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 시모음]
새
점 하나를 공중에 찍어놓았다 점자라도 박듯 꾸욱
눌러놓았다
날갯짓도 없이
한동안
꿈적도 않는
새
비가 몰려오는가 머언 북쪽하늘에서 진눈개비
소식이라도 있는가
깃털을 흔들고 가는 바람을 읽고 구름을 읽는
골똘한 저,
한 점
속으로 온 하늘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범일동 블루스
1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고 산다. 애 패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 소리가
기묘한 실내악을 이루며 새어나오기도 한다. 헝겊 하나로 간신히 중요한 데만 대충 가리
고 있는 사람 같다. 샷시문과 샷시문을 잇대어 난 골목길.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내수공
업과 들여놓지 못한 세간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간밤의 이불들이 걸어나와 이를 잡듯 눅
눅한 습기를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지난밤의 한숨과 근심까지를 끄집어내 까실까실하게
말려주고 있다.
2
간혹 구질구질한 방안을 정원으로 알고 꽃이 피면 골목길에 퍼뜩 내다놓을 줄도 안다.
삶이 막다른 골목길 아닌 적이 어디 있었던가, 자랑삼아 화분을 내다놓고 이웃사촌한 햇
살과 바람을 불러오기도 한다. 입심 좋은 그 햇살과 바람, 집집마다 소문을 퍼뜨리며 돌
아다니느라 시끌벅적한 꽃향, 꽃향이 내는 골목길.
3
코가 깨지고 뒤축이 닳을 대로 닳아서 돌아오는 신발들, 비좁은 집에 들지 못하고 밖에
서 노독을 푼다. 그 신발만 세어봐도 어느 집에 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어느 집에
자고가는 손님이 들었고, 그 집 아들은 또 어디에서 쑥스런 잠을 청하고 있는지 빤히 알
아맞힐 수 있다. 비라도 내리면 자다가도 신발을 들이느라 샷시문 여는 소리가 줄줄이 이
어진다. 자다 깬 집들은 낮은 처마 아래 빗발을 치고 숨소리를 낮춘 채 부시럭부시럭거린
다. 그 은근한 소리, 빗소리가 눈치껏 가려주고 간다.
4
마당 한 평 현관 하나 없이 맨몸으로 길을 만든 집들. 그 집들 부끄러울까봐 유난히 좁
다란 골목길.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았으니, 여기서 벽은 누구나 쉽게 열고 닫을 수가 있
다 할까,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다. 다만 한바탕 울고 난 뒤엔 다시 힘이 솟듯, 상다리 성
치 않은 밥상 위엔 뜨건 된장국이 오를 것이고, 새새끼들처럼 종알대는 아이들의 노래소
리 또한 끊임없이 장단을 맞춰 흘러나올 것이다. 젖꼭지처럼 붉게 튀어나온 너의 집 초인
종 벨을 누르러 가는 나의 시간도 변함없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질 것이다.
아버지와 느티나무
아버지의 스무살은 흑백사진,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무슨 노랜가를
부르고 있는지 기타를 품고, 사진 밖의 어느 먼곳을 바
라보고 있는지 젖은 눈으로, 어느 누군가가 언제라도
말없이 기대어올 것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와 함께 있다 나무는 지
친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기 위하여 그렇게 기울어
간 것이나 아닌지, 쓰러질 듯 기울어 가면서도 기울어가
는 둥치를 끌어당기느라 뿌리를 잔뜩 긴장하고 서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 사람들 등의 굴곡에 가장 알맞는 모습으로 기울어
가기 위하여 한평생을 고단하게 쓰러져갔을 나무, 풍성
한 머릿결을 바람에 비다듬고 내가 알 수 없는 노래에
수만의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 구겨지고 구겨진 흑백 속
