 냄새의
바람에 펄럭이는 절규

칠월(七月)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波面)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海岸線)의
조국(祖國)의 포옹(抱擁).

칠월(七月)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祝祭) 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 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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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토루소

박두진

지금은 멀디멀은
볕살의 나라에서 온 아가씨여
나의 앞에서 너는
자꾸만 날개돋쳐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고
그만큼의 공간에서 나는
나혼자 할 수 없이
땅으로 땅으로 가라앉네

너의 예쁘디예쁜
영혼의 날개의
화사한 무지개에 매달리는
내 영혼의 둘레 가의
알 수 없는 이 슬픔

그 볕살의 나라
볕살의 궁전에서 내려온
곱디고운 영혼의 너의 뜨거움
꿈의 뜨거움
숨결의 그 뜨거움의
순수 인력은

견디다 못해서 전율하는
나의 열기
영혼의 날갯짓의 절망 속의 황홀로
마지막 부딪치는
돌격 앞에서도

너는 그 너의 영혼
몸뚱어리 예쁜 가슴 옹송그리며
멀디먼 볕살 속의
볕살의 나라
무지개 속 훨훨 숨어
달아나버리네

지금은 나의 앞에
말도 없이 있는
그러면 언제일까 언제쯤일까
아가씨여

그 별이 되어 꽃이 되어
이슬이 되어 폭발하는
폭발하는 너와 나의
영원한 순수
하나로의 영원은 언제 쯤을까
아가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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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푸른 하늘 아래

박두진

내게로 오너라.
어서 너는 내게로 오너라.
불이 났다.
그리운 집들이 타고,
푸른 동산, 난만한 꽃밭이 타고,
이웃들은, 이웃들은, 다 쫓기어 울며 울며 흩어졌다.
아무도 없다.
이리들이 으르댄다.
양떼가 무찔린다.
이리들이 으르대며, 이리가 이리로 더뷸어 싸운다.
살점들을 물어 뗀다.
피가 흐른다.
서로 죽이며 자꾸 서로 죽는다.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싸우다가,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멸하리라.
처참한 밤이다.
그러나 하늘엔 별
별들이 남아 있다.
날마다 아직은 해도 돋는다.
어서 오너라.……
황폐한 땅을 새로 파 이루고,
너는 나와 씨앗을 뿌리자.
다시 푸른 산을 이루자.
붉은 꽃밭을 이루자.
정정한 푸른 장생목도 심그고,
한철 났다 스러지는 일년초도 심그자.
잣나무, 오얏, 복숭아도 심그고, 들장미, 석죽, 산국화도 심그자,
싹이 나서 자라면, 이어, 붉은 꽃들이 피리니……
새로 푸른 동산에 금빛 새가 날아오고,
붉은 꽃밭에 나비 꿀벌떼가 날아 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섧게 흩어졌던 이웃들이 돌아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푸른 하늘, 푸른 하늘 아래 난만한 꽃밭에서,
꽃밭에서, 너는, 나와, 마주, 춤을 추며 즐기자.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자.
울며 즐기자.……
어서 오너라.……
☆★☆★☆★☆★☆★☆★☆★☆★☆★☆★☆★☆★
《33》
피닉스

박두진

햇볕에 반짝이는 먼지
바닷가 자잘한 모래알속에서도,
아직은 숨어있는 흙 속의
풀뿌리
골짜기에 딩구는 희디하얀 백골 속에서도
일어날 것이라 한다.

언제나 불안한 저들의 눈동자
피묻은 옷자락
저절로 떨리는
머리카락 속에서도,

더럽게 엉기는 저들의 피톨
썩은 양심

죄의 손
거짓과 횡포와 살인을 기만하는
혓바닥 속에서도,

따습고 맑디맑고 혁혁한 눈의 영원
불멸의 의의 부리
관용의 앞가슴
사랑의 뜨건 심장
죽일수록 살아나는 푸른 자유로
날개여,

어디나의 바람
어디나의 암흑
어디나의 죽음에서 푸득푸득 날개쳐
영원 다시 불멸의 넋
일어날 것이라 한다.
☆★☆★☆★☆★☆★☆★☆★☆★☆★☆★☆★☆★
《34》
하늘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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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항아리

박두진

길어 내리는, 길어 내리는,
하늘 가득 먼 푸름 항아리배여.
입술 갓을 빨고 가는
따스한 햇볕,
알맞은 보픈 배의
자랑스러움이어.
오랜 날 타 내려온 그리움에 익은
가슴 닿는 꽃익임의 향그러운 젖 흐름
아, 아기 낳자. 아기 낳자.
하늘 배임이어.
길어 안은 하늘 속의
햇덩어리여.
☆★☆★☆★☆★☆★☆★☆★☆★☆★☆★☆★☆★
《36》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빛이 싫여 달빛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빛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뉘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휠훨휠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위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37》
향현(香峴)

박두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어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깔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사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즉 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리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
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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