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스크랩] 다시 읽는 문병란의 詩

월정月靜 강대실 2008. 2. 21. 16:10

http://blog.naver.com/mjc5471/130027917669

다시 읽는 문병란의 詩
                                                                - 땅의 戀歌 外


1. 들어 가는 말 


1959~1963년 현대문학지에 茶兄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문병란 시인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화제의 시인이다. 초창기 까다롭기 소문난 김현승 시인의 엄격한 지도와 추천 작품 심사를 거치는 것도 그렇지만 초기의 탁마된 언어표현과 정제된 따뜻하고 맑은 서정시 〈街路樹〉〈밤의 呼吸〉〈꽃밭〉으로 등단한 다음 〈꽃씨〉〈손〉〈鳥籠의 새〉〈祈禱〉등 괄목할 만한 시를 썼던 그가 유신시대에 즈음하여 역사와 시대적 요구를 통감하고「정당성」이라는 급선회 현실참여라는 저항의 열기를 내뿜기 시작하여 그의 시적 변모에 대한 우려와 걱정과 기대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시월유신과 그의 교단생활의 시련기, 거리의 교사 시절을 시작하며〈전라도 뻐꾸기〉의 엘레지와 저항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창비의 청탁으로〈땅의 戀歌〉〈고무신〉〈엉머구리의 合唱〉〈나를 버리고 가신 님〉〈겨울산촌〉〈절교장〉들을 발표하면서 민중시 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한다.
 한편〈직녀에게〉〈북한쌀〉〈박타령〉〈씀바귀의 노래〉등을 쓰면서 5·18민중항쟁을 뛰어넘는 통일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민중저항시인 민족통일시인의 고난과 명예를 한꺼번에 짊어져야 했다.
《정당성》《죽순밭에서》《땅의 戀歌》외 23권의 시집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50년을 격한 지금에도 그의 시는 독자들의 사랑을 맘껏 받고 있고 민주화 열린시대 이후엔 교과서, 참고서, 방송교재 작곡되어 부르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성가는 대단하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시 백과 한국시 소개란에선 그 인기도 대단하여 경쟁의 중심에 서있다. 북한의 원로인 동기춘 시인은 문학인 남북의 만남 자리에서 문명란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전제하고 축사 속에서「동소산의 머슴새」를 즉석 낭독하기도 하였다. 금번 20~30편의 대표작 화제작을 게재하여 다시 읽는 자리를 마련코자 지면을 대폭 할애하였다. 광주에선 그분의 시정신을 기리는 사람들이 소박한 팬클럽인 ‘瑞隱文學會’를 결성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바 필자인 내 자신도 그분과 뜻을 같이하는 영광의 역할을 얻었다. 앞으로 이런 지면을 계속 활용할 생각이며, 독자와 시인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뜻에서 본지 주간으로서 간단한 해설과 소개의 역할을 담당코자 한다.
 瑞隱 문병란 시인과 모던포엠의 만남, 이는 어느면 행운일지 모른다. 직접 작품을 통하여 다리를 놓으면서 그의 불멸의 명시〈직녀에게〉그 싯구 그대로 ‘우리는 만나야 한다’를 시도해 본다.
 독자 제현의 아낌없는 성원과 23권의 시집 속에서 가려낸 20~30편의 시 속에서 그의 체취와 멋 무등산이 낳은 민족시인의 해타에 대하여 음미의 기회를 얻기 바란다. 더불어 모던포엠의 시의 가족사를 다채롭게 발전시키기 위하여 광주의 원로 무등산의 시인을 모던포엠의 고문으로 모셨다는 뉴스도 다시 한번 알리는 바이다. 시사랑 모던포엠의 앞날에 햇살 따스하길 빈다. 대표작을 고르는 데는 어려웠지만 인터넷과 기존의 문예지특집란 그리고 작자의 의견을 물어 뽑았음을 밝힌다. 본격적인 평론보다는 간단한 소개 형식의 시작 노트를 달아 독자들의 감상을 돕고자 한다. 독자 제현의 양해 있으시기 바란다. 뿐만 아니라, 원로 시인의 노작들을 필설에 올려 누가 되더라도 본래 작품이란 독자의 몫이 있고 평론가의 창조적 재료가 되는 터이므로 본인과 의견이 상이하더라도 양해 있으시길 바란다.

2. 대표작 다시 읽기 그 감상과 소개

(1) 꽃 씨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 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午後,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悲哀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 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窓邊에
화려한 어젯날의 對話를 묻는다.

 제1시집 문병란 시집(삼광출판사.1971.7)에 수록된 작품으로 추천시기에 쓴 초기작품이다. 여러 가지 애송시집 한국의 명시집에 수록되어 독자의 애송을 받는 시이다. 작은 한 알의 꽃씨, 그것은 응집된 생명의 표상이자 우주 그 자체이다. 꽃씨가 제목이자 바로 메타포로 함축되어 있다.
 한 알의 작은 꽃씨에 온 우주를 응집시킨 그의 솜씨를 엿볼 수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여백과 여운이 있어 서정시의 운치가 빼어난 작품이다. 낱말 하나하나 엄선하여 다듬어진 시어들은 영롱하여 이미지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천하의 가을이 한 알의 꽃씨 속에 모여 들어 있다’는 표현은 현미경으로나 들여다 볼 수 있는 섬세함이다. 그리고「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진다」는 것은 기교 이상의 심안으로 보는 미시적 이미지이다.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은 자아성숙의 함축이다.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對話를 묻는다」는 것, 그것은 고요한 성찰 속에 충만해 가는 성숙의 해조(諧調)와 관조(觀照)이다.

(2) 街路樹

鄕愁는 끝나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午後의 江邊에서
돌아와 섰다.

생활의 廢墟에 부대끼던 겨울을 벗으면
永點에 서서 기다리는 우리들의 三月一
凍傷의 가지마다
부풀은 地熱에 窓門이 열린다.

허기진 발자국들이 돌아오는 午後의 入口
아무데서나 너의 인사는 반갑고
너와 같이 걷는 이 길은
시진한 孤獨을 나누며 가는 季節의 좁은 길.

빈손 마주 모으고 돌아오는 밤이면
가난을 열지어 흐르는 어둠 속
서러운 까닭은
우리 모두 사랑을 따로이 간직하기 때문이다.

어둠을 呼吸하는 고요론 자리
누리지는 별빛을 머금어
다가오는 三月같은 머언 얼굴들이
쏟고 간 눈물.

너는 보내야 했듯이 또 맞아야 하기에
철따라
새 옷으로 갈아입는 미쁘운 女人.

여기는 季節이 맨발로 걸어 왔다
맨발로 걸어 돌아가는 길목.

가자,
우리 所望의 머언 山頂이 보이면
목이 메이는 午後.
街路에 나서면
너와 같이 나란히 거닐고 자운

너는 正月의 휘앙새, 기대어 서면 너도
나와 같이 고향이 멀다.

 제1시집 문병란 시집에 실려있는 작품으로 1959년 10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제1회 추천 작품이다. 학보병으로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시창작 시간에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군문에 있다가 가정과 학교로 돌아온 그 향수가 모티브가 되어 있으며 빙점에 서서 기다리는 가로수의 3월이 그 귀향만큼이나 절실하고 실감이 난다. 시는 사상과 관념의 정서적 형상화라고 한다. 지성으로 절제된 감상의 농도가 알맞아 온화하면서도 가슴에 스며드는 서정의 촉촉한 윤기가 많아 세월이 갔어도 그대로 호소력을 지닌 가편이 아닌가 한다. 겨울을 벗으면, 허기진 발자국, 시진한 고독, 누리지는 별빛, 미쁘운 여인, 거닐고 자운등 특이한 감각적 표현이나, 가로수에 기탁된 감정이입법의 호소력은 소망의 산정과 5월의 휘앙세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맨발로 걸어왔다 맨발로 걸어 돌아가는 계절은 그 실감으로 말하면 너와같이 나란히 거닐고 자운 바로 그 먼 고향에 대한 고요한 영혼의 속삭임인 것이다. 말의 뜻만 있는 시는 시가 아니다. 말의 맛, 그 끼, 그 체온까지 느낄 때 비로소 시어의 매력에 젖는다.
 이 시는 바로 그러한 마음을 나누며 5월의 가로수 길을 거닐고 싶은 외로움과 그리움에 대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3) 時間

約東의 날개.

어느 날 午後
겨울의 빈 公園 다섯째 層階에서
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저만치 놓인 빈 벤치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고,
出發 十分 前,
어느 역전 부근 二層 茶房
빈 커피盞에 고이고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걷는 어느 鋪道 위
잘 닦인 구두 콧날 끝에 앉아 微笑하다가
더러운 역전 부근 三流旅館 화장실의
까아만 壁面에 落書가 되어 묻혀 있을까.

어느 未完된 書類의 빈 칸에 놓인
셋째 손가락,
셋째 마디에 낀 二頓重
金가락자 속에 묻혀버린 忘却.

오늘은 뜨거운 난로 속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혀가 되어
한줌 그리움의 재를 남기고,

어느 고독했던 頭蓋骨 위에 물고이다.
高山의 벼랑 끝,
금간 바위틈에 피어 있는
꽃.

네가 비워 두고 간 자리엔
離別이 되어 남고
約束時間 五分前에 온 사람
겨울의 窓가에 놓인
빈 花甁의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무형한 관념을 객관적 상관물을 가져다가 유형한 것으로 형상화시킨 수법은 이미지즘의 즉물적 표현이면서 시간 자체가 의인화 되어 있다.
 첫 행에서 시간을 한 마디로 ‘약속의 날개’라고 은유하였다. 겨울의 빈 공원 다섯째 층계에서 가시화 하였고 그(시간)는 역전 부근 이층 다방 커피잔에 고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시간)는 엉뚱하게 역전부근 삼류여관 화장실의 낙서가 되어 묻혀 있기도 한다. 모더니티가 있는 유니크한 표현이다.
 구성상 전부에 이르러 클라이맥스 조성 수법에 의해 시상에 변화를 주면서 미완의 서류 빈칸에 놓인 사무원의 손가락 셋째 마디에 낀 이돈중의 금가락지 속에 묻혀있는 망각. 그 영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겹치는 영상처럼 뜨거운 난로속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혀가 되어 한줌 그리움의 재를 남기고, 마침내 고독했던 두개골 위에 물고이다 그것은 고산의 벼랑 끝 금간 바위틈에 피어 있는 꽃이 되는 것이다. 영화의 스피디한 영상처리 화면같은 장면 전환법은 이미지즘 수법의 능숙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쾌한 이미지의 비약이 경박성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약간 돈강법을 사용하여 안전하게 결구를 끌어내었다. 「네가 비워두고 간 자리엔/ 이별이 되어 남고/ 약속 시간 5분전에 온 사람/ 겨울의 창가에 놓인/ 빈 화병의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60년대 풍으로 보아 꽤 멋을 부린 모던한 시가 아니었던가 한다. 사람들에게 잊혀진 시인 듯하나 작자의 추천에 의하여 금번 집중 조명에 넣게 되었다.

(4) 정당성

때때로 나의 주먹은
때릴 곳을 찾는다.

그 어느 허공이든가
그 어느 바위 모서리이든가
주먹은
때릴 곳을 찾아 고독하다.

뻔뻔한 이마,
오만한 콧날을 향하여
꼭 쥐어진 단단한 주먹.

凝集된 핏덩일 물고
四角의 정글 속에
불꽃을 튀기는

一瞬,
산산히 부서져 가는
그 어느 絶頂에서
나의 주먹은 피를 흘린다.