에서도 그 노래 빳빳하게 살아 있다
언젠가 구겨진 선처럼 내 몸에도 깊은 주름이 패이
면, 돌아갈 수 있을까 저 생생한 한 그루 아래로, 돌아
가서 당신을 쏙 빼닮았다는 등허리를 아름드리 둥치에
지그시 기대어볼수가 있을까
처음 나무는 낯선 나를 의아해하겠지만, 한줌의 뼈를
품고 지쳐서 돌아온 나를 알아보지 못해 어리둥절해하
겠지만, 구겨진 생의 실핏줄마다 새순 같은 초록물이
번지고 몸의 박동음과 물관을 타고 오르는 은지느러미
미끄러운 물소리가 다시 눈부시게 만나는 한때
나무는 이내 알게 될 것이다, 약간 굽은 내 등의 굴
곡을 통해, 무너져가는 가계를 떠맡은 채 일찌감치 그
의 곁을 떠나간 청년 하나를, 그가 꾸다 만 꿈과 슬픔
까지를
어쩌면 흑백의 저 푸른 느티나무 아래서 부를 노래
하나를 장만하기 위하여 나의 남은 생은 온전히 바쳐져
도 좋을는지 모른다 사진 안에 미쳐 들어오지 못한 어
느 먼 곳을 향하여 아버지의 스무살처럼 속절없이 나는
또 그 어느 먼곳을 글썽하게 바라보아야 하겠지만
한줌의 뼈를 뿌려주기 위해, 좀더 멀리 보내주기 위
해, 제 몸에 돋은 이파리를 쳐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주
는 한 그루, 바람을 몰고 잠든 가지들을 깨우며 생살 돋
듯 살아나는 노래의 그늘 아래서
방어진 해녀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 멍기 있나, 멍기 - )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래진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
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마터면 실성한 여잔가 했더니
파도소리 그저 심드렁
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
그 사투리 저 혼자 자맥질 하다 잠잠해진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불쑥 솟구쳐올랐다
하아, 하아 - 파도를 끌고
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 나오는 해녀,
내 놀란 눈엔 글쎄 물 속에서 방금 나온 그 해녀
실팍한 엉덩이며 볼록한 가슴이 갓 따올린
멍게로 보이더니
아니 멍기로만 보이더니
한잔 술에 미친 척 나도 문득 즉석에서
멍기 있나, 멍기 - 수평선 너머를 향해
가슴에 멍이 든 이름 하나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다
버드나무 강변에서의 악수
버드나무 아래 아이들이 도마뱀을 쫓는다
모래톱에 꼬리만 댕강 잘라놓고
버드나무 썩은 둥치 속으로 사라진
도마뱀은 좀체 고개를 내밀지 않고
초등학교 가족 동반 동창횟날
한쪽에선 빌려온 노래방 기계에 술판이 한창인데
악수를 나눌 때면 늘 가슴이 먼저 아려오던 친구가
돌 갓 지난 아기를 보듬고 온다
의자공장 잔업을 하다 그만 변을 당했어
덕분에 4급 장애인 혜택을 다 받게 되었지 뭐냐
만나고 헤어질 때면, 잡아줄 수 없고
흔들어줄 수 없는 손가락 셋을 흔들며 쓸쓸히 멀어져가던 친구
나는 친구가 제 손 대신 내민
아기의 손가락 다섯을 두 손에 감싸쥔다
그러는 나를 친구는 봄햇살보다 더 환하게 바라보고
버드나무 둥치 속으로 사라진 도마뱀 꼬리처럼
내 딱딱하게 굳은 손아귀 속에 들어와 꼼지락거리는 마디마디
지친 아이들이 잘려나간 도마뱀 꼬리를
모래흙 속에 묻어주고 있는 게 보인다
모래톱날에 드문드문 잘려나간 물줄기는
땅속으로 숨었다가 멀리서 다시 고개를 내밀고
지난 겨울 뭉툭하게 쳐냈던 버드나무
연초록 가지들도 새로 막 흐드러지고 있는 강변
감꽃
1
감꽃 핀다, 어디선가 소식 없는 사람들 편지라도 한 장
날아들 것 같다
사람도 집도 땟국물이 흐르는 기차길 옆 오막살이
기우고 기웠지만 어딘지 정이 헤퍼보이는 철망을 달고
옥수수 한줌 쌀 한줌 가난을 폭죽처럼 터뜨리던
뻥튀기 할아버지, 잠들어 계신 언덕일까
아지랑이 아지랑이 마술의 주문이 오르고
햇빛에 달궈진 선로 끝 아득히 멀리서부터 기적이 울리면
뻥 튀긴 희망에 주린 배를 달래본 적 있니 설사를 하며
속아본 적 있니
속을 줄 알면서도 튀밥이 튀면 허천나게 달려든 적이 있어!
