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허형만시 모음

월정月靜 강대실 2008. 4. 14. 13:52

순천만
             

새떼들 솟아오르고
갈대 눕는다

대대포구로 떨어지는 해
뻘 속을 파고드는데

묻지마라
쓸쓸한 저녁의 속내를

만월 일어서고
별 하나 진다


안 개

밤새 머물지 못한 영혼들이 있었으리

그래 새벽은 안개를 낳고
떠다니는 영혼, 그 중에서도
상처받은 영혼들을 감싸주고 있으리

개미 한 마리

개미
한 마리
또박또박 간다
(기어가는 건지
걸어가는 건지)

영하 수십도의
안데스 설원
한 마리
개미
또박또박 간다
(눈 속에 묻혔다가
다시 헤쳐나왔다가)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설원을
벗어난 개미
한 마리
또박또박 간다
(삶이 아름다운 건지
희망이 목숨인 건지)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아이맥스 영화 「사랑의 날개」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거 리
                
그 사람이 나를 모른다 하니
나 또한 그를 모른다 한다

조금씩 여위어가는 시간의 육신만큼
조금씩 잠도 시들해져가는
이 나이의 마루 끝에 걸터 앉으면
이 빠진 간장종지만한 햇살도
나를 알아 발가락 간지럽히고
삶의 울타리에 내려앉은 쇠찌르레기
쀼-이, 큐, 큐, 쀼이 은근히 나를 돌아보게 하는데

그 사람만은 나를 모른다 하고 돌아서니
나 또한 그를 본 적이 없다 하고 돌아선다


게놈/개놈

-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으로 기능하게 하는 정보는 세포핵에 있는 DNA에 G, A, T, C 등 네 종류의 염기배열의 형태로 수록돼 있다. 이를 사람의 '게놈(유전체)'이라 한다(김대식 교수)

30억개의 염기를 나는 본 적이 없는데
게놈이란 소리만 들으면 '개놈'이라고 들리니
개놈에게도 '게놈'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인간게놈 프로젝트여
이 시대의 유전자에 이상은 없는가
이 땅의 개같은 놈들 유전병을 치료할
인간개놈 프로젝트는 없는가
이 시대의 영혼은 아직
푸르른 남천을 오르지 못하고 있다


살다보면           

무문토기처럼 투박한 안개가 서서히, 느리게, 겹겹으로 에워싼다 통근버스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나아가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차창 가까이 바싹 조여오는 안개의 날렵한 혓바닥 앞에 차 안에 갇힌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살다보면 때로 이렇게 숨결마저 발목잡히는 일이 많다

우리도 차라리 안개가 되든가 안개 속에 녹든가 허공중에 물방울로 증발되든가 우주의 반짝이는 눈물로 굳어지든가 그리하여 마침내 알타이 우코크 고원 베르떽 계곡의 지워지지 않는 안개처럼 우리 모두를 구름 위에 서있게 하든가 살다보면 때로 이렇게 시간마저 발목잡히는 일이 많다.


풀꽃 한 송이
-기도


그대 보고자운 풀꽃 한 송이
오늘도 바람결에 흔들리면서
사랑합니다 그대여 허락하소서

그대 확실한 언약 아닐지라도
오시리라 목이 긴 풀꽃 한 송이
진실한 사랑이란 왜 이리 외로운지
오늘따라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들판으로 밀려오는 은밀한 고요

그대 기다리는 풀꽃 한 송이
오늘도 구름결에 숨어 살면서
그립습니다 그대여 찾아드소서



풍 경


여린 산벚꽃
사이사이
화개동천
그 깊고 서늘한
시간의 물소리



훤해진 자리

출근길 光木 1호선 국도변에 어느날 잡목림이 서서히 잘리워지고 있었다 떡갈나무 아카시아나무 볼품없는 조선소나무까지 언덕배기로 올라갈수록 밑둥만 남고, 며칠이 지났다 밑둥도 뿌리 뽑히고 그렇게 벌목지역이 넓어지면서, 지금까지 도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언덕배기가 갑자기 훤해졌다 그 훤해진 자리로 수많은 초옥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 다시 며칠이 지난 뒤 늦은 귀가길이었다 달도 별도 구름에 가리워 천지분간 어려운 밤 그 언덕배기 집집마다 이승의 어떤 빛보다 더 밝은 등불 하나씩 내걸고, 길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 길 밝히고 있었다 대낮에도 그 자리가 훤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하동포구에서

섬진강 긴 숨소리가
얼마나 깊은지
하동포구에 서보면 안다
가랑비 촉촉히
산 그림자도 푹 삭아버린 날
뱃사공은 보이지 않고
헤오리떼
섬진강 숨결 한 자락씩 끌며
마치 꿈길인 양 날아오른다
비에 젖은 알몸 훤히 드러낸 채로.


寂滅을 위하여

나는 지금 어딘가로 떠난다
나는 지금 어딘가로 떠나서
그 어딘가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서
마침내 나마저도 떠나고자 한다

꽃집에서 한 단의 후레지아를 샀다 허망보다 깊은 색, 짙노란 꽃잎들이 천천히 다가와 나의 얼굴을 부벼댔다 한꺼번에 내뿜는 뜨거운 콧김, 그 아찔함! 최후의 사랑처럼 한 단의 후레지아는 이미 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어딘가에서 돌아오고자 한다
나는 지금 어딘가에서 돌아와
그 어딘가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돌아와
마침내 나마저도 잊고자 한다


속 도

매일 아침 일곱시 반이면 어김없이 출근길에 오르는 光木국도변에는 속도를 측정하는 이동카메라가 숨겨져 있다 햇살 좋은 봄날 금천에서는 벌 나비와 교접하는 배꽃들의 거친 숨소리가 찍히고 남평 오거리에서부터 나주 방면으로 뻥 뚫린 길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맨발로 떼지어 달리는 소나기의 뒷발꿈치도 찍히고 어린 코스모스들이 셋! 넷! 복창하며 갓길로 줄지어 등교하는 학다리쯤에선 달작지근한 안개의 혓바닥도 찍히고

매일 저녁 여섯시면 어김없이 귀가길에 오르는 光木국도변에는 속도를 측정하는 이동카메라가 숨겨져 있다 무안군청 앞을 벗어날 때 가로수 백양나무잎이 톡, 부러지는 순간의 아찔한 전율이 찍히고 고막원역 앞 신호등을 무시하고 날아오르는 회오리바람의 당당한 오만도 찍히고 광주로 들어서는 언덕배기 구석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덜 녹은 눈더미의 오디빛 입술도 찍히고


소 리

허옇게 뼈만 남은
서어나무
골수에 구멍이 뚫려있다
그 구멍에서
까막딱따구리가 쪼다 남은
소리가 들렸다
딱다그르르
아득한 생애를 그리워라도 하듯
서어나무 으스스 몸 떠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이 산 어느 계곡 쯤으로
우레가 흐르는가
딱다글 딱다글
그 작은 구멍들마다
연두빛 잎 틔우는 소리로
가득 술렁였다
서어나무
잠시 생생한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 사라졌다
아니본 듯 떠나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