지금은 싸움이 끝나고
敗北를 어루만지는
고독한 주먹,
그 어느 허공을 향하여
캄캄한 어둠을 겨냥하고 있다.

언젠가는 뜨거운 流血에 젖어
피를 물고 깨어져 갈
슬픈 黙示,
주먹은 정당성을 찾고 있다.

 59~63년 그 사이 대학을 마치고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된 문병란은 수업과 입시지도를 맡으면서 병아리 시인으로서 은사인 김현승 시인의 꾸지람을 들으면서〈기도〉〈화병〉〈꽃씨〉〈나비〉〈조롱의 새〉〈시간〉〈손〉등 세련된 언어 솜씨와 순수한 서정의 정수를 담은 시들을 현대문학지에 계속 발표했다. 그때의 작품들을 모은 시집이 《문병란시집》이었다. 앞에 언급한 3편의 작품 외에도 〈밤의호흡〉이나 〈기도〉〈손〉〈화병〉들은 주목을 끌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 현실은 4·19의 좌절과 함께 군사 쿠데타에 의한 유신정권이 들어섬으로써 편안한 마음으로 인생을 관조하며 서정주의에 안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참여(engagement)라는 새로운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그때의 그 심경을 대변하는 시집이 바로 70년대 초에 간행한 《정당성(세운사 간행.1973.10)》이었다. 〈성삼문의 혀〉〈도둑놈〉〈정당성〉〈장남감이 없는 아이들〉〈사기꾼들〉〈아버지의 귀로〉등이었다.
 ‘正當性(정당성) Justice'법률 용어이기도 한 이 말은 정당성이 없는 변칙적 현실에 대한 저항의지의 표상으로 ‘주먹’을 클로즈업 시켜 권투시합을 연상시키는 착상을 하고 있다. 「때때로 나의 주먹은/ 때릴 곳을 찾는다」첫 구가 당돌하면서도 매우 인상적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한국의 명시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의 첫구절이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김광균 시인의 <추일서정> 첫구이다. 온건한 서정주의적 첫구들이 지닌 시적 도입부에 비하여 ‘때릴 곳을 찾는다’는 표현이나 깡패를 연상시키는 ‘주먹’을 대뜸 제시한다는 것은 이색적인 표현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 주먹이 본격적인 역할이나 제몫을 하기까지는, 다시 말하면 저항의 주체 我와 非我가 확실해지기까지는 상당한 기간 고뇌와 방황이 필요했음을 본인은 여러 군데서 피력한 바 있었다.
「언젠가는 뜨거운 유혈에 젖어/ 피를 물고 깨어져 갈/ 슬픈 黙示/ 주먹은 정당성을 찾고 있다」 끝구절로 보아 아직은 모색에 머물고 있는 현실참여를 향한 과도기적 몸짓으로 여겨진다.

(5) 아버지의 歸路

西天에 노을이 물들면
흔들리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리어키꾼의 거치른 손길 위에도
부드러운 노을이 물들면
하루의 난간에
목마른 입술이 타고 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한 애인이 된다는 것,
무너져 가는 노을 같은 가슴을 안고
그 어느 歸路에 서는
가난한 아버지는 어질기만 하다.

까칠한 주름살에도
부드러운 夕陽의 입김이 어리우고,
上司를 받들던 여윈 손가락 끝에도
십 원짜리 눈깔사탕이 고이 쥐어지는
시간,

가난하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그 아들 딸 앞에 돌아오는
초라한 아버지,
그러나 그 아들 딸 앞에선
그 어느 大統領보다 위대하다!

아부도 아첨도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王國
主流와 非主流
與黨과 野黨도 없이
아들은 아버지의 발가락을 닮았다.

한 줄기 주름살마저
보랏빛 미소로 바뀌는 시간,
수염 까칠한 볼을 하고
그 어느 차창에 흔들리면
시장기처럼 밀려오는 저녁노을!

무너져 가는 가슴을 안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돌아오는
그 어느 아버지의 가슴속엔
시방
따뜻한 핏줄기가 출렁이고 있다.

 2005년도 EBS 방송교재에나 전국 국어교사모임이 간행한 고등학생용 현대시모음집에 보면 필독의 시로 권장하고 있고, 입시 참고서 같은 데서도 부권상실의 현대에서 참된 아버지상을 위한 연구 대상으로 추천되고 있는 시이다.
그의 초기시의 한 특징인 호흡이 긴 장시 스타일에 속한 이 시는 서민적 삶의 애환을 리얼리즘 수법으로 전개하여 약간 지루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압도하는 진실성 때문에 끝까지 밀고가는 장시 스타일의 조사(措辭)가 특징을 이룬다. 그러기에 지루하다고 느끼기보다 그의 시적 진지성에 이끌리게 된다.
 우선 시 도입부에서 가장 평범한 일상의 시내버스 타기에서 시작하되 그 순간 문득 아버지가 된다는 서민상은 가히 평범 속의 비범으로 봐야 할 것이다 「西天에 노을이 물들면/흔들리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일견 매우 비시적인 일상사를 허두로 내세우고 있으나 잘 들여다보면 단 한 마디도 함부로 쓴 말이 아니다. 그가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들은’을 쓰고 있다. 그 아버지는 혼자가 아니라, 버스 칸에 탄 모든 아버지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수많은 가난한 아버지들을 함께 묶은 공동체의식을 담고 있다.
특히 리어커꾼 아버지를 하나의 표상으로 내세워 그의 목마른 입술을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가난한 아버지는 애인이 된다고 전제하고 무너져가는 노을 같은 가슴을 안고 가난한 아버지는 어질기만 하다고 표현한다. 까칠한 주름살, 여윈 손가락, 그러나 십원짜리 눈깔사탕을 사는 아버지, 가난하나 그 깨끗한 손을 가지고 돌아오는 아버지는 굳이 ‘대통령보다 위대하다’고 감탄법을 쓴다. 아마도 이 땅의 대통령들이 많이 어질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교대조법인지 모른다. 그것은 그다음 연에서 ‘주류’니 ‘비주류’니 ‘여당’과 ‘야당’이란 말이 야유로 쓰였고 ‘아들은 아버지의 발가락을 닮았다’는 그 표현도 시니컬한 느낌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무도 당당하고 떳떳하여 거침이 없다. 하필이면 닮은 것이 발가락이냐. 박타령만큼이나 아기자기한 그의 시적 재미는 교훈을 담고 있으면서도 즐겁게 하는 시적 본령에 충실해 있다.

한 줄기 주름살마저
보랏빛 미소로 바뀌는 시간,
수염 까칠한 볼을 하고
그 어느 차창에 흔들리면
시장기처럼 밀려오는 저녁 노을!

무너져 가는 가슴을 안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돌아오는
그 어느 아버지의 가슴속엔
시방
따뜻한 핏줄기가 출렁이고 있다.
- 아버지의 귀로. 7,8연 -

 본인마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이 시, 70년대의 시집속에 묻혀 있는 이 시가 인터넷 시백과에서 수백명이 검색해 가서 〈직녀에게〉를 훨씬 초과한 ‘대중적 인기’를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다시 관심을 갖고 약간 장시인 이 시를 살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그냥 알 수가 있다. 교과서적인 시, 그런 시야말로 자신 있게 우리 아이들에게 권장할 명시가 아닐 것인가.

(6) 땅의 戀歌

나는 땅이다
길게 누워 있는 빈 땅이다
누가 내 가슴을 갈아엎는가?
누가 내 가슴에 말뚝을 박는가?

아픔을 참으며
오늘도 나는 누워 있다.
수많은 손들이 더듬고 파헤치고
내 수줍은 새벽의 나체 위에
가만히 쓰러지는 사람
농부의 때묻은 발바닥이
내 부끄런 가슴에 입을 맞춘다.

멋대로 사랑해버린 나의 육체
황토빛 욕망의 새벽 우으로
수줍은 안개의 잠옷이 내리고
연한 잠 속에서
나의 씨앗은 새 순이 돋힌다.

철철 오줌을 갈기는 소리
곳곳에 새끼줄을 치는 소리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새벽마다 연한 내 가슴에
욕망의 말뚝을 박는다.

상냥하게 비명을 지르는 새벽녘
내 아픔을 밟으며
누가 기침을 하는가,
5천년의 기나긴 오줌을 받아먹고
걸걸한 백성의 눈물을 받아먹고
슬픈 씨앗을 키워온 가슴
누가 내 가슴에다 철조망을 치는가?

나를 사랑해다오, 길게 누워
황토빛 대낮 속으로 잠기는
앙상한 젖가슴 풀어헤치고
아름다운 주인의 손길 기다리는
내 상처받은 묵은 가슴 위에
빛나는 희망의 씨앗을 심어다오!

짚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고무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군화가 짓밟고 간 다음에도
탱크가 으렁으렁 이빨을 갈고 간 다음에도
나는 다시 땅이다 아픈 맨살이다.

철철 갈기는 오줌 소리 밑에서도
온갖 쓰레기 가래침 밑에서도
나는 다시 깨끗한 땅이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아픔이다.

오늘 누가 이땅에 빛깔을 칠하는가?
오늘 누가 이땅에 멋대로 線을 긋는가?
아무리 밟아도 소리하지 않는
갈라지고 때묻은 발바닥 밑에서
한줄기 아픔을 키우는 땅
어진 백성의 똥을 받아 먹고
뚝뚝 떨어지는 진한 피를 받아 먹고
더욱 기름진 역사의 발바닥 밑에서
땅은 뜨겁게 뜨겁게 울고 있다.

 <정당성2>에서 작자 자신은 진정한 민중(노동자나 시민들) 만나기까지는 좀더 기다려야 했다는 말을 다시 상기시켜야 한다. 그가 기다리는 그 시기를 맞이한 시가 바로 유신시대 75년 중반에 창작과 비평에 연이어 발표한 일련의 민중시였다. 그 중에서 단연 웅장한 장강의 운율을 지닌 힘있는 대지적 상상력에 의한 시라 상찬한 것이 <땅의 연가>이다.
70년대 80년대 유신시대 군부독재와 맞서 5·18민중항쟁을 겪으면서 그 고난 속에서瑞隱 문병란의 시는 사실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참여적 저항적 민중시 민족시의 성격을 띤다.
 <땅의 戀歌><정당성>등 호흡이 길고 톤이 강한 민중의 언어로 쓰여진 대지적 생명력에 닿아있는 시였다.
<땅의 戀歌>는 제목 그대로 민중과 국토를 일체화시켜 분단된 국토에 바치는 헌가로서 그 불멸성을 노래한 생동감 넘치는 매우 파워풀(Powerful)한 시이다. 이 시를 표제로 삼은 창비시선으로 간행된 《땅의 戀歌》는 그 앞에 간행된 《죽순밭에서(인학사간 78)》와 함께 군부독재시절에 판금된 바 있다. 이 시는 <고무신>과 함께 《노동시 시선집》에 게재되어 있다.
분단 상황에 의한 전쟁의 참화가 스쳐간 만신창이의 국토, 부동산 투기로 인하여 온갖 놀부시대의 욕망으로 점철된 땅, 외세의 침략으로 짓밟혀 수난을 겪은 땅, 그러나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민중이라고 절규하는 가장 위대한 연가가 이 시가 아닐까.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아 손색이 없지만 소화력이 약한 독자는 압도당하여 현기증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시인의 경우 그의 장점이 곧 단점이 되는 경우를 왕왕히 보게 되는데 바로 이 시도 문병란의 모든 것이면서도 폭포수 같은 대하 장강의 포효는 온건한 서정주의 독자들은 달아날 가능성도 있다 하겠다.