꽃이 튄다, 저만치 떨어져서 귀를 막는다
너를 묻은 땅속 꽃씨 한줌도 성급하게 피어날까
튀밥처럼 뻥 하고 튀어오를까, 귀청이 다 떨어지도록
치밀어오르는 그리움, 아그데 아그데 감나무 굶주린
꽃이 핀다
2
감나무 아래 들어 잠에 들고 싶다
떨어진 풋감처럼 떫디떫은 잠이라도
헤 입 벌린 채 빠져들고 싶다
나무 둥치에 탯줄처럼 줄을 묶어놓고
밭일 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아가 울지 마라, 자꾸 울면 쐐기가 떨어진다
이파리로 다독다독, 자장가를 불러주던
유모(乳母)의 품속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다
헤 벌린 입에 젖을 물려주기 위해
흘러내리는 젖을 입속에 넣어주기 위해
아래로 축 처져 있던 감나무 가지 아래
모기 선(禪)에 빠지다
죽비(竹扉)
열대야다 바람 한 점 들어올 창문도 없이 오후 내내 달궈놓은 옥탑방
허리를 잔뜩 구부러트리는 낮은 천장 아래 속옷이 후줄근하게 젖어
졸다 찰싹, 정신을 차린다 축축 늘어져가는 정신에 얼음송곳처럼 따
끔 침을 놓고 간 모기
불립문자(不立文字)
지난 밤 읽다 만 책장을 펼쳐보니 모기 한 마리 납작하게 눌려 죽어
있다 이 뭣꼬, 후 불어냈지만 책장에 착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체액을 터트려서 활자와 활자 사이에 박혀 있는 모기, 너도
문자에 눈이 멀었더냐 책장이 덮이는 줄도 모르고 용맹정진 문자에
눈 먼 자의 최후를 그렇게 몸소 보여주는 것이냐 책속의 활자들이 이
뭣꼬, 모기 눈을 뜨고 앵앵거린다.
향(香)
꼬리부터 머리까지 무엇이 되고 싶으냐 짙푸른 독을 품고 치잉칭 또
아리튼 몸을 토막토막 아침이면 떨어져 누운 모기와 함께 쓰레받기
속에 재가 되어 쓸려나가는 배암의 허물
은산철벽(銀山鐵壁)
찬바람이 불면서 기력이 다했는가 날쌘 몸놀림이 슬로우모션으로 잔
바람 한 줄에도 휘청거린다 싶더니, 조금 성가시다 싶으면 그 울음소
리 엄지와 집게만을 가지고도 능히 꺼트릴 수 있다 싶더니,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울음소리, 사라진 그쯤에서 잊고 살던 시계 초침 소리
가 들려온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간간
이 앓아 누우신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도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저
많은 소리들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니
폭포
벚꽃이 진다 피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이 절벽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버린 자들, 가지마다 층층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안에서 바깥으로 화르르
자신을 무너뜨리는 나무,
자신을 무너뜨린 뒤에야
절벽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떨어져내리는
저 소리 없는 폭포
벚꽃나무 아래 들어
귀가 얼얼하도록 매를 맞는다
폭포수 아래 득음을 꿈꾸던 옛 가객처럼
머리를 짜개버릴 듯 쏟아져내리는
꽃의 낙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술통
부숴버린 술통조각을 무쇠난로 통속에 던져준다
안주일절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 청산옥
과묵했던 마개를 딸 때면 팡 하고 들려오던 탄성과
찰, 찰, 찰, 거침없이 흘러나와 감겨들던
순금의 혀는 다 어디로 갔는지
한평생 술이 익어가던 배는 그를 끌어안고 산
사내들의 위장처럼 속이 헐고 구멍이 났다
복수라도 찬 듯 발효되지 못한 시간의 쉰 냄새만을 풍기고 있다
노을빛으로 물들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내들의 가슴과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면서
그가 가진 향기와 빛깔을 남김없이 내어주며 늙어가던 술통
난로 속에서 남은 힘을 다해 타오른다
뼛속까지 스며 있는 알코올 기운이 아직 남아 있다는 듯
불콰하게 되살아나는 불, 술통조각을 던져줄 때마다
취해서 휘청휘청 일렁이는 불, 빛이 늙고 지친
여자의 맨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여주고 있는 한때
호랑이 발자국
가령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해마다 눈이 내리면 호랑이 발자국과
모양새가 똑같은 신발에 장갑을 끼고
폭설이 내린 강원도 산간지대 어디를
