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
비 나리는 밤이면
어머니는
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
방문 여는 버릇이 있다.
방문을 열면
눈먼 외할머니 소식이
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
육순의 어머니.
공양미 삼백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
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시다?
외가댁에 다녀오신 오늘,
묘하게도 밤비 내리고
방문을 여신 어머니는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젖어
차라리 돌아가시제.
돌아가시제.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위한 헌시
나의 시에서 ‘여성’에 관한 시는 단연 어머니가 많다. 그리곤 겨우 ‘아내’나 ‘누이’, 아님 실크로드 여행 후에 쓴 투루판박물관의 미라 소녀,지리산의 여신 마야고, 그리고 도미의 아내 정도에 불과하다.
실제로 나의 시에서 어머니는 나의 시정신의 모태로 자리한다. 그만큼 지금까지 10권의 시집 속에 거의 한 두편씩은 꼭 자리한다. 왜 그럴까. 이제 와 곰곰히 생각해보면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 곁을 떠나 초등학교부터 객지에서 생활한 것이 결국 군대 제대할 때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지 않았는가 싶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여덟 살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아홉살이 되었을 즈음 광주에서 공무원이셨던 아버님이 집에 오시어 한참 공자왈 맹자왈에 심취해 있던 나를 데리고 광주 서석초등학교에 입학시켜 버렸다. 시골 촌놈이 갑자기 도시에 덜렁 내던져진 셈이 되고 만 것이다. 방학이 되어야 겨우 찾아뵐 수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은 남달랐다.
군대를 제대한 후 나는 곧바로 복학하지 않았다. 물론 정년퇴직금으로 사업에 손대셨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신 아버님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너무나도 오래 떨어져 살았던 어머니와 하루라도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대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2년간 어머니와 함께 흙속에서 흙과 더불어 농사꾼으로 살다가 복학했다.
그동안 나는 어머니에 대하여 여러 심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예컨대 1987년의 시집 『입맞추기』(전예원)에서의 「어머니」는 이렇다.
두 손 꼬옥 잡으시고/ 가난보다 가녀린 힘줄 떠시며/ 맛있게 해먹어라 손수 기른 거다/ 시금치 한 다발/ 늘 깡마른 아들 근심으로/ 뽀빠이처럼 불끈불끈 힘 좀 쓰라고/ 시금치 한 다발/ 비닐봉지 가득 눌러 담으시고/ 이리 주세요 제가 들지요/ 아니다 저까지만 갈란다/ 날도 쌀쌀한데 이제 들어가세요/ 아니다 버스 타는 거 볼란다/ 한 손엔 손잡고/ 또 한 손엔 시금치 한 다발/ 달빛보다 차가운 밤길을/ 육순의 어머니/ 바람으로 흐르신다/ 강물로 흐르신다.
농사를 업으로 알고 오직 흙속에서만 사실 줄 아시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랴. 시금치 한 다발을 받아들고 떠나온 뒤 그 시금치를 먹으며 목이 메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한데 이듬해인 1988년 연작 시집 『供草』(문학세계사)에서의 「어머니」는 당시 시대에 대한 아픈 절규를 육자배기 가락으로 토해냄으로써 ‘시대의 어머니’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내 안에 자리한다.
낼모래가 칠순이신 어머니는/ 폭포처럼 굽은 허리에/ 해와 달을 띄우시고/ 오늘도 개천가 썩은 잡초 꺾어드시네/ 썩은 잡초 꺾고 꺾고/ 뿌리채 뽑아/ 오늘도 닳은 호미로 땅을 파시네/ 그것도 밭뙈기라고 일구셨던 땅에/ 콩 심어 참깨 심어 호박도 심어/ 올해는 자식놈 실히 먹여 살리려시던/ 낼모래가 칠순이신 어머니는/ 올 여름 예상 밖의 폭우에 몽땅 쓸려 보내고/ 시뻘건 진흙더미 쌓인 개천가/ 다시금 신들린 듯 호미질만 하시더니/ 봐라 얘야/ 올해는 하늘도 노하셨는갑다/ 아무리 비바람 몰아쳐도/ 이런 일은 통 없었는디야/ 아마도 올해는 찬서리도 빨를랑갑다.
그후 1995년 나의 어머니는 시집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책 만드는 집)에서 다시 땅의 어머니로 환원하신다. 그때의 시 「오늘도 어머니는」은 이렇다.
오늘도 어머니는/ 땅이 좋아/ 땅에 사신다/ 폭포처럼 굽은 허리/ 땅에 묻으시고/ 콩대로 어우러져/ 고구마 넝쿨로 어우러져/ 땅이 되셨다가/ 어머니, 저 왔어요/ 얼른 알아 듣고 일어서는/ 저 폭포의/ 빛나는 물살/ 마침내 무지개로 걸리는/ 어머니의 땅.
나는 지금까지 내 시 속에 살아 숨쉬는 여성, 어머니의 한 삶의 흔적을 짚어본 셈인데 앞의 「봄비」는 1985년 시집 『모기장을 걷는다』(오상출판사)에 수록되어 있는 시로서 외할머니와 관련된 서사적 이야기를 갖고 있다.(평론가 김현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어떻든 어머니와 함께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외할머니는 다섯 살이 되기 전의 나를 온전히 도맡아 키워내신 분이었다. 그 외할머니가 언젠부터인지 눈이 머셨다. 이 시를 80년대 초 『현대문학』에 발표한 뒤 10여년이 지나 두 아들을 데리고 외갓집을 찾았을 때 눈먼 외할머니는 두 눈 멀쩡할 때와 다름없이 나를 이리저리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의 감회를 1999년 시집 『비 잠시 그친 뒤』(문학과지성사)에 「외할머니」라는 제목으로 수록했다.
올해 아흔 여섯/ 눈먼 외할머니는/ 두 아들의 애비 된 손자의/ 머리부터 얼굴이며/ 손끝까지 이리저리 쓰다듬으시는/ 눈먼 외할머니는/ 횡만아 횡만아/ 니가 그래 정녕 횡만이냐/어디보자 시상에 내 새끼야/ 두 눈 뜨고 두 눈 뜨고/ 니를 볼 수만 있다면/ 아니제, 한 눈이라도 처억 뜨고/ 그래 그래 니를 볼 수만 있다면/ 아이고 내 새끼야/ 내가 니를 어떻게 업어 키웠다고/ 해방되어 일본서 막 나왔을 때/ 내가 니 하날 애지중지/ 하늘도 안 부럽고 땅도 안 부럽고/ 어화둥둥 내 새끼야 키웠는디/ 그래 그래 내가 니 볼라고/ 이리 오래 사는갑다/ 안 죽고 오래오래 사는갑다/ 아흔여섯 굽이굽이/ 눈물 속에 잦아드는/ 눈먼 외할머니는.
그후 외할머니는 앞 못본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하직하셨다. 그때 큰딸이신 어머니의 피눈물을 나는 보았다. 「밤비」를 쓸 때만 해도 눈이 멀어 저리 고생하시느니 “차라리 돌아가시제. 돌아가시제.” 하시던 분이. 나의 어머니는 오늘도 흙과 함께 살아 계신다.◑
출처 : 한국시문학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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