오늘 누가 이 땅에 빛깔을 칠하는가?
오늘 누가 이 땅에 멋대로 선을 긋는가?
아무리 밟아도 소리하지 않는
갈라지고 때 묻은 발바닥 밑에서
한 줄기 아픔을 키우는 땅
어진 백성의 똥을 받아먹고
뚝뚝 떨어지는 진한 피를 받아먹고
더욱 기름진 역사의 발바닥 밑에서
땅은 뜨겁게 뜨겁게 울고 있다.
- 땅의 연가 최종련 -

 장강의 운율과 파도와 같은 톤은 마치 웅장한 관현악이나 교향악의 규모에 비할 수 있다. 바이올린 독주나 소품을 듣는 잔잔한 울림이 아니라 물밀어가는 민중시대의 통일 여망이 합창으로 울려 퍼지는 교성곡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적 수난이 휩쓸고 간 이 땅위에 그 수난에 맞설만한 이 대지의 연가가 창작되었다는 그것만으로도 이 시대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고 남을 것이다.

(7) 고무신

어느 노동자의 발바닥 밑에서
40대의 여인의 금간 발바닥 밑에서
이제는 닳아지고 구멍 뚫린 고무신,
이른 새벽 도시의 뒷골목 위에서나
저무는 변두리의 진흙 밭 속에서나
그들은 쉬지 않고 아득히 걷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쉬임 없이 걸어온 운명,
즌데만 딛고 온 고단한 발길 따라
캄캄한 어둠도 밟고 가고
끝없이 펼쳐진 노동의 아침,
타오르는 불길도 밟고 간다.

아득한 시간의 언덕 너머 펼쳐진
고향의 잃어진 논둑길을 걸어서
가물거리는 호롱불을 찾아가는 고무신,
두메산골 머슴의 발바닥 밑에서도
흑산도 뱃놈의 발바닥 밑에서도
뿌듯한 중량의 눈물을 안고
그들은 어디서나 돌아오고 있다.

영산포 어물장 법성포 소금장
이 장 저 장 굴러다니다
영산강 황토물 속에 처박혀
멀뚱멀뚱 두 눈 부릅뜨고
한 많은 가슴 썩지 못하는 고무신.

오늘은 엿장수의 엿판에 실려
보이지 않는 땅으로 팔려간다.
뒷골목 쓰레기통에 누워 낮잠을 자고
허름한 변두리의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주인의 정든 발에 신기었을
또 하나의 고무신을 생각하며
그 주인의 발가락 사이
솔솔 풍기는 고린내를 생각하며
송송 구멍 뚫린 가슴 안고
빈 달빛에 젖는 양로원 뜨락.

군화가 밟고 간 아스팔트 위에서
윤나는 구두가 밟고 간 아스팔트 위에서
모진 학대 속에 짓밟힌 고무신,
기나긴 형벌의 불별 속을
오늘은 절뚝이며 절뚝이며 쫓겨간다.

머슴의 발바닥 밑에서
식모살이 순이의 발바닥 밑에서
뜨겁게 뜨겁게 닳아진 세월,
돌멩이도 걷어차며 깡통도 걷어차며
사무친 설움 날선 분노 안으로 삭이고
변두리로 변두리로 쫓겨온 고무신.

번뜩이는 竹槍에 구멍난 가슴 안고
장성 갈재 넘어가던 짚신,
그 발자국마다 핏물이 고이는데
오늘은 구멍 뚫린 고무신이 쫓겨난다.

썩어도 썩어도 썩지 못하는 한많은 가슴,
땅 속 깊이 파묻혀도
뻘밭 속에 거꾸로 처박혀도
한사코 두 눈 부릅뜨고
영영 죽지 못하는 恨
여기 벌떼같이 살아나는 아우성이 있다.

 어떤 문인은 반농담으로 ‘문병란의 신(神)’은 ‘고무신’이라 하였다. 작자 자신도 자작시 해설에 그것을 그다지 기분 나쁘게 생각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고무신은 민중(노동자나 농민)의 자화상 그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기독교적 구호라면 ‘저 낮은 곳을 향하여’가 바로 민중적 구호이다. 낮은 곳, 시속에 나온 메타포로서 ‘구멍 뚫린 고무신’이 고난과 노동과 가난에 찌들은 민중의 모습이 아닌가. <땅의 연가>와 쌍벽을 이루는 이 <고무신>은 전형적인 리얼리즘의 수법에 의한 이야기시이기도 하다. 화자가 바로 고무신으로서 그의 일생은 농민의 일생 그것이기도 하다. 도시의 뒷골목, 변두리의 진흙 밭, 즌데, 캄캄한 어둠, 타오르는 불길, 논둑길, 머슴의 발바닥, 영산포 어물장, 법성포 소금장, 엿장수의 엿판, 쓰레기통, 황톳물 뻘밭 속, 온갖 가학적인 것들 군홧발과 윤나는 지배계급의 학대 속에서 마침내 ‘한많은 가슴’ ‘벌떼같은 아우성’으로 살아나는 민중 그 자체의 저항과 삶을 의미한다. 10연 60행에 육박하는 장시로서 긴 호흡과 톤을 유지하여 균형을 잃지 않고 끝까지 밀고간 Style은 조선조 판소리의 그 가락만큼이나 아기자기하다 하겠다.

썩어도 썩어도 썩지 못하는 한많은 가슴,
땅 속 깊이 파묻혀도
뻘밭 속에 거꾸로 처박혀도
한사코 두 눈 부릅뜨고
영영 죽지 못하는 恨
여기 벌떼같이 살아나는 아우성이 있다

- 고무신의 최종렬 -

 흔히 그의 시는 헤비급 프로권투 12라운드를 다 치루되 반드시 끝연에 가서 K·O로 끝나는 그런 시합을 연상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8) 織女에게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1970년 중반에 발표된 이 시는 흔히 통일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비극적 운명에 놓인 연인들이 어떠한 역경을 극복하고서라도 ‘만나야 한다’고 절규하는 절박한 상황의식을 노래하고 있다.
 동양의 설화인 견우와 직녀에서 그 모티브를 가져다가 일종의 알레고리 수법을 사용했지만 견우직녀의 로맨틱한 연애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비극적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다.
 비연 구조로 되어 있는 이 시는 크게 전단과 후단으로 나누어진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로 종결부를 이루고 있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에 놓이는 오작교를 통하여 일년에 한번씩이라도 만나는 낭만과 재회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이 시의 주인공들은 사실상 그것마저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으로 이른바 극한상황 속에 갇혀 있다.
 ‘유방(순정)’도 빼앗기고 ‘처녀막(정조)’ 마지막 ‘머리털(인권)’까지 빼앗긴 그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 그 생이별은 강요되고 있다. 하여 주인공 화자는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징검다리) 놓아 칼날이나 면돗날이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한다고 절규한다. 시에서 과장법은 리얼리티보다 진실에 압도하는 생명의지이다. 이런 생명의지가 있어 그가 그 많은 폭압의 시대를 이기고 지금까지 시와 교단 그리고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민중적 삶의 승리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 시는 작곡되어 대중에까지 보급되었으며 김원중 조관우 등이 CD에 취입하였고 판금의 수모도 받았으나 지금은 고등학교 문학교재에 수록되었고 대입 참고서나 학습교재로도 보급되어 남북이 애창하는 통일가곡이 되고 있다. 이 땅의 비극이 끝나기 전까지는 애송 애창될 것이며, ‘만나야한다’ 그 당위 조동사의 내포적 의미는 단연 남북통일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고 철조망과 벽 대화의 단절을 소통시키는 그날까지 말라붙은 은하수를 눈물로 녹여야 할 것이다.

(9) 호수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1981년 창비시선으로 간행한 《땅의 戀歌》에 수록된 작품이다. 현실참여적 열도 높은 시들에 가려 좀처럼 보이지 않던 이 시가 8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애송시집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였으며 〈직녀에게> 뒤이어 작곡되어 노래로도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제목이나 시적 내용 그 표현으로 보아 연정을 노래한 것이나 넓은 의미로 인생의 관조로 보여진다. 호수라는 제목이지만 본문에 수면도 없고 물도 나오지 않는다. 마음의 호수이거나 어떤 심상(心象)에 대한 긴 기다림이거나 이루지 못할 어떤 염원을 담고 있는 듯하다. 구절로 된 메타포나 이미지는 없지만 시 전체가 하나의 메타포가 되어 있는 시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 시에서 제일 중요한 핵심이다. ‘수많은 사람’과 ‘꼭 만나야 할 사람’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그래서 그는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라고 미해결인 채 이 호수는 불가해의 여운을 남기고 아쉬운 파문만 마음에 전한다.
 시는 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 있다. 시는 그저 시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 시야말로 그저 시요, 그저 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애송한다는 말 이외에 더 다른 해설도 변명도 필요할 것 같지 않다. ‘비로소’라는 부사가 매우 돋보이는 뉘앙스를 풍겨주는 것도 시어의 신비 그것이 아닐까. 시에 대한 감동은 강요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저절로 감동해야 그것이 참다운 감동인 것이다. 좋은 시, 그것은 아무런 해설도 비평도 필요없는 할말을 다하지 않고 독자의 몫을 남겨놓은 그런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시가 바로 이 <호수>이다.

(10) 새벽의 차이코프스키

새벽에 깨어나 혼자서 듣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가늘은 현악기의 현 끝에
아리게 떨리는 알레그로
내 고독한 혼도 따라 울고 있다
이 새벽 밖에서는
새록새록 싸락눈이 내리고
어디선가 외로운 목숨이
쓸쓸한 기침 소리로 돌아누울 때
노래는 2악장으로 바뀌고 있다
세상은 얼마나 차갑고 쓸쓸한가
세상은 얼마나 무섭고 고독한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도 없이
눈 내리는 이 새벽
혼자서 듣는 차이코프스키
나도 한 마리 작은 귀또리처럼 운다.
산다는 것은 음악보다
얼마나 아프고 쓰린 울음인가
어디선가 외로운 가슴이 모로 누워간다
오 기침 소리여
기침 소리여

 이 시는 1997.9. 계몽사에 의해 간행된 시집 《새벽의 차이코프스키》의 표제시이다. 시인의 고백에 의하면 일찍이 70년대 유신시대에 써서 원탁시라는 동인지에 발표했으나 시집에 수록되지 않고 투쟁적 상황 때문에 묵혀진 작품이었는데, ‘시사랑 어머니회’ 낭송모임의 애송시가 되어있어 늦게야 시집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만 들어도 그 사상을 의심받던 시절이 있었다. 더구나 새벽에 들으면 더욱 의심할지도 모른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곡을 좋아했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리스트에 올라 반체제 시인 취급받던 시절의 실존적 고독을 노래한 것 같다.
 필자 반거덜충이 문학도였지만 서은시인이 광주일고에서 나의 후배들을 지도할 때 그 분의 인기(?)를 풍편에 듣기도 했었다.
 시란 고독과 외로움의 소산, 이 시를 보면 그의 ‘기침소리’가 훌륭한 메타포가 되어 있음을 본다. 섬세하면서도 사무치는 모국어의 정겨움이 눈 내리는 새벽의 싸락눈처럼 정답기도 하다. 「기침소리여, 기침소리여」 어쩌면 살아있다는 것을 이렇게도 말하는 걸까. ‘아리게 떨리는 알레그로’ 우리말의 독특한 음성적 효과로 압운을 만들기도 하고 ‘나도 한 마리 작은 귀또리처럼 운다’는 표현 속에 담긴 여백의 미는 그의 고독의 깊이를 짐작하고 남는다. ‘외로운 가슴이 모로 누워간다’ 몸살나게 좋은 이 표현 속에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이 어떻게 폭압시대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를 자청했는가 의심할 정도다. 그러나 그의 힘은 바로 이 순수, 〈땅의 연가〉에서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아픔’이라 노래한 그 순수성이 무기가 되어 싸웠던 것임을 이 작은 서정시가 작은 기침소리로 말하여 준다.