엉금엉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눈 그친 눈길을 얼마쯤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눈이 내리는 곳 그쯤에서 행적을 감춘
사람인 것도 같고 사람 아닌 것도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래서
남한에서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들갑을 떨며 사람들이 몰려가고
호랑이 발자국 기사가 점점이 찍힌
일간지가 가정마다 배달되고
금강산에서 왔을까, 아니 백두산일 거야
호사가들의 입에 곶감처럼 오르내리면서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민 차리면 된다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복고품 유행처럼 번져간다고 치자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증명할 수 없어서
과연 영험한 짐승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게로군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고 치자 눈과 함께 왔다
눈과 함께 사라지는, 가령
호랑이 발자국 같은 그런 사람이
돌종
돌 쪼는 소리 쩡쩡
여름 한낮 나른한 대기를 흔든다
뭘 만드느냐 물으니
석수장이, 돌종을 만든단다
큰절 부방장 스님
석종 부도를 만든단다
그러고 보니 돌은 반쯤 종신 모양을 하고 있다
저 돌종이 다 완성되면
종은 이제 다시는 울지 못하는
버버리 종이 되겠구나
그래, 버버리 종으로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석수장이 내려치는 정끝에서
저렇게 얼얼하게 아파 실컷 울고 있는 모양이구나
울음 뚝 그친 돌 속으로 들어가서
어떤 중이 돌종이 될는지
엉덩이 묵직한 돌중으로 깊디깊은 참선에 빠져들는지
돌은 벌써 반쯤 문 딱 걸어 잠근
침묵이다 챙 챙
불꽃 튀기는 침묵으로
남은 울음을 마저 쪼아내고 있다
* 손택수 시집 '호랑이 발자국' (창작과비평사)
옻닭
1
그늘만 스쳐도 살갗에 소르르 소름이 돋는다
해마다 한번씩 자신을 스쳐간 폭염과 홍수
팔을 뚝뚝 부러뜨리던 폭설의 기억을 비벼 꼬아
제 속을 치잉칭 결박하는 나무
속을 쥐여짜 잎잎이 푸르디푸른 신음을 뱉어낸다
허나 독기라면 닭도 지지 않는다
한평생을 옥살이로 보내온 그가 아닌가
톱날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벼슬과 부리,
쇠창살 사이로 모가지만 간신히 빼내어
댕강 참수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
제것이 아닌 몸뚱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가 아닌가
지독에 이른 동물과 식물이
한몸이 되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다
2
독기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나를 무심코 집어삼킨 세상에
우툴두툴한 옻독을 옮기리라
뚝배기 그릇 속에 코를 쥐어박고
아버지와 함께 옻닭을 먹는다
두 편에 오만원 어쩌다 받은 원고료로
삼십년 지게꾼살이 주식으로 삼아온
술담배에 속을 상한 당신
술담배보단 서른이 넘도록 빈둥대는 아들놈 때문에 더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당신
알코올과 니코틴의 독성, 갈수록 짐만 되는 아들놈의
독성
옻이 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목구멍까지 차오른 가려움을 꾸욱 눌러 참는다
독을 우려낸 진국 한 그릇을 뚝닥 비워 삼킨다
지렁이
잠깐 스쳐가는 소낙비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아스팔트가 녹아나는 도로변까지는
나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
너는 어쩔 수 없는 미물이다, 생각하는 순간
지렁이 한 마리 밟지도 않았는데 꿈틀한다
언젠가 불에 데인 흉터처럼, 열이 많은
내 몸을 아스팔트 바닥 삼아 기고 있는 흉터처럼
속살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무리들,
제 안의 남은 수분 속에
한여름의 열기를 다 빨아들일 듯
끝없이 말라비틀어져가는 무리들
한방에선 해열제로 쓴다고 했던가
열 먹고 죽어 열을 푸는 약이 된다고 했던가
이열치열 지극히 뜨거워져서 아픈 몸을 서늘하게 식
히는 것
어디 그것이 한방에서만의 일이겠는가마는
마디마디 몸을 지지며 염천을 향해 기어간다
회초리자국 같은 붉은 화상자국이 꿈틀꿈틀
내 앞의 길을 쓰라리게 휘감고 있다
꽃그늘
꽃그늘 아래 구덩이가 생겼다. 구덩이 옆에 피어난 벚꽃잎은 고개를 수그린 채 하
나같이 땅을 쳐다보고 있다.
그늘 속에서 산역꾼은 털이 숭숭한 돼지비계에 막걸리를 마신다. 사내의 아내는 오
늘 출산을 한다. 이 땅을 다 파야 미역줄기 고깃근이라도 사갈 수가 있다.
꽃이 어지럽게 술잔 속으로,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온다. 꽃을 받아먹으며 파르
르 떠는 술잔, 잘게 저민 살점 같은 꽃을 받아먹으며 허기를 감추고
떡 벌린 아가리를 좀처럼 다물 줄 모르는 구덩이, 깊숙이 다시 삽을 꽂는다. 헛구
역질처럼 한 삽 두 삽 퍼올릴수록 시큰하게 허리를 꺾는, 우두둑 무릎 관절을 꺾는
저 육중한 꽃그늘, 꽃이 거느린 구덩이, 점점이 흩날리는 구멍 속으로 어칠비칠 불
콰한 해가 떨어진다.
오동나무 지팡이
오동나무 짙은 잎그늘이 어리자 담벼락이 일렁인다
담벼락 아래 계단이 딱딱하게 굳은 관절을 꺾었다 펴
며 술렁거린다
저 그늘 속엔 얼마 전까지 노파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해종일 우멍하게 깊은 눈구멍으로
오가는 이들을 무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거동도 없이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그늘 깊숙히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마도 가끔씩 들려오는 마른기침 소리만 아니었다면
아무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노파의 소매 스적이는 소리와 잎그늘
뒤척이는 소리가 한몸이 되어 들려오던 골목길
언젠가 나뭇잎 그늘이 가만히 어깨에 손을 얹어왔을 때
이봐 젊은이, 손을 얹고 알아들을 수 없는 수화를 건
네 왔을 때
나는 어깻죽지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는지 모른다
빛이 감춰둔 늪 속에라도 빠져들듯 더럭 겁을 집어먹
었는지 모른다
녹물을 끼얹은 나뭇잎 하나가 남은 햇살을 그러쥐고
작심한 듯이 뚝 떨어져내릴 무렵
떨어져내린 나뭇잎이 제 그늘과 바짝 붙어서
바쁘게 오가는 발길들에 바삭바삭 부서져내리고 있을
무렵
자리를 뜬 노파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이듬해 밑동에선 어린 가지 하나만이 쑥 올라왔다,
허리 구부정한 나무가 짚은 지팡이였다
외딴 산 등불 하나
저 깊은 산속에 누가 혼자 들었나
밤이면 어김없이 불이 켜진다
불을 켜고 잠들지 못하는 나를
빤히 쳐다 본다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눈을 뜨고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외눈으로
하염없이 글썽이는 산.
그 옆에 가서 가만히 등불 하나를 내걸고
감고 있는 산의 한쪽 눈을 마저 떠주고 싶다
물푸레나무 코뚜레
가지 하나가 휘어져서 땅거죽을 찌르고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예사로만 보아오던 조무래기 새떼며
눈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꽃을 탐하느라 고집스레 가지를 끌어내리던
어스럭송아지하며
원을 그리며 흐르는 차디찬 물소리, 환한 달이 떴다
소를 잡고 난 뒤에 집안에 코뚜레를 걸어두면
복이 들어온다 했던가 한평생
소를 몰던 할아버진 땅속으로 돌아가고
이랴, 이랴 땅의 콧김을 받아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뭇가지
휘묻이한 몸을 코뚜레 삼고, 한쪽 끝을
놓칠까봐 팽팽하게 조바심하고 있다
청도의 봄 혹은 소싸움
봄은
몸 위에
두 개의 뿔이 돋은 소다
머리를 맞대고 퉁방울눈을 부라리며
황토빛 잔등에서 아지랑이 더운 김이 스멀거리도록
뾰족하게 깎은 뿔을 부딪힐 때마다 나는 마찰음이
챙, 챙, 불똥을 튀긴다
봄은 쟁기로 겨우내 굳은 땅거죽을 갈아엎듯,
제 살거죽을 찌르며 뚫고 나오는 아픔
아픔으로 살진 몸 위에
돋아난 두 개의 뿔들을 휘두른다
씩씩거리는 소울음 소리를 내며
모래판을 마구 헤집고 다닌다
* 손택수 시집 '호랑이 발자국' 에서
은행나무 사리알
아랫배에 끙 힘을 주고 밀어낸 열매들이 온 천지를 잘 익은 된장 냄새 황금빛으로 물들여준다 동
제가 있을 때면 한 상 걸게 차려놓고 밥을 먹던 은행나무 고목
사리알이 별것이간디, 언젠가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본 滿空 스님 바리때도 저 은행나무 재목
이었다 포개진 그릇마다 은행나무 가지 사이에나 들어와 있을 법한 만공이 가득 차 있었다
스님도 한 그루 은행나무로 살다 간 것이 아닐까 아픔 몸 속에 들어와 입적한 목숨들을 품고 잘
익은 똥내음, 사리알 맺는 일에 한 평생 보내고 간 것이 아닐까
은행나무 더부룩한 아랫배가 다 개운하다는 듯 가볍게 몸을 흔든다 앗따 뭘 퍼먹었길래 이렇게
독한고, 똥 푸러 온 인부처럼 코를 쥐고 마을 사람들이 푸지게 퍼질러 놓은 알들을 줍는다
(현대시학 2002년 9월호)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 1998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
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
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
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
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어부림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휜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린다
木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앆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꿰어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든다.