(11) 쓴 맛

모든 향기 중에 으뜸 향기!
모든 맛 중에 으뜸 맛!
쓴맛이여, 너는 내 혀끝에 짜릿하니 스며
내 오장육보를 전율시키는 맛 중의 맛!

세상의 단맛들 썩어 지늘키고
세상의 온갖 향기들 독하여 육신을 마비시키고
세상의 모든 빛깔들 눈부셔 눈 멀게 할 때
쓴맛이여, 너는 혀를 일깨우고 혼을 일깨우고
마침내 마비된 코에 독침을 놓아
잃어버린 온갖 맛들을 다시 찾아준다

누가 인생을 쓰다 달다 말하는가
쓴맛 속에 알아지는 참맛을 헤아려
스스로 단맛을 거부할 때,
쓴맛이여, 너는 유익한 벗처럼 내게 와서
마비된 사랑의 향기를 일깨워 주었다

그대 연인의 입술에서
달콤한 꿀맛을 훔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여, 눈과 귀와 코를
잃어버린 사람이여, 쓴맛 속에서
마침내 알아지는 최후의 맛!
쓴맛 속에서 되살아오는 오롯한 사랑의 맛이여

 오관의 감각 중의 하나가 미각이고 그 미각 중의 대표적인 맛이 고미(苦味) 즉 ‘쓴맛’이다. 이 ‘쓴맛’의 대어는 ‘단맛’으로 우리 속담에도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이 있다. 쓴맛 괴로움 고통 불행 등과 통하는 말이다. 이목구비(耳目口鼻) 귀, 눈, 코, 입 그리고 혀(舌) 가장 대표적인 감각 기관인데 현대시에서 이런 감각기관을 잘 활용하여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청각 시각 미각 통각 공감각 등 현대시의 한 갈래인 감각파들이 매우 선호하는 표현방법이기도 하다.
 시인은 ‘쓴맛’을 「모든 향기 중의 으뜸 향기!」요 「모든 맛 중의 으뜸 맛!」이라고 상찬을 도입부에 제시하면서 매우 진지한 역설로 독자를 꾀이기 시작했다. 분명 이것은 ‘단맛’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상당히 놀라게 하며 역설적으로 어리둥절케 하는 자극적 수법인성 싶다. 그러면서 독자들이 미처 결정도 하기 전 감탄사로써 「쓴맛이여, 너는 내 혀끝에 짜릿하니 스며/ 내 오장육보를 전율시키는 맛 중의 맛!」이라고 큰 소리로 단정해 버린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을 무작정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쓴맛 자랑으로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다니! 바로 그 시적 기교의 능숙성이 첫머리부터 감탄을 머금게 한다. 그런 다음 2연에 가서 본격적으로 단맛파를 제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쓴맛의 역할이 ‘마비된 혀를 일깨우고’ ‘혼을 일깨워’ ‘단맛에 마비된 코에 독침을 놓아’ ‘잃어버린 온갖 맛들을 다시 찾아 준다’고 자신있게 노래한다.
 그리고 3연(轉연)에 가서 「누가 인생을 쓰다 달다 말하는가」 감탄법으로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킨 다음, 「쓴맛 속에 알아지는 참맛을 헤아려/ 스스로 단맛을 거부할 때/ 쓴맛이여, 너는 유익한 벗처럼 내게 와서/ 마비된 사랑의 향기를 일깨워 주었다」고 자신있게 단정을 내린다.
 그의 단호함 자신만만함 파워풀한 호기, 그 열정을 도처에서 만나지만 이 시처럼 자신만만한 대조법과 패기도 드물지 않나 생각된다. 생각기에 따라서 단맛은 안일무사주의자, 투항자, 보수적 순응자, 나태와 무기력한 부루지아, 양식이나 의식이 마비된 자, 그러한 순응주의자를 일컫는 부정적 이미지로 부각시키기 위해 ‘쓴맛’의 가치나 역할을 애써 강조하고 있음을 일종의 은유로써 제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종결부 4연에서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을 야유하듯 「그대 연인의 입술에서/ 달콤한 꿀맛을 훔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여, 눈과 귀와 코를/ 잃어버린 사람이여, 쓴맛 속에서/ 마침내 알아차리는 최후의 맛!/ 쓴맛 속에서 되살아오는 오롯한 사랑의 맛이여」라고 감탄하고 있다. 평자로서도 어느면 어리둥절하여 더 이상 언급할 말이 없다. 지금까지 瑞隱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 시를 거론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작자 자신이 넌짓 권한 이유를 깨닫고 내 자신 빙그레 웃을 뿐이다. 좋은 시는 말이 필요없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교감이 아니겠는가.

(12) 씀바귀의 노래

달콤하기가 싫어서
미지근하기가 싫어서
혀끝에 스미는 향기가 싫어서

온몸에 쓴내를 지니고
저만치 돌아 앉아
앵도라진 눈동자
결코 아양 떨며 웃기가 싫어서

진종일 바람은 설레이는데
눈물 죽죽 흘리기가 싫어서
애원하며 매달려 하소연하기가 싫어서

온몸에 툭 쏘는 풋내를 지니고
그대 희멀쑥한 손길 뿌리쳐
눈웃음치며 그대 옷자락에 매달려
삽상하게 스미는 봄바람이 싫어서

건달들 하룻밤 입가심
기름낀 그대 창자 속
포만한 하품 씻어내는 디저트가 되기 싫어서

뿌리에서 머리끝까지 온통 쓴 내음
어느 흉년 가난한 사람의 빈창자 속에 들어가
맹물로 피를 만드는
모진 분노가 되었네
그대 코끝에 스미는
씁쓰름한 향기가 되었네

 씀바귀 - 엉거시과에 속하는 다년초. 한자어로 苦菜(고채) 쓴 나물이다. 키는 30cm정도 크고 잎은 어긋맞게 나며 톱니가 있고 5~7월경 작은 가지 끝에 노란 꽃이 핀다. 어린잎은 나물로 식용, 흰즙이 있고 쓴맛이 나는 나물이다. 맛은 상추맛보다 더 쓰고 입맛을 돋우는 나물로 식용한다. 이 정도면 시 감상에 도움이 될 정도는 되었을지 모르겠다. 토끼가 좋아하여 토끼풀이라고도 한다.
 우선 이 시는 話者(화자 Persona)가 씀바귀 자신이니까 일종의 의인법적 표현이다. 1연부터 5연까지 ‘싫어서’라는 부정적 거부적 행동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무려 7번이나 쓰였다. 따라서 작자의 의도가 담겨있는 이 형용사의 주체인 화자 씀바귀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거부적 저항의 자세를 짓고 있는 다른 사물의 표상이다. 그래도 꽃은 꽃이니까 사람으로 치면 여인, 그것도 시골처녀, 도시로 팔려가 공단이나 유흥가에서 노리개가 될 우려가 있는 그러한 유혹이나 불의 지배 유한계급 브르조아지에 대한 항거의 몸짓으로 보여진다. 혹자 이 순수한 식물인 씀바귀로 이념적 목적성을 달성키 위해 작자의 관념적 비유(보조관념)로 사용한 그것이 순수한 자연관조적 태도가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시 전체의 무드는 그러하다.
 아양떠는 것, 애원하는 것, 눈웃음치는 것, 삽상하게 스미는 것, 건달들 입가심 디저트가 되는 것, 이러한 몸팔이 그러한 노리개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맹물로 피를 만드는 분노요 뿌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쓴내음을 지니고 그대 코끝에 스미는 씁쓰름한 향기가 되겠다고 노래한다. 애상적 감상주의를 벗어버린 활달한 언어 운행 그 거침없는 운율 등 시원시원하게 고동치는 율격은 색다른 맛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땅의 산야에 함부로 피어 있는 수많은 야생화 그것들은 무지렁이 조선의 시골처녀요, 공순이가 되고 식순이가 된다하여도 그 향기 그 긍지 누가 감히 짓밟고 꺾으랴, 기품마저 느껴지는 ‘싫어서’의 연속음이 단순한 거부 그 이상의 춘향이 그 절의에 맞먹는 매력 아닐까.

(13) 비용

17세기 프랑스 어느 허름한 시골 주막에서
당신은 낮술을 들고 있다
낮술은 가장 고독한 사람이 마시는 술
당신은 전설처럼 앉아
어느 창녀의 엉덩이께서 천국을 찾는다.
절도, 목사, 살인, 음주, 패륜, 매음,
전과자 기록부를 가득 메운 이력서
당신은 아무것도 변명하거나 감추지 않는다.
오늘 나도 어느 주점에 앉아 낮술을 들며
저만치 앉아 있는 당신을 본다.
정의 양심 진리 어쩌고 저쩌고
대학교수 흉내를 내는 나에게
낮술 대작을 청하며 깡소주를 권한다.
도둑놈과 시인
비도덕적 매음자와 대학교수
시시한 대조법을 우습게 나발 분다
아 양심이란 무엇이며 타락이란 무엇인가
내가 다섯 잔의 낮술을 마시고 있을 때
聖 프란시스 비용은 저만치 앉아
한바탕 껄껄껄 웃어제끼고 있었다.
“병란아! 너도 정신적으로 좀 성장하래이!”

 프랑소아 비용[Franciois Villon](1431~1463) 15세기 무렵 프랑스의 시인. 고아로 사제에 의해 양육되어 파리대학 문학부에서 수학하고 생부노와 교회 경내에서 신부를 살해하고 옥살이, 사면 후 다시 절도에 가담하는 등 이른바 범죄시인이라 불리웠다. 그는 신랄한 유머와 풍자가 섞인 《유증의 노래》《유언의 노래》 시집을 썼고 방랑 음주 수회의 투옥 등으로 불우한 삶을 산 전설적인 시인이었으나 훗날 문제의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 같은 시인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우아한 중세의 궁전시인들의 고상한 틀을 깨뜨리고 빈궁과 패잔, 죽음, 투옥, 범죄 등 온갖 고통과 직면한 인간의 처절한 목소리로 읊은 프랑스 근대시의 비조이다. 보들레르 베를렌느 랭보 등 모두 이런 혈통을 이어받은 시인들이라 할 수 있다. <늙은 창녀의 노래> 같은 시는 부도덕하고 불결하기보다는 참절처절한 그 노래에 흠뻑 빠지게 된다.
 이쯤 소개한다면 <비용>이란 시 감상의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은 시인이 비용의 활동연대를 15세기에서 17세기 근대로 끌어내린 것은 두찬이었을까, 메타퍼였을까, 아마 20세기 가까이 끌어내리는 것이 작자와의 만남을 더욱 친밀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문학은 모두 상상과 허구의 산물이니까 시인의 창조적 권리를 인정하기로 하자. 20세기의 시인 서은이 어느 주점에서 그와 만났다는 것부터 하나의 시적 허구니까 그의 수작을 따라가 볼 수밖에 없다.
 ‘낮술’은 가장 고독한 사람이 마시는 술이란 정의가 맞는지 어쩐지는 모르나 술에 문외한인 나로서 낮술의 그 고독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비용의 이력서를 메운 사건은 절도 · 신부살인 · 음주 · 패륜 · 매음, 서은의 닉네임은 정의 · 양심 · 진리 · 어쩌고 · 저쩌고 약간 자조 섞인 대조법에 의해 대학 교수 흉내(80년 복직교수가 된 일인 듯)를 내는 자기에게 비용이 깡소주를 권한다는 것이다. 「도둑놈과 시인/ 비도덕적 매음자와 대학교수/ 시시한 대조법을 우습게 나발분다」「아 양심이란 무엇이며 타락이란 무엇인가/ 내가 다섯 잔의 낮술을 마시고 있을 때/ 聖 프란시스 비용은 저만치 앉아/ 한바탕 껄껄껄 웃어제끼고 있었다/ “병란아 너도 정신적으로 좀 성장하래이!”」
 정말 껄껄 웃을 일이다. 서은 선생, 대학교수 흉내가 무척 답답했던 것 같다.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뜻인즉슨 비용을 사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서도 넌지시 운만 떼는 서은 선생을 존경하는 소생 아는척 하기는 예의가 아닌 줄 안다. 참으로 이색적이며 비장미 만점인 엘레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옛날의 어떤 각시탈은 연방 웃어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눈물나는 유머가 있다면 이런 시가 아닐까.

(14) 어떤 베르테르

겨울의 빈 들판 위에서
겨울 들판 같은 가슴을 안고
한 미친 사나이가
겨울에만 피는 꽃을 찾아 헤맨다.

꽃이여 꽃이여
겨울에 피는 꽃이여
그대, 어느 바위틈에 숨어 있느뇨?

북풍 휘몰아치고
한 점 푸름도 없이
바위 속까지 죄다 말라 버린 들판
푸른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은데
겨울에도 피는 사랑의 꽃은 어디 있느뇨?

그 사나이의 손은 떨리고 있고
그 사나이의 눈은 열기에 흐려 눈곱이 끼어 있고
그 사나이의 입술은 핏기 없이 말라 부르터 있고
그 사나이의 이마엔 고뇌의 밤이 주름을 파 놓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광야에 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무지에 서서

50년을 불러 온 이름,
50년을 찾아온 꽃,
그 보이지 않는 꽃은 어디에 피어 있느뇨?

꽃이여 꽃이여
미친 중년의 사내가 찾아다니는
오오 겨울에만 피는 꽃이여!

 전세계 청춘들의 애독서《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서간체로 된 질풍노도(Sturm Und Drang)시대 괴테의 자전적 연애소설이다. 1부는 자기가 사랑한 친구의 약혼녀 부프를 롯데(Lotte)로 설정했고 2부는 자기의 친구 엘루잘렘이 남의 유부녀를 사랑하다 자살한 사건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전쟁터의 나폴레옹도 애독자로서 전선의 마상에서 읽었다고 하니까 그 인기는 짐작할 만하다. 이 시는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삽화에서 모티브를 얻고 있다. 베르테르가 숙명의 연인인 친구의 약혼녀 Lotte를 잊지 못하여 병이 날 지경, 전전반측 밤마다 잠못이루고 낮이면 들판과 산야를 헤매며 못잊을 그 사랑에 고뇌와 방황을 거듭한다. 그러던 어느날 겨울의 들판에서 꽃을 찾아 헤매는 미친 사내를 만나 그 마음을 연민으로 이해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자기 처지(짝사랑)를 미루어 그 미친 사내의 마음을 이해한걸까. 눈물을 흘리며 가긍히 여긴 심정을 롯데에게 하소연삼아 고백한다. 서은은 이 삽화의 사나이와 괴테의 분신 베르테를 가져다가 ‘어떤’이란 수식어를 얹어 자기자신의 짝사랑 못 이룰 사랑의 상징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핵심은 「꽃이여 꽃이여/ 겨울에 피는 꽃이여/ 그대 어느 바위틈에 숨어 있느뇨?」이다. 중간중간 반복하면서 이루지 못할 사랑의 비유로 겨울에 피는 꽃을 메타포로 제시하고 있다. 사랑만이 아니라 이상(理想)이나 어떤 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은의 시에 이런 불가해한 사랑의 이미지는 어떤 지고한 ‘이상향’에의 향수같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 미친 사내나 베르테르나 괴테나 그 이루지 못할 진실한 사랑 때문에 방황하고 고뇌하였을 것이다. 서은의 시에 자주 나오는 불운한 인물들 지귀(志鬼)나 비용이나 랭보나 베르테르나 모두 이 사내(미친 사내)와 많은 공통점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연정이나 연애의 배경설정은 매우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이다. 겨울의 들판, 북풍 휘몰아치고 바위속까지 말라버린 들판, 그런데 그런 말라붙은 황무지에서 꽃을 찾아 헤매는 미친 사내에 공감하고 연민하여 그 사내가 넌지시 자신임을 밝히기까지 한다. 「꽃이여 꽃이여/ 미친 중년의 사내가 찾아다니는/ 오오 겨울에만 피는 꽃이여」어느 면 <호수>의 ‘어쩔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15) 感傷調

레미드 구르몽이 떨어지고 있다
내 추억의 벤치 위에
쉰 아홉 개의 소슬한 꿈이
계절의 부도를 날리고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사랑 내 가슴에 있다고
멋진 거짓말을 노래할 때
또 한 잎
레미드 구르몽이 상냥히 지고 있다

조국의 가을 하늘이 너무 푸르러서
슬프기만 하다는 시인은
황토 무덤 속에 누워
그 고운 뼈 삭은지 오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노래하는
어느 작고 시인의 빈 잔 위에
목마가 떠나간 가을이 오고
오늘은 구두 발자국 밑에서
레미드 구르몽이 죽어 가고 있다

소녀야, 시월의 언덕에 서서
파산한 청춘을 안고
너의 사내놈은 유서를 쓰고
피 함빡 쏟는 노을 길에
레미드 구르몽의 발자국이 울고 있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센치멘탈을 주조로 하는 그의 특별한 시이기도 하다. 연애시집이나 애송시집에 단골메뉴로 끼는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레미드 구르몽의 시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아마 그런 연애시에 기탁하여 감상조로 연정을 읊은 시다. 서은은 민중시인으로서 대중들의 예술취미(혹자 통속성으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의 꽤 흥미 있는 연작시에(流行歌調)라는 것이 있다. 곧잘 흘러간 노래도 한곡조 뽑는 그 실력에서 그 취향을 안다. 아마 이 시도 그런 대중적 취향을 취하여 친근감이 넘치는 칸조네나 샹송가요 같은 가사를 연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멋이 있다. 가을날 낙엽이 지는 것을 그 낙엽과 그 시를 쓴 시인을 하나로 묶어 「레미드 구르몽이 떨어지고 있다/ 내 추억의 벤치 위에/ 쉰아홉개의 소슬한 꿈이/ 계절의 부도를 날리고 있다」고 노래한다. 아마 59세시 어느 오후 벤치에 앉아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리듯 좀 쉽게 쓴 시가 아닌가 싶다. 그는 평소에 걸작이나 가작보다 태작이나 졸작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2연의 첫구는 가요로 부르는 모더니즘파 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에 있는 시구이다. 그런데 3행에 가면 ‘멋진 거짓말’이라고 야유를 했다. 이것은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란 시의 통속성을 건드린 것이다. ‘이름’을 잊었는데 어떻게 ‘사랑’이 남아 있는가? 그래도 이 시의 가사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유행가적 통속성을 야유하면서도 패러디 수법으로 차용하고 있는 모던보이식 우스개짓이다. 서은은 그 살벌한 시절에도 이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반독재, 반유신, 5·18의 계속적 항쟁에 앞섰던 것이다. 그러기에 쉬어가는 이 시의 야유와 패시티쉬는 정겹다.
 3연은 죽은 불우한 시인의 추억(혹여 생활고를 못이겨 자살한 김만옥 시인이라도 생각한 것일까) 김수영 시인이 그 천박성이 싫어 감상조 냄새나는 그 시를 욕하고 장례식장에도 안갔다고 《시여 침을 뱉아라》에서 밝힌 바도 있는 박인환 시인의 패러디, 선의의 우정을 느끼게 하는 대중성에의 공감도, 그래서 서은은 모난데 없는 민중시인으로 불리운다.
그래도 끝 연에 가선 독한 마음먹고 모진 소리 한 마디 「파산한 청춘을 안고/ 너의 사내놈은 유서를 쓰고/ 피 함빡 쏟는 노을 길에/ 레미드 구르몽의 발자국이 울고 있다」 대표작 아닌 이 감상조 서은 선생의 파한을 대하여 그의 오지랍이 넓음을 알겠다.

(16) 허무와 절망

허무와 절망이 만나
희망의 눈을 피하여
동반 자살을 계획한다.

인생은 한 장의 낙서 그보다
사랑은 값싼 1회용 소모품
여자와 남자는 밤마다
위치를 바꾸어 한번씩 죽는다.

무효가 된 젊은 날의 고백
비로도빛 절망이 빠끔히 눈을 뜨고
나비를 쫓던 미소년을 유혹한다
그 밤에 나는 허무의 포로가 되었다.

타락하지 않은 자는 엄벌에 처함
절망 공화국의 헌법 제1조
나는 생명보험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사고사시 일억 원이 지급됨’
아내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악마는 저만치 앞서
저승행 화살표 방향 끝에 서서
69년째 기다리고 서 있고
계약이 만료된 희망 위에
뒤돌아보지 말라고
갈색 추억이 경고한다.

 문학의 요체는 사랑, 시의 주제는 허무와 절망이 그래도 간이 맞는 소스다. 요새같이 민주화 운동의 주가가 폭락하고 이데올로기나 진보 자유 그런 말이 인기 없을땐 섹스나 연애란 말보다 그래도 허무나 절망이 더 고상하다.
서은 선생도 나이들어 데모대 앞장서기보다 골방에 누워 지내는 일이 더 많을 듯싶다. 그래서 허무나 절망을 빌어다 청탁원고를 메꾼 듯하다.
「허무와 절망이 만나/ 희망의 눈을 피하여/ 동반 자살을 계획한다」 허무 · 절망 · 희망 같은 관념어를 의인화시켜 그들을 인격적으로 표현했다. 과거엔 상당히 핏대를 세우던 인생론인데 최근엔 다소 관조적으로 풀어놓았다. ‘인생은 한 장의 낙서’ ‘사랑은 값싼 1회용 소모품’ 세태풍자다. 「여자와 남자는 밤마다/ 위치를 바꾸어 한번씩 죽는다」이는 섹스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현실에 대한 냉소이면서 실존적 연민이다. 3연은 제3의 연애, 제3의 섹스, 자유연애에서 이젠 프리섹스시대, 변화무쌍의 현실을 ‘허무의 포로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이 시엔 비판이기보다 현실적 긍정의 수용의 의사가 보인다. 3연은 매우 파격적이다. ‘절망 공화국’이 등장하고 그 절망공화국에서는 헌법 제1조로 ‘타락하지 않은 자는 엄벌에 처함’이라는 법령을 공포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생명보험에 가입한 아내가 ‘사고시 일억원이 지급 된다’고 다정하게 속삭인다는 것이다. 사고로 안죽어 본전만 찾은 아내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실소감이지만 목하 한반도는 돈 세상. 악마는 저승행 화살표 방향 끝에 서서 69년째 기다리고 서있다고 하는데, 금년 서은 선생 73세, 생명보험 그 귀추가 주목될 뿐, 보험금도 로또복권 행운도 연이 먼 것으로 알고 있다. 제발 허무와 절망의 눈을 피하여 오래오래 사소서.