외할머니의 숟가락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홍어
어느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
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나는 고기가 한점 먹고 싶고
김치 한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어머니 뱃속에 있던 열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추석달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보이로 어서옵쇼, 손님들 구
두닦이로 밥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
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 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던지, 상
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 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
느껴 울던 추석달
소가죽북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어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디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 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 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 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 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일이다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가시 끝에 탱글탱글 빗방울이 열렸다
나무는 빗방울 속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햇살과 구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새울음 소리까지를
고동 속처럼 알뜰히 빼어 먹는다
가시 끝에 맺힌 빗방울들,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다
살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린는 상처를 머금고 사는 일이다
입술을 윽 깨물고 상처 속으로 들어가 한몸이 되는
일이다
열매들은 모두 빗방울을 닮아 둥그래질 것이다
빗방울의 아픔을 궁글려 탱탱한 탱자알이 될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내 어둔 이마 위로
빗방울 하나가 고동껍질처럼 떼구루루 떨어져내렸다
연꽃 에밀레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집
알껍질은 뜯어먹는다 방금 나온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나오자마자 놀라운
식욕으로, 그동안 나를 품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품어주마, 뛰쳐나온
집을 하나도 빠짐없이 오물오물 뜯어먹는다
애벌레의 몸속으로 통째로 들어간 집, 애벌레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곰실곰
실 기어다니다가 더듬이를 쭉 내밀어보고, 양 날개를 활짝 펴보는 집, 알집
속에 수많은 새끼집을 짓고 눈을 감으리라 그렇게 집이 나의 양식이 되고,
나는 집의 처소가 되어 살다 가리라
무얼 잘못 먹었는지 생똥을 싸고 자꾸 헛구역질을 한다 녹화해둔 「환경
스페셜」비디오 테이프도 다 돌라가고 차디찬 꽃무늬 장판바닥에 누워 나
비잠을 청해보는 하루, 어쩐지 벗어논 허물처럼 집이 헐렁하다
소금쟁이의 연애
바람 한 점 없는데 못물 위에 파문이 번지는 건
소금쟁이 때문이다 소금쟁이의 순전한 연애 때문이다
가만 보면 암컷인지 수컷인지 바람기 농한 소금쟁이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짝에게 무슨 신호를 보낸다
제 미미한 몸을 상하 좌우로 흔들어 고요한 수면을 깨우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파문이 스르르 번져가서
좀체로 곁을 두려 하지 않는 짝의 발바닥을 간지른다
간지름을 참지 못하고 푸르르 떠는 건너편의 소금쟁이
가장 미세한 떨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하게 가늘어진 다리, 파문에 감전된
다리의 떨림도 답신처럼 넌지시, 보기에 따라서는 수줍게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연못을 건너간다
소금쟁이 한 쌍의 은근한 수작 때문에
잠시도 잠들지 못하고 술렁이는 연못.
시골버스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러대는 시골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투덜투덜 한참을 지나쳤다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올린 포플러나무와 내가
어쩌면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지장(指章)
도서관 책을 읽다 보니 누르스름한 지문이 보인다
체액과 손에 묻은 먼지를 인주밥 삼아 찍어놓은 지장
아들놈이 하는 짓을 늘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의 지문을
언젠가 내 글이 실린 잡지에서 본 적이 있다
어린날 개학 전날 밤까지 보여드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 펼쳐본 통지표,
시원찮은 통지표에 어느새 찍혀 있던
당신의 도장 앞에서처럼
나는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던 것인지, 지문이
연못물처럼 찰랑이며 번져가는 책장을 들여다본다
희미해져가는 파문을 지켜내느라고, 책장 속의 느낌표 하나가
땀방울처럼 뚝 떨어졌다
튀어오른 것 같다!