(17) 戀歌 1

걸레를 더럽다고 말하지만
걸레보다 더 더러운 것은
인간의 마음,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때를 지니고
너덜너덜 썩어버린 너의 양심,
너의 마음을 닦아낼 걸레는 없다.
제법 춘향이처럼 호호거리며 웃는 여인아!
너의 속마음 칼을 감추고
나의 약한 남성을 유혹하지만
이미 돌이 되어버린 모진 마음을 아느냐
걸레는 마루바닥 때를 닦지만
스스로 남의 때를 안고 묵묵하지만
곱게 화장한 너의 얼굴은
마음의 때를 가리기엔 너무 옅구나
분으로 바르고 비단으로 감싸도 보이는 마음
닦을 수도 빨 수도 없는 너의 양심은
어느 구석 걸레처럼 처박아 두었느냐
빨아도 빨아도 걸레는 걸레
양심의 때를 닦을 걸레는 따로이 없구나

 연작시 연가1, 아마 이 시들은 5·18당시 수배되어 은신처에서 쓴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제목에 가장 더러운 걸레를 소재로 삼고 있다. 이것이 이 시의 으뜸 재미이디. 그런데 그 걸레와 대조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관념인 양심이나 마음이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때를 지니고 너덜너덜 썩어 버린 양심을 고발하고 있다. 5·18같은 비극이 바로 너덜너덜 썩어버린 양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더럽혀진 양심은 세탁할 수도 없고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고 걸레로도 닦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양심이 부재한 그 살육의 시대에 가식적인 창녀의 미소를 띠고 있는 춘향이, 이미 그녀가 분바르고 화장한다 해도 마음의 때 더러운 양심을 가리기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용기라 하였다. 총칼을 아무데나 휘두르는 것은 용기냐, 만용이냐, 죄악이냐. 죄를 지으면 하늘에도 빌 곳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도 빌지 않고 잘 사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양심, 바로 걸레가 되어버린 그 파렴치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걸레는 차라리 깨끗한 것 걸레는 아무 죄가 없으니 예덕선생(똥 푸는 엄행수 박지원의 소설) 찬양하듯 <걸레찬가>를 다시 쓰소서. 이 시는 분명 그의 수많은 대표작 중엔 넣을 수 없는 작품인데. 파한(破閑)을 위하여 끼여넣은 것 같다.

(18) 똥이 된 쌀 노래

쌀을 먹어
피와 살을 만들지 못하고
똥만 만드는 슬픈 역사.

북쪽 쌀이 남쪽에 와도
그들의 사랑은 따라오지 않고
남쪽 쌀이 북쪽에 가도
우리들의 정성은 따라가지 않고

사랑과 눈물 대신
서로 주고 받는 건
똥 같은 자만심.

쌀 속에 혁명도 따라오고
쌀 속에 총알도 따라가고
쌀은 또 하나의 전쟁
우리들의 쌀은 밥이 되지 않는다.
우리들의 쌀은 사랑이 되지 않는다.

오 우리들의 역사는 아직 똥만 만드는가
사랑과 희망을 만들지 못하고
우리들의 역사는 슬픔을 삼켜 피똥을 싸는가

서은 선생은 <북한쌀> <寓話>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등 <직녀에게>를 위시하여 많은 통일시를 노래했다. 그 중에서 비교적 소품에 해당한 이 작품을 감상해 본다.
 언젠가 북한에서도 수재민 구호미로 북한쌀이 내려온 적이 있고 우리쪽에서도 쌀이 북쪽으로 가고 있다. 이른바 남북경제교류이다. 해마다 조금씩 그 양이 늘고 있고 이산가족 상봉이나 북한 방문 등 괄목할만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고 서로의 속마음은 아직도 오월동주 딴 마음 딴 생각이 여전하다. 이러한 남북한 동질성 회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표리부동한 서로의 전략이 바뀌지 못하는 남북한 갈등구조를 ‘쌀’을 가지고 은유법으로 노래하고 있다. ‘똥'이 지닌 메타포의 속뜻을 생각하며 감상한다면 이 시의 내포적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쌀을 먹어 똥을 만들지 말고 피를 만들자는 본의를 생각하는 그것이 이 시의 핵심이다. 원래 똥분자는 쌀을 먹어 다른 것 즉 똥을 만든다하여 糞(똥분)이라고 쓴다. 일본은 미국을 쌀같이 먹어 똥을 만든다고 미국(米國)이라고 쓴다. 美國이라고 쓰는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 America를 假借로 차음하여 한자로 쓰는 것이니까 아름다울 美자를 꼭 써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쌀은 사랑과 희망을 만들지 못하고 똥을 만들며‘ ’슬픔을 삼켜 피똥을 싸는가‘ 탄식하는 시인의 마음을 생각하며 앞으로 전개될 남북교류의 미래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

(19) 인연서설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가는 일이다.

 20세기 마지막 해에 펴낸 시집 《인연서설(시와 사회사 1999.3)》의 표제시다. 거리의 교사를 면하여 대학에 복직한 10여년만에 정년 1년을 앞두고 펴낸 감회 깊은 시집이었다. 월급다운 월급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학원으로 강연장으로 시위현장이나 감옥으로 그 삶의 다난했음은 누구 말마따나 무등산은 다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유명세에 비하여 너무도 고단한 그의 삶과 고독은 그 시만이 지닌 비밀일지도 모른다. 눈 한번 팔아본 적 없는 시인의 길, 교육의 길,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 연민과 눈물이었던 그의 성품, 그러나 심심찮게 적들도 있고, 그의 주변에서 똥개도 짖기 마련, 봄햇볕 나면 피려든 도리행화, 우후죽순격 민주투사, 설치는 정치 지망생, 너도 나도 잘난 사람들 때문에 그는 또 고독한 뒷자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묵묵히 내색하지 않는 그는 10여년 드나들던 연구실 짐을 챙겨 다시 지산동 오두막으로 돌아온 것은 2000년의 일, 《인연서설》은 그 무렵의 심경들이 침전되어 그 깊이와 심원함을 더하게 된다. 이 시 전체를 가곡으로 작곡한 대학의 음악교수가 있는가 하면 줄줄 암송하는 스님이 있고 사업처 꽃가게 담벽에 새겨서 걸어놓은 애독자도 있었다.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서정시의 충분조건을 잘 갖춘 가슴 저리도록 아름답고 슬픈 시이다. 어느 한 단어 어느 한 구절 허술한 데가 전혀 없는 세련되고 정선된 모국어들이 서로 만나 빚어내는 음영은 마치 금싸라기 같이 빛을 발하고 신비와 숙명의 영역에까지 그 연분이 면면함을 발하고 있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1연을 이어받아 그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2연은 한 단계를 높여 그 사무친 마음을 고요히 읊조린다. 그리고 3연에선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가는 일이다」 4연에선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가는 일이다」그리하여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못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가는 일이다」시에서 완벽성을 추구하는 그의 빈틈없는 배려가 그 ‘인연’의 신비와 무상을 아로새겨 놓았다. 어느 독자가 “왜 사랑이 서로의 가슴에 가서 죽어가는 일이냐?”고 질문했지만 “나도 모르겠다”고 아직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를 애송한다는 스님께나 물어볼 일이 아닐까.

(20) 매화연풍

병풍 속 매화가
바람이 났다

고매한 화백이
몽당 붓끝으로 꼭꼭 눌러
그 속기 고이 잠 재워 놓았는데

금년 봄 늘그막에
기어코 바람이 났다.

일부러 나비를 그리지 않은 노화백은
먹을 진하게 갈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매화야 매화야
분홍빛 손톱 발톱 곱게 감추고
꿈 머금은 눈 아슴푸레이
이 봄에 병풍 속에서 살포시 엿보아
춘향이 걸음으로 아장아장 걸어 나오너라

속곳도 깨끗이 빨아 다려 입고
머리 빗고 사뿐사뿐
분단장도 곱게곱게 다스리고

열 두폭 병풍 속 굽이굽이
봄바람 타고 꽃바람 타고
이 봄에 나와 어울려 한바탕
거시기 머시기 꽃놀이 안 할래?

노화백은 화기가 돌아 빙그레
몽당 붓 다시 움켜쥐고
매화의 예쁜 배꼽 밑에다
진한 먹물로 낙점을 꼭 찍었다.

 동명의 시집이 나올 예정이라 한다. 2006년의 봄은 병풍속 매화가 바람이 날 것인가. 사군자 그림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주체인 매화는 곧 사람으로 변하여 노화백과 어울리고 다시 그것은 바람끼를 걱정하는 노화백의 붓끝에 가서 화폭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중성과 예술성이 믹서되어 있고 현실과 환상이 교차되어 그 흥취를 손상치 않는 시적 즐거움이 서정시의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 낸 로만스 그레이풍 연가라 칭할만 하다.
「매화야 매화야/ 분홍빛 손톱발톱 곱게 감추고/ 꿈 머금은 눈 아슴푸레히/ 이 봄에 병풍속에서 살포시 엿보아/ 춘향이 걸음으로 아장아장 걸어 나오너라」무슨 신비한 주문을 외듯 그 환상의 매화꽃은 선녀로 환생한다. 「열두폭 병풍속 굽이굽이/ 봄바람 타고 꽃바람 타고/ 이 봄에 나와 어울려 한바탕/ 거시기 머시기 꽃놀이 안할래?」늘 보아도 동안인 그 노익장의 원로시인 서은, 그러나 권위의식도 티도 내지 않는 소탈한 성품이지만 중요한 것 하나 지키기 위해 부질없는 것 9가지는 버린다고 한다. 평생 지방에 서울 사람 눈치 보지 않는 것은 물론 바로 눈앞의 사람도 골똘한 사색속에 고개 숙여 걷는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매화연풍》속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그런 경지가 아닐까.

(21) 희망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 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창가조의 제목을 붙인 이 시는 IMF구제금융시대를 맞아 많은 사람이 파산하고 구조조정에 의한 실직사태가 벌어졌을 때 쓴 시로 알고 있다. 시란 즐겁게 하면서 가르친다고 했듯 예술적 즐거움과 함께 교훈이 담겨 있어야 한다. 1~4연까지 매우 온건한 비유법으로 고난 극복에 대한 격려를 병렬구조로 열거하고 있다. 얼음장 밑에서 헤엄치는 고기, 눈보라 속에서 망울을 트는 매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삶의 끈기, 사막의 고통 속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나그네, 겨울의 밭고랑 빙점에서 뿌리를 뻗어 매운맛을 지니는 마늘, 불꽃 속에서 단련되는 명검의 날 등 모두 고진감래를 위한 고난 속의 삶의 의지를 격려해마지 않는다. 그리하여 포괄하는 종련에서 꿈꾸는 자, 희망을 가진 자에게 그 투쟁의 에네르기 창출을 영탄적으로 강조하였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격려시의 전형적 패턴을 지닌 시로서 많은 애독자들이 나누어 가진 절망시대의 희망시이다.

(22) 가을의 풍경화

가을이 되면
모든 풍경들은
하나의 소리로 변해 버린다

산봉우리들은 높은음자리표,
돌 사이 흐르는 계곡의 여울물 소리는 피아니시모.
산들바람은 안단테 칸타빌레
비바체 아다지오로 타오르는 단풍잎.

가을이 되면
모든 풍경들은
하나의 악보로 변해버린다.

산봉우리에서
골짜기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는
계절을 장송하는 고요한 레퀴엠.
종일, 떠나는 것들을 위하여
낙엽은 이별의 손수건을 흔들고
만장을 두른 야국은 눈물을 머금는다.