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으로 나락드락 불
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화살나무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덤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버려진 집 속에 거울조각이 있다
집을 버리면서, 거울을
두고 오는 건 차마 못할 짓이다
버려진 제 모습을 쳐다볼 수 없어
먼지를 풀썩이며 조용히 미쳐가는
집의 거울을 보라
집은 제 얼굴에 화장을 하는 대신
거울에 화장을 한다
거울에 파우더 분가루 같은
먼지를 덕지덕지 처발라
망가져가는 제 얼굴을 흐릿하게 뭉개어본다
그렇게 남은 날을 견뎌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형벌이다
폐가는 금이 가거나, 깨어진
거울조각을 품고 있다
낡은 자전거가 있는 바다
외갓집 소금창고 구석진 자리에 낡은 자전거 한대가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슬었지만, 수리하면 쓸 만하겠는걸. 아마도 나는 길 닿는 곳
이면 어디든지 쌩쌩 미끄러져 다녔을 은륜의 눈부신 전성기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논둑길 밭둑길로 새참을 나르고 포플러 푸른 방둑길 따라 바다에
이르던 시절, 그는 아마도 내 이모들의 풋풋한 젊은 날을 빠짐없이 지켜보
았으리라. 읍내 영화관 앞에서 빵집 앞에서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
다, 아카시아 향기 어지러운 방둑길로 푸르릉 푸르릉 바큇살마다 파도를
끼고 굴러다니기도 했을, 어쩌면 그는 열아홉 꽃된 처녀아이를 태우고 두
근두근 내 아버지가 될 청년을 만나러 가기도 했으리라. 바다가 보이는 풀
밭에 누워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썰물져가는 하모니카 소리에 하염없이
젖어들기도 하였으리라. 그때 풀밭과 바다는 잘 구분이 되질 않아, 멀리서
보면 그는 마치 바다에 누워 즐겨 꿈에 젖는 행복한 몽상가로 보이지 않았
을까. 첫사랑처럼 한 번 익히고 나면 여간해선 잘 잊혀지질 않는 자전거, 손
잡이 위의 거울 먼지를 닦아본다. 거울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나를 품고 있
었다는 눈치다. 턱없이 높은 앉을깨 위에서 페달이 발에 잘 닿지 않는다고
툭하면 투정을 부리던 철부지 아이를, 맥빠진 앞바퀴 뒷바퀴 타이어에 바
람 빵빵 밤 늦도록 소금자루 같은 달을 태우고 비틀대던 방둑길을.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들려오지 않으면 이제는 왠지 허전해진다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럇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갈기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무거운 몸에 리듬을 실어주는 소리
곡비
눈이 많이 내린 한겨울이면 새들에게 모이를 줘서 아들 내외에게 자주 잔
소리를 듣던 함평쌀집 할머니
세상 버리던 날 새들은 오지 않았다 밥 달라고, 밥 달라고,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양철문을 바지런히 쪼아대던 새들
등쌀에 이놈의 장사도 집어치워야겠다, 그 아드님 허구헌 날 술만 푸고 있
더니
쌀집 앞 평상마루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려준다 장지의 소나무 위에
서 울던 새울음 소리가 어째 영 낯설지만은 않더라고
울 어매가 주는 마지막 모이를 받으러 왔나 싶어 고수레 고수레 한상 걸게
차려주었더니, 구성진 곡비 소리 해종일 끊이질 않더라고
*손택수 孫宅洙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과를 졸업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부산작가상, 현대시동인상 수상
제22회 신동엽창작상 수상
시집 [호랑이 발자국] (창작과비평사, 2003)
출처 : 산으로의 망명
글쓴이 : 은산 원글보기
메모 :
'손택수' 프로필
이름 :
출생 :
1970년 출신지 :
전라남도 담양 직업 :
시인 학력 :
경남대학교 데뷔 :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당선 경력 :
이지북 기획실 실장 자음과 모음 기획실 실장 수상 :
2007년 제14회 이수문학상 시부문 2005년 제2회 육사시문학상 신인상 대표작 :
목련전차, 호랑이 발자국,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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