봄과 여름을 지나
지금은 가을의 악장이
로만스 그레이로 고요히 저무는 시간,
귀뚜라미 소리는
짧은 휴지부 속에 숨고
이별은 되도록 짧게,
늦은 밤 달은 G선상의 아리아로 떠오른다.

 그림과 음악을 접속시킨 모던한 서정시다. 「가을이 되면/ 모든 풍경들은/ 하나의 소리로 변해버린다」고 과감하게 시각적인 것들을 청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산봉우리는 높은음자리표, 계곡의 여울물 소리는 피아니시모, 산들바람은 안단테 칸타빌레, 비바체 아다지오로 타오르는 단풍잎, 꽤나 유식한 듯한 음악 상식과 함께 가을의 풍경을 악보로 바꾼 테크닉이 나름대로 유니크하다. 멋이란 동양적 풍류에 알맞지만 좀 가벼운 듯하면서도 고루하지 않은 스타일과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는 것처럼 흥겹다. 종련 「봄과 여름을 지나/ 지금은 가을의 악장이/ 로만스 그레이로 고요히 저무는 시간/ 귀뚜라미 소리는/ 짧은 휴지부 속에 숨고/ 이별은 되도록 짧게/ 늦은 밤 달은 G선상의 아리아로 떠오른다」음악 용어나 음악의 상식이 있으면 이 시의 흥취는 배가할 것이다.

(23) 꽃가게 앞을 지나며

그 꽃빛깔만큼이나 예쁜 이름을 가진
온갖 꽃들이 진열된
꽃가게 앞을 지나면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문득
너의 이름이 떠오른다.

진정 그리움이란
진홍빛 장미꽃만큼이나
간절히 타오르는 정열인 것이냐

아름다운 것만 보면 문득
푸른 하늘이 치어다 보이고
거기 눈부신 이국종
아네모네의 이름보다 멀게
너의 고운 미소 피었다 스러지나니

삶의 외로움 나누는
목마른 어느 길목에서
나는 너의 조그만 미소를 구하여
이리도 간절히 발돋음해 애태운다

오라, 노을 지는 꽃길 위에
종종 걸음으로 왔다가 스러지는
무수한 발자국 지우며
봄과 함께 꽃내음 타고 올
제비꽃 초롱 내 사랑하는 연인아!

 연인이나 가까운 분들 생일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가게가 있다. 꽃가게, 온갖 꽃들이 진열된 아름다운 선물의 집이다.
 봄이 되면 그 꽃 이름도 다채로워 무슨 꽃인지 그 빛깔 향기 생김새를 잘 몰라도 가슴을 설레게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아네모네, 히야신스, 아마릴리즈, 시크라멘, 베고니아 그 이름만 들어도 그리움이 가슴에 솟구칠 듯하다. 그 꽃가게 앞을 지나며 그 꽃을 선물로 주고 싶은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연시이다. 아무 소재나 가져다가 펜만 들면 아름다운 시가 되는 능숙한 그의 솜씨는 도처에 번득거리는데, 특히 이 시는 고운 꽃들을 닮은 우리말의 맵시가 한결 돋보인다. 「아름다운 것만 보면 문득/ 푸른 하늘이 치어다 보이고/ 거기 눈부신 이국종/ 아네모네의 이름보다 멀게/ 너의 고운 미소 피었다 스러지나니」
꽃과 연인의 얼굴과 미소가 겹치듯 그 영상의 참신함이 꽃내음처럼 신선하다. 「삶의 외로움 나누는/ 목마른 어느 길목에서/ 나는 너의 조그만 미소를 구하여/ 이리도 간절히 발돋움해 애태운다」
 이 풋풋한 향기와 앳된 젊음의 싱그런 감각이 백발이 성성한 그 나이에 이렇게 생생한지 감탄을 절한다. 더구나 종련에 이르러 「오라, 노을지는 꽃길 위에/ 종종걸음으로 왔다가 스러지는/ 무수한 발자국 지우며/ 제비꽃 초롱 내 사랑하는 연인아!」는 틴에이저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 싱그러움을 풍겨준다.

(24) 첫사랑

눈썹 달이
나뭇가지 끝에서
작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어제 핀 꽃이
오늘 핀 꽃에게
부드러운 혀 끝을 오무린다

산다화 냄새가
쌔하니
코 끝에 와서 간지린다

안되요 안되요
바람이
보리밭 속으로 숨는다

숨겨 놓은
오렌지를 훔치는
아도니스의 하얀 손

어둠은 살랑
눈썹달 끝에서 미약을 흘린다

 시는 설명이나 진술로 쓰지 않는다. 영상이나 구체적 사물을 통하여 하나의 느낌을 전하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래서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도 한다. 첫사랑, 누구에게나 이 말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이다. 이 첫사랑을 시로 쓸 때 어떻게 표한할 것인가. 괴테를 필두로 수많은 시인들이 이 신비한 첫사랑의 감미로운 추억을 형상화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서은 또한 그 많은 연시 중에 이 제목을 가진 시가 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첫사랑을 환상적인 영상으로 제시했다. 「눈썹 달이/ 나뭇가지 끝에서/ 작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그 신비함과 감미로움을 환상적인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1연은 시각(눈) 2연은 미각(혀) 3연은 후각(산다화 냄새) 4연은 바람(청각) 5연은 감각(손) 6연은 어둠이 흘리는 미약(서로 반하게 되는 약) 등 여러 가지 감각을 동원하여 첫사랑의 그 신비를 떠올려 준다. 못잊느니 괴롭느니 이별이나 눈물이 없다. 첫사랑을 눈, 코, 입술, 손으로 만지고 느끼게 표현해 놓았다. 흥과 멋과 매력을 담고 있는 고루하지 않은 감각 그러나 천박하지 않은 환상이 날아갈 듯 아련하여 절로 눈이 감기는 그리움이 있다.

(25) 봄 새벽

새벽에 일어나 원고를 쓰다 보니
늙은 아내의 맨발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다.
발바닥에 간지럼을 먹였더니
아내가 발칵 화를 냈다.
나는 무안해서 얼른 이불을 덮어 버렸다.

무지개를 보아도 가슴이 안 뛰는 나이
발가락을 보아도 재미가 없는 나이
나는 쓰다 만 원고지 여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펜을 놓았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도
이젠 할 일이 없다.
밀린 원고나 끄적거리다
돈 되지 않는 동인지 원고나 쓰다가
나는 동 틀 무렵 산책을 나간다.

까치야, 이른 잠 깨어
전신주 위에 앉아 깍깍 꽁지 춤 반갑구나
손가락 꼽아 헤아려 보니
오늘이 입춘 지나 벌서 경칩
땅굴 속 배암도 부시시 눈을 뜨고
하마 이맘때쯤 서로 엉킬 것이다
아 봄이다 봄! 이 봄에 난 무얼할까

 정년 후 비교적 한가한 때 쓴 시 같다. 시에 나타난 그대로 봄새벽 원고를 쓰다가 늙은 아내의 맨발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어 간지럼을 먹였다는 봄새벽 사건이다. 그랬더니 아내가 벌컥 화를 냈다. 그래서 시인은 무안하여 얼른 이불을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것이 시가 될까. 천로변 사람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는다고 한다. 기차가 지나가면서 부부의 잠을 깨워놓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맹랑한 이야기다. 하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에겐 이런 사건이 시가 된다. 서은 시인은 2연에 가서 그 사연을 시로써 쓰고 있다. 「무지개를 보아도 가슴이 안 뛰는 나이」이 시구는 워즈워드의 <내 가슴은 뛰노나(무지개)>의 차용한 패러디다. 거기에 연유하여 「발가락을 보아도 재미가 없는 나이」로 정의하였다. 결국 시인은 이른 새벽 산책을 나간다. 「까치야, 이른 잠 깨어/ 전신주 위에 앉아 깍깍 꽁지춤 반갑구나/ 손가락 꼽아 헤아려 보니/ 오늘이 입춘 지나 벌써 경칩/ 땅굴 속 배암도 부시시 눈을 뜨고/ 하마 이맘때쯤 서로 엉킬 것이다/ 아 봄이다 봄! 이 봄에 난 무얼할까」
 후일담 하나, 이 시를 잡지에 발표하고 얼마후에 제자 교수 한 사람이 안부 전화를 걸어 저녁대접 의사를 전해왔다고 한다. 시인은 대체 어느때 가장 좋은시를 쓸까. 아마 외로울 때가 아닐까.

(26) 똥밟기

어쩌다 길을 가다가
똥을 밟을 때가 있다

그때의 기분 나쁨
그 순간의 당황함

이미 저질러진 사태 앞에서
이 더러움의 제거는 매우 난처해진다

지난밤 개새끼나 잡인들이
함부로 갈겨놓은 똥

덫이나 함정을 피하다
마침내 똥을 밟고 만다.

도처에 진창이 놓인
괴로운 세속의 길에서
너와 나의 만남
오늘의 이 역겨움을 어찌할 것인가
똥을 밟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똥을 씹은 심정

벗이여, 구린내여,
오늘의 진창길에서
그대 때 묻은 손을 어찌하려오?

 인생이란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 현실이란 마냥 깨끗하고 선한 것만은 아니다. 선과 악, 미와 추, 행과 불, 이루 열거할 수 없는 불협화음과 갈등 속에 영일이 없는 고난의 세계다. 그래서 고해라 했고 현실적 고난의 삶을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도 했다. 속세살이야 말로 진흙 묻히고 똥 밟기 일수, 수많은 생존의 몸부림이 계속되는 곳이다.
 혹자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염원한다 했지만 그것 역시 염원이지 현실은 죄와 더러움 사이에서 그것을 이기기 위하여 진흙과 똥을 묻힐 밖에 없는 것이다.
 서은 시인의 시적 발상도 바로 거기서 연유하고 있다. 이러한 역겹고 부정적인 소재로 시를 쓴다는 것은 적극적인 인간애에 바탕을 두지 않을 때는 불가능하다. 시란 일차적으로 아름답다는 정의를 내리니까 소재도 선이나 연애나 자연관조 등 부담이 없는 것일 때는 쓰기도 편하고 독자의 이해를 구하는데도 쉽다.
그러나 똥과 같은 소재는 그와 달리 작가의 역량이나 인생관 자체가 적극적이어야 하고 악과 추 속에서 그것을 이겨낼 진실성 참된 인간성을 구현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 시를 대하면 작자의 의도는 물론 의외로 이 시의 깊은 재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항용 겪는 바, 아무리 홀로 깨끗하려 하여도 근묵자흑이라고 자의보다 타의에 의해서라도 실수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사방에 널려 있는 쓰레기, 오물, 똥, 그것을 피해서 나홀로 깨끗 유지란 쉽지가 않다. 똥 같은 세상, 똥 같은 놈들과 어울려 살자니 똥을 밟고 마는 것이다. 이 시의 모티브에 나타난 이 시의 창작 의도이다. 하여 시인은 그것을 피하기보다 괴로운 세속길에서 악과 더러움으로 만난 운명을 적극 수용하면서 그 인생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 서은시의 매력과 휴머니티가 있다. 후반부에 제시된 그의 속세살이 인간사랑은 어느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또, 그러한 생각을 시로 엮어내는 그의 만만찮은 시력(詩歷)에 대하여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도처에 진창이 놓인/ 괴로운 세속의 길에서/ 너와 나의 만남/ 오늘의 이 역겨움을 어찌할 것인가/ 똥을 밟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똥을 씹는 심정」그는 체관(諦觀)을 통해 다시 한번 휴머니티를 주장하고 있다.

벗이여, 구린내여,
오늘의 진창길에서
그대 때묻은 손을 어찌하려요?

 의문으로 제기되었고 일단 똥묻은 손이나 발을 씻기야 하겠지만 세속을 떠나 인간적 사랑을 삶의 자세로 삼겠다는 그 인간애에 대한 내면 의지를 밝히고 있다. 아름다운 척하는 그런 모조품이 아니라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절실성을 지닐 때 구린내와 악은 향기와 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7) 봄밤

천냥 주고도 못 사는 봄 밤이
술 잔 속에 와서 바끔히 두 눈을 뜨고 있다
이 좋은 밤 술이나 마시기냐
살랑, 봄 바람이 겨드랑이 속에 파고들어
내 주눅 든 청춘을 꼬드긴다
너는 이 밤에 내 사타구니 속에까지 와서
어느 날 밤의 사랑의 椿事를 속삭이며
담을 넘고 개구멍을 뀌라고 꼬시기냐
원조교제 사범, 60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그 2단짜리 작은 기사를 생각하며
이 밤에 나는 죄 지을 일 없어 하욤없어라
봄 밤의 죄는 죄가 아니다
봄 밤의 죄는 봄밤이 책임진다
어디선가 잠 못 드는 봄 꿩도 푸드득 나는데
춘향이 집으로 가는 개구멍 앞에서
월매의 단속곳 속 향그런 봄 밤이 밀주로 익는다
아 어디선가 이런 밤안개의 잠옷이
팔선녀 고운 어깨 위에 사르르 물결치고
꽃 지는 4월달 흐느끼는 봄 밤 꽃불 속으로
안개 속의 두 사람 하나 되어 흐드러진다

 시인하면 고래로 이태백 같은 사람을 떠올린다. 술잔도 기울이고 여자도 잘 호리고 풍류가 있는 이른바 그것이 낭만파다. 문학의 2대 사조는 결국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다. 시인의 본적지는 낭만주의다.
서은 시인도 현실참여나 현실비판 또는 저항적 열기를 내뿜는 그런 시절에도 낭만성이랄까 그 풍류적인 면모나 시인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든 지금도 주석에선 단연 호기를 잃지 않고 풍류담 연애담 그 구수한 언변은 아기자기하다. 이 <봄밤>이란 시는 아직도 그가 멋진 연애 같은 그런 봄밤의 낭만을 가지고 있다는 징표이다. 봄밤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은근히 자기의 춘정(春情)을 봄밤에게 전가시키려는 묘한 말장난을 숨기고 있고 초등학교 교장이나 봄밤을 데이트로 즐기는 연인들을 끌어들여 살그머니 엿보기 같은 간접적 바람피우기를 시도하려는 저의가 숨겨져 있다.
 ‘천냥 주고도 못 사는 봄밤’이라고 배경 설정을 해놓은 다음, 봄바람이 살랑 겨드랑이에 파고들어 자기 자신을 꼬드긴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봄밤은 술잔만 권하는 것이 아니라, 사타구니 속까지 와서 봄밤의 러브어페어를 속삭이며 개구멍을 쥐라고 유혹한다는 것이다. 또 최신 정보로 원조교제 문제로 기사회된 60대 교장 신문기사까지 속삭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밤에 나는 죄 지을 일 없어 하욤없어라」라고 매우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서 넌지시 「봄밤의 죄는 죄가 아니다」고 공범자의 내면을 드러낸다. 봄밤의 죄는 과연 죄가 아니고 봄밤이 책임지는 것인가? 이것이 곧 낭만이고 이태백 시선의 주장이 아니겠는가. 그 이하 서은 시인의 봄밤은 독자의 유추에 맡기고 끝을 맺는다. 춘향이 집으로 가는 개구멍 이도령의 낭만을 조금 빌리고 싶은 그의 낭만이 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28) 춤추는 소나무

경상도 운문산 여승들만 모여 공부하는
운문사에 가면 막걸리를 마시고 크는
이상한 소나무가 있다. 더구나 그 소나무는
태양을 향해 위로 가지를 뻗는 것이 아니라
땅을 향해 아래로 가지를 뻗는 것이었다.

젊고 예쁜 여승들은 모두 다 금욕주의자로서
자기들은 한결같이 부처님만 모시면서도
그 소나무에겐 막걸리 공양을 잊지 않고
봄 가을 좋은 날씨를 골라 흥겨운 연정을
바치는 것이었다.

아침 저녁 예쁜 여승이 나와 쇠북을 치는
시간이면 둥둥둥 다닥닥 그 신나는 북소리
따라 막걸리 공양을 받은 소나무는
염불 소리인 듯 울음소리인 듯 이상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그 가지들도 북소리 따라
그 신명나는 춤사위 고운 어깨들을
조금씩 울먹이는 것이었다.

삼라만상이 모두 잠들은 깊은 밤중
잠 못 이루는 어느 젊은 여승이 그 나무
부여안고 고운 뺨 부벼대며 남 몰래
흘린 눈물 공양 슬픔 공양도 쬐끔 받아
먹고 더욱 더 아름다워진 소나무는
밤으로 밤으로만 이상한 울음을 우는 것이었다.

 경상도 운문산의 운문사 여승의 승방 뜰 위에 있는 소나무를 소재로 한 시이다. 막걸리 공양으로 크는 밑으로 가지를 뻗는 특이한 소나무와 여승들과의 교감을 노래하였는 바, 산문적 율조에다 얘기를 섞어 아기자기하게 엮은 시이다.
막걸리 공양과 여승들의 연정, 여승이 남자에게 정을 주면 파계요 죄악이지만 소나무에게 정을 주면 법열(法悅)이다. 이 소나무는 여승의 막걸리 공양만 아니라 그들의 연정 그들의 눈물 그들의 염불 그들의 북소릴 들으면서 춤을 춘다는 것이다. 여승들의 고뇌와 연정이 소나무 속에 가서 법열과 환희로 승화됨을 노래하고 있다.

(29) 情

잔잔한 여름 호수에
둥실 흰구름 한 송이 떴다.

우두커니 선 키 높은 미루나무 끝
한 줄기 바람이 이파리 끝에서 피리를 분다.

아, 무엇이 이리 간절히 사무치게 하는가.

고개를 들면 가슴 가득 쏟아져 오는
파아란 하늘.

몰래 치어났던 오랑캐꽃도
아차차 들키고 말았다.

모든 것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대낮
호박 덩굴이 슬그머니 담을 기어오른다.

 <情>이란 시는 하나의 ‘관념’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회화적 수법으로 표현한 시이다. 정이란 무엇인가. ①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feeling. ②사랑하는 마음. affection. ③불교에선 탈선 가능성이 있는 혼탁한 망념. 쉽고도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쓰이는 뜻은 ①②항일 것이다. <정주고 내가 우네> <정주지 않으리> <정든님> 등 가요에서 사용하는 정은 남녀의 춘정이나 정욕(sexual desire)이라고 하는 연정의 통칭일 것이다.
 서은 시인의 <정>은 feeling의 뜻으로 쓴 듯하며 정화된 그리움을 어떤 정경으로 회화적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마음의 그림(mental picture)이라 할 것이다.
 3연 「아 무엇이 이리 간절히 사무치게 하는가」여기에서 그 마음을 암시하고, 여름의 잔잔한 호수, 거기에 비치는 흰구름, 키높이 서있는 미루나무, 파아란 하늘, 담을 기어오르는 호박덩굴, 이런 것들로 정화된 정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초여름을 배경으로 그리운 마음을 자연에 기탁하여 사랑을 관조하였다. 5연의 오랑캐꽃은 일종의 파격인데 안달이 난 그리운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아름다운 초여름 대낮이 아닌가. 그러나 꾹 참고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솟구치는 정을 고요히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30)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일월성진은 금은 보석으로
수놓은 찬란한 궁전
그 속에서 인생은 짧고 시는 영원하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소리와 향이 넘치는 대자연은
온갖 꽃으로 수놓은 울타리와 신비의 정원
그 속에서 지상의 날은 짧아도 시는 영원하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노래도 부를 수 있다는 것
덧없는 목숨 부귀도 영화도
찰나에 피는 꽃 - 그대 시 한 편으로도
지구의 반족을 입맞추어 차지할 수 있다.

시인아, 연인들아, 그리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대 녹스는 황금을 보았느냐
나이 들어 늙은 노파 주름진 달을 보았느냐
인생은 늙고 병들어 죽어도
시는 항상 젊고 아름답고
지상의 빛나는 운율은 늙지 않는다.

영원한 청춘 시인아,
올림퍼스 산상의 아름다운 뮤즈여
그대 아껴둔 하프의 줄을 골라
천년 늙지 않는 사랑의 하프를 타라
괴테도 파우스트도 악마에게서 청춘을 빌리나니
하늘이 주신 은총 인생은 짧으나 시는 영원하다.
오 연인의 사랑은 짧으나 시의 운율은 녹슬지 않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Life is short, art is long」이 말은 로마의 세네카, 브라우닝, 괴테, 고티에 등 비슷비슷한 주장으로 거의 일반화된 속설이다. 80~100년 안팎을 사는 인생 아무리 우겨도 길다고는 할 수 없다. 유한자인 예술가(그 중에는 30세 이전에 이미 요절한 예술가도 있지 않은가)가 만든 예술품은 그의 사후(이런 인간의 문명이나 문화가 지속된다면)에도 많은 사람이 감상하고 전해지니까 생명이 길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생명을 넘어 생명으로 전해지는 불후의 명작’이라 말하는 그 예술의 시공을 초월한 영원성인 것이다.
 서은의 이 시는 어느 ‘시낭독회모임’에서 합창시로 낭독하겠다 청탁하여 창작했다가 그 이후 잡지에 발표하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하여 인생은 짧지만 그 인생을 소재로 하여 시인이 쓴 아름다운 시는 그 시인이 죽은 후에도 영원히 남는다는 시의 불멸성을 노래하였다.

3. 끝맺는 말

23권의 시집, 이미 수백편의 시를 발표한 터 그에 비하면 30편의 시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또 대강 골라낸 것으로 소개 정도에 그쳤지 엄선했거나 본격적인 평가를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적 가치와 올바른 평가는 미래의 역사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일부의 작품이지만 감상을 겸하여 소개하면서 그의 폭넓은 작품세계에 대하여 경의와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특히 한 시대 저항의 시인을 자처하여 현실참여를 부르짖으며 시의 투쟁적 무기화에 선도적 역할을 했지만 그는 여느 시인과는 달리 시 아닌 시, 시적 형상화가 되지 않은 그런 생경한 주장과 관념을 담은 선동선전의 시가 아니라, 서정적 바탕위에 시의 본령을 충실히 지켰음을 확인하고 남는다.
 시단에 등단할 그 당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이 고장에 묻혀 살면서 그 명성이나 무슨 문학단체의 자리에 관심두지 않았기에 그 역량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관하여 서은 선생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으며 누가 악평한다 해도 호불호 50:50이면 성공이라 웃어넘긴다. 다 좋아하는 사람, 그 사람 멋없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절반이면 된다는 것이다.
 서울을 쳐다보지 않는 사람, 서울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 일류보다 늘 삼류를 더 좋아하는 사람, 그는 기증본 시도 일류시인으로 평가받는 사람보다 무명의 시인부터 읽는다고 한다. 사교력도 없고 아첨 기술도 없고 그러나, 시와 교육 그 분야에 대해선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오늘도 그는 지산동 우거에서 묵은 책더미 속에 싸여 카랑한 그 기침소리 살아있다는 흔적으로 잡문이건 시이건 그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모던·포엠 독자와 함께 문운창성을 거듭 기원한다.

출처 : 서은문학회
글쓴이 : 문재철 원글보기
메